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력천재 미대생-129화 (129/203)

■ 129. 하종호 vs 이형원 □

진행자인 정경아가 다시 마이크를 잡았다.

"하종호 심사위원님."

"넵."

"하종호 심사위원님은 미술을 전공하지 않으셨죠?"

"맞습니다. 저는 신문방송학과를 나왔습니다."

하종호는 원래 신문기자 출신이었다.

그는 기자로 신문에 칼럼을 기고하며 조금씩 명성을 얻었다.

그리고 소설책도 몇 권 썼고, 자신의 블로그에 영화나 시사 이슈에 관한 글을 쓰며 명성을 얻었다.

정경아는 다시 하종호를 향해 말했다.

"실은 미술을 전공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영 아트가 하종호씨를 심사위원으로 모셔온 것입니다. 보다 새로운 시각으로, 혹은 일반 관객의 시선으로 작품들을 해석해 주실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맞습니다. 저도 제 장점이 거기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하종호 심사위원님. 이번 결승에 오른 두 팀의 작품을 전시 전부터 꼼꼼히 살펴보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종호 위원님이 보시기에 두 작품이 어땠는지요?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그런데 유명하신 미술 평론가님들 앞에서 제가 먼저 의견을 말하려니 확실히 떨리긴 하는군요."

하종호는 말은 그렇게 했지만 별로 긴장하는 것 같진 않았다.

그리고 하종호는 두 팀을 번갈아보며 자기 의견을 말하기 시작했다.

"일단 저는 예술 작품은 경쟁의 대상이 아니라느니, 두 작품 모두 훌륭하지만 어쩔 수 없이 결정을 내려야 한다느니, 그런 등등의 판에 박힌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어차피 저는 결정을 내리라고, 이 자리에 돈을 받고 왔으니까요."

하종호는 쿨해 보이려고 무척 노력하는 것 같았다.

아무튼.

"그리고 저는 말씀하셨듯이 미술을 잘 모릅니다. 그러니 그냥 제가 생각한 대로 편하게 이야기하겠습니다. 혹시 제가 틀리는 부분이 있다 하더라도 너무 비웃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스튜디오의 스크린에는 먼저 팀 수진의 그림들이 비춰졌다.

"저는 이번 결승에 오른 두 작품을 보며 다시 한 번 프로와 아마추어 사이의 차이를 실감했습니다. 먼저 팀 수진의 그림들. 말씀하신대로 저는 이번 전시를 전시 전부터 찾아가 꼼꼼히 관찰했습니다. 전시장을 찾은 관객들은 팀 수진의 그림에 뜨겁게 호응했습니다. 처음에는 예상 밖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팀 수진의 그림들을 다시 살펴보고는 이해했습니다. 하나같이 그림들이 정말 예쁘더군요. 예뻐도 너무 예뻤습니다. 이렇게 예쁜 그림들이니까, 사람들이 좋아하는 게 당연한 게 아닐까요? 마치 아이들이 이빨을 썩게 하는 사탕을 찾는 것처럼 말입니다. 반면 최성진과 윤상희 작가의 작품들을 보면 어떨까요?"

그리고 이제 스크린에는 두 작가의 작품들이 떠올랐다.

"윤상희 작가의 사진들은 강력한 흡입력으로 관객을 매료시킵니다. 하지만 최성진 작가의 그림으로 사진들을 일부 가렸습니다. 예술적 의도를 가지고 일부러 사진이 가진, 직관적인 상업성을 스스로 포기한 것입니다. 대신 그 작품 안에는 철학적 사유가 들어있습니다. 관객의 1차적인 재미를 빼앗은 대신, 관객이 한 걸음 더 작품에 다가와 감춰진 가치와 상징을 직접 발견하도록 촉구하는 것입니다."

하종호의 칭찬에 최성진은 밝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또 하나. 사진이나 회화는 평면적인 작품입니다. 하지만 최성진 작가는 사진을 덮은 유리에 그림을 그렸습니다. 두 개의 평면을 교차시켜, 사진이 갖는 평면의 한계를 벗어난 것입니다. 일종의 건축적인 시도라고 할까요?"

하종호는 자신의 의견을 말하고 뿌듯한 표정을 지으며 스튜디오를 둘러봤다.

[ 내가 미술 전공은 아니지만, 이 정도면 꽤 예리하지? 이제 인정할 수밖에 없을 걸? ]

마치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그러자 형원 선배가 조용히 마이크를 손에 쥐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종호 평론가님의 의견에는 제가 반박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참고로 저 역시 미술을 전공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저 역시 제 마음대로 답변하겠습니다. 혹시 제가 틀린 말을 하더라도 너그럽게 봐주시기 바랍니다. 참고로 저도 글을 씁니다. 신춘문예와 SF소설공모대전에서 대상을 탔습니다. 하종호 평론가님도 소설을 쓰셨죠?"

나왔다! 신춘문예!

형원 선배는 전국 방송에서도 꿋꿋했다.

그리고 형원 선배는 하종호를 향해 빙긋 웃었다.

나이는 형원 선배가 한참 어렸지만 표정이나 여유에서는 전혀 밀리지 않았다.

참고로 하종호가 소설가란 사실은 대부분 알고 있었다.

하종호는 유명한 블로거고 방송에도 자주 나온다.

'그리고 방송에 나올 때마다 자주, 자기가 글을 쓴다고도 말했으니까.'

하지만 하종호의 글을 읽어본 사람이 그리 많지는 않은 것 같다.

하종호의 글 자체가 상을 타거나, 화제가 되거나 했던 적은 없었으니까.

물론 나 역시 앞으로 영영 하종호의 글을 읽을 생각은 전혀 없었다.

어쨌든 형원 선배의 너무 여유로운 태도가 거슬렸는지, 하종호는 딱딱한 표정을 지었다.

"일단 하종호 평론가님은 저희 팀 의 그림들이 전부 한결같이 너무 예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봐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묻고 싶습니다. 그림이 예쁜 게 나쁜 건가요? 원래 예술은 즐기기 위한 것입니다. 그림이 예쁠 수도 있지, 아니 그림은 예뻐야죠. 마치 소설이 재미있어야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하종호 평론가님도 소설가니까 제 말을 이해하시겠죠?"

"그, 그거야 그렇습니다."

형원 선배의 질문은 마치 내게는,

[ 하종호, 당신의 소설은 대체 얼마나 재미있지? ]

하고 묻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형원 선배도 하종호의 소설을 읽은 적이 없다고 굳게 확신했다.

아무튼.

형원 선배는 다시 말을 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하종호 평론가님은 사진 앞에 유리를 두고 거기에 그림을 그린 것을 건축적인 시도다, 평면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시도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거기에 공감할 수 없습니다. 회화가 평면인 것은 분명 맞지만, 애초에 평면에는 한계가 없습니다. 평면은 가장 자유로운 공간입니다. 예를 들어보죠. 실례지만 이주원이 그린 심야버스를 스크린에 띄워 주시겠습니까?"

형원 선배의 요청에 따라 내 그림이 스크린에 크게 비춰졌다.

내 축축한 욕망이 담긴 그림이 이렇게 전국 방송에서 클로즈업 되다니.

얼굴이 화끈거렸다.

"저는 이번에 친구들의 그림을 보며 평면 회화가 얼마나 자유로운 예술인지 새삼 깨달았습니다. 보시다시피 이 그림은 고속버스의 한 좌석을 그렸습니다. 그림 속 인물은 의자에 기대어 있고, 그 인물의 앞도 의자가 가로막고 있습니다. 사실 이것으로 충분합니다. 우리는 이 그림을 보고, 버스 안의 의자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답답한 공간을 떠올릴 수 있으니까요. 이렇게 그림은 단순한 평면이 아니라, 우리의 경험에 다가서는 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민망한 표정을 짓자, 옆에 앉은 유나가 나를 보며 키득거렸다.

어쨌거나 형원 선배의 설명은 이어졌다.

"이렇게 그림 앞에 서는 것만으로 우린 버스라는 가상의 공간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굳이 공간감을 건설하기 위해 또 한 장의 유리가 필요했다고요? 하종호 평론가님. 유리 한 장을 사진 앞에 덧씌웠다고, 그것을 건축적인 시도라고 언급하는 자체가 오히려 일차적인 사고라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후배 소설가 이형원의 잔인한 공격에 하종호는 대답 대신 표정이 더 굳어버렸다.

"그리고 또 하나, 우연인지 몰라도 이 심야버스 그림 안에도 유리가 있습니다. 바로 버스의 창문입니다. 이 그림은 의자들이 빼곡히 채워진 버스의 내부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만약 이 창문이 없었다면 버스의 풍경은 무척 답답했을 것입니다. 또한 이 창문은 동시에 여러 용도로 쓰였습니다. 먼저 그림이 답답하지 않도록 관객들의 호흡을 환기시켜줍니다. 그리고 그림 속 두 인물의 시선이 교차하는 영역이며, 또한 버스 내부의 닫힌 공간이 현실의 한계를 벗어나는 미지의 영역이기도 합니다."

응?

내가 그런 거창한 의도로 버스의 창문을 그렸던 걸까?

나는 단지 버스의 까만 창문이 예뻐서 그렸던 것 같다.

그리고 창문이 거기에 있었으니까 당연히 그렸을 뿐이다.

하지만 뭐, 형원 선배가 그렇다고 하니까 오늘은 잠시 그런 걸로 하자.

"하종호 평론가님. 이렇게 부수적인 장치 없이도 그림 안에서 충분히 건축적인 요소가 구현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이 그림이 마냥 예쁘기만 한 것도 아니라는 사실이 같이 설명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예쁜 그림 안에도 충분히 공간이 있고, 건축이 있고, 가치와 상징이 있습니다."

으음...

심야 버스를 그리며 내가 담고자 했던 가치는 '나중에 꼭 유나의 배를 만져봐야지.'였다.

아무튼.

'공익근무하면서 책도 많이 읽고, 미술이론 공부도 열심히 하도록 하자.'

좋은 화가가 되기 위해서는 꼭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았다.

형원 선배 덕분에 나는 강제로 굳게 다짐해야 했다.

형원 선배는 자기보다 나이도 많고, 경력도 많은 하종호를 마치 가르치듯 썰어버렸다.

거들먹거리던 하종호는 별다른 대꾸도 못하고 벌개진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네, 이형원씨의 재미있는 의견 잘 들었습니다.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심사위원님들의 감상도 들어보겠습니다."

이제 영 아트 결승전 녹화가 점점 끝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정경아의 진행에 따라, 먼저 유예철 교수가 마이크를 붙잡았다.

"아, 하종호씨가 판에 박힌 말이라고 했지만, 저는 꼭 이 말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일단 예술은 경쟁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리고 두 팀의 작품 모두 훌륭했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내리는 결정이 큰 의미가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하종호는 형원 선배에게 무참히 공격당한 직후였기 때문에 유예철 교수의 말에도 아무 대꾸 못하고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유예철 교수는 미소를 머금고 차분하게 말했다.

"흔히 평론가라고 하면, 또 대학 교수라고 하면 아주 특별한 사람처럼 생각합니다. 우리들은 마치 변태처럼 특이하고 이상한 그림이나 작품들을 좋아할 것처럼 생각하죠. 아마 제 생각에 현대미술이 너무 어렵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게 추측합니다. 하지만 저희도 똑같습니다. 미대 교수에게도 현대미술은 어렵고 괴상합니다. 다만 이해하려고 노력할 뿐이죠. 그래서 저도 예쁜 그림이 좋고, 재미있는 그림이 즐겁습니다. 문제는 오늘 두 팀의 작품이 모두 똑같이 예쁘고 훌륭하다는 것입니다."

유예철 교수의 말에 옆에 있던 박경원 큐레이터가 고개를 끄덕이며 마이크를 받았다.

"맞습니다. 공감합니다. 저도 전시를 기획하다보면, 가끔은 저도 이해가 가지 않는 이상한 작품들을 마주치곤 합니다. 저도 그런 난해한 작품들보다는 단번에 공감할 수 있는 쉬운 작품이 좋습니다. 특히 오늘의 두 팀 모두, 어렵지 않으면서도 내용이 가득 담긴 좋은 작품을 가져왔다고 생각합니다. 두 팀 모두 결승에 어울리는 좋은 작업을 했습니다. 선배 예술가로서 칭찬해주고 싶네요."

그리고 마지막 메인 심사위원인 국선정 교수가 마이크를 붙잡았다.

오늘의 우승은 메인 심사위원 세 명과 초청 심사위원 세 명, 모두 여섯 명이 의논을 통해 결정한다.

"지지난 주에도, 지난주에도 같은 말을 했습니다. 같은 말을 결국 세 번 하게 되네요. 며칠 전 신문에서 영 아트 시즌 2의 기사를 읽었습니다. 하지만 전 분명히 선언하겠습니다. 저는 절대 시즌 2에는 나오지 않을 생각입니다. 너무 힘들고 어려운 자리입니다."

국선정 교수의 선언에 유예철 교수와 박경원 큐레이터도 웃으면서 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국선정 교수는 다시 말을 이었다.

"두 팀의 작품들 모두 훌륭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고민했습니다. 대체 어떤 기준으로 한 팀을 선택해야 후회가 남지 않을까? 하지만 아무리 고민해도 결국 제자리였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결정했습니다. 어차피 머리로 고민해봤자 답이 없다면 그냥 가슴이 끌리는 팀을 선택하면 어떨까? 어차피 둘 다 훌륭한 작품을 했으니까, 나는 그냥 편하게 선택해도 되지 않을까? 그렇다면 나를 조금 더 설레게 하고, 조금 더 웃게 한 작품은 무엇이었을까? 그렇게 생각했더니 머릿속이 맑아지는 기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게 예술의 본래의 목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군가를 설레게 하는 것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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