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력천재 미대생-173화 (173/203)

■ 173. 결국 □

수진 선배가 엉뚱한 시나리오에 꽂혔다고?

김제우 감독이 툴툴대며 말했다.

"정말 공부만 하라고 준 시나리오였어. 그런데 굉장히 마음에 들었나봐. 수진씨가 은근 고집이 있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아무리 그 영화는 안 된다고 해도 다른 영화는 성에 안 차는 눈치야. 내 참. 내가 배우 때문에 이렇게 답답해하는 것도 정말 오랜만일세."

김제우 감독정도 위치면 신인배우에게는 신 같은 존재.

하지만 욕심 없는 수진 선배에게는 먹히지 않나보다.

"어떤 영화길래 그러세요?"

"잠깐 기다려보게."

김제우 감독은 일어나서 잠시 철제 책장을 뒤졌다.

그리곤 낡은 시나리오 한 권을 내게 건넸다.

꽤 오래된 각본인지 표지도 구겨지고, 종이도 누랬다.

'어라?'

그런데 내가 아는 제목이었다.

몇 번이나 말했지만, 나는 유명한 영화만 기억한다.

그런데 이번엔 나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거의 모든 사람들이 알게 되는 제목이었다.

'이 영화가 벌써 시나리오가 나와 있다고? 내가 영화로 본 건 한참 후였는데?'

대략 지금부터 7, 8년 쯤 후?

정확히는 기억이 안 나지만 이 영화는 아주, 아주 나중에 개봉한다.

가끔 그런 영화들이 있다고 듣긴 했다.

임자를 못 만나 영화계를 한참 떠돌다 겨우겨우 아주 운 좋게 영화화 되는 경우.

'그런데 이 영화도 그런 케이스였구나······'

나는 시나리오를 빠르게 넘기면서 내용을 훑어보았다.

내가 아는 그 영화가 맞았다.

기억이 정확하지 않은지, 혹은 대사의 수정이 이뤄졌는지 조금 낯선 부분도 있었다.

하지만 분명 내가 아는 그 영화였다.

영화 문외한인 내가 이렇게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는 말은 이 영화가 대박이란 뜻이었다.

그런데 수진 선배가 이 영화에 꽂혔다고?

게다가 다른 사람들은 모두 이 영화가 안 된다고 말한다고?

왜지?

"그런데 이 시나리오는 왜 영화가 안 되는 거죠?"

"시나리오 작가 탓이야."

"작가 탓이요?"

"어, 감독이 직접 쓴 시나리오야. 그런데 그 감독이 데뷔작을 시원하게 말아먹었거든. 수진씨가 그 영화에 반한 것도 어느 정도는 이해해. 먹먹한 사랑이야기니까. 하지만 영화 외적인 요소도 생각해야지. 세상에 누가 데뷔작을 말아먹은 신인 감독 작품을 선뜻 밀어주겠나?"

그런 사정이······

김제우 감독은 수진선배의 고집이 억울한지 계속 투덜댔다.

"감독 전작이 뭐 길래요?"

"워낙 망해서 자넨 들어도 모를 거야. 심지어 공포영화였어. 장르라도 유사하면 PD들이 머릿속에 그림이라도 그려보지. 공포 찍다 망한 감독이 난데없이 이번엔 멜로를 찍겠다고 하면 대체 누가 투자를 하겠나."

이 감독이 전작은 공포 영화를 찍었구나.

처음 듣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멜로를 오지게 찍어버립니다.'

혹시나 싶어서 물어봤다.

"그런데 그 공포 영화 평가는 어땠나요?"

"좋았다네. 그래서 그게 더 문제야. 흥행은 못 시키는 감독이 평가는 잘 받아 버리면 그때부터 다루기가 힘들어지거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군요."

"그래도 이 각본을 좋게 보고 투자를 하겠다는 회사도 있었다네. 대신 감독은 다른 사람이 맡는 조건이었지. 하지만 다 거절했어. 반드시 자기가 직접 연출해야 한다고."

워낙 흥행한 영화라서 나도 어렴풋이 이 영화의 뒷이야기를 알고 있었다.

첫사랑을 다룬 이 영화는 감독이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라고 했다.

그래서 남에게 맡기기 싫었던 걸까?

김제우 감독은 투덜댔지만, 나는 오히려 더 좋게 보였다.

'예술가는 약간 고집도 있어야지.'

어쩌면 내가 미래의 결과를 알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결과를 모르는 김제우 감독에겐 말이 안 통하는 꼴통 신인 감독으로 보였을 수도 있다.

"그리고 이 시나리오엔 결점이 많이 있다네. 그걸 고치라고 해도 그 친구가 도무지 말을 안 들어."

"어떤 부분이 결점이죠?"

내가 구체적으로 질문하자 김제우 감독은 신나서 대답 했다.

원래 전문가들은 자기의 분야에 대해 질문 받으면 상당히 좋아한다.

"일단 이 영화는 배드 엔딩이야. 멜로는 행복하게 끝나야지. 누가 자기 돈 내고 주인공들이 맺어지지 않는 멜로를 보러 오겠나?"

"그, 그런가요?"

"그리고 배우가 여러 명이야. 남주와 여주의 현재와 어린 시절을 각각 두 명이 번갈아 연기하거든. 배우 입장에서 생각해보게. 자기가 받아야 할 포커스를 다른 배우와 반씩 나눠 갖는데, 선뜻 출연하고 싶겠나? 멜로는 배우 빨이 중요하단 말이야. 그런데 이 영화는 A급은 캐스팅하기가 쉽지 않을 거야."

그렇게 볼 수도 있는 건가?

내 머릿속에 이 영화는 마냥 명작으로 기억되었다.

하지만 제작자의 입장에서는 실패의 공식을 충실히 따르는 영화였다.

"그리고 이 영화는 뒷맛이 개운하지가 않아. 대한민국의 멜로 영화라면 주인공들이 예쁘고 착해야 하는데, 이 영화는 너무 현실적이야. 뭔가 찝찝하단 말일세. 이 영화는 글렀어. 그러니까 몇 년 전에 완성된 시나리오가 아직까지도 굴러다니고 있지."

결국 김제우 감독의 눈에는 이 대박 영화가 잘 쓰인 쓰레기로 보이는 것이었다.

그런데 김제우 감독뿐 아니라 다른 제작자들 눈에도 그렇게 보인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그러고 보니 수진 선배가 대단하네.'

일단 나는 감독이 준 낡은 시나리오를 챙겼다.

"일단 수진 선배하고 이야기를 나눠보겠습니다. 수진 선배를 이렇게 걱정해주시고 챙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야. 수진씨는 내가 데뷔시켰으니 나도 책임감이 있지. 아무튼 자네가 이번에도 잘 해결해주게."

과연 내 해결법이 김제우 감독이 원하는 방향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난 고개를 끄덕이며 파주 영화사를 빠져나왔다.

* * *

사직동 카페 건물은 리모델링 공사에 들어갔다.

현장관리는 김덕진 사장이 알아서 잘 해주고 있었다.

일이 척척 잘 진행되었기 때문에 나는 벌써 새로운 카페 자리도 알아보고 있었다.

다음 후보는 양평이었다.

양평은 이미 전원주택이나 드라이브코스로 각광받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인기는 계속 앞으로도 이어진다.

나는 전생에 봤던 양평의 대형 카페로사를 몇 년 앞당겨 내손으로 지을 생각이다.

쇼핑몰과 화장품은 늘 그랬듯 순조로웠다.

그리고 수진 선배의 영화 일은 일단 내가 꼼꼼히 시나리오를 읽어본 후에 결정할 것이다.

그래서 지금 당장 중요한 것은.

바로 김태민과의 과제였다.

김태민이 진지한 얼굴을 하고, 학교 작업실을 서성였다.

"식물 중 하나를 선택해서 두 가지 매체로 표현하라. 무슨 과제가 이렇게 복잡해."

김태민이 몇 십 분 째 같은 불평을 했다.

일단 식물을 하나 정해야 한다.

그리고 그 식물을 잘 표현할 수 있는 매체 두 개를 선택해야 한다.

그게 다가 아니다.

두 매체 사이의 관련성이나 맥락을 찾아 예술적 의미를 부여해야 했다.

두 개의 별개의 작품이 아니라, 두 작품이 서로에게 필연성을 제공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생각할 게 꽤 많았다.

하지만 나는 노련한 회귀자.

언제나 차근차근 문제를 해결한다.

"일단 식물을 먼저 정하자."

"으응, 그래. 그런데 식물이 너무 많잖아."

"그럼 식물을 분류해보자.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식물. 그리고 머리를 굴려야 겨우 생각나는 식물."

생각할 게 많을 때는 분류와 정리가 언제나 도움이 된다.

3학년 쯤 되니까 확실히 예술적 영감을 떠올리는 일도 체계적이 되었다.

예전엔 무작정 카메라를 들고 거리로 나갔었다.

나는 종이를 꺼내 연필로 식물의 이름을 적었다.

"우리가 흔히 보는 식물들, 꽃과 화분들, 야채와 과일 등등······그리고 우리가 흔히 보지 못하는 식물들은······"

"만지면 움직이는 식물도 있어. 동물을 잡아먹는 꽃도 있고, 사람만큼 큰 꽃도 있어. 꽃에서 지독한 냄새가 나서 시체꽃이라고도 부른데."

김태민이 노트북을 검색하며 여러 식물 사진들을 찾았다.

확실히 둘이 같이 앉아서 이야기하고, 검색하니 생각들이 많이 정리되었다.

"그럼 이젠 우리가 표현할 수 있는 식물의 특징들을 이야기해보자. 먼저 특징들을 찾아내고, 그 중 가장 매력적인 특징에 초점을 맞추면, 우리가 어떤 작품을 해야 하는지 범위를 줄일 수 있을 거야."

"그래."

회귀자의 능숙한 리드.

거기에 잘 따라오는 그림천재.

임진만, 기다려라.

이런 고약한 과제를 가져오다니.

원래도 따끔하게 혼내줄 생각이었지만, 이번엔 절대 용서가 불가능하다.

"일단 식물은 조용해. 소리가 나지 않아. 소리가 날 때가 있었나?"

"바람 불 때?"

"식물은 수동적이구나. 식물은 녹색이야. 녹색은 여름이고, 여름은 무력하고, 우울하고, 죽음이 있고······"

하지만 같은 단어가 사람에 따라 다른 의미를 지닐 수도 있었다.

김태민은 곧바로 나와 반대의 의견을 내어놓았다.

"여름은 젊어. 생명이 가득 찼고. 곤충들이 숨어 있지."

브레인스토밍처럼 우린 우리가 떠오르는 이미지들을 바로바로 기록했다.

그리고 생각의 폭풍이 지난 후, 우리가 적은 것들을 같이 읽어보았다.

"그런데 뭔가 묘하네."

"나도 그래. 뭔지 설명은 못하겠는데 이상하게 익숙한 기분이 든다."

내 말에 김태민이 동의했다.

조용하고, 움직이지 않고, 색이 화려하지만 때론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나를 응시하고, 언제나 인간 주위에 있고······

가만있어보자, 이것은?

"태민아, 너도 나랑 같은 생각해?"

"아마도 비슷한 생각?"

내 머리에 떠오른 것은 고양이였다.

조용하고, 움직이지 않고, 언제나 인간 주위에 있고······

물론 고양이는 움직인다.

밥도 먹고 소리도 낸다.

고양이와 식물의 특성은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다.

하지만 내 머릿속엔 어떤 유사성이 떠올랐다.

고양이에겐 식물과 닮은 어떤 은밀함이 있었다.

어쩌면 고양이가 식물들 사이에 잘 숨어서 지내도록 진화했는지도 모른다.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식물을 고양이화 시키면 어떨까? 아니면 고양이를 식물화 시키는 거야. 둘의 모양을 합성해도 되고, 아니면 의미적 유사성을 발견해도 될 거야."

내 말에 김태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은 것 같아. 고양이를 식물이라고 우기자!"

"조형성 면에서도 훨씬 재미있을 것 같아. 식물을 단순히 재현하는 것보다, 고양이를 닮은 식물을 새로 창조해보자."

나는 김태민이 항상 고양이만 그리는 것에는 제일 반대하는 1인이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자유롭게 해석하는 고양이라면 언제든 찬성이다.

"그래, 그럼 우리의 방향은 고양이화된 식물로 하자. 일단 각자 이미지를 수집하고 러프 스케치를 제작한 후에, 어떤 매체로 완성할 것인지 다시 이야기해보자."

"그래!"

일단 멈췄던 작품 구상이 1보 전진했다.

심각했던 김태민의 얼굴도 한결 밝아졌다.

* * *

그리고 나는 유나와 이야기를 나눴다.

나는 수진 선배의 일로 영화사를 방문한 일을 유나에게 말해줬다.

"김제우 감독이 무심코 건넨 시나리오에 수진 누나가 꽂혔나봐. 아무리 제작될 예정이 없다고 해도, 계속 물어본대. 그리고 비슷한 영화가 예정된 건 없는지도 물어보고, 그 감독의 다른 계획이 없는지도 계속 물어본대."

"언니가 확실히 그런 면이 있지. 무슨 일이든 한 번 생각이 꽂히면······"

평소엔 느슨한 성격의 수진 선배.

하지만 그런 성향은 계속 감지되어 왔다.

일단 그 어렵다는 한국대 서양화과에 입학한 것도, 한 번 꽂히면 달려드는 성격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심지어 그렇게 힘들게 입학해 놓고, 피시방 게임에 꽂혀서 1학년 성적을 날려먹기도 했다.

"그런데 그 시나리오 나도 마음에 들더라고. 여러 번 읽어봤는데 정말 괜찮았어. 하지만 김제우 감독은 실패할 영화래."

나는 유나에게 김제우 감독이 말해준 실패 요인들을 자세히 들려줬다.

"그런데 내가 본격적으로 개입하게 되면, 어쩌면 우리의 재산이 투입될 지도 모르니까······"

그러자 유나가 웃으며 대답했다.

"주원아. 난 괜찮아. 우리 자산관리는 전적으로 너한테 맡길게. 이제까지도 너무 잘 해 왔잖아. 네가 너무 바빠져서 잠을 못 자거나, 학교를 빼먹거나 그러지만 않으면 난 상관없어."

"진짜?"

"응, 우리 공동 재산을 다 날려도 상관없어."

"정말?"

"응. 그런데 다 날리진 않을 거지?"

물론 그러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의 자산은 철저히 안전하게 관리되고 있었다.

하지만 빈말이라도 유나가 그렇게 말해주자 무척 고맙고 든든했다.

유나가 덧붙였다.

"그리고 김제우 감독의 말, 조금 나쁜 것 같아. 한 번 실패했다고 다시 기회를 안 준다니. 누구나 한 번은 실패할 수 있잖아. 두 번 째는 그래서 더 잘할 수도 있고. 한 번 더 기회를 줘야 한다고 생각해."

"그래."

마치 나처럼.

한 번 실패한 사람들이 전부 기회를 뺏긴다면, 나 역시 이번 생이 없었을 것이다.

난 언제나 모르는 일에는 조심스러웠다.

하지만 유나의 마지막 격려가 마치 운명처럼 들렸다.

'그럼 이번에도 한 번 일을 벌려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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