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 인생게임 □
전국을 다 뒤져서 원하던 집을 찾았다.
내가 유나에게 계획을 말할 땐, 그냥 생각나는 대로 말한 것이었다.
하지만 찾아봤더니 그런 집이 정말 있었다.
곧 방학이 시작되었고, 유미와 유현이도 출국했다.
유미가 어찌나 고마워하는지 살짝 미안해질 지경이었다.
"오빠, 꼭 선물 사 올게요."
유미야.
여행을 맘껏 즐기고 천천히 돌아오는 게 최고의 선물이란다.
아무튼.
두 사람이 떠나고, 우리도 짐을 꾸렸다.
내 카니발.
작지 않은 차지만 졸전을 위한 캔버스를 싣기에는 비좁았다.
이것저것 화구와 유나의 집에서 챙긴 밑반찬들.
그리고 한 달간 놀기 위한 장비들도 차에 싣고 출발했다.
캔버스는 도착해서 택배로 받기로 했다.
우린 거제도로 출발했다.
"멀리도 간다. 그냥 가까운 곳으로 가지. 운전하기 힘 들겠다."
유나가 걱정하며 말했다.
"서울 가까운 곳이면 회사가 계속 신경 쓰이고, 결국 출근하게 될까봐. 한 달 동안 이것저것 다 잊고 그림이랑 너만 생각하고 싶어."
"치이."
유나가 내색은 안했지만, 동생들을 여행 보내준 것을 엄청 고마워했다.
물론 내게는 시커먼 속내가 있긴 했지만, 어쨌거나.
그리고 유나는 착한 일을 하면 보상은 철저히 하는 성격.
'아마도 이번 한 달은 정말 포근하게 보낼 수 있겠지.'
그렇게 우린 거제도로 출발했다.
고속도로는 막히지 않고 시원하게 뚫렸다.
차 안에서 내내 유나가 들뜬 게 느껴져서 나도 피곤한 줄 모르고 운전했다.
음악도 듣고, 속도도 마음껏 밟고.
가끔 휴게소에 들러 맛있는 것도 조금 사먹었더니 벌써 거제도였다.
"우와."
집을 보자마자 유나가 소리쳤다.
유나가 마음에 들어 해서 다행.
난 이미 집을 계약할 때 한 번 와본 적이 있었다.
서울에서 거제까지 가까운 거리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준비에 만전을 가했다.
한 달간의 꿈같은 동거, 아니 그림 합숙을 게으른 준비로 망칠 순 없으니까.
* * *
거제도는 대형 조선소들이 있어서 지방이지만 무척 발전한 도시였다.
아파트 단지도 많고, 괜찮은 식당도 많고, 조선소에 파견된 외국인도 많이 살았다.
그리고 섬 중앙엔 낮은 산과 저수지도 많아서 찾아보니 구석, 구석 예쁜 집들이 많았다.
내가 빌린 집은 저수지 옆에 지어진 아담한 전원주택.
그리 큰 집은 아니지만, 방이 두 개였고, 거실이 꽤 넓어서 그림 그리기엔 충분했다.
또 잔디와 화단이 펼쳐진 마당은 꽤 넓었다.
침실 창문으로 바로 연못이 보이고, 집을 나서면 산속으로 산책로가 이어졌다.
나무가 우거진 산책로 옆으로는 제법 큰 도랑이 흘렀다.
그래서 졸졸졸, 물 흐르는 소리가 무척 듣기 좋았다.
차로 잠깐 나가면 해수욕장으로 갈 수도 있었고, 대형 마트도 가까웠다.
여름이라 관광객도 많았지만, 띄엄띄엄 전원주택이 있는 산속이라 우리와는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우린 조용히 지낼 수 있었다.
우리가 집에 도착했을 때, 50대의 집주인 아주머니가 집 열쇠를 가지고 우릴 반겼다.
인상은 푸근한 시골 아주머니 같았지만, 이런 집을 여러 채 가지고 임대업을 하는 돈 많은 사업가였다.
"서울서 오시느라 힘 드셨죠? 환영합니다."
집주인은 가전제품 등에 대해 간단히 설명하고는 우리에게 열쇠를 넘겼다.
"아, 그리고 하나만 부탁할게요."
"네, 말씀하시죠."
"실은 근처에 고양이가 두 마리 살아요. 정확히 말하면 네 마리요."
"고양이요?"
유나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되물었다.
"한 7,8년 전에 옆집에서 기르던 고양이에요."
그러면서 집주인은 멀리 떨어진 집 하나를 가리켰다.
옆집이라고 해봤자 거리가 100미터는 넘을 것 같았다.
"저기 서울에서 온 부부가 한동안 살았는데, 고양이를 기르다가 버리고 갔어요. 노르웨이 숲? 암컷 고양이였는데, 이 근처서 지내다가 어떻게 새끼를 세 마리나 낳았어요."
노르웨이 숲?
고양이 품종은 잘 모르지만 꽤 비싸게 들렸다.
싸든 비싸든 간에 기르던 동물을 버리고 가다니.
"아마 곧 나타날 거예요. 사람을 잘 따르고 일 년 내내 털이 긴 고양이라서 금방 알아보실 거예요."
그리고 집주인은 마당의 창고에 고양이 사료가 있는 곳을 가르쳐줬다.
커다란 포대가 두 개나 있었다.
"이름이 몽키예요. 원래 이름은 모르고, 나무 같은데 잘 올라가서 동네사람들이 그냥 그렇게 불러요. 새끼가 세 마리인데, 첫째랑 둘째는 가끔 나타나요. 몽키가 나이 들어서 길고양이들한테 항상 맞고 다니거든요. 그런데 셋째가 몽키랑 같이 다니면서 몽키를 지켜줘요. 저녁에 밥 때가 되면 두 마리가 집 앞에 나타날 거예요."
아마도 집 주인이 집고양이가 길에서 사는 게 불쌍해서 그동안 사료를 챙겨준 모양이었다.
"셋째 이름은 세리에요. 원래는 내가 하루에 한 번씩 와서 사료를 챙겨주는데, 집에 손님이 계실 땐 내가 매일 오기에 좀 그러니까. 그래서 부탁드릴게요. 하루 한 두 번, 사료랑 물만 챙겨주시면 돼요."
"그럴게요, 전혀 문제없어요."
유나가 선뜻 웃으며 대답했다.
유나는 동물을 좋아해서 귀찮기는커녕 오히려 가산점이었다.
난 솔직히 말하면 고양이보다는 개가 더 좋다.
하지만 김태민 덕분에 고양이를 워낙 자주 접하다 보니 고양이도 싫진 않게 되었다.
"셋째 이름이 세리면, 혹시 둘째 이름은 두리인가요?"
"어? 어떻게 아셨어요? 첫째 이름은 하나에요. 다른 길고양이들이랑은 생긴 게 많이 달라서 보면 곧바로 아실 거예요."
그렇게 고양이 모녀도 부탁하고 집주인은 떠났다.
우리가 거제도 집에 도착한 것은 오후 4시.
슬슬 출출해질 무렵이었다.
차에서 간단히 짐을 내리고 유나가 말했다.
"주원아. 오늘은 내가 저녁 만들게. 넌 좀 쉬어. 운전하느라 힘 들었잖아."
"아니야. 여기선 일은 내가 다 할게. 넌 그냥 쉬기만 해."
"안 그래도 돼. 나도 조수석에 앉아만 있었더니 좀 움직이고 싶어서 그래."
유나는 웃으면서 나를 부엌 밖으로 밀어냈다.
그리고 기분이 좋은지 노래도 크게 틀어두고 이것저것 요리를 시작했다.
'어차피 할 일은 많으니까.'
먼저 차에서 화구들을 내렸다.
이젤도 펼치고, 거실 창가에 유나의 작업대도 세웠다.
그리고 마당엔 텐트를 펼쳤다.
전생에서 아이를 기르던 직장 동료들이 가끔 캠핑을 다녀와서 자랑하곤 했었다.
"가끔 집 밖에서 가족끼리 같이 잠들면 서로 부쩍 가까워지는 게 느껴지거든. 밖에서 먹으면 음식도 더 맛있고. 한 번 캠핑 다녀오면 몸은 피곤한데, 마음은 푹 쉬는 기분이야."
그때는 그런 말들을 전부 흘려들었었다.
내가 너무 지쳐 있어서 별로 부럽지도 않았었다.
캠핑은 장비들도 비싸고, 나는 시간도 없으니까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이번 생은 조금씩 여유가 생기고 있었다.
그래서 캠핑도 한 번 쯤 도전해보고 싶었다.
'멀리 캠핑장까진 가진 않더라도.'
마당에 텐트를 펼치고, 코펠로 라면 끓여먹어야지.
완전 생초보라서 간단한 텐트인데도 한참 걸렸다.
그 다음엔 침실에 모기장을 걸었다.
'창문을 열고 바깥의 소리를 들으면서 잠 들려면.'
그럼 모기장이 필요할 것 같아서, 침대를 다 덮는 크고 예쁜 녀석으로 하나 장만했다.
모기장을 다 치고는, 창문 옆에 풍경과 모빌을 걸었다.
바람이 불면 시끄럽지 않은 풍경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그렇게 한가롭고 조용한 동거, 아니 그림합숙을 위한 준비를 하나씩 마쳐갔다.
"주원아! 밥 먹어!"
메뉴는 차돌박이 된장찌개.
뚝배기에서 보글보글 끓고 있었다.
반찬은 무생채나물, 계란 후라이, 그리고 밑반찬 몇 개.
소박하지만 이 정도로 충분했다.
'반은 그냥 먹고, 반은 비벼서 먹어야지.'
유나는 요리를 다 하고는 샤워를 하고 옷도 갈아입었다.
반바지에 헐렁한 티셔츠 차림.
무척 편하고 즐거워 보였다.
샤워를 마친 직후라 더 뽀얗고 어려보이는 유나.
"너도 밥 먹고 샤워해. 여기 물 진짜 차가워."
"응. 그럴게."
그렇게 첫 숟갈을 뜨려는데.
"주원아, 먼저 한 잔 받아."
유나가 내게 유리컵을 내밀고, 냉동실에서 꺼낸 차가운 맥주를 가득 따라줬다.
그리고 내 밥숟가락 위해, 반찬도 한 젓가락 얹어줬다.
겨우 맥주 한 잔.
반찬 한 젓가락으로 이렇게 세상 다 가진 기분이 들다니.
그리고 이렇게 멋진 저녁이 앞으로 한 달이나 남았다니.
너무 행복해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 * *
저녁을 다 먹고 유나와 집 주위를 산책하기로 했다.
산 속이라 여름이지만 무척 시원했다.
그렇게 집을 나서려는데, 고양이 소리가 들렸다.
"어머, 얘들인가 봐."
여름인데, 털이 무척 긴 회색 고양이 한 마리가 유나에게 다가와 발목에 몸을 부볐다.
"신기하다. 고양이가 이러는 거 처음이야."
그리고 노란색 고양이가 또 한 마리 나타나 유나 앞에서 배를 보이며 뒹굴었다.
색깔은 그냥 노란 길고양이인데, 털이 더 길고 무척 부드러워보였다.
길고양이와 노르웨이 숲의 혼혈이라 그런지 무척 우아해보였다.
"이 녀석이 세리인가 봐."
둘 다 사람한테 사료를 받아먹고 지내서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는 것 같았다.
우리가 사료와 물을 갈아주자, 두 마리는 허겁지겁 사료를 먹기 시작했다.
"주원아, 내일 마트가면 고양이 간식이랑 샴푸도 사자."
그리고 우리는 숲 속으로 걸었다.
나는 노력상점의 [숲속 산책]을 자주 썼지만, 진짜는 또 달랐다.
숲에 들어서자 서로 다른 종류의 새들이 서로 경쟁하듯 울어댔다.
그리고 가끔 새소리가 끊기면 길 옆의 물소리가 들렸다.
"아, 어떡해. 이제 겨우 첫날인데, 이렇게 평생 살고 싶다."
유나가 내 손을 붙잡고 말했다.
유나가 좋아해서 다행.
그런데 노련한 회귀자는 빈틈을 놓치지 않는다.
"평생? 유나야, 너 설마 나한테 청혼 하는 거야?"
"아니거든! 뭔 말이야! 그냥 나 혼자 여기서 고양이랑 살고 싶단 말이거든?"
눼눼.
그러세요.
그런데 나도 이렇게 시골에서 한가롭게 살고 싶긴 했다.
돈은 벌써 충분하니까, 일하지 않고도 대대손손 잘 살 수 있었다.
하지만 그래선 안 될 것 같았다.
조금 숲 속을 걷다가 유나에게 말했다.
"유나야, 있잖아."
"응."
"나 졸업하면 본격적으로 사업을 해 볼 생각이야. 한철이 복무 끝나면 IT쪽으로도 진출하고. 그래서 돈을 많이 벌고 싶어. 아주 많이."
"본격적으로 사업? 그럼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은 뭐야?"
"지금 하는 일들은 그냥······학교 다니면서 하는 아르바이트지."
"아르바이트라기엔 너무 부잔데······"
유나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내가 생각해도 이주원이 참 많이 컸다.
"우리가 매달 공부방이랑 보육원 후원하고 있잖아. 거기에 송금할 때마다 이런 생각을 했어. 내가 더 돈이 많다면 더 많은 곳을 도울 수 있을 텐데. 나는 운 좋게 너무 많은 돈을 벌었으니까, 내가 가진 행운을 남들과 나누고 싶어. 꼭 그래야 할 것 같아."
"그런 이유면 찬성할게. 그런데 괜찮겠어? 너 그림 그리는 거, 진짜 좋아하잖아. 일하는 틈틈이 그리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있겠어?"
어차피 미대 입시를 결심할 때, 내 목적은 화가가 되는 것이 아니었다.
다시 얻게 된 두 번째 삶인 만큼, 예술을 공부하며 두 번째 삶의 이유를 고민해보고 싶었다.
물론 나는 그림을 좋아한다.
하지만 화가가 되기 위한 그림이 아니라, 순전히 나를 위한 그림이면 충분했다.
"영영 사업만 할 건 아니고, 마흔이나 쉰쯤 됐을 때, '이주원, 이만하면 됐다.' 싶으면 그땐 일을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릴 거야. 아마 그때 쯤 되면······"
"그때쯤 되면?"
"그땐 정말 이런 곳을 찾아서, 지금처럼 너랑 하루 종일 그림만 그리면서 살 거야."
내 말에 유나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얘 좀 봐. 누가 널 그때까지 만나준대?"
"너 어차피 나랑 못 헤어져."
"무슨 소리야. 내가 뭘 하든 내 맘이지."
"우리 재산이 전부 공동 명의로 복잡하게 엮여 있거든. 그래서 나랑 헤어지려면 변호사 고용해서 재산 분할만 한 3년 걸릴 걸? 변호사한테 서류 보여주면 아마 한숨 푹 쉬면서 '그냥 다시 사귀세요.' 이렇게 말할 걸?"
"헐!"
유나가 억울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미 늦었다.
유나는 이제 나한테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렇게 말하고 나니까 가슴이 뻥 뚫린 것처럼 세상 후련했다.
이 날을 위해 내가 얼마나 참고 참았던가!
결국 지난 몇 년간의 인생게임은 이주원의 승리로 마무리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