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8. 비포 선라이즈 □
드디어 건축학기초의 박기용 감독과 면담을 가졌다.
그 자리엔 나와 김제우 감독, 그리고 수진 선배까지 함께 했다.
"어떤 분이신지 정말 궁금했어요. 이렇게 뵙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
수진 선배가 씩씩하게 박기용 감독에게 인사를 건넸다.
"저야말로 영광입니다. 정말 생각도 못했는데······완전 포기하고 있었거든요."
건축학기초의 시나리오가 완성되고 몇 년이나 지난 후였다.
처음 시나리오가 나왔을 때, 몇 곳의 영화사에서 긍정적인 답변을 줬었다.
하지만 연거푸 엎어지고, 이제는 포기하고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 잘나가는 신인 배우와 거물 제작자, 그리고 투자자까지 한꺼번에 등장했다.
"모두 여기 수진씨 덕분이라네, 자네는 정말 수진씨한테 잘 해야 해. 수진씨가 자네 각본을 좋게 보고, 여기 이주원 사장을 설득한 거야."
김제우 감독이 살짝 양념을 얹어 말했다.
이렇게 말해두면 정말 수진 선배한테 도움이 될 것 같아 난 잠자코 있었다.
"아닙니다! 정말 각본이 너무 좋았어요! 전 그냥······"
하지만 수진 선배는 다급히 공을 돌렸다.
그리고 우린 영화에 대해 여러 이야기를 나눴다.
원래 수진 선배가 찾던 영화는 방학에 맞춰 촬영할 수 있는 작품.
하지만 건축학기초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수진 선배의 일정에 맞추기는 힘들 것이다.
"누나, 괜찮겠어요? 이 일정대로라면 누나는 내년에 졸전과 촬영을 병행해야 해요."
"난 괜찮아. 전 괜찮습니다! 이 작품에 출연할 수 있다면 그 정도쯤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수진 선배의 씩씩한 대답에 박기용 감독은 한 번 더 감동한 눈치였다.
그리고 김제우 감독이 내게 물었다.
"자네는 뭐 할 말 없나?"
"저는 딱히요. 감독님이 외부의 의견에 휘둘리지 말고, 마음 편하게 자기 작품을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하하, 이 친구가 모든 감독이 듣고 싶은 말을 하는군."
"아, 하나 덧붙일 게 있습니다."
내 말에 박기용 감독과 김제우 감독은 물론 수진 선배까지 동시에 집중했다.
이것이 투자자의 위엄!
"영화가 자칫 잔잔할 수도 있으니까요, 조연들이 포인트를 줬으면 합니다. 그 남주의 친구 있지 않습니까? 그 친구의 배역을 강조하고, 개그에 비중을 더 주면 어떨까요?"
"오, 그것도 방법이지. 주연들이 못 웃기면 조연들이 웃겨야 해. 맞아, 한국영화는 한 번씩 웃겨줘야 하거든. 이 친구, 영화는 잘 모른다더니 나름 연구를 많이 했군!"
김제우 감독까지 부추기자 박기용 감독도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겠습니다. 그 녀석은 저도 애착이 있는 배역입니다."
"다행이네요. 남주의 친구부터, 어머니, 그 못된 선배까지. 조연배우도 훌륭한 분들로 잘 골라주세요. 제작비는 최대한 힘을 실어드리겠습니다. 이왕 늦어진 만큼, 서두르지 마시고 좋은 영화를 만들어주십시오."
"감사합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렇게 건축학기초의 영화 제작도 본격적으로 착수되었다.
그런데 그렇게 많은 사람과 자금이 필요할 줄은 미처 몰랐다.
자금은 넉넉하다고 호기롭게 선언했는데, 막상 일이 진행되자 조금 쫄리기도 했다.
영화를 제작하지 않았다면 이번에도 아마 건물에 투자했을 것이다.
그래서 건물의 벽돌을 망치로 뜯어 공중에 뿌리는 기분이 살짝 들기도 했다.
어쨌든 이왕 시작했으니 이제는 멈출 순 없다.
다행히 유능한 사람들과 같이 일하게 되어 리스크가 많이 줄었다.
그러니 최대한 좋은 작품이 나오도록 지원하는 것.
그게 내가 할 일이었다.
* * *
시간이 슝슝 지났다.
그리고 드디어 커다란 캐리어를 끌며 공항에 도착했다.
원래는 시간제한 없이 맘껏 돌아다니고 싶었다.
하지만 막상 여행이 다가오니 그게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래서 줄이고 줄여서 한 달.
'한 달도 솔직히 쉽지 않았어.'
목적지도 줄였다.
런던, 함부르크, 빈.
원래의 계획은 유럽 일주였지만, 세 곳만 돌아보기로 했다.
셋 다 오래된 도시로, 도시 자체도 예쁘고 괜찮은 미술관도 많았다.
우린 아무래도 미대생이니까, 미술관에서 오래 걸릴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난관이 있었다.
바로 감시자 한유미.
우린 사귄 지 3년도 넘었다.
그래도 역시 같이 여행을 떠나는 일은, 아무래도 가족에겐 눈치가 보였다.
"유미는 내가 맡을게."
하지만 유나가 나섰다.
그리고 금방 해결했다.
"어떻게?"
"면세점에서 백을 사주기로 했지."
그런 방법이!
첫 도착지는 영국 런던.
겨울의 런던은 춥고 회색이었다.
으슬으슬 찬바람이 불었다.
하지만 상관없다.
아니, 그래서 더 좋았다.
벽돌이 깔린 도시를 산책하다, 추우면 따뜻한 홍차를 마셨다.
추위 덕분인지 홍차가 너무 맛있었다.
그리고 밤엔 유나를 꼭 끌어안고 잤다.
추위 따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우리는 먼저 테이트 모던 미술관에 갈 거야. 그리고 다음은 테이트 브리튼 갤러리."
테이트 모던 미술관은 화력 발전소에 세워진 미술관으로, 이름 그대로 현대 미술을 주로 다뤘다.
"테이트 모던은 헨리 테이트가 세운 미술관으로······"
이번 여행의 제안자라서 내가 여행 가이드를 자처했다.
그리고 매일 여행지를 조사하고, 유나를 안내했다.
"너무 그렇게 애쓰지 않아도 괜찮아. 낯선 곳에서 헤매는 것도 여행의 일부잖아."
"아니야, 너한테 최고의 여행을 선물할 거야."
"치이."
유나에게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사실 나는 어떻게든 하루 6시간의 노력을 채워야 한다.
그래서 유나를 위해 애쓰는 척하며, 매일 아침 호텔에서 당당하게 공부를 했다.
'이것이야 말로 6시간도 채우고, 점수도 따는 1석 2조의 노련함!'
내가 회귀를 괜히 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하루 2시간 정도 하이 유나 사이트에 접속해 회사를 살펴보고, 이메일 보고도 받았다.
그렇게 6시간의 노력은 무리 없이 채울 수 있었다.
하지만 나중에 안 사실인데, 미술관 관람도 노력한 시간에 포함되었다.
졸전을 앞둔 미대생의 간절함이 노력상점에 반영된 것 같았다.
그러니 애초에 6시간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작은 문제가 생겼다.
'문제는 바로 테이트모던 미술관.'
한 달 일정의 첫 번째 도시.
그리고 첫 번째 미술관.
런던만 해도 둘러볼 미술관이 한 둘이 아니었는데, 그 첫 번째에서 막히고 말았다.
하루를 다 보내고도 반의 반도 감상하지 못한 것이다.
"우리 이왕 이렇게 된 거 꼼꼼히 관람하자. 더 많은 곳을 보려고 미술관을 설렁설렁 지나치는 그런 바보짓은 하지 말자."
유나의 의견.
우린 그렇게 테이트 모던에서만 5일을 보냈다.
그런데 다음은 더 가혹했다.
테이트 브리튼 갤러리.
같은 테이트 그룹에서 세운 미술관으로 여기엔 온갖 유럽 화가들의 그림이 걸려 있었다.
테이트 모던이 현대적 아이디어의 집합소라면, 테이트 브리튼 갤러리는 미대생의 천국이었다.
"어떡하지? 나 텐트 가져와서 이곳에서 살 수 있을 것 같아."
"그 옆 텐트에 내가 살고 있을 거야."
이왕 늦어버린 것.
우리는 한 점 한 점 집중해서 그림을 관찰했다.
유나는 윌리엄 터너의 수채화 앞에서 거의 울음을 터뜨렸다.
윌리엄 터너는 18세기 영국 수채화가로 현대에도 여전히 위대한 화가로 추앙받는다.
"이제까지 대체 내가 뭘 그린 거지?"
스물다섯 살 유나.
유나는 거의 인생의 절반을 수채화를 그려왔다.
나 역시 입시 미술을 치렀고.
하지만 우리의 수채화는 대가의 그림 앞에서 한없이 초라해졌다.
"와서 보길 정말 잘했다."
가끔 압도적인 패배는 오히려 영혼을 맑게 해주고, 삶의 의욕을 고취시켜주는 것 같다.
그렇게 일주일 동안 테이트 브리튼을 감상했다.
보고 또 보고 느긋하게 성에 찰 때까지 관람했다.
그리고 늦은 오후엔 회색의 템즈강과 그 주위를 산책했고, 일찍 해가 지면 유나랑 꼭 안고 잠들었다.
이보다 더 완벽할 순 없었다.
그리고 세 번째 시련.
바로 내셔널 갤러리.
우린 한 달 여행 중 거의 2주를 런던의 미술관 두 곳에서 보내 버렸다.
"주원아. 내셔널 갤러리는 가볍게 보고 다음 도시로 넘어가자."
"그래. 함부르크도 정말 아름다운 곳이래."
하지만 내셔널 갤러리는 미술관의 끝판왕, 대마왕 같은 곳이었다.
고흐, 세잔, 쇠라, 모네, 렘브란트, 카라바조, 보티첼리······
책에서 보던 그림들이 정말 실존했다.
그게 다가 아니었다.
유명한 화가들이란 수업시간에 조금 많이 언급되었을 뿐.
갤러리의 모든 작품들이 모두 똑같이 훌륭한 작품들이었다.
결국 정신을 차려보니 한 달 여행 중 24일을 런던에서만 지내고 말았다.
그런데도 아직 우리는 런던의 미술관 중에 절반도 보지 못한 것이다.
"으앙, 이상해. 24일을 완벽하게 보낸 것 같은데, 뭔가 패배한 기분이야."
유나가 허탈해하며 외쳤다.
"다음에 다시 런던에 오자. 억지로라도 떠나지 않으면 영영 못 떠날 것 같아."
그렇게 은근슬쩍 '다음'을 기약하는 노련한 회귀자.
그래도 명색이 유럽 여행이니까 런던은 떠나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런던 여행이 되고 만다.
결국 함부르크는 패스하고, 곧바로 오스트리아로 갔다.
오스트리아에는 유나가 먹고 싶어하던 빵도 있었고, 유나가 좋아하는 영화 '비포 선라이즈'의 촬영지도 있었다.
"이제야 진짜 유럽에 온 것 같아."
오스트리아에 도착해서 마차 투어도 하고, 소시지도 먹고 맥주도 마셨다.
벨베데레 궁전에서 클림트의 그림도 관람했다.
사실 클림트는 미대생들이 자주 접하는 화가는 아니었다.
미대생들은 미술사의 흐름에 따라 그림을 배우는데, 클림트는 혼자 미술사에서 동떨어져 있었다.
평론가들보다는 일반인들에게 사랑받는 화가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예쁘다. 그리고 너무 좋다."
유나는 넋을 놓고 클림트를 바라봤다.
"정말 비평가들은 언제나 쓸데없는 말만 하는 것 같아. 그림은 그냥 그림인데."
비평가들은 하나의 그림이 존재해야 하는 긴 이유를 만들어 논문을 쓴다.
하지만 그런 이유들 전에 그림은 이미 스스로 존재하고 있다.
물론 나야 대학생일 뿐이니까, 그 사람들보다 내가 더 많이 아는 것은 아니다.
어쨌거나.
오스트리아에서도 그림 몇 점, 건물 몇 개 돌아봤더니 어느새 한 달이 끝나고 있었다.
그리고 우린 영화 비포 선라이즈에 나왔다는 대관람차에 탑승했다.
관람차 안에서 식사를 할 수 있는 곳이었다.
오스트리아에서 마지막 저녁.
관람차는 느릿느릿 하늘로 치솟고, 우리 앞에는 맛있는 음식들이 차려져 있었다.
유나가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있잖아, 나 런던에 있을 땐 음식에 별로 불만이 없었거든. 그런데 비엔나에 와보니까 사람들이 왜 그렇게 영국 음식을 욕하는지 알 것 같아."
"나도. 난 영국에서 조식 먹을 때마다, 그냥 여기다 고추장 넣고 끓이면 맛있는 부대찌개가 될 텐데, 생각했었어."
"부대찌개 먹고 싶다. 서울 가면 곧바로 끓여먹자."
우린 와인 잔을 들어 건배했다.
"있잖아, 유나야."
"응?"
"넌 기차에서 처음 보는 사람이 같이 내리자고 하면 따라 내릴 수 있어?"
영화 비포 선라이즈는 그렇게 시작한다.
처음 만난 남자를 따라 내리는 줄리 델피.
"글쎄, 정말 반했다면 가능하지 않을까?"
반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일까.
"그럼 유나야. 만약 내리자고 하는 사람이 나였다면?"
"아마 힘들었을 거야. 너는 그냥 정으로 사귀는 거니까."
유나가 얄밉게 대답했다.
그래, 유나야.
그렇게 말하는 게 너의 자존심에 도움이 된다면야.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지만, 회귀자는 꿈틀하지 않는다.
이미 나는 유나와 한 달 째 여행 중이었다.
그게 중요했다.
유나는 자존심을 챙기고, 나는 한 달 동안의 포근한 밤을 챙겼다.
"그런데 유나야."
"응?"
"만약에 말이야. 내가 한국대에 떨어졌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무슨 말이야?"
"내가 한국대 서양화과에 시험 치는 것은 누가 봐도 모험이었거든. 떨어지는 게 더 당연한 상황이었어. 그땐 별 생각이 없었는데, 요즘은 자주 이런 생각을 해. 내가 한국대에 떨어졌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넌 어땠을 것 같아? 만약 내가 없었으면?"
"음······"
사실 요즘에 들어서만 자주 하는 생각은 아니었다.
나는 늘 생각해왔다.
전생에, 내가 한국대 생이 아니었을 때, 유나는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누구랑 사귀고, 어떤 삶을 살았을까?
유나는 와인을 머금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창밖의 비엔나를 바라보며 천천히 말했다.
"음······생각하기 싫어진다. 네가 없었으면······지금보다 덜 풍족했을 테고, 덜 유명했을 테고, 덜 재미있었을 거야."
"그랬겠지."
"그리고 지금처럼 완벽하게 행복하다는 느낌은 절대 들지 않았을 거야."
어라?
뜻밖의 대답.
이 정도 대답은 유나로서는 특급 솔직함이었다.
그리고 유나는 다시 이야기했다.
"아마 네가 한국대 생이 아니었더라도 우리 어디선가 만나지 않았을까? 그림 관련 일을 하다가, 아니면 동대문에서. 아니면 버스나 전철에서도. 그랬을 것 같아. 우린 어떻게든 엮이게 되지 않았을까? 아까 내가 했던 말 조금 고칠게. 만약 네가 기차에서 내리자고 했으면 내렸을 것 같아. 한눈에 반하진 않았더라도 널 알아보긴 했을 거야."
와인 덕분인지, 비엔나의 야경 덕분인지.
오늘은 유나가 조금 선심을 썼다.
이번엔 내가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런데 버스에서 너랑 마주쳤어도 내가 같이 내리자고 못했을 거야. 넌 나한테 과분하게 예쁘니까."
"알긴 아는 구나."
"그리고 난 아마 너에 대해서 잊고 지냈을 거야. 그냥 버스에서 잠시 봤던 아주 예뻤던 사람 정도겠지. 그러다 죽는 순간에 이렇게 생각했을 거야. 다시 태어난다면, 다시는 같은 실수를 하지 않을 거라고. 다음엔 절대 소중한 것들을 지나치는 바보가 되지 않겠다고······"
내 말을 듣고 유나가 깔깔 대며 웃었다.
"그게 뭐야. 바보야. 너 뭔가 근사한 말을 하려다가 말이 꼬인 거지? 갑자기 왜 횡설수설을 하는 거야? 설마 와인에 취했어?"
이런.
유나가 너무 신나게 웃어대서 이번에는 뻔뻔한 회귀자도 조금 무안했다.
나는 유나에게 빵 접시를 밀며 말했다.
"빵이나 먹어. 네가 먹고 싶어하던 오스트리아 빵이다."
오스트리아의 빵은 정말 고소하고 맛있었다.
담백한 크루아상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