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4. 꿀팁 □
유나의 응원과 동의도 받았다.
시나리오를 여러 번 읽으면서 확신도 가졌고.
그래서 다음으론 수진 선배를 만나 이야기를 나눠봤다.
"누나. 김제우 감독님이 누나랑 이야기를 해보래요. 누나가 들어오는 영화를 다 거절하고 있다고. 혹시 찍고 싶은 영화가 따로 있는 거예요?"
수진 선배는 한숨을 쉬더니 그 영화에 대해 실토했다.
"나도 김제우 감독님한테 들었어. 그 영화가 제작될 리는 없다고. 그런데······진짜 괜히 읽었나봐. 자꾸 그 시나리오랑 비교하게 되고, 다른 영화는 전부 딱히 끌리지가 않아."
"그렇군요. 실은 김제우 감독님이 누나 걱정 하길래, 나도 그 시나리오 읽어봤어요. 그런데 대체 어떤 점이 그렇게 끌렸던 거예요?"
"글쎄, 그게 말로 하긴 힘들어. 뭐라 해야 하나, 주위에 흔히 있는 일이니까. 내 이야기 같고, 내가 잘 할 수 있을 것 같고······음. 모르겠다."
"하긴. 세상에 말로 설명되지 않는 게 더 많죠. 그래서 우리가 그림을 배우는 거고요."
"맞아!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어떤 부분이 나랑 그 영화 사이에 있는 것 같아. 내가 누구보다 그 배역을 잘 소화할 수 있을 거야. 하지만 그래도······"
수진 선배는 시무룩하게 이야기했다.
"김제우 감독님이 너까지 보내서 설득하라고 했으니까 다른 영화를 찾아봐야겠지. 나도 언제까지 미룰 순 없고. 원래는 겨울 방학에 촬영 시작하고 내년 여름부터는 학교에 집중할 생각이었는데······너무 늦어졌다."
내가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누나. 만약에 내가 그 영화 제작되게 도와주면요?"
"응?"
수진 선배는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응? 뭐라고?"
"내가 한 번 그 영화 제작되게 해볼게요."
"너, 그런 것도 할 줄 알아? 영화를 제작되게 한다고? 어떻게?"
어떻게?
물론 돈으로.
세상에 돈으로 되지 않는 일은 없지.
"일단 제가 김제우 감독님이랑 이야기를 해볼게요."
내 말을 듣고 수진 선배가 감동한 표정을 지었다.
"주, 주원아. 날 위해서 이렇게까지! 고마워! 정말 고마워!"
굳이 수진 선배를 위해서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대박을 이미 알고 있는 영화의 시나리오가 굴러다니는 것을 보게 된다면?
게다가 통장에는 처분을 기다리는 현금이 수십 억 쌓여있다면?
내 상황에 처한 회귀자라면 누구나 시도는 해 볼 것이다.
하지만 그걸 굳이 지금 상황에서 설명할 필요는 없지.
난 은근 생색내는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아니에요, 누나. 친구끼리는 도와야죠. 누나랑 정화 누나가 도와주지 않았으면 지금 하이 유나도 없을 텐데요. 나도 그 영화가 누나랑 잘 맞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이대로 묻히기도 아깝고요."
"주원아, 나 정말 열심히 할게! 최선을 다할게!"
"그래요. 누나. 누나를 믿어 볼게요. 그리고 일단 감독님이랑 이야기를 해 봐야 해요"
그리고 오후.
조별과제를 위해 학교카페에서 김태민과 만났다.
그런데 김태민의 표정이 진지했다.
"주원아."
"응?"
"누나한테 이야기 들었어. 정말 고마워. 그 영화 찍고 싶어서 누나가 정말 한동안 끙끙 앓았거든. 그런데 네가 도와주기로 했다며? 우릴 위해 이렇게까지 애써줄 줄은 몰랐어."
음.
내가 나쁜 의도가 있었던 전혀 아닌데, 순진한 두 사람이 이렇게 고마워하니까 사기를 치는 기분이 들었다.
"아니야. 수진 누나가 좋은 영화를 찾아와서 그런 거지. 누나가 은근 안목이 있는 것 같아."
하지만 김태민은 여전히 감동한 표정을 풀지 않았다.
나는 원활한 조별과제를 위해서도 김태민의 감동을 약간은 깨뜨려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태민아. 그런데 너는 불안하지 않아?"
"뭐가?"
"수진 누나는 벌써 유명하고 인기도 많고. 이제 졸업하고 본격적으로 일하게 되면 지금보다 더 유명해질 텐데."
"불안하지. 그런데 영화를 찍어서 불안한 건 아니고. 누나는 원래부터 너무 착하고 예쁜 사람이니까. 나한테는 과분한 사람이라서 예전부터 불안했어."
딱히 과분한 건 잘 모르겠다.
내게는 그저 서로에게 딱인 것 같은데.
과분하다는 표현은 나와 유나에게 더 잘 어울린다.
'그나저나 김태민과 나는 둘 다 여자 친구가 자기에게 과분하다고 생각하는 구나. 우리 친구 맞네.'
그리고 김태민은 말을 이었다.
"사실 내가 교직을 이수하는 것도 불안해서 그런 거야. 나도 누나한테 맞춰, 최선을 다해야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뭐든 다 할 생각이야."
김태민도 충분히 강한 것 같다.
어떤 사람들은 불안에 무너지는데, 김태민은 오히려 불안을 자신을 성장시키는 에너지로 사용했다.
멋있는 녀석.
하지만 멋있는 사람을 보면 괴롭히고 싶은 것이 회귀자의 심리.
나는 툭 지나가는 말처럼 던졌다.
"그런데 괜찮아? 이번 영화 키스신도 있던데."
커억.
방금까지 의젓하게 대답했던 김태민.
그러나 이번엔 가슴에 손을 얹고 호흡곤란을 겪었다.
'그냥 받아들여라, 친구. 영화배우랑 사귀는 남자의 운명인 것을! 수진 선배에게 맞춰 최선을 다하겠다고 하지 않았는가?'
하지만 너무 괴로워하길래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병을 줬으면 약도 주는 것이 회귀자의 도리.
"태민아. 앞으로 수진 누나가 바빠질 때를 대비해서 내가 꿀팁을 전수해줄게."
"꿀팁?"
"응. 앞으로 수진 선배는 더 바빠질테고, 피곤해질 거야. 널 만날 시간도 줄어들겠지."
"그, 그렇겠지."
"그때를 위해 내가 꿀팁을 전수해줄게."
나는 김태민을 향해 가까이 오라는 손짓을 보냈다.
그리고 소곤소곤 조용히 속삭였다.
"그럴 땐 발마사지를 해줘. 피곤할 땐 발마사지가 최고야. 피로도 풀리고, 두 사람의 감정적 유대도 깊어질 거야."
"바, 발마사지? 꼭, 꼭 해볼게."
김태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각오에 찬 표정을 지었다.
"그래. 나만 믿어. 절대 후회하지 않을 거야."
나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김태민의 어깨를 두드려줬다.
두 번의 인생을 겪으며 깨달은 최고의 지식.
발의 위대함을 세상에 널리 전파하리라.
* * *
김태민과 나는 입체 하나, 그림 하나를 그리기로 결정했다.
우린 입체에는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자신 없다고 영영 피할 수는 없는 노릇.
원래 과제를 하면서 배우는 것이 미술 수업의 목적이다.
그러니 매번 새로운 도전을 하는 것의 미대생의 의무다.
그동안 너무 그림만 그리며 안일하게 살았는 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입체 기법이나 재료에 대해 잘 모르니까, 조금 작게 만들어보는 건 어떨까?"
"동의해. 작게 만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선택의 폭이 넓어질 거야."
우린 지난 번 과제에서 유나, 수진 조가 만들었던 '조소과 살펴보기' 책을 뒤적였다.
정말 미대생한테 무척이나 유용한 책이었다.
"고양이가 인형 같은 느낌이 있잖아. 그리고 식물이랑 합성하는 것도 장식적인 부분이 있을 거고. 그러니까 아예 피규어를 만들면 어떨까?"
피규어는 흔히 장난감이나 장식품으로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피규어도 예술 작품이 될 수 있다.
사실 피규어 뿐만 아니라, 거의 세상의 모든 것들이 제대로 우길 수만 있다면, 전부 예술 작품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피규어 만들기는 고난이도의 작업!
그리고 크기가 작아진만큼 디테일을 살려야 한다.
우리가 만들고 싶다고 당장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모르는 건 누나랑 유나한테 물어보면서 진행하면 되지!"
유나, 수진 두 사람은 부전공으로 2학년 때부터 착실하게 조소과 수업을 들었다.
과제를 핑계로 짧은 시간도 활용해 데이트를 하고 싶은 김태민이 음흉한 속내를 감추고 외쳤다.
"그래! 우리 넷이 같이 모여서 과제를 하자!"
역시 마찬가지 속내를 가진 나도 격하게 동의했다.
그렇게 우리 네 사람은 함께 모여 과제를 했다.
장소는 가장 넓은 유나의 집.
"우리도 입체와 그림을 같이 하기로 했어. 우린 옷이 꽃과 비슷한 점이 있다고 생각했거든. 그래서 옷과 가방을 오려서 입체를 만들기로 했어. 그걸 다시 그림으로 옮기고."
아마 대한민국에서 제일 옷이 많은 사람이 한유나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유나에게 옷을 오려 입체를 만든다는 발상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그리고 김태민과 나는 모르는 것들은 유나, 수진에게 물어가며 고양이 피규어를 만들었다.
먼저 철사와 아이소핑크로 뼈대를 만들고.
그 위에 스컬피와 에폭시 퍼티를 이용해 뼈대를 덮었다.
모양이 완성되면 색도 입히고 피규어를 완성하면 된다.
김태민이 고양이 인형을 만들고, 내가 배경과 받침대를 만들기로 했다.
그리고 피규어가 완성되면, 그림은 각자 한 점씩 그리기로 했다.
"우리 이렇게 같이 모여서 작업하니까 1학년 때 생각난다."
열심히 작품을 만들던 유나가 중얼거렸다.
1학년 땐 요령이 없어서 과제가 내려지면 무조건 밤샘을 했다.
밤이 되면 야식도 시켜 먹고, 술도 한 잔 하며 게임도 했다.
도란도란 취기에 이야기를 나누다 여기저기서 커플도 탄생했고.
몸은 힘들었지만, 그때가 참 즐거웠다.
"출출한데 야식 배달시킬까?"
"찬성! 나는 소주도!"
그렇게 보쌈과 소주로 술판이 벌어질 무렵, 도서관에서 공부하던 유미도 집에 도착했다.
밤 늦게 공부하느라 피곤에 지친 유미.
유미는 보쌈과 소주를 보자마자 크게 외쳤다.
"으앙! 나도 미대 갈 걸! 미대생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해 보여!"
"오고 싶다고 아무나 올 수 있는 게 아니란다."
그렇게 여러 날을 정신없이 보냈다.
오전엔 학교에서 수업을 듣고, 오후엔 출근해서 일을 하고, 저녁엔 유나의 집에 모여 같이 과제를 했다.
밤에 유미가 도착하면 야식을 주문하고 다섯이서 술판을 벌였다.
일과 예술. 학업과 연애.
모든 것이 하나로 어우러진 바람직한 미대 라이프라 할 수 있었다.
* * *
"초보들은 과제가 내려지면 무조건 달려들지. 하지만 난 임진만이다. 난 먼저 식물을 관찰했다. 긴 사유에 잠겼지. 그리고 깨달았어. 내가 낸 과제긴 하지만, 정말 잘 낸 과제라고. 식물들은 하나같이 모양이 다르고, 아름답고, 또 신비롭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
임진만이 자뻑에 취해서 이야기했다.
하우영은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
"맞습니다. 세상의 모든 식물들이 전부 조형적으로 완성된 각각의 예술 작품 같아요."
"그래. 그래서 난 이 식물들을 어떻게든 멋진 작품으로 옮겨야 한다는 조각가의 사명도 느꼈다."
조각가의 사명이라······
할 말은 많지만, 하우영은 입을 다물었다.
하우영도 이제 임진만을 대하는 요령이 생겼다.
일단 섣불리 의견을 내지 않을 것.
의견을 내봤자 임진만은 항상 자기 마음대로 한다.
둘째 말을 조심할 것.
임진만은 맘에 안들면 습관적으로 하우영의 뒤통수를 때린다.
"그래서 형, 이번에도 좋은 아이디어가 있으신가요?"
"우영아, 식물의 본질이 뭐라고 생각하니?"
"본질이요? 글쎄요? 형은요?"
"여러 가지가 있겠지. 하지만 나는 그 중 최고는 바로 색이라고 생각한다."
"색이요?"
"식물은 곧 녹색이야. 식물은 빛을 받아 살아가고, 그 빛을 위해 녹색이 필요하지. 녹색은 곧 식물의 생명이다. 그리고!"
"그리고요?"
"그 녹색들 사이에서 돋보이기 위해 화려한 꽃을 피우지. 꽃의 색이 화려하다는 것은 식물들 스스로 인정하는 거야. 자기들의 본질이 녹색이라는 것을. 결국 식물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색이다!"
음.
뭔가 그럴 듯해 보이긴 했다.
"그래서 형은 식물의 색을 어떻게 작품으로 표현할 생각이십니까?"
"난 이제 깨달았다. 평범한 생각으로는 놈들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그래서 반대로 할 생각이다."
"반대로요?"
"식물에서 녹색을 제거해버리는 것이다. 그럼 흰색이 남겠지. 입체로 만들어진 새하얀 식물. 상상해 봐. 얼마나 낯설고 이질적이겠어? 그 작품에서 느껴지는 충격이 곧 식물에 있어서 녹색의 중요함을 말해주겠지. 하지만 그것으론 부족해."
"또 뭘 하실 건가요?"
"흰색 식물의 입체를 만든 후에는 원래의 그 식물이 가지고 있던 색으로 다른 사물을 그리는 거야. 예를 들어 진달래가 있다고 생각해보자. 흰색 진달래를 입체로 만들고, 진달래의 분홍색을 추출해서 분홍색 무언가를 그리는 거지."
"그런데 이번 과제는 같은 대상을 두 매체로 표현하는 거였잖아요?"
"그러니까. 얼핏 보면 다른 두 개의 사물을 그린 것으로 보이겠지. 하지만 같은 진달래에서 추출한 색으로 그린 거니까, 결국 우린 같은 대상을 표현하는 거지. 어떠냐? 반전의 반전 아니냐? 서양화과 놈들이 이렇게 꼬는 걸 좋아하더군. 놈들의 방식으로 이겨주겠다. 후후후."
뭔가 알쏭달쏭하면서도 꽤 그럴 듯한 느낌.
역시 임진만은 나름 실력파였다.
"좋습니다. 형. 해볼 만 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뭐냐?"
"식물을 어떻게 입체로 만드실 건가요? 식물의 잎은 얇고, 꽃은 모양이 복잡해서 입체로 만들기가 쉽지 않을 텐데요. 특히나 흰색만 남은 상황이라면 형태를 더 신경 써야 할 겁니다."
"우영이 너도 제법 머리가 돌아가는 구나. 나를 따라다니더니 꽤 늘었군."
음······
하우영은 이번에도 할 말은 많지만 입을 다물었다.
"폴리로 뜰 거다."
"폴리요?"
폴리란 폴리코트를 말했다.
일종의 가루로 만들어진 플라스틱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사용법은 석고랑 비슷하다.
하지만 석고상은 깨지기도 쉽고 보관도 어렵다.
석고상은 습기도 잘 먹어서 자칫하면 곰팡이가 필 수도 있다.
하지만 폴리코트 작품은 깨지지도 않고, 보관도 쉽고, 무게도 가볍다.
여러모로 편리한 소재.
식물을 입체로 만들기에도 적합한 소재였다.
"좋습니다. 생각보다 일이 많겠군요. 이번에도 부지런히 움직여야 겠습니다."
"그래, 우영아. 이번이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최선을 다하자."
둘은 뜨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작은 문제가 있었다.
폴리코트.
그것은 발암물질이었다.
그래서 만들 때도 방독면을 착용해야 했고, 피부에 닿지 않도록 조심해야 했다.
심지어 작품이 완성된 후에도 몇 년간 지속적으로 독성을 내뿜었다.
그래서 일부 외국의 경우, 사용이 금지된 곳도 있었다.
하지만 근성의 한국 조각가들은 폴리코트를 꾸준히 애용한다.
그리고 근성이라면 임진만도 지지 않는다!
서양화과 양아치 놈들을 꺾기 위해서라면 발암물질 정도는 두렵지 않았다!
"힘내자, 우영아!"
"예! 형!"
이준성의 회화4.
그 결전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서울의 한 편에서는 4명의 미남미녀가 모여 알콩달콩 과제를 하며 매일 맛있는 야식을 시켜 먹었다.
그리고 또 다른 한 편에서는.
쌀쌀한 가을 날씨.
두 명의 건장한 청년이 작업복으로 온몸을 싸매고, 발암물질을 뒤집어쓰며 고생고생 작품을 만들었다.
과연 승자는 누가 될 것인가?
누가 이기든!
젊은 미대생들이 이렇게 열심히 과제를 하는 한, 대한민국 미술계의 앞날은 한없이 눈부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