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력천재 미대생-130화 (130/203)

■ 130. 결과 □

여섯 명의 심사위원들은 짧은 감상을 들려줬다.

그리고 회의에 들어갔다.

그런데 잠깐이라던 회의는 점점 길어졌다.

또각또각.

기다리는 동안, 진행자인 정경아가 우리에게 다가와 작게 속삭였다.

"긴장되세요?"

우리 팀 수진 여섯 명은 서로를 잠깐 쳐다봤다.

확실히 긴장되긴 하지만, 못 견딜 만큼은 아니었다.

친구들과 함께여서 뭔가 든든한 맛이 있었다.

"잘 될 거예요. 그리고 이따가 발표나면 정신없을까봐 미리 말해두는데, 오늘 그림 잘 봤어요. 여섯 명 작품 모두 감동적이고 좋았어요."

정경아는 모델이지만 틈틈이 그림을 그렸고, 작은 규모로 전시도 했다.

그리고 꽤 알려진 컬렉터로, 젊은 작가들의 작품을 모은다고 했다.

장소가 장소라서 그런지, 작은 격려도 꽤 고맙게 느껴졌다.

모두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순수 미술을 전공하는 사람들은 살짝 아트테이너들에게 반감이 있기도 했다.

우린 몇 년간 공부해서 겨우 이룰까 말까한 성과들을 아트테이너들은 손쉽게 얻으니까.

그런데 유인호도 그렇고, 정경아도 그렇고, 직접 만나보니 생각보다 괜찮은 사람들 같았다.

역시 모든 종류의 편견은 나쁜 것 같다.

"고맙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산뜻하게 인사했다.

"자, 드디어 결과가 정해졌다고 합니다!"

진행자인 정경아가 본래의 커다란 목소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스튜디오의 중앙 무대에서 큰소리로 외쳤다.

두두두두두.

그리고 메인심사위원인 국선정 교수가 마이크를 붙잡고 말했다.

"제법 긴 여정이었죠? 영 아트 코리아 1회의 우승자는······"

카메라와 조명, 배경음악까지 모두 국선정 교수를 향했다.

"1회의 우승자는 바로! 축하드립니다! 팀 수진입니다."

국선정 교수를 향하던 수많은 시선들이 일제히 우리를 향했다.

그리고 여러 대의 카메라들이 우리를 향해 다가왔다.

"아······"

카메라가 다가올 땐 입 벌리지 말라고 PD님들이 주의 줬었는데······

미리 배운 것들이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나처럼 똑같이 놀란 친구들의 얼굴이 보였고, 세상에 우리 여섯 명만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축하드립니다! 영 아트 코리아 시즌 1의 우승자는 바로 팀 수진입니다!"

확인해주듯 정경아가 다시 한 번 크게 외쳤다.

뭘 해야 하지?

뭘 해야 하지?

영 아트 우승이야,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전부 거짓말이었던 것 같다.

우승했더니 생각하던 것보다 훨씬 좋았다.

그리고 떨렸다.

난 제일 먼저 손을 뻗어 유나의 손을 붙잡았다.

'유나의 손은 이 와중에도 부드럽구나.'

그리고 고개를 돌려 김태민과 형원 선배를 바라봤다.

김태민이 활짝 웃고 있었다.

김태민이 이렇게 진심으로 좋아하는 건 진짜 오랜만에 본다.

평소에는 너무 착하게 웃기만 해서, 가끔 김태민이 사실은 가면을 쓰고 있는 건 아닐까 의심할 정도였다.

그런데 아닌가보다.

'김태민이 이렇게 열정적으로 좋아하는 건······'

지난 여름방학.

유현이와 함께 PC방에 가서 '3:3 안 오면 지상렬' 맵으로 스타크래프트에서 대역전승을 거두고 난 후, 정말 오랜만에 보는 것 같았다.

아무튼 김태민이 웃으니까 나도 기쁘고, 또 무척 다행스러웠다.

영 아트 같은 이런 왁자지껄한 쇼가 혹시 김태민에게 방해가 되는 건 아닐까, 자주 걱정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한 고비를 무사히 넘긴 것 같아 정말 다행이었다.

그리고 형원 선배.

팀 수진의 히어로.

난 유나의 손을 놓고 형원 선배를 끌어안았다.

"형 고마워요. 형 최고였어요."

"고맙긴. 내가 고맙지. 너도 정말 잘 했어."

한철이까지 이 자리에 있었다면 최고였을 텐데.

뒤풀이엔 한철이도 불러서 신나게 놀아야겠다.

그리고 수진 선배와 정화 선배.

난 솔직히 처음에는 영 아트 출연에 부정적이었다.

영 아트에 나가자고 먼저 주장했던 사람은 고맙게도 수진 선배와 정화 선배였다.

하이 유나 촬영과 병행하면서 텔레비전 쇼에 출연하기 정말 힘들었을 텐데.

그리고 방송 때문에 얻은 유명세 때문에 많이 불편했을 텐데.

그런데 두 사람은 지난 몇 달 간 한 번도 불평하지 않았다.

영 아트에 출연해서 가장 고생한 사람은 바로 수진 선배와 정화 선배, 그리고 유나일 것이다.

"누나들 진짜 고마워요. 고생 많았어요."

"아니야. 네가 제일 고생 많았어."

"고생은요. 난 재미있었어요. 진짜로요."

"나도야. 나도 재밌었어."

우린 그렇게 촬영 중이라는 것도 잠시 잊고 서로 손을 붙잡고 기뻐했다.

"태민아."

"주원아."

김태민 역시 너무 멋졌다.

특히 마지막 두 번의 미션은 김태민이 아니었다면 절대 이기지 못했을 것이다.

이 사람들과 함께라서 정말 다행이었다.

"자, 팀 수진 너무 좋아하는데요. 방송이 끝나면 마저 기뻐하시고요. 잠시 심사위원님들의 심사평을 들어보겠습니다. 심사위원님들도 퇴근하셔야 하니까요."

정경아가 우리를 놀리듯 다시 쇼를 진행했다.

"이제 심사평을 말해도 될까요? 아니면 계속 기뻐하도록 5분 정도 더 드릴까요?"

유예철 교수도 마이크를 붙잡고 우리를 놀렸다.

아무래도 교수이다 보니까 학생들만 보면 놀리고 싶어지는 모양이다.

우리는 표정을 다듬고 조용히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래요, 교수님들.

한 번 들어봅시다.

우리 작품이 얼마나 대단한지 읊어보시죠.

거짓말처럼 마음속에 여유가 차올랐다.

그리고 유예철 교수가 심사평을 말했다.

"일단 팀 수진의 우승을 축하드립니다. 첫 작품부터 지켜봤는데, 아주 훌륭했습니다. 정말 잘했습니다. 그리고 최성진 작가님과 윤상희 작가님도 아주 고생 많았습니다."

우린 살짝 윤예철 교수를 향해 감사의 목례를 했다.

그리고 윤예철 교수가 다시 심사평을 이어갔다.

"결과 발표 전에 국선정 교수님께서 먼저 말씀하셨죠. 누군가를 설레게 하는 것이 예술의 목적이라고. 저도 공감합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쉽게 체험할 수 없는 기분을 떠올리기 위해 예술이 필요한 거죠. 팀 수진의 작품들이 저한테는 그랬습니다. 먼저 이 그림."

그리고 유예철 교수가 PD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자 스튜디오의 스크린에 김태민의 그림이 떠올랐다.

그림의 제목은 '화장하는 수진누나'였다.

이제 와서 보니, 그림은 특별한데 제목은 너무 수수했다.

뭔가 김태민다웠다.

유예철 교수는 스크린에 떠오른 그림을 잠시 말없이 지켜봤다.

"이 그림은 정말 신비롭더군요. 거칠고 무심한 붓질, 정돈되지 않은 소품들. 그리고 여러 표정을 가진 등장인물들. 화가들은 그림에 여러 가지를 담아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감정을 담아내는 일이 제일 힘들겁니다. 하지만 이 그림엔 무수한 감정들이 동시에 담겨져 있습니다. 이 그림을 보면서 저는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어린 나이에 이런 그림을 그려낼 수 있을까? 하지만 계속 그림을 보다 보니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어리니까 이런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게 아닐까? 그래서 김태민씨."

유예철 교수는 김태민의 이름을 불렀다.

유명한 사람이 이렇게 이름을 부르니까, 내 순진한 친구 김태민이 갑자기 대단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하긴 대단한 사람 맞긴 하지만.

"그래서 김태민씨. 제 개인적인 바람인데, 영영 나이 들지 마세요. 그리고 계속 이렇게 신비롭고 알쏭달쏭한 그림을 많이 그려주세요. 정말 김태민씨의 팬이 되었습니다."

이 정도면 거의 극찬이었다.

한국 최고의 미술가 중 하나인 유예철 교수가 겨우 스물한 살의 미대생에게 팬을 자처하다니.

부럽기도 하고, 또 마음속에 의욕이 차올랐다.

나도 김태민에게 부끄럽지 않은 경쟁자가 되고 싶었다.

그리고 박경원 큐레이터가 유예철 교수에게서 마이크를 건네받았다.

"다른 멤버들의 그림은 제가 맡겠습니다. 제 분량도 챙겨야 하니까요. 유 교수님께서 다 차지하시면 곤란하죠."

교수들의 농담에 웃어주는 것은 학생들의 의무다.

잘 훈련된 미대생들인 우리 팀 수진은 박경원 큐레이터의 농담에 환하게 웃었다.

그런데 이번엔 좀 진심으로 웃었다.

'우승이 좋긴 좋구나.'

마음에 여유가 생겨서 지금은 재미없는 농담에도 활짝 웃을 수 있게 되었다.

"저도 유 교수님의 말씀에 적극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림에 감정을 담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특히 이 그림."

박경원 큐레이터가 가리킨 그림은 유나가 그린 그림.

'오후의 카페.'

빛으로 가득 찬 카페의 풍경이었다.

그리고 그 안에 내가 그려져 있었다.

조금 창피했다.

"저도 유 교수님과 비슷한 생각을 했습니다. 어떻게 어린 나이에 이런 그림을 그릴 수가 있을까. 하지만 팀 수진의 일주일간 작업 영상을 보면서 조금 이해가 되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이 그림은 그림 구석구석 빛과 온기가 채워져 있습니다. 마치 그림 밖으로 새어나올 것 같은 느낌이죠."

박경원 큐레이터는 한국 최고의 전시 기획자다.

수많은 작가들이 박경원의 눈에 띄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그런 박경원 큐레이터에게 이런 칭찬을 듣다니.

고개를 돌려봤더니 유나도 활짝 웃고 있었다.

그래, 실컷 좋아하렴.

미대생이라면, 지금은 정말 좋아해도 되는 순간일 것이다.

"이런 감정, 이런 온기는 절대 미술학원이나 대학에서 배울 수 있는 게 아닐 것입니다. 화가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지는 그림입니다. 그리고 또 앞으로는 어떤 작품을 그릴지 궁금해지는 그림입니다. 한유나씨 그림 맞죠? 앞으로도 기대하겠습니다."

그리고 화면에는 수진 선배와 정화 선배의 그림도 차례로 떠올랐다.

"모두 재미있고, 따뜻한 그림입니다. 친구들을 관찰하고 지켜보는 어린 미대생들의 귀엽고 솔직한 시선이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내 그림.

"이 그림에도 많은 것이 들어있죠. 나이답지 않은 원숙함과 정돈된 느낌이 무척 좋습니다. 어린 소녀의 옆얼굴을 바라보며 떠오르는 여러 생각들이 관객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지는 느낌입니다. 앞서 형원씨가 말했듯 그림 속 공간감도 무척 흥미롭고요. 역시 앞으로가 더욱 기대되는 그림입니다."

나이답지 않다라······

난 솔직히 평론가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언어가 너무 화려하다고나 할까?

그래서 언어에 잡아먹혀 본질을 부풀리는 느낌이 있어서였다.

당장 형원 선배만 하더라도 형원 선배의 말을 듣다보면 나까지 넘어갈 것 같았다.

하지만 역시 이름 있는 평론가들은 예리한 것 같았다.

'나이답지 않다니.'

살짝 뜨끔했다.

어쨌든 나도 꽤 많이 칭찬들었다.

뿌듯하구나.

고생했다, 이주원.

그리고 박경원이 자기의 심사평을 마무리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오랜 시간 미술 기획자와 평론가로 일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오랜만에, 즐겁고 기분 좋게 팀 수진의 작품들을 감상했습니다. 팀 수진의 작품들을 보고 있으면 지나간 제 대학 시절도 생각나고, 또 나도 다시 그림을 그려보고 싶단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래서 오늘 집에 가서 오랫동안 쓰지 않은 화구들을 다시 꺼내볼까 생각중입니다. 수고 많았습니다. 좋은 작품을 보여줘서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국선정 교수가 마이크를 받았다.

"앞의 두 분이 제가 쓸 말들을 많이 뺏어가 버렸네요. 하지만 다행히 한 사람이 남았습니다. 바로 이형원씨. 저는 마지막 경연에서 형원씨의 실크스크린 작업도 아주 좋았습니다."

으악.

처음 찍어본 실크스크린으로 국선정 교수의 칭찬을 듣다니!

형원 선배가 해냈다!

형원 선배 역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

"물론 아직은 많이 미숙하겠죠. 하지만 열심히 배우고, 또 즐겁게 몰입하는 장면이 무척 감동적이었습니다. 사실 그림은 어려운 게 아닙니다. 누구나 시작할 수 있죠. 글자를 모르는 아이들도 크레파스를 쥐고 그림을 그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언제부터 인가, 자격 있는 사람들만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바뀌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형원 선배의 실크스크린 작품들이 스튜디오 스크린에 떠올랐다.

또 일주일간 형원 선배가 잉크를 뒤집어써가며 실크스크린을 찍던 모습도 같이 상영되었다.

"영 아트란 쇼에 가장 부합되는 사람이 어쩌면 형원씨는 아닐까,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예술은 어렵지 않다는 것, 누구나 도전할 수 있다는 것을 몸소 증명해줬으니까요. 텔레비전 쇼에서 화가들과 미대생 틈에서 처음으로 도전해보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겁먹지 않고 용감하게 덤벼들었습니다. 저는 형원씨의 그 모습이 너무 멋있었습니다. 작업복도 잘 어울렸고요."

국선정 교수의 말을 들어보니, 우리가 형원 선배에게 너무 가혹한 요구를 하지 않았나 반성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잘 해냈으니까.

국선정 교수가 다시 말을 이었다.

"영 아트 마지막회가 방송되고 많은 사람들이 형원씨처럼 미술에 도전했으면 좋겠습니다. 직장을 마치고 근처의 판화 공방에서 실크스크린을 배우며 뿌듯해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어린 학생들이 입시를 위해서가 아니라, 정말 즐기기 위해서 학원을 찾아가 그림을 배웠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게 가능하다는 것을 형원씨가 증명해 준 것 같습니다. 정말 잘했습니다. 고생 많았습니다."

그렇게 우린 세 명의 거장에게서 기분 좋은 칭찬을 실컷 들었다.

긴 시간 진행된 촬영이었지만, 조금도 피곤하지 않았다.

우린 서로의 손을 붙잡고 마음껏 승리의 기쁨을 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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