■ 203. 외톨이 □
지금은 2월.
조금만 더 기다리면 유나는 4월의 신부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유현이 입대하기 전에 결혼해야 하거든."
우리는 그렇게 말하곤 했지만 사실은 조금이라도 빨리 같이 살고 싶어서였다.
나는 원래 호텔보다는 수수한 야외 결혼식을 원했다.
경치 좋은 카페 자리를 찾느라 부지런히 돌아다녔더니 예쁜 야외 결혼식 장소도 많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겨울이라서······'
유나가 떨지 않고, 편하게 결혼하려면 결국 호텔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왕 호텔에서 하는 결혼식인데······'
사람들도 많이 불러서 근사하게 치르기로 했다.
나야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유나에게 가능한 예쁜 결혼식을 선물하고 싶었다.
그렇게 정신없이 시작된 결혼식.
내가 그동안 바쁘게 살았던 덕분에 손님들이 끝도 없이 밀려왔다.
먼저 어머니의 하객.
나는 포항에 전세 버스를 보내 어머니의 하객들을 실어왔다.
외가 쪽 친척 몇 분.
어머니와 같이 일하셨던 감자탕집 이모님들.
"아이고, 우리 주원이 장가가는 구나! 그것도 이런 으리으리한 호텔에서, 출세했네!"
"그러게, 언니는 좋겠네, 좋겠어. 우리 주원이 서울 물 먹더니만, 인물이 훤해졌네!"
일당백의 식당 이모님들.
이모님들이 들이닥치자 하객 수 곱하기 100만큼 소란스러워졌다.
그래도 결혼식은 시끄러우면 더 좋으니까.
물론 지금 어머니가 일하시는 백반집 사장님도 함께 오셨다.
이제 돈은 많지만, 어머니는 앞으로도 계속 백반집에서 일할 거라고 하셨다.
"주원아. 축하한다."
원장선생님도 사모님과 아이들을 데리고 직접 오셨다.
제일 고마운 분.
원장 선생님이 없었다면 미대생도 되지 못했을 것이고, 오늘의 결혼은 시작도 못했을 것이다.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야. 내가 꼭 와야지. 네가 장가까지 가는 구나."
"감사합니다. 전부 원장 선생님 덕분입니다."
시간이 진짜 빨리 흐른다.
처음 원장선생님을 처음 뵈었을 때는, 갓 결혼한 청년이셨다.
하지만 지금은 눈가에 주름도 잡히셨고, 희끗희끗한 새치도 보였다.
"손님이 끝도 없이 오는 구나. 네가 그 동안 정말 잘 살았나보다. 우린 이제 안에 들어가 있을게."
"네, 선생님. 나중에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아니야, 정신없을 텐데. 우린 그냥 조용히 뷔페 먹고 갈 거야."
그 다음은 내 사업적 후원자를 자처하는 김제우 감독.
김제우 감독이 영화계 사람들을 우르르 데리고 등장했다.
그리고 오랜만에 보는 건축 사무소 안과 밖의 안동진 전 대표도.
거기다 동대문 큰손 사장들까지 줄줄이 찾아왔다.
'나도 약간 속물이긴 하구나.'
결혼식장에 잘나가는 사람들이 계속해서 찾아오니까 나도 괜히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축하해요, 결국 두 사람이 결혼하는 군요."
"오셨어요! 잘 지내셨죠?"
영 아트에서 만났던 강우 크루 두 사람도 결혼식장에 왔다.
그래피티 아티스트였던 강우 크루는 그때보다 훨씬 더 유명해졌다.
"많이 바쁘시죠?"
"지난 달 귀국해서 요즘은 좀 느긋해요. 만약 안 불렀으면 많이 섭섭했을 겁니다."
내가 좋아하는 예술가들이 계속 승승장구해서 무척 다행이었다.
그런데 그때 결혼식장 입구 쪽에서 우렁찬 인사 소리가 들렸다.
"오셨습니까!"
이준성 교수였다.
이준성 교수가 등장하자 미리 와 있던 서양화과 동기들이 일제히 인사를 한 것이었다.
"이여, 웃긴 놈 결혼식장이 한국대 서양화과 동창회가 되었네. 아는 얼굴이 여기 다 있네."
이준성 교수가 걸걸하고 시끄러운 목소리로 껄렁하게 등장했다.
그리고 내게 곧장 다가와 속삭였다.
"어이, 결혼식장에서도 한 번 웃겨야지?"
"하하하. 교수님."
이 양반이 큰일 날 소리를.
오늘은 유나와 나에게 소중한 날.
아무도 안 웃기고 얌전히 넘길 것이다.
"아니야. 넌 분명 날 웃길 거야. 내가 널 지켜보고 있겠다."
결혼식장에서 신랑을 협박하다니.
그때였다.
"이여, 이준성이. 많이 컸네."
"허걱."
당당하던 이준성이 갑자기 차렷 자세로 얼어붙었다.
그리고 이준성 교수의 뒤에는 두 사람이 서 있었다.
그리고 이번엔 이준성 교수가 꾸벅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서, 선배님 오셨습니까."
등장한 사람들은 바로 김용철 작가 내외.
둘 다 한국대 서양화과 출신으로 이준성 교수와 나의 선배였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연히 와야지. 결혼 축하한다. 우리 태민이도 어서 장가가야 할 텐데."
"주원이가 빨리 가는 거죠."
"빨리 가면 좋지 뭘 그래. 손주도 빨리 보고."
"아직 할머니 되기 싫거든요?"
김용철 작가 내외는 내 앞에서 사이좋게 투닥거렸다.
김용철 작가는 내 손을 꽉 쥐고 힘차게 악수했다.
"축하하네."
"감사합니다."
참고로 김태민은 수진 선배와 미리 결혼식장에 와 있었다.
그리고 곧 서춘일 교수도 왔고, 강영 교수도 도착했다.
"졸업식도 하기 전에 결혼부터 하다니, 뭐가 그리 급했나?"
"졸업 전에 결혼을 해야 교수님들을 모시죠."
"하하하, 이 친구 넉살은."
교수들과 김용철 작가는 자기들끼리 모여 이야기를 나눴다.
조교 남동민도 교수들과 같이 도착했다.
"주원아, 축하한다."
"형, 조교 계약 끝나면 유학가신다면서요."
"응, 5월 출국이야."
남동민은 미술 엘리트 코스를 착실히 밟고 있었다.
한국대 졸업 후 대학원까지.
그리고 유학까지.
남동민 정도의 성실함과 실력이라면 몇 년 후에는 신문에서 그의 이름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한 명의 고등학생이 미대에 가기로 결심한 후, 남동민처럼 차근차근 하나씩 이뤄나가기가 정말 쉽지가 않았을 것이다.
남동민은 잘 해내고 있었다.
나름 멋있었다.
"형 출국하기 전에 한 번 뭉쳐야죠."
"그래, 당연하지."
남동민이 내 어깨를 두드려줬다.
"기억나? 우리가 1학년 개강 파티에서 처음 만났지. 그땐 너희 둘이 이렇게 결혼 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어."
"정말요? 꿈에도요?"
"그렇지. 꿈에도. 유나는 누가 봐도 1학년 중 제일 예뻤는데, 넌 솔직히······"
쩝.
인정합니다.
그땐 저도 유나가 제 아내가 될지 전혀 몰랐습니다.
"어머, 늦어서 미안해요! 애들 때문에."
뒤이어 승희씨가 남편과 아이들을 데리고 식장에 도착했다.
요즘은 하이유나의 규모가 원디자인에 비해 훨씬 커버렸지만, 김승희는 이주원 제국의 일등공신이었다.
"아니요, 딱 맞춰 오셨습니다."
"정말 축하드려요. 결국 두 분이 결혼하시는 군요. 두 분이 같이 쇼핑몰 시작할 때가 엊그제 같은데."
"전부 승희님 덕분입니다. 그때 저를 안도와주셨으면 오늘의 저희가 없었을 겁니다."
"제가 돕긴요. 대표님 덕분에 지난 몇 년간 신나게 일했는데요."
지난 몇 년 내가 열심히 살긴 했지만, 운이 정말 좋기도 했다.
너무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그리고 그 좋은 사람들과 나를 이어준 것은 두 말할 나위도 없이 나의 '노력'이었다.
물론 나는 노력상점이 있으니까, 완전한 노력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
그래도 난 최선을 다했고, 또 앞으로도 계속 지금처럼 열심히 살아갈 생각이다.
내가 자신 있는 것은 노력밖에 없다.
그때 유현이가 안에서 후다닥 튀어왔다.
"형, 이제 들어가셔야 한 대요. 신랑은 미리 들어와 있어야 한 대요."
"아, 그래. 금방 갈게."
"어서 가보세요. 파이팅입니다, 대표님."
"그래요. 승희님도 오늘 식사 맛있게 하시고요. 이따가 다시 인사드릴게요."
그렇게 서둘러 인사를 건네고, 나도 후다닥 안으로 달려갔다.
가슴이 떨려왔다.
드디어 시작이다.
* * *
"안녕하십니까? 저는 이번 결혼식의 사회를 맡은, 신랑 이주원의 절친이자 선배인 김대성이라고 합니다."
절친이라니······
다른 사람에게 부탁할 수도 있었지만, 뭐랄까.
아슬아슬한 재미가 있다고 해야 할까?
게다가 졸준위 위원장으로 믿기지 않은 활약을 펼쳤기에 김대성에게 결혼식 사회를 부탁했다.
"먼저 주례를 소개하겠습니다. 주례를 맡으신 분은 신랑 이주원군과 한유나 양의 사업을 오랜 시간 도와주신 은성사의 김영식 대표님이십니다."
김대성이 은성사의 사장님을 소개하자, 은성사 사장님이 멋쩍어 하며 결혼식의 중앙단에 오르셨다.
주례를 부탁할 사람은 많았지만, 그래도 너무 유명하거나 거창한 사람은 싫었다.
유명한 사람보다는 내가 정말 잘 알고, 본받고 싶은 사람 중에 고르고 싶었다.
원장 선생님은 너무 젊으셔서 당연히 거절하셨을 것이고, 김용철 작가는 원래 그런 부탁을 싫어한다.
물론 내가 부탁했다면 승낙은 하셨을 것이다.
하지만 본인이 싫어할 것을 아는데 굳이 부탁하는 것도 이상하다.
그래서 유명하진 않더라도, 내가 사업을 할 때마다 유용한 조언을 자주 해주시던 은성사 사장님께 부탁했다.
특히 은성사 사장님 내외는 정말 사이가 좋았다.
"그럼 이제 신부가 입장하겠습니다!"
박수와 웨딩마치가 식장을 메우고, 드디어 유나가 등장했다.
유나는 활짝 웃고 있었고, 유나의 손을 잡은 아버님은 오늘도 쓸쓸한 표정을 짓고 계셨다.
'아버님······'
유나는 하얀 드라이아이스 안개 위로 천천히 내게 다가왔다.
정말 구름 위를 걷는 천사처럼 말도 안 되게 예쁜 유나.
나는 다가온 유나의 손을 꼭 붙잡았다.
"그럼 신랑, 신부가 혼인 서약을 하겠습니다!"
너무 떨려서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서약서를 제대로 읽긴 했는지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냥 고개를 들었더니 사람들이 박수를 치고 있었다.
"그럼 이제 주례사가 있겠습니다."
흐흠, 흐흠.
은성사 사장님이 무척 어색하게 몇 번이나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 조용한 목소리로 천천히 주례를 시작했다.
"사실 전 동대문에서 옷장사를 하는 사람입니다. 많이 배우지도 못했고, 대단한 일을 한 적도 없습니다. 이사장, 아니 이주원군이 부탁하길래 일단 알겠다고는 했는데, 막상 여기 와보니······ 유명하신 분들이 너무 많군요. 그래서 왜 하필 제게 부탁한 건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은성사 사장님이 목소리가 무척 좋으셨다.
역시 장사를 하는 분이라 그런지, 듣기 좋은 말투로 말하는 요령을 잘 아시는 듯 했다.
나는 내가 꽤 주례를 잘 골랐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은 저와 집사람이 자주 하는 놀이가 있습니다. 동대문에 새로운 사람들이 보일 때마다, 저 사람들은 형제다, 저 사람들은 사장과 직원이다. 저 사람들은 부부다. 이렇게 관계를 맞추는 거죠. 이주원 군과 한유나 양이 처음 동대문에 왔을 때, 우리 둘 다 당연히 부부인 줄 알았습니다. 저 두 사람은 참 일찍 결혼했구나. 그런데 부부가 아니라고 하더군요. 하지만 결국 이 두 사람이 오늘 결혼을 하네요. 우리가 또 한 번 제대로 맞춘 셈입니다."
옛날 생각이 나는지 유나는 고개를 숙이고 살짝 웃었다.
"저는 장사꾼이라서 장사꾼 식으로 말하겠습니다. 장사는 싸게 사서 비싸게 파는 일입니다. 이익을 남기면 기분이 좋고, 손해를 보면 기분이 나쁘죠. 하지만 결혼은 행복을 사고 파는 거래입니다. 그래서 저는 두 사람에게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서로 먼저 손해를 보라고 말입니다. 내가 손해를 볼수록 상대는 그만큼 이익을 얻고, 또 행복해질 테니까요. 두 사람은 동대문의 대박 장사꾼이니까, 결혼 장사도 당연히 잘 해낼 거라고 믿습니다."
역시 은성사 사장님.
내가 주례는 제대로 고른 것 같다.
'하지만 사장님. 저는 손해를 볼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유나와 함께 있는 모든 순간이 보석처럼 값지거든요.
손해를 볼 수 없는 장사입니다.
그렇게 은성사 사장님은 차분하게 주례를 마치셨다.
"네, 감동적인 주례사 잘 들었습니다. 그럼 이제, 축가를 듣도록 하겠습니다. 축가를 준비해주신 분은 바로! 바로!"
의외로 능숙한 김대성의 결혼 진행.
그런데 너무 잘하니까 왠지 더 불안했다.
그리고 축가 무대 위에 익숙한 사람 둘이 올라왔다.
바로 유미와 유현이었다.
유미는 유나를 똑닮은 미녀.
유현이도 키가 크고 훤칠했다.
그래서 두 사람이 축가 무대에 오르자 조용한 감탄이 식장에 퍼져 나왔다.
'이것이 인물 집안의 위력.'
괜히 내가 다 뿌듯했다.
먼저 유미가 마이크를 붙잡았다.
"언니, 언니 정말 축하해. 우리가 어렸을 땐 정말 많이 싸웠잖아. 겨우 한 살 차이라서. 그런데 정말 언니는 언니인가 봐. 동생인 나는 변변한 연예 한 번 못하고 있는데 언니는 이렇게 멋진 형부를 찾아서, 졸업도 하기 전에 시집까지 가버리니까. 뭐가 그렇게 급했어? 나랑 좀 더 같이 살지. 그래도 언니가 너무 행복해보여서 나도 정말 기뻐. 언니, 사랑해. 그리고 늘 고마워."
유미의 축하에 유나의 눈이 촉촉해졌다.
슬픈 일이 아닌데도, 내가 괜히 미안해졌다.
마치 내가 언니를 뺏어가는 심정.
하지만 그렇다고 언니를 돌려줄 생각은 조금도 없다.
"그리고 주원 오빠. 이제 주원 오빠를 진짜 형부라고 부르게 되었네요. 제 소중한 언니를 잘 부탁드릴게요. 언니가 오빠 많이 좋아하는 거 아시죠?"
그럼 잘 알지.
우리 처제.
얼굴도 예쁘면서 말도 참 예쁘게 하는 구나.
결혼 끝나자마자 처제에게 용돈을 퍼부어야겠다.
그리고 유현이가 마이크를 받았다.
"전 언제나 형이 있는 친구들이 부러웠습니다. 큰누나는 역시 언제나 최고의 누나야. 이런 멋진 형을 데려오다니. 그리고 주원이 형, 아니 이제부터는 매형. 형은 사나운 누나들만 가진 저에게 오아시스 같은 존재입니다."
유현이의 넉살에 하객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유나와 유미가 동시에 유현이를 향해 눈빛 레이저를 발사했다.
하지만 유현이는 꿋꿋하게 마이크를 붙잡고 큰소리로 외쳤다.
"그럼 축가를 시작하겠습니다. 저희 매형에게 바치는 노래입니다!"
그리고 시작되는 익숙한 뽕짝 멜로디.
"사는 게 무엇인지! 아픔이 무엇인지!"
유현이가 어깨를 들썩이며 신나게 노래 부르고, 유미는 서툰 춤까지 췄다.
유현이는 특히 사람들을 기분 좋게 하는 매력이 있었다.
그래서 하객들은 흥겹게 박수를 치며 두 사람의 노래를 따라 불렀다.
흥겨운 무대가 꿈처럼 지나갔다.
"그런데 축가가 한 팀 더 있습니다! 그들은 바로!"
후다닥.
이번엔 무대 위로 세 사람이 올라왔다.
바로 김태민과 김한철, 그리고 이형원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소설가 이형원입니다."
천재 소설가 이형원은 자신만만하게 자기를 소개했지만, 반응은 미지근했다.
이형원은 맘속으로 한국인의 독서 부족은 심각한 사회 현상이라고 투덜댔다.
아무튼.
"안녕하십니까, 김한철입니다."
"안녕하십니까, 김태민입니다!"
자연스럽게 김태민이 마지막으로 마이크를 건네받았다.
그런데 김태민이 마이크를 붙잡자, 왠지 '김태민과 아이들' 느낌이 났다.
그리고 김태민은 쑥스러워하며 축하의 인사를 꺼냈다.
"주원이는 정말 우리들의 멋진 친구입니다. 그래서 주원이가 결혼 한다는데 우리가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이 무대를 준비했습니다. 즐겁게 들어주십시오!"
김용철 작가는 아들의 씩씩한 모습에 흐뭇하게 웃었다.
김태민도 대학에 입학할 때와 많이 달라졌다.
누구는 결혼을 하고, 누구는 책을 내고, 누구는 씩씩해지고.
우리들도 참 많이 컸다.
그리고 이번에도 어김없이 시작되는 뽕짝 멜로디.
축가들이 어째 전부 내 취향이었다.
"반딧불 초가집도 님과 함께면!"
노래 실력은 그럭저럭이지만, 착한 하객들은 모두 즐겁게 박수를 치며 따라 불렀다.
그런데 노래 가사가 정말 정확히 지금 내 마음이었다.
나의 예쁜 아내 유나.
그리고 우리의 부모님을 모시고, 좋은 친구들과 함께 백년쯤 행복하게 살고 싶었다.
"자, 멋진 축가 잘 들었습니다. 그럼 신랑, 신부 인사가 있겠습니다. 먼저 신랑과 신부가 신랑의 어머니께 인사를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우리 앞에 선 어머니.
어머니는 결혼식 내내 울고 계셨다.
왜 우세요, 어머니.
이 좋은 날에.
난 이제까지 잘 참았는데, 어머니가 우시니까 나도 같이 가슴이 울컥했다.
'어머니, 잘 살게요. 그리고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어머니를 향해 씩씩하게 큰절을 올렸다.
그리고 드레스를 입은 유나가 조심스레 허리를 숙여 천천히 인사했다.
왜 그 모습이 그렇게 고맙고 예뻐 보이는지.
어머니와 유나.
두 여자에게 평생 잘 해야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그럼 신랑, 신부가 신부의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겠습니다!"
장인어른, 장모님.
감사합니다.
든든한 아들이 되겠습니다.
나는 이번에도 씩씩하게 두 분께 큰절을 올렸다.
아버님이 다가와서 내 팔을 붙잡고 나를 일으켜주셨다.
그렇게 우리의 결혼식이 행복하게 마무리 되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김대성이 외쳤다.
"자, 이제 결혼식이 끝나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전에 제가 한마디를 덧붙이려고 합니다."
어? 어억.
김대성. 그만.
이제까지 잘 해왔잖아.
꼭 이래야만 하겠어?
이 맛에 김대성을 섭외하긴 했지만, 막상 눈앞에 대성병지가 달려오자 아찔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대성 병지는 스톱을 모른다.
"저는 지금 이 순간에도 이 두 사람이 결혼한다는 사실이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학교 친구들 전부를 속이고 이렇게 몰래 둘이서 사랑을 키워왔다니! 그래서 지금 모두가 보는 앞에서 당당하게, 공개적으로, 두 사람이 사랑의 입맞춤을 해야 한다고 선언합니다! 그것도 뽀뽀가 아니라 뜨거운 키스! 진짜 키스여야 합니다!"
와아아아아!
김대성의 선언에 뜻밖에 하객들이 열렬히 환호했다.
수업 시간엔 한 번도 이런 호응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키스해! 키스해!"
식장의 구석에서는 동기들이 큰소리로 외쳐댔다.
김대성 이 인간이······
거래처 사장들이랑 포항 동네 어른들까지 보고 있는데.
하지만 포항 어르신들도 같이 외치고 있었다.
'역시 감자탕집 이모님들.'
하객들의 호응에 힘을 얻었는지, 김대성이 다시 한 번 외쳤다.
"신랑은 어서 신부에게 키스를 하십시오! 신부가 기다리고 있는 게 보이지 않으십니까!"
키스가 대단할 것은 없지만, 강제로 시켜서 하게 되니까 슬쩍 약이 올랐다.
"키스하세요!"
그리고 계속해 외치는 김대성.
누구를 탓하겠나.
김대성의 병지본능을 간과한 내 탓이다.
그런데 막상 모두가 보는 앞에서 키스를 하려니, 이제 유나가 내 신부라는 사실이 절실히 실감이 났다.
"키스를 하란 말입니다!"
김대성이 한 번 더 큰소리로 외쳤다.
그래, 내가 별 수 있나.
나는 유나에게 키스하기 위해 반걸음 다가갔다.
유나도 나를 향해 반걸음 다가왔다.
우리 눈이 마주치자 유나는 예쁘게 웃었다.
그리고 입술만 움직여서 속삭였다.
'왜 또 울어, 바보야.'
내가 울고 있었나?
나도 몰랐다.
그런데 눈이 빨갛기는 유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나저나 결혼 첫날부터 남편을 바보라고 부르다니.
자기는 그 바보한테 붙잡혔으면서.
우리 두 바보.
지금부터는 이주원의 아내 한유나.
한유나의 남편 이주원.
나는 더 이상 외톨이가 아니었다.
이젠 세상에 내 마음이 머물 곳이 생겼다.
나는 유나의 미소 위에 키스했다.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