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력천재 미대생-179화 (179/203)

■ 179. 고수 □

'노트북을 가져오길 정말 잘했군.'

오스트리아에서 한국 인터넷을 검색하다 뜻밖의 정보를 캐치했다.

[ 김용철 작가 조수 구함 ]

[ 모집 부문 : 판화 ]

[ 기간 : 2월말에서 5월말까지. 기간은 일정에 따라 연장될 수 있음. ]

[ 지원자는 이력서와 판화 관련 포트폴리오를 메일로 제출해주세요. ]

바로 김태민의 아버지 김용철 작가가 3개월짜리 조수를 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김용철 작가라면 한국에서 가장 성공한 화가 중 하나였다.

한국에서 인정받아도 외국에서는 무명인 경우도 꽤 많았다.

하지만 김용철 작가는 오히려 외국에서 더 높이 평가되었고, 실제로 작업의 상당 부분이 해외로 판매되고 있었다.

그래서 간혹 김용철 작가를 안 좋게 평가하는 작가들도, 김용철 작가가 한국 미술을 세계에 알리는 공로만큼은 모두 인정하고 있었다.

'나의 경우엔······'

김용철 작가의 그런 외적인 요소보다 김용철 작가 본인에게 더 끌렸다.

김용철 작가는 그 명성이나 성과에도 불구하고 열정적으로 다작을 하기로 유명했다.

도전하는 장르도 다양했다.

처음 명성을 얻은 것은 회화였지만, 그 이후 입체부터 사진, 영상, 심지어 키네틱까지, 다양한 시도를 했다.

물론 모든 장르에서 다 성공을 거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포기를 몰랐다.

김용철 작가야말로 말 그대로 진정한 노력하는 천재였다.

'그리고 이번에는 판화로군.'

판화는 나도 2학년 때 배운 적이 있다.

특히 판화는 육체적으로도 꽤 힘든 작업이었다.

그래서 노력상점이 있는 내가 상대적으로 다른 학생들보다 뛰어날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교수님한테 칭찬도 많이 들었다.

나름 자신 있는 분야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번 조수 채용에 끌리는 이유는······

[ 근무시간 : 자유근무, 단 평일 하루 3시간은 김용철 작가님의 업무 시간에 맞춰야 합니다. 김용철 작가님은 주로 오후 5시부터 새벽 2시까지 작업실에 계십니다. ]

이 조건이라면 학교와 병행할 수 있었다.

김용철 작가가 야행성이라는 것은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다.

아마도 자유 근무라는 조건은 나 같은 학생이나, 겸업을 하는 젊은 작가들을 배려하기 위해서 인 듯 했다.

'아마 4학년 1학기가 꽤 바쁘긴 할 거야.'

하지만 정말 정신없는 기간은 2학기부터다.

1학기라면?

그리고 이 정도 조건이라면?

마치 나를 위한 채용인 것 같았다.

'한국 최고 작가 김용철과 함께 작업할 수 있는 기회라면 좀처럼 다시 오지 않을 거야.'

두근두근.

계속 욕심이 나고, 뭔가 흥분되었다.

물론 내가 채용된다는 보장은 없다.

하지만 시도는 해 봐야지.

나는 오스트리아 호텔방에서 서둘러 이력서를 작성했다.

다행히 미리 만들어둔 포트폴리오가 노트북에 저장되어 있었다.

'친구 찬스를 한 번?'

하지만 김태민은 내 소중한 친구이자 경쟁자.

그래서 별로 그러고 싶진 않았다.

'게다가 김용철 작가라면······'

이준성 교수는 김용철 작가를 아프리카 물소 같은 사람이라고 했다.

'아들에게 청탁을 넣으면 오히려 역효과가 날지도 몰라.'

그리고 만약 내가 자격이 없다면 탈락되는 게 나을 것이다.

나를 위해서도, 김용철 작가를 위해서도, 그리고 다른 지원자를 위해서라도.

그래서 허튼 수는 쓰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꾸욱, 이메일을 전송했다.

* * *

귀국하자마자 일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영국과 오스트리아에서 보낸 한 달.

마치 유럽은 시간이 정지한 것처럼 한가롭고 편안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하이유나도, 5DE도, 카페로사도 모두 정신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몇 년 만에 보낸 한 달짜리 휴가였지만, 모두에게 미안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먼저 하이유나와 5DE.

정화 선배는 몇 군데 백화점을 상대로 입점 제안을 검토 중이었다.

정화 선배는 이제 겨우 스물여덟 살.

하지만 쫄지 않고, 대기업 백화점을 상대로 판매수수료를 두고 흥정을 벌였다.

'누나, 너무 멋져요.'

아직 결과는 나오지 않았지만, 그렇게 듬직할 수가 없었다.

나는 정화 선배를 믿고 기다리기로 했다.

그리고 카페로사.

사직동 카페로사가 영업을 시작했다.

빨간 벽돌 건물에 까만 유리창.

리모델링도 멋지게 잘 나왔다.

역시 김덕진 사장이 실력이 있었다.

물론 수익이야 모텔보다 많이 부족할 것이다.

하지만 사직동 거리에 카페로사의 커피 냄새를 풍기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카페 2층에서는 독립 출판된 책들을 같이 팔았고, 3층엔 직원들의 휴식 공간을 만들었다.

"카페는 결국 직원들이 손님을 대하는 장사거든요. 때론 커피맛보다 직원의 미소가 더 큰 역할을 하죠. 그래서 직원들에게 신경을 써야 합니다. 사장이 직원을 배려하는 친절이 그대로 손님에게 전달됩니다."

김덕진 사장의 철학에 나도 동의했다.

그리고 카페 직원의 말에 따르면, 건물의 전 주인이었던 그늘 서점의 사장 할아버지가 매일 이곳에 찾아와서 커피를 마신다고 했다.

직원이 내게 말했다.

"두 대표님께 너무 감사한다고 몇 번이나 말씀하셨어요. 이 건물을 예쁘게 꾸며주셔서 너무 좋으시대요."

"그 분이 몇 시에 오시죠?"

"매일 2시에서 4시 사이에 오세요."

나는 시계를 봤다.

슬슬 도망가야겠군.

그늘 서점 사장님이 싫은 건 아닌데, 자꾸 너무 고맙다고 하는 사람을 마주하기가 좀 그랬다.

"그 분 오시면 잘 챙겨드리세요. 그리고 저도 감사하게 생각한다고 말씀 전해주시고요."

사직동 카페로 김덕진과 나의 조합이 성공적이라는 결론이 났다.

덕분에 망설이지 않고, 나는 양평에 대형 한옥 식당을 구입했다.

'다음 프로젝트는 양평의 한옥 카페다.'

그리고 그 식당 주위의 땅도 한꺼번에 전부 통 크게 매입했다.

나중에 카페가 성공한 후에 매입하면 땅값이 오를 테니까.

화끈하게 질러 버렸다.

"이 대표님, 이래도 되는 겁니까?"

나의 씀씀이에 김덕진 사장이 조금 긴장한 표정.

"양평에 작은 커피 왕국을 만드는 겁니다. 양평을 지나는 모든 사람들이 감히 들르지 않고는 못 배기도록 말입니다. 김덕진 사장님 그 동안 해보고 싶었던 것들을 여기서 전부 시도 해보세요."

"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커피에 미친 양반이 세계를 돌면서 온갖 근사한 카페들을 다 가봤으니 하고 싶은 게 얼마나 많았을까?

일단 한옥을 개조한 카페를 먼저 만들고, 순차적으로 주위에 초대형 카페를 완성할 것이다.

'한국 최대의 카페를 만드는 거야. 그리고 그 규모가 바로 카페로사의 브랜드가 될 거야.'

나는 거침없이 팍팍 밀어붙였다.

그렇게 밀린 일들을 해결하고, 잠시 포항에 내려갔다.

조수석에는 유나가 면세점에서 사준 어머니 핸드백이 있었다.

포항.

가방을 받은 어머니는 활짝 웃으셨다.

예전이라면 이렇게 비싼 가방은 절대 매지도 못하셨을 것이다.

그리고 왜 사왔냐며 나를 한참 나무라셨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제법 편해지신 모양.

무척 다행이고, 또 뿌듯했다.

"주원아."

"네?"

"이 가방도 유나가 고른 거지?"

"네."

"그래. 이렇게 비싼 선물은 절대 네가 고르면 안 된다. 알겠지?"

음.

나도 나름 미대생인데······

왜 이리 신용을 잃어버린 걸까?

"유나는?"

"제주도 갔어요. 방학이잖아요."

"그래, 유나도 좀 쉬어야지. 유나 서울 돌아와도 일 너무 시키지 말고, 이제 유나 졸전 해야 하니까······"

졸전은 나도 해야 하는데.

어머니는 유나만 너무 예뻐하신다.

그런데 나는 그게 듣기 좋았다.

그리고 아마도 어머니가 유나를 챙기시는 건 전부 나를 위해서일 것이다.

그런데 그때 전화가 울렸다.

"네, 이주원입니다."

"안녕하세요. 김용철 작가님 사무실인데요. 판화 조수 지원하셨죠?"

"네, 맞습니다."

"합동 면접이 있거든요. 김용철 작가님이 직접 질문하실 예정이고요. 참석해주셔야 하세요."

포트폴리오 심사를 통과했구나!

나는 주먹을 쥐고 작게 환호를 외쳤다.

그리고 김용철 작가의 비서가 불러주는 시간과 장소를 메모했다.

"그럼 좋은 결과 있으시길 바랄게요."

"네, 감사합니다."

전화를 끊자 어머니가 궁금한 표정으로 물어보셨다.

"무슨 일이야? 무슨 일이길래 그렇게 좋아하니?"

"김용철 작가라고 굉장히 유명한 분이 있거든요. 그런데 그 분 일을 도와드리면서 작업도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있길래 지원했어요. 1차를 통과했나 봐요. 엄마, 미안한데 나, 그 일 때문에 내일 아침에 바로 서울에 올라가야 할 것 같아요."

어머니 표정은 아쉬움 반, 걱정 반.

"어휴, 이렇게 바쁘면 뭐 하러 내려왔어. 조심해서 올라가. 그리고 아무리 바빠도 유나 잘 챙겨주고."

어쩌다가.

어머니는 이제 기승전 유나가 되어 버리셨다.

* * *

그리고 드디어 면접 날이 되었다.

나는 김용철 작가의 사무실에 조금 일찍 도착했다.

대형 작업실 내부에 김용철 작가의 일을 챙기는 사무실이 따로 갖춰져 있었다.

일찍 왔다고 생각했는데, 2명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여자 하나, 남자 하나.

그런데 둘 다 나보다 몇 살 많아 보였다.

"안녕하세요. 전 H대 판화과 대학원생 이윤재입니다. 어디서 왔어요?"

그 중 하나가 먼저 다가와 내게 말을 건넸다.

"한국대요."

"혹시 한국대 판화과 대학원에서 왔어요?"

"아니요, 서양화과요. 전 학부생입니다."

학부생이란 말에 이윤재의 눈빛이 살짝 묘해졌다.

H대는 서양화과와 판화과가 따로 있다.

그래서 판화과에서 판화만 4년 동안 전문적으로 배운다.

하지만 한국대는 판화과는 따로 없고, 서양화과에서 판화 수업을 배운다.

"최미향입니다. 전 대구에서 왔어요."

최미향은 판화과 대학원을 졸업하고, 판화 공방을 운영 중이라고 했다.

'내가 제일 경력이 짧군.'

살짝 다가오는 위기감.

과연 나는 김용철 작가의 조수로 채용될 수 있을까?

"들어오세요. 세 분 같이 들어가시면 되세요. 긴장하지 마시고, 세 분 다 작가님 질문에 편하게 대답하시면 되세요."

친절한 비서가 우릴 안내했다.

그렇게 드디어 김용철 작가와 마주하게 되었다.

실물로는 처음 보는 김용철 작가.

얼핏 김태민의 얼굴이 보이긴 했다.

하지만 김태민이 여리여리한 소년 이미지라면, 김용철 작가는 정말 아프리카 물소 같았다.

'김태민은 정말 부모님의 좋은 점만 쏙쏙 빼먹었구나.'

김태민이 살짝 얄밉게 느껴질 정도였다.

난 왜 우리 어머니의 좋은 점만 쏙쏙 빼먹지 못했을까.

"어서 들어와요. 여기 편하게 앉아요."

김용철 작가가 자리에서 일어나 웃으며 말했다.

격식 같은 것은 별로 따지지 않는 타입 같았다.

우리 세 사람은 우물쭈물 김용철 작가 앞의 소파에 앉았다.

"한 번 보자, 윤재씨는 H대 판화과 대학원생이면, 그럼 지도 교수가 김동원 작가 맞나요?"

"네, 맞습니다. 저희 교수님께서 항상 김용철 작가님을 칭찬하셔서 늘 존경해왔습니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김용철 작가님을 가까이서 모시면서 작가님의 예술을 대하시는 진지한 자세를 배우고, 또 저를 돌아보고 반성하며 성장하고 싶어 지원했습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쏟아지는 아첨 반 소개 반.

"아, 그렇군요. 고맙네요. 그리고 미향씨는 포트폴리오가 참 흥미롭더군요."

"네, 판화 작업을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덕분에 올해 판화 협회 공모전에서 우수상을 타고, 서울시립미술관에서 2주간 전시를 했습니다."

"좋은 작품이 많더군요."

김용철 작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주원씨. 한국대 서양화과 이주원이라······ 혹시 내가 아는 그 이주원이 맞나요?"

어?

김용철 작가가 나를 알고 있었구나.

영광스럽고도 기묘한 기분의 순간.

어떻게 아는 걸까?

신문 기사를 읽은 걸까?

아니면 김태민이 이야기한 걸까?

"네, 아마 맞을 겁니다."

내 말에 김용철 작가가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내가 아는 그 이주원이 맞으면 굳이 이렇게 지원할 필요가 있었나? 그냥 언제든 내 작업실에 찾아왔어도 환영했을 텐데."

어랏?

그런 방법이?

원래 김용철 작가의 이미지는 살짝 무서운 느낌이었다.

아마도 워낙 유명한 사람이고.

또 이준성 교수가 쩔쩔매는 모습을 봐서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김용철 작가의 모습은 딱 마음씨 좋은 친구 아버지 그 자체였다.

"태민이한테라도 미리 말해두지 그랬나?"

다른 두 사람의 전형자가 있었지만, 김용철 작가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친구의 도움 없이 제 실력으로 객관적으로 평가 받고 싶었습니다."

내 대답에 김용철 작가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그런가요? 그럼 어디 한 번 이주원씨 소원대로 해봅시다."

설마?

[ 친구의 도움 없이 객관적으로 평가 받고 싶었습니다. ]

나의 이 대답을 이끌어내려고 일부러 김태민을 언급했던 것일까?

시골에서 태어나 한국대에 입학하고, 산양 미술관 설립자의 딸과 결혼한 후, 해외 유학까지.

그리고 외국과 한국에서 모두 인정받는 작가가 된 김용철.

심지어 미친 교수 이준성까지 겁먹게 만드는 성난 물소.

당연히 김용철은 그림 실력은 물론 수완까지 갖춘 남자였다.

'꼬마 회귀자가 오늘 드디어 진정한 고수를 만난 것인가?'

왠지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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