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력천재 미대생-136화 (136/203)

■ 136. 밤송이 □

아직 영 아트가 방송되는 도중.

이미연이 이형원의 존재에 대해 까맣게 잊고 있을 때였다.

이미연은 와인과 꽃을 들고 김용철의 집에 도착했다.

이미연은 벌써 몇 번 이 곳에 와 본 적이 있었다.

'여긴 항상 수수하고 소박해. 집주인인 용철 아저씨의 성격을 닮았어.'

김용철은 건물 하나를 통째로 집으로 쓰고 있었다.

아직 대학생인 김태민조차 한 층 전부를 자기 방 겸 작업실로 쓸 정도였다.

물론 김용철은 자기 작업실 건물은 따로 가지고 있었다.

띵동.

"어서 오게."

"오랜만이에요. 어서 들어와요."

문이 열리고 김용철과 그의 아내이자 산양 미술관 관장인 최혜선이 이미연을 맞이했다.

최혜선과 가사도우미가 부지런히 식탁을 차리고 있었다.

야옹.

김태민의 고양이들도 이미연을 경계하지 않고 다가와서 머리를 내밀었다.

"아저씨, 태민이는요?"

"어, 친구들 만나러 나갔어. 요즘 걔 얼굴 보기 힘들어."

"뭐야. 자기가 불러놓고 자긴 없어요?"

"아니야. 오늘 자네를 초대한 건 우리 부부야. 그리고 태민이는 이제 곧 입대잖아. 그러니 우리가 이해해야지."

뭐, 하긴.

이미연도 김태민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김태민이라면 이렇게 미리 준비된 자리는 지루해 했을 것이다.

지루하게 억지로 앉혀두는 것보다는 다음에 따로 보는 게 차라리 나을 것이다.

"자, 이제 밥을 먹자고."

식탁에 차려진 메뉴는 강된장과 찐 호박잎.

그리고 쌈채소들과 돼지고기 수육과 여러 종류의 나물들.

소박하고 정갈한 메뉴였다.

"입에 맞을지 모르겠어요."

"너무 좋아요. 외국에 오래 있다 와서 저는 한국식 집밥이 너무 그리웠어요."

"다행이네요."

"나도 마찬가지야. 한국을 떠나고 이틀만 지나도 벌써 집사람 된장찌개가 생각나지. 당신이 너무 바빠서 데리고 다닐 수 없는 게 얼마나 안타까운지 몰라."

"이 사람이 이렇다니까. 아내를 된장찌개 끓이는 사람으로 알고 있어요."

"마침 미연이가 좋은 와인을 가져왔군. 강된장이랑 와인이랑 돼지고기가 정말 잘 어울려. 사람들은 이 맛을 모르지."

화기애애한 식사였다.

진심으로 저녁을 즐기던 이미연은 김태민에 대해 물었다.

"그나저나 태민이는 어때요? 학교는 잘 다녀요? 미국에서 지낼 땐 학교를 너무 자주 빠져서 제가 애먹었거든요."

그 말에 김용철은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흐뭇한 시선으로 최혜선과 눈을 맞췄다.

이미연의 질문에 최혜선이 먼저 대답했다.

"태민이는 잘 지내요. 오히려 너무 잘 지내서 걱정이지."

"아들이라는 게 그런 것 같아. 집에만 있으면 오히려 불안해. 아들은 눈에 안 보여야 도로 안심이 되는 존재야. 그리고 태민이는 며칠에 한 번씩 불쑥 나타나서 우리를 웃기고 사라져."

"어떻게 웃기는데요?"

김용철과 최혜선은 김태민 생각만 해도 벌써 웃긴 모양이었다.

"한번은 나한테 케이크 만드는 법을 배워갔어요. 어찌나 요란을 떠는 지. 하루 종일 부엌을 전쟁터로 만들고는 케이크만 들고 사라졌어요. 결국 아주머니랑 내가 주방을 다 치웠죠."

"걔 여자 친구 생긴 거 맞지? 그날 그래서 내가 샴페인을 같이 들려 보냈는데."

"맞는 것 같아요. 케이크 장식에 그렇게 신경 쓰는 거 보면. 그런데 그림을 완전 헛배웠다니까. 누가 봐도 엉망인 케이크를 보고 혼자 뿌듯해하더라고요."

부부의 아들 자랑에 이미연도 같이 웃었다.

유명 화가에 미술관 관장이라도 아들 자랑은 다 똑같은 모양이었다.

"좋네요. 역시 화가는 사랑을 많이 해야 해요. 그래야 좋은 그림이 나오죠. 태민이는 잘하고 있네요."

"그런 것 같아."

그리고 김용철이 조금 차분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며칠 전에는 말이야. 영 아트 마지막 촬영이 끝난 직후였을 거야. 태민이가 나보고 소주 한 잔을 하자더군."

"태민이가요?"

"응. 그리고 부대찌개도 끓여 왔었어. 맛은 별로였는데. 그래도 좋았어. 옛날 생각나더군. 나도 학생 때 친구들 자취방에서 부대찌개 끓여서 소주 마시고 그랬거든. 찌개도 아니었지. 라면에 김치 넣고, 스팸 넣고 그냥 끓였지. 그때는 스팸도 귀했어. 우린 모두 가난한 화가 지망생이었지."

"와아. 아저씨랑 태민이랑 둘이서 소주 한 잔 하신 거예요? 아주머니 섭섭하셨겠다."

"그렇지도 않아요. 처음엔 조금 섭섭했는데. 나중에 두 사람 취해서 했던 말 또 하고, 또 하고. 술주정하는 거 옆에서 보니까, 내가 끼지 않은 게 정말 다행이다 싶더라고요. 얼마나 웃겼는데. 새벽까지 대체 몇 병을 마신 거예요?"

부부의 아들 자랑은 끝도 없었다.

"그게 말이야. 정말 신기하더군. 난 그다음 날, 머리가 아파서 죽는 줄 알았거든. 그런데 태민이는 또 아침부터 친구들 만나러 나갔어. 이제 태민이가 나보다 술이 쎄 진거야. 그 녀석이 벌써 이렇게 자랐어."

"참, 별걸 다 자랑하시네요."

"그런데 태민이가 이렇게 말하더군. 영 아트가 참 재미있었다고. 그때 미연이 자네랑 꼭 밥 한 번 먹어야겠다고 생각했지."

"정말요? 재미있었대요?"

이미연은 세상 뿌듯함을 느꼈다.

"그랬던 모양이야. 친구들과 어울려서 하나씩 이뤄가고, 자기들을 알아가는 게 즐거웠겠지. 또 뭐라고 했는줄 아나?"

"뭐라고 했는데요?"

"자기가 그림을 그려서 다행이라고 하더군. 그림이 너무 재미있다고 했어. 부모 마음이 너무 웃긴 것 같아. 그 말을 듣고 이상하게 내가 태민이한테 고맙다는 생각이 들더군. 따지고 보면 내가 태민이를 키운 건데. 태민이가 그렇게 말해주니까 내가 오히려 아들한테 고맙더라고."

이미연은 아직 어려서 부모의 마음은 잘 몰랐다.

그래도 그녀 역시 오랜 시간 예술을 공부했으니, 그런 감정들을 상상할 순 있었다.

이미연 역시 김태민이 잘 자라고 있는 것 같아 다행으로 여겨졌다.

어쨌거나 김용철과 최혜선이면 한국 미술계의 실세들도 알고 봤더니 팔불출이었다.

"물론 자네한테도 고마워. 태민이도 자네한테 고마워할 거야. 태민이와 친구들에게 좋은 추억을 만들어줬으니까."

이미연은 거창한 예술적 야심으로 영 아트를 시작했다.

하지만 김용철 작가의 눈에는 그냥 아들의 추억거리 정도로 여겨질 뿐이었다.

김태민의 어머니인 최혜선도 한마디 보탰다.

"난 미술관을 운영하잖아요. 많은 전시를 하고, 많은 예술가들을 만났어요. 훌륭한 작품들도 많이 봤고, 유명한 철학가들과도 이야기를 나눠봤어요. 그런데 나도 어쩔 수 없는 그냥 엄마인가 봐요. '그림이 재밌어요.' 태민이 그 한마디 말이 이제까지 겪은 모든 예술작품보다 훨씬 좋았어요. 예술에 바친 일생을 전부 보상받는 느낌이었어요."

그 말을 하고, 김용철과 최혜선은 서로 마주보며 뿌듯해했다.

"다행이네요. 영 아트 말고도 앞으로도 태민이가 그림에 집중할 수 있도록 제가 많이 도울게요."

이미연의 말에 김용철은 빙그레 웃었다.

"괜찮아. 괜찮을 거야. 자기가 알아서 잘 하겠지. 태민이는 요즘 매일 바뀌고 있어. 콩나물 같아. 매일매일 훌쩍 자라지. 이제 또 군대까지 다녀오면 더 건강해지고, 더 부지런해질 거야. 그러니까 알아서 잘 할 거야. 지금까지 해오던 것처럼 말이야."

"네, 그렇겠네요."

"아이를 이십년이나 키우고 나서야 이제 아이를 키우는 게 어떤 건 지 알 것 같아. 아이를 키운다는 건 그냥 믿고 기다려주는 것 같아. 그걸 이제 알다니. 그래서 이제 아이를 하나 더 키우면 훨씬 더 잘 키울 자신이 있는데. 여보, 어때?"

"이 사람이 진짜!"

김용철의 갑작스런 농담에 세 사람은 즐겁게 웃어댔다.

* * *

이제 시끌벅적한 영 아트에서 벗어나 조금씩 일상을 되찾았다.

수진 선배는 상금으로 받은 돈을 전부 부모님께 드렸다고 한다.

'부모님 공장이 조금 어렵다고 했었지.'

수진 선배는 착하고 욕심이 없는 사람이다.

유나처럼 뭐든지 다 알아서 하는 딸도 든든하겠지만, 수진 선배 같은 착한 딸이 있어도 든든할 것 같다.

그리고 수진 선배는 다음 학기를 휴학하고 연기 학원에 다닐 계획이라고 했다.

본격적으로 연기를 시작할 생각인지, 아니면 단순히 입대하는 남자 친구에게 졸업을 맞추려는 건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반면 정화 선배는 상금으로 받은 돈을 전부 삼성 주식에 몰빵했다.

'으음, 역시 정화 선배. 대단하군.'

솔직히 나는 미래를 대강 알지만 주식은 잘 모른다.

재테크를 배울 만큼 여유도 없었고, 재테크를 할 재산도 없었다.

하지만 나같은 주알못도 삼성 주식의 가치는 알고 있었다.

물론 삼성보다 더 수익이 높은 주식도 많겠지만, 그래도.

정화 선배의 탁월한 안목에 감탄했다.

'정화 선배는 우리 쇼핑몰에서도 적지 않은 월급을 받아가니까.'

정화 선배가 주식을 팔지 않고 묵혀두기만 한다면 꽤 이익을 볼 것이다.

'가끔 물어보고, 절대 팔지 말라고 힌트나 줘야겠다.'

참고로 나는 정화 선배를 내 후계자로 찜했다.

솔직히 유나는 옷을 좋아할 뿐이지 회사 경영에는 관심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나는 유나가 그림에 집중할 수 있도록 최대한 도울 생각이다.

하지만 정화 선배는 달랐다.

머리도 좋고, 계산도 빨랐다.

'내가 2년간 공익으로 근무해야 하니까.'

아무래도 낮 동안 회사를 비워야 하는 만큼, 믿을 수 있는 경영자가 필요하다.

물론 경력자 직원들을 다수 채용해 내 빈 공간을 매울 예정이다.

하지만 정화 선배에게도 착실히 회사의 경영을 가르쳐볼 생각이다.

정화 선배는 잘 해 줄 것 같다.

그리고 정화 선배는 계속 학교에 다닐 계획이라고 했다.

정화 선배는 빨리 졸업하고 싶어했다.

그리고 유나도 휴학할 계획이었다.

"난 중학교때부터 미술 학원에 다녔거든."

거의 6년간 쉬지 않고 그림을 그린 셈이다.

대학까지 더하면 7년.

유나의 성격상 정말 치열하게 그렸을 것이다.

그러니 이제 좀 쉴 만도 했다.

그래봤자 유나는 쉬어도 쉬는 게 아닐 것이다.

하이 유나는 지금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고, 유나는 책임감 있는 오너였다.

물론 나와 졸업을 맞추려면 유나는 2년을 휴학해야 한다.

'아무리 여자 친구라도 2년이나 휴학을 부탁하는 것은 좀 잔인한 것 같기도 하고.'

모르겠다.

그리고 형원 선배.

난 이때는 형원 선배가 또 수상할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영 아트 상금이면 형원이 형이 당분간 돈 걱정 없이 글을 쓸 수 있겠구나.'

난 그렇게 생각하고, 형원 선배한테 도움이 된 것 같아 혼자 뿌듯해했다.

그리고 김태민은, 김태민이 상금을 어디다 썼냐면은······

'태민이는 아마 자기 통장에 돈이 입금된 것도 확인해보지 않았을 거야.'

김태민은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녀석이다.

째깍째깍.

매일 시간은 흐르고 드디어 입대가 다가왔다.

신청은 늦게 했지만, 내가 김태민보다 입대가 조금 더 빨랐다.

'어쨌든 같이 복학할 수 있어서 다행이군.'

나는 집 근처의 이발소에 가서 머리를 밀었다.

쓸쓸하구나.

겨우 한 달 훈련인데, 머리를 깎으니까 마음이 아파왔다.

'조용히 다녀와야지.'

현역으로 입대하는 김태민도 있는데 내가 요란하게 입소하기는 좀 그랬다.

난 친구들을 찾아가 한 명씩 인사했다.

"잘 다녀와."

"네, 형원이 형."

그러고 보니 형원 선배도 대단하구나.

현역이라니.

세상의 모든 현역은 다 대단한 것 같다.

"잘 다녀와."

컴공과인 한철이는 병역특례 지망이다.

그래서 2학년으로 진학할 예정.

'몸만 보면 특전사인데.'

역시 세상은 불공평한 것이다.

하긴 터미네이터도 컴공과 학생들이 만들었겠지.

'자기들 몸매를 참고해서 만들었나 보다.'

참고로 나는 왼쪽 어깨가 좀 안 좋다.

일상에는 거의 불편이 없지만, 어깨를 당기거나, 충격을 주거나, 아니면 무거운 짐을 메거나 하면, 어깨가 빠질 수도 있다.

그리고 김태민과도 인사를 나눴다.

"꼭 면회 갈게."

"그래, 꼭 와. 기다릴게."

내가 훈련소에 있는 동안, 김태민이 현역으로 입대한다.

그러니 나는 김태민을 배웅해 줄 수 없다.

대신 나중에 김태민 면회나 자주 갈 생각이다.

김태민이나 한철이나 똑같은 친구들이지만, 왠지 태민이는 좀 더 챙겨줘야 할 것 같은 이미지다.

그리고 유나.

"아, 머리 너무 웃겨. 밤송이 같아."

"밤송이라니."

유나는 내가 한 달 간 사라지는데도 조금도 아쉬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재미있다는 듯, 짧아진 내 머리를 손으로 쓰다듬으며 놀렸다.

'이 녀석이.'

그런데 유나가 머리를 쓰다듬어 주니까 기분이 묘하구나.

계속 쓰다듬 당하고 싶었다.

'훈련 끝나고도 계속 머리를 기르지 말까? 열심히 그림 그리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라고 둘러대자.'

잠깐 고민하기도 했다.

그리고 훈련소 입소 당일.

나는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대한민국 대중교통이 훌륭해서 그 전날 미리 갈 필요도 없었다.

그런데 문을 열자 집 밖에 익숙한 그림자가 있었다.

유나였다.

"어? 이렇게 이른 아침에 뭐 하러 일어났어."

"훈련소까지는 못 따라가도, 그래도 배웅은 해 줘야지."

유나가 그래도 의리는 있구나.

그래, 유나도 원한다면 유나를 위해서라도 계속 밤송이 머리를 유지해야겠다.

"자, 이거 받아."

"어?"

유나가 내게 쇼핑백을 내밀었다.

"두 시 소집 맞지? 들어가기 전에 이거 먹고 들어가. 김밥이야."

"어······"

살짝 감동이라 대답이 잘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김밥이 따뜻했다.

"전날 만들면 맛 없을까봐. 방금 만들었어."

아······

심지어 수제김밥이라니.

행복이 밀려왔다.

예쁜 여자 친구가 건네는 따뜻한 김밥.

훈련 받으러 갈 맛이 나는구나.

나는 유나를 향해 두 팔을 벌렸다.

어서 와서 안기라는 신호였다.

"우이씨."

유나는 불평하면서도 내게 와서 안겼다.

우린 사귀긴 하지만 아직 스킨십은 어색한 사이.

내게 안긴 유나는 좀 뻣뻣하지만, 그래도 안아보니 좋았다.

훈련소 갔다와서 스킨십에도 좀 박차를 가해야겠구나.

굳게 다짐했다.

"다녀올게."

"조심해서 갔다 와."

그렇게 산뜻하게 서울을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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