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 상견례 □
그리고 드디어 상견례.
유나와 나는 성북동에서 코스로 한식을 내는 식당을 예약했다.
식당도 조용했고, 주변 경치도 예뻤다.
특히 한식이라서, 유나의 할머니나 우리 어머니에게도 그리 어렵지 않은 요리였다.
처음으로 두 부모님이 만나는 자리인만큼, 유나와 나는 며칠 전 직접 식당을 찾아가 확인했다.
"여기가 딱이네."
유나가 마음에 들어 해서 더 고민할 이유가 없었다.
식당 예약을 마치고, 유나가 내 손을 꼭 붙잡았다.
유나는 내가 하도 애원해서 어쩔 수 없이 결혼해준다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준비 도중에 가끔 지금처럼 감정이 벅차오르면 이렇게 내 손을 힘줘서 붙잡곤 했다.
우리가 어른이 된다는 사실이, 그리고 정식으로 부부가 된다는 사실이 유나에게도 특별한 의미인 것 같았다.
그럼 나는 괜히 고마워서 같이 유나의 손을 꼭 붙잡고, 유나의 손가락을 만졌다.
그리고 드디어 대망의 그날이 왔다.
상.견.례.
우리 쪽 참석자는 어머니와 나밖에 없었다.
서울에서 갑자기 치러지는 상견례라서 둘 뿐이기도 했다.
하지만 느긋하게 준비된 상견례라도 역시 둘이면 충분할 것 같았다.
그런데 어머니가 꽤 긴장하셨다.
"괜찮아요, 엄마. 모두 좋은 분들이세요. 그리고 절 많이 좋아해주세요."
"그, 그래?"
하지만 어머니는 이미 내 목소리가 안 들리시는 듯 했다.
그렇게 어머니를 모시고 식당에 도착했을 때, 유나네 식구들은 이미 식당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아들. 그래, 잘해보자."
어머니가 비장하게 말씀하시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우리가 예약한 방의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자, 유나의 식구들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우리를 맞았다.
"안녕하세요."
"어머니, 오셨어요."
우리를 맞이하는 따뜻한 미소.
환한 온기.
포근한 가족의 냄새.
식구가 단 둘 뿐이던 우리 모자가 늘 동경하고 그리워하던 장면이었다.
그리고 유나의 할머니께서 어머니께 다가와, 어머니의 두 손을 꼭 붙잡으셨다.
"어서 와요. 잘 왔어요."
유나의 할머니.
제주도에서 오랫동안 식당을 운영하셨고, 유나의 아버님, 그러니까 장인어른을 키우신 분이었다.
언뜻 유나나 유미의 이목구비가 할머니에게서 비치기도 했다.
'오랜 시간 바르게 살아오시며, 한 가족을 행복하게 이끌어 오신 분.'
유나의 할머니는 이미 우리 모자의 사정을 잘 알고 계셨다.
그래서 짧은 인사였지만 여러 의미가 담겨 있었고, 목소리에는 깊은 위로가 담겨있었다.
긴 시간을 견뎌 오신 할머니의 목소리와 체온은 마법 같은 힘이 있었다.
할머니가 직접 손을 잡아주시자, 어머니도 비로소 긴장을 풀고 같이 환하게 웃으셨다.
"고맙습니다."
"고맙기는요, 가족끼리."
어머니와 할머니는 그렇게 잠시 손을 붙잡고 서 계셨다.
그리고 어머니는 자리에 앉아서 먼저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이제는 떨지 않고 또박또박 말씀하셨다.
"많이 부족한 제 아들을 이렇게 훌륭한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주셔서 너무 감사드립니다. 주원이가 어설픈 구석이 많아서 유나처럼 똑똑하고 다부진 아내가 꼭 필요했는데, 정말 다행입니다."
"아니요, 어설프긴요. 주원이만큼 똑부러지고, 착하고 성실한 청년을 어디서 찾겠어요. 오히려 저희가 감사드려야죠. 이렇게 대견한 아들을 저희 큰아들로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식사가 조금 이어지자, 어머니는 완전히 여유를 찾으셨는지 이런 말씀도 하셨다.
"유나가 너무 예뻐서 둘이 사귀는 내내 제가 다 조마조마했습니다. 주원이가 유나를 잘 붙잡아서 너무 다행입니다."
어머니······
세상 모두가 유나가 내게 과분하다고 하지만, 어머니까지 그렇게 말씀하시자 살짝 배신감이 밀려왔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흐뭇하기도 했다.
어머니는 평생 가난하고 힘들게 살아오셨다.
게다가 이혼하고 혼자서 살아오셨다.
그래서 조금, 사람들 앞에서는 다소 위축되는 경향도 있으셨다.
'하지만 오늘은······'
무척 편하고 즐거워 보이셨다.
아마 그만큼 유나의 가족이 우리를 편하게 맞아줘서 가능했는지도 몰랐다.
이 순간이 마냥 감사하고 뿌듯했다.
식사가 조금 더 진행되자, 이제 더 이상 상견례가 아니라 그냥 보통 가족의 저녁 식사가 되어버렸다.
"와, 여기 너무 맛있다. 작은 누나, 누나도 빨리 시집 가. 여기 음식 한 번 더 먹게."
"됐거든! 만나는 사람도 없는데!"
유미와 유현이가 투닥거리자, 어른들이 다 같이 웃으셨다.
"유현아, 군대 가기 전에 먹고 싶은 거 리스트로 작성해 놔. 형이랑 누나랑 서울 한 번 돌자."
"진짜죠? 형, 약속했어요!"
유현이가 나와 친형제처럼 지내는 모습을 양가의 어른들이 흐뭇하게 바라보셨다.
"그래, 유미야. 넌 시집가지 말고 아빠랑 평생 같이 살자."
"싫어요!"
유미가 단호하게 외치자, 아버님은 오늘도 쓸쓸히 창밖을 바라보셨다.
* * *
소설가 이형원.
한때는 천재라고 불렸던 남자.
하지만 그는 오랫동안 소설을 쓰지 않았다.
그러던 중 우연히 웹소설에 대해 알게 되었다.
'이렇게 재미있다니! 전개는 빠르고, 인물들은 욕망에 충실해! 이것이야 말로 새로운 시대의 예술!'
웹소설을 알게 된 이형원은 닥치는대로 웹소설을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소설가.
드디어 이형원의 창작 본능이 꿈틀대기 시작했다.
결국 이형원은 직접 연재를 시작했다.
장르는 레이드 헌터 아카데미 짬뽕 혼합물.
하지만!
[ 작가, 이거 정신 못 차리네. 초딩이냐? 요즘은 개나 소나 글 쓴다고 설치네. 맞춤법도 모르고 필력도 바닥이네.]
첫 댓글로 악플이 박히고 말았다.
하지만 이형원은 역시 실력파.
기본기도 탄탄했고 적응도 빨랐다.
[ 어, 이거 볼만한데요? ]
[ 이렇게 특이한 헌터물은 처음이네요. 작가님 응원합니다! ]
슬슬 응원의 댓글도 달리고, 심지어 후원금까지 받았다.
그럴수록 이형원은 더욱 신나서 맹렬히 글을 썼다.
하지만 30편쯤 썼을 때, 한계에 부딪히고 말았다.
일단 웹소설 자체가 처음이었고, 또 순전히 재미로 시작한 글이라 큰 열정도 없었다.
그렇게 억지로 한 권을 쓰자 처음에 열광하던 독자들도 슬슬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읽는 사람도 줄어들자 이형원은 더욱 흥미를 잃었다.
'쉽게 생각했는데 웹소설도 꽤 어렵군.'
그리고 그 무렵.
이형원은 여자 친구도 생겼다.
바로 이정원.
'이형원 인생에 이렇게 예쁜 미대생을 사귀는 날이 정말 올 줄이야! 역시 인생은 한방이야! 주원아! 고맙다!'
그때부터 이형원의 관심은 웹소설보다는 귀여운 여자 친구였다.
연재는 들쭉날쭉.
생각날 때마다 띄엄띄엄, 내용도 자기 마음대로였다.
[ 작가 양반 정신 차리쇼! 특이해서 봤더니 내용이 산으로 가네! ]
[ 하차합니다. 이딴 글을 쓰다니 작가님은 인생에서 하차하세요. ]
악플이 넘쳐나기 시작했지만, 이형원은 코웃음쳤다.
'이 인간들이 감히 내가 누군 줄 알고. 내가 바로 이형원이다!'
이형원은 이제 악플을 즐기는 경지에 다다랐다.
그런데 어느 날 이형원은 특이한 쪽지를 받았다.
[ 재미있게 읽던 글인데, 요즘 연재를 하지 않으셔서 무척 아쉽습니다. 혹시 괜찮으시다면 제가 이 이야기를 리메이크해도 될까요? ]
뭐야? 이 녀석은?
남이 장난으로 쓴 글에 이렇게 집착하다니.
이형원은 첫 쪽지는 무시했다.
하지만 그 이상한 쪽지는 계속 도착했다.
[ 순전히 저의 자기만족을 위한 시도입니다. 계속 연재할 생각이 없으시다면 부디 제가 고쳐 쓰게 해주십시오. 혹시 제 글에 작가님이 영감을 받으셔서······]
흥.
이형원은 오기가 생겼다.
'감히 천재 이형원이 쓴 글에 손을 대겠다고? 영감? 평범한 인간이 내게 영감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나? 좋다, 할 수 있으면 어디 한 번 해 봐라.'
도발에 넘어간 이형원.
[ 좋습니다. 마음대로 쓰셔도 됩니다. 한 번 써 보시지요. ]
이형원은 순식간에 승낙의 답장을 작성했다.
그리고 전송 버튼을 누르려는 바로 그 위기의 순간!
디디디디디디.
이형원의 전화기가 울렸다.
"어, 자기야."
"오빠! 지금 어디에요? 아직 집에 있으면 어떡해요? 오늘 같은 날 늦으면 안 되는 거 몰라요?"
여자 친구가 있어서 다 좋은데, 나쁜 점 한 가지.
바로 항상 잔소리를 들어야 한다는 것.
물론 아직은 잔소리조차 예뻐 보일 시기였다.
"어, 미안, 자기야. 금방 나갈게."
그런데 이정원이 이렇게 잔소리하는 이유가 있었다.
왜냐면 오늘은 바로 그가 제일 아끼는 동생인 이주원의 결혼식 날이었기 때문이다.
'그래, 서둘러야지. 이제 나가봐야겠다.'
그리고 다시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화면에는 막 보내려던 승낙의 답장이 아직 그대로 남아있었다.
'에이, 주원이 결혼식을 기점으로 나도 새출발하자. 웹소설은 이제 신경 쓰지 말자.'
그렇게 이형원은 컴퓨터를 꺼버렸다.
만약 이형원이 승낙의 답장을 보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물론 변덕스러운 이형원의 성격상 나중에 다시 웹소설 사이트에 접속할 수도 있었다.
어쨌거나 그래도 오늘은 이주원의 결혼식 덕분에 무사히 위기를 넘긴 것이다.
* * *
"으이그, 이제 나오면 어떡해요! 더 빨리 왔어야죠!"
이형원은 이정원의 잔소리를 들으며 결혼식장으로 향했다.
"헐."
결혼식장은 엄청 화려했고, 이주원은 수많은 하객들에게 붙잡혀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주원이가 대단하긴 하구나."
그래서 이형원은 먼저 신부 대기실로 향했다.
신부 대기실엔 이미 김한철과 윤상미, 김정화와 김태민 커플도 함께 있었다.
"와, 완전 인형인 줄. 유나야, 진짜 예쁘다. 결혼 축하해."
"네, 오빠. 고마워요."
한유나는 평소에는 수수하게 다니는 편이었다.
그리고 쇼핑몰도 일상복 컨셉이라 요란하게 꾸미진 않았다.
하지만 오늘 작정하고 신부 화장을 하자, 정말 여신이 드레스를 입고 앉아있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이형원은 김한철 커플을 보며 씨익 웃었다.
"한철이 이 놈."
"히히히, 그렇게 됐네요."
오늘 부케를 바로 김한철의 여자 친구인 윤상미가 받기로 한 것이었다.
윤상미가 연상이기도 했고, 또 김한철이 빨리 가정을 꾸려서 안정된 생활을 하고 싶어 했다.
특히 김한철은 병역특례 복무가 끝나면 곧바로 이주원과 회사를 만들 생각이었다.
"그런데 내 생각에 주원이가 사업으로 성공한 것은 거의 90%는 유나 덕분인 것 같아요."
"왜? 주원이도 일 잘하거든?"
유나가 따지자 김한철은 고개를 저으며 설명했다.
"주원이가 부지런하긴 한데, 예술가의 피가 흘러서 가끔 현실과 공상을 구별을 못하더라고. 얼마 전에는 미래에는 인터넷 동전이 수 천 만원씩 할 거라는 거야."
"인터넷 동전? 동전이 수천만원이라고?"
"그러니까요. 어디서 무슨 공상과학 소설을 읽었나 봐요. 일단 화폐라는 게 은행에서 나오는 거잖아요. 그리고 수천만원씩 하면 그게 무슨 동전이에요. 아무래도 내가 IT계의 한유나가 되어서 주원이를 잘 이끌어줘야 할 것 같아요."
음.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같은 생각을 했다.
김한철은 키가 188에 어깨가 쫙 벌어진 인간 고릴라.
김한철이 아무리 노력해도 'IT계의 한유나'라는 표현은 심각하게 잘못된 것 같았다.
그때 이형원이 감개무량한 표정을 지으며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한 명씩 결혼하는 구나. 예전에 꼬꼬마였던 주원이와 한철이를 내가 하나씩 거두었던 게 엊그제 같은데, 둘이 먼저 장가를 가다니."
"그러게 말이에요. 그런데 말이죠."
또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신부 대기실의 시선이 모두 김한철에게 쏠렸다.
그러고 보면 이형원에게 묻혀서 그렇지, 김한철도 한 헛소리 하는 인간이었다.
"내가 결혼은 주원이에게 졌지만, 2세 계획만큼은 주원이게 이길 거야. 예로부터 힘하면 김한철! 김한철하면 힘! 주원이에게 전해 줘. 분발하지 않으면 금방 나한테 따라잡힐 거라고!"
"으이그!"
찰싹.
김한철이 호언장담하자 윤상미가 김한철의 등짝을 때렸다.
김한철이 직장생활을 오래 해서 약간 아재처럼 말하는 측면이 있었다.
그때.
"흐흐흐흐."
이형원이 음흉한 웃음을 터뜨렸다.
"2세 계획은 힘이 전부가 아니지. 하루 종일 집에서 빈둥거리며 이것저것 온갖 상상을 하는 소설가를 우습게보면 곤란하다고. 흐흐흐흐."
"으아아악, 징그러!"
철썩.
이번에는 이정원이 두 배는 강력하게 이형원의 등짝을 날렸다.
그런데 그 두 사람을 보며 숨은 강자 김태민이 차가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외롭게 자란 김태민.
김태민 역시 대가족을 꿈꿨다.
먼저 출발한 진돗개 이주원.
뒤를 쫓는 근육질 사냥개 김한철.
음흉한 토이푸들 이형원.
그리고 그들을 웃으며 지켜보는 치타 김태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