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5. 두 번째 소원 □
"그래, 들어나 보자!"
유나는 화난 척 소리를 질렀지만, 노노노.
연기가 어설퍼.
이미 첫 번째 소원으로 유럽을 다녀와서인지, 유나의 눈빛 어딘가에 살짝 기대가 비쳤다.
그래서 나는 한층 여유를 가지고, 내 두 번째 소원을 말했다.
"유나야, 내 두 번째 소원은······"
"빨리 말해!"
내가 일부러 뜸을 들이자, 유나가 재촉했다.
절대 그냥 들어나 보자는 사람의 태도가 아니었다.
어쨌거나.
"나랑 한 달만 같이 살아."
"그게 무슨 소리야?"
"잘 들어봐."
길가를 걷고 있던 우리는 옆의 벤치에 잠시 앉았다.
"내가 집을 하나 구해 볼게. 바닷가 근처이긴 한데, 너무 바다는 아니고, 근처에 산도 있는 곳. 아무튼 적당히 시골이고 사람은 별로 없을 거야. 어차피 차가 있으니까 잠시 운전하면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 쉽게 구할 수 있는 곳으로 가자. 여름이지만 조용한 곳으로 찾아볼게."
"그래서?"
"우린 어차피 방학동안 졸전을 대비해서 계속 그림을 그려야 하잖아. 서울에 있으면 아마 학교 작업실에 출근하겠지. 으으. 햇볕에 달아오른 뜨거운 아스팔트 도로를 생각해 봐. 하지만 거긴 달라. 주위엔 온통 풀밭이고, 창문을 열면 매미 소리, 새소리, 바람 소리가 들려. 라디오도 크게 틀어둘 수 있어. 옆 사람 배려해서 시시하게 이어폰으로 듣지 않아도 돼. 넌 듣고 싶은 노래를 크게 틀어두고, 아침부터 오후까지 즐겁게 그림을 그리는 거야. 그리고 오후가 되면······"
"오후가 되면?"
"오후가 되어서 네가 그림 그리는 게 살짝 지루해질 무렵이면, 내가 마당의 평상에 수박화채와 참외, 아이스티를 세팅해둘 거야. 차가운 화채를 먹으며 시골의 오후를 천천히 감상하는 거지. 그리고 한 두 시간 더 그림 그리고, 차를 끌고 근처의 식당으로 가서 맛있는 시골 밥상을 먹는 거야. 아니면 마당에서 바비큐를 해도 되고. 저녁엔 택시를 타고 읍내로 가서 시골 술집에서 맥주도 한 잔 하고."
"시골 술집?"
"응. 시골의 작은 술집이긴 하지만 바닷가니까 신선한 안주는 많을 거야. 그리고 기분 좋게 취해서 집에 도착하는 거야. 침대를 뒹굴며 이것저것 이야기하며 놀아도 되고. 아니면 빔 프로젝트를 틀어놓고 영화를 한 편 봐도 되고. 그러다 잠이 오면 그대로 잠들면 돼. 그리고 아침 늦게 눈을 뜨면 내가 침대 옆에 아침을 차려놨겠지. 넌 느긋하게 아침을 먹고, 나랑 같이 손잡고 집 근처 낮은 산을 산책하는 거야. 그리고 다시 어제와 똑같은 하루를 반복하는 거지."
유나의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였다.
이미 넘어왔을 걸?
[ 서울 학교의 바글거리는 비좁은 작업실 VS 시골의 천국. ]
이것은 절대 거절할 수 없는 제안.
다만 지금 유나는 어떻게 해야 자존심을 지키며 승낙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을 것이다.
잠시 후.
한참 만에 유나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문제가 있어."
"문제? 뭔데?"
"유미와 유현이. 한 달이나 너랑 살겠다고 하면 유미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전에 유럽 여행은 잘 넘어갔잖아?"
"여행이랑 동거랑 같아?"
"동거라니. 이건 어디까지나 그림 합숙."
동거라면 왠지 건전해 보이지 않으니까, 나는 재빨리 단어를 정정해줬다.
"그거나, 그거나! 유미 입장에선 똑같지!"
유나야, 내 입장에서도 똑같아.
어쨌거나 일리 있는 지적이다.
깐깐한 유미 입장에서 언니가 남자와 한 달 동안 같이 살겠다고 하면 분명 반대할 것이다.
유미는 나랑도 친하긴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의 문제다.
사이좋은 한씨 자매는 서로를 감시하고 단속한다.
하지만 나는 노련한 중년 회귀자.
"유나야. 그럼 내가 유미랑 유현이만 해결하면 넌 나랑 같이 한달 사는 거다."
"그, 그래. 약속은 약속이니까"
자기도 좋으면서 끝까지 어쩔 수 없이 따라오는 척 하기는.
어설픈 연기지만 존중해 드립니다.
그렇게 두 번째 소원의 조건부 승인을 받았다.
* * *
다음 날, 집 앞의 카페.
나는 오랜만에 유미와 단 둘이 만났다.
기말 시험기간이라 피곤해보였지만, 유미는 밝게 웃었다.
"아, 오빠. 웬일이에요? 설마 또 언니한테 선물하려고요?"
"그보다 학교는 다닐만해? 많이 힘들지? 수의대도 결국 생명을 다루는 분야니까, 공부할 것도 많고, 책임감도 막중할 거야."
"하, 오빠 진짜! 그렇게 말해줘서 너무 고마워요. 많은 사람들이 우릴 의대랑 비교하고 은근히 무시하거든요. 정말 생명은 똑같이 소중하고 어려운 건데. 오빠 말 들으니까 눈물 나려고 해요!"
"기말고사 준비 힘들지? 나도 정신없이 지내느라 널 많이 못 챙겨준 것 같아 미안하네."
"아니에요. 오빠 바쁜 거 잘 알죠."
"그래서 말인데······"
나는 슬슬 본론을 꺼냈다.
"유미야."
"네?"
"유나랑 내가 겨울 방학에 유럽 여행 다녀온 거 알지?"
"네. 잘 알죠. 언니가 얼마나 자랑했다고요."
"응. 그때 영국에서 유나가 매일 네 이야기 했거든. 너무 예쁜 곳이라 너한테도 보여주고 싶다고. 자기만 여행 와서 너무 미안하다고."
"정말요? 언니가 그랬어요?"
맘속으론 어떻게 생각했는지 모르겠지만 유나가 별로 유미 이야기를 하진 않았다.
자기 즐기기 바빴던 것 같다.
어쨌거나.
"응. 그래서 말인데 이번 여름 방학에 너한테 작은 선물을 해주고 싶어서. 한 달 정도 유럽에 다녀오지 않을래? 그동안 공부하느라 힘들었을 텐데. 푹 쉬고 와. 비행기 티켓도 좋은 걸로 끊어주고, 묵을 곳도 근사한 곳들로 잡아줄게. 잠시 공부는 잊고 마음껏 힐링 하고 와. 로마, 프랑스, 영국······"
"어머! 정말요?"
"응. 네가 너무 피곤해보여서 유나가 걱정하더라고. 나도 마찬가지고. 우리의 작은 정성이야."
"오빠! 진짜 너무 고마워요! 오빠 최고예요!"
유미는 끼약, 끼약 소리까지 지르며 좋아했다.
"단!"
"단?"
"조건이 있어, 유미야."
유미의 표정이 순식간에 날카로워졌다.
"뭐죠? 오빠?"
"유현이도 데려가."
"유현이를요?"
"응. 유현이한테도 군대 가기 전에 의미 있는 선물을 해주고 싶거든. 아무래도 소설가 지망생이니까 여행을 많이 하면 도움이 될 것 같은데. 그런데 너도 알잖아. 유현이는 어리기도 하고, 또 너만큼 믿음이 안가. 여행 보내면 중간에 옆길로 새지는 않을까, 어디서 사기 당하진 않을까. 너무 걱정이 돼."
유나만큼은 아니지만, 유미도 책임감 있는 누나였다.
유현이 이야기가 나오자 유미가 살짝 눈썹을 찌푸렸다.
"좀 귀찮긴 하겠지만, 네가 유현이도 데려가. 대신 용돈은 넉넉하게 줄게."
"알겠어요. 오빠. 데려가서 짐꾼으로 써야겠어요. 그리고 저랑 유현이, 이렇게 챙겨주셔서 너무 고마워요. 정말 감동이에요."
"아니야, 유미야. 너희 둘은 친동생이나 마찬가지인 걸. 기말고사 마무리 잘하고, 여행 재미있게 다녀와."
그렇게 회귀자는 일단 유미를 해결했다.
그날 오후에는 한유현을 만났다.
나는 반찬을 주겠다며, 유현이를 집으로 불렀다.
그리고 이번에도 미리 준비한 대사를 읊었다.
"유미가 요즘 너무 힘들어보여서 여행이라도 보내주고 싶거든. 알잖아, 대학 생활은 한 번 뿐이니까, 학창 시절에 배낭여행은 좋은 추억이 되겠지. 그런데 말이야, 내가 좀 옛날 사람이라서. 아무래도 여자 혼자 여행 보내려니까 안심이 되지 않아. 그래서 네가 누나를 데리고 다녀와야겠다."
"음······"
한유현은 턱을 만지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유나와 유미의 막내 동생.
어려서부터 사나운 누나들과 함께 지내다보니 유현이는 나이에 비해 조숙하고, 머리가 잘 돌아갔다.
그리고 나와 코드도 잘 맞았다.
유현이는 내가 건넨 쥬스를 한 모금 마시곤 조용히 말을 시작했다.
"전 오랫동안 형을 지켜봤죠. 저는 형을 정말 좋아해요. 그리고 형은 배울게 많은 사람이었어요."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그냥 여행이나 다녀오겠다고 말해.
"내가 이제까지 분석한 바에 의하면, 주원이 형은 절대 한 가지 이유만으로 움직이지 않았어요. 언제나 몇 수 앞을 내다보고 최대한 많은 사람이 동시에 많은 이익을 볼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내리죠."
"내가 그랬었나?"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그렇다면 한 번 생각해보죠. 나와 작은 누나가 유럽 여행을 떠나면 형이 얻는 이익은 무엇일까? 왜 하필 우리 두 사람을 한 달이나 한국을 떠나게 하려는 것일까?"
"내가 얻는 이익이라······친동생처럼 여기는 두 사람이 휴식을 취하고, 견문을 넓히는 것?"
하지만 한유현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내가 이제까지 본 바에 의하면 주원이 형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몇 가지로 정해져 있어요. 형은 회사를 여러 개 경영하고 있지만, 돈에 휘둘리는 사람은 아니에요. 그래서 우리가 없는 사이에 동업자인 큰 누나를 제거하려는 그런 금전적인 음모는 아닐 거예요."
하하하.
난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그럴 리가 있나. 소설가를 지망하더니 우리 유현이가 추리 소설을 너무 많이 읽었구나."
"형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세 가지죠. 첫째는 예술. 형은 정말 부지런히 학교의 과제를 하죠. 하지만 그것은 저와 작은 누나가 한국에 있어도 아무 상관이 없어요. 둘째는 포항에 계신 어머니. 형은 효자예요. 하지만 그것 역시 저와 유미 누나랑은 큰 상관이 없어요. 그리고 세 번째 이주원을 움직이는 것은 바로!"
"바로?"
"그것은 바로 한.유.나. 큰누나라면 저와 작은 누나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죠. 이주원은 대체 저와 작은 누나가 한국에서 사라진 한 달 동안 한유나와 무엇을 할 생각일까요? 우리가 존재하면 불편해질 어떤 계획. 그것은 대체 무엇일까요?"
훗, 후후후.
노련한 회귀자가 귀여운 복병을 만났군.
하지만 여기까지는 나도 예상하고 있었다.
한유현이 만만한 상대가 아니란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유현아."
"예, 형."
"넌 열심히 공부해서 서울에 있는 학교에 왔지. 그리고 아마 1년 내로 군대에 가게 될 거야. 그렇지?"
"네, 맞아요."
"아무래도 집에서 멀리 떨어져 지내다보니, 혹시 하고 싶은 일이 있더라도 부모님께 곧바로 상의하진 못했을 거야. 누나들이 둘이나 있지만, 역시 남자가 아니면 공감하기 힘든 그런 주제도 있는 법이지. 혹시 평소에 꼭 하고 싶었던 일 중에, 남자 형제가 있다면 의논하고 싶었던, 그런 일이 있었을까?"
한유현은 잠시 내 눈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실은 최근에 면허를 땄습니다. 군대에 가기 전에 운전을 잘하게 되면 아주 요긴할 텐데. 아마 제주도 집이었다면 아버지 차로 운전을 연습했겠죠. 그런데 아무래도 서울이다 보니······"
"이런, 우리 유현이에게 그런 문제가 있었구나. 형이 더 신경 썼어야 했는데, 미안하구나. 1600cc 중고차 정도면 어떨까? 넌 학생이니까 첫 달 유류비와 세금, 보험료도 내가 내주고 싶은데."
반짝!
한유현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형! 그렇게 해주신다면 둘째 달 기름값부터는 제가 알바를 해서 내겠습니다!"
갑자기 급 공손해진 한유현.
난 승자의 미소를 지어줬다.
생각보다 쉽군.
돈이 내게 문제가 되는 것도 아니었고, 유현이는 귀여운 막내라서 중고차 정도는 아깝지 않았다.
어차피 언젠가는 내가 챙겼어야 할 문제.
"유현아, 대신 꼭 안전 운전해야 한다."
"넵, 형!"
"좋아, 먼저 유럽에 다녀온 후에 같이 차를 보러 가자."
"그럼 저는 유미 누나가 쾌적한 여행을 즐기도록 최선을 다해 보살피겠습니다! 작은 누나가 너무 즐거워서 계속 유럽에 머물고 싶도록 만들겠습니다!"
이번엔 내가 반짝.
나도 모르게 내 눈이 빛났다.
"여행을 5일 연장할 때마다 추가 용돈을 지급하지."
"감사합니다! 믿고 맡겨주십시오!"
그렇게 노련한 회귀자는 유나의 두 동생도 해결했다.
이제 우리 앞엔 꿈같은 동거, 아니 그림 합숙이 펼쳐질 일만 남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