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력천재 미대생-123화 (123/203)

■ 123. 아버지 □

나의 빌라.

나, 유현이, 김태민 셋이 있었다.

나는 거실에 앉아 노트북 검색 중.

유현이는 내 옆에 앉아서 수학 문제를 풀고 있었다.

나는 요즘 유현이 수학 과외를 해주고 있었다.

내가 전부 가르치는 건 아니고, 유현이가 혼자 공부하다 막히면 내가 봐주는 식이었다.

설렁설렁 느긋한 이미지와는 다르게 유현이도 제법 공부를 한다.

'한씨 집안 내력인가······'

그 똑똑한 머리를 내 아이들에게도 꼭 물려주고 말겠다고 또 한 번 다짐했다.

'그나저나······'

내가 유현이와 유미한테 너무 잘 대해줬는지, 두 녀석이 제주도로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유미의 논술고사가 끝났는데도 둘은 계속 서울에 머물렀다.

곧 유나의 부모님이 여행도 가신다는데, 여행 기간 동안 계속 눌러앉을 모양이었다.

딱히 싫은 건 절대 아니고, 그냥 좀 웃긴 정도.

'뭐, 유나도 동생들을 끔찍이 아끼니까.'

유나를 위해서라도 나야 별 상관없다.

둘 다 귀엽고 눈치도 빨라서 불편한 것도 없었다.

보글보글.

김태민은 소주 한 잔 하자며 부대찌개를 끓이고 있었다.

이제 곧 영 아트도 끝날 테고, 김태민은 입대해야 한다.

아직 입대까지 한 달 넘게 남긴 했지만, 김태민은 워낙 감수성이 풍부하니까.

그래서 미리부터 싱숭생숭한 모양이었다.

'친구들끼리 밤마다 술 한 잔 하는 게 같이 사는 재미겠지.'

김태민이 입대해서 나도 많이 아쉬웠다.

나는 노트북으로 영 아트 결승 상대인 최성진을 검색하고 있었다.

최성진은 교포 출신 엄친아 미술가로 시드를 받고 영 아트에 출연한다.

등장부터 강력한 우승 후보였는데, 결국 결승까지 왔다.

재미있는 건, 이제까지 겨룬 상대들 중에 최성진이 제일 검색하기가 쉽다는 사실.

검색 사이트에 이름만 입력하면 촤르륵, 최성진의 작업들이 펼쳐졌다.

'그만큼 활발히 활동하고, 마케팅도 잘 한다는 거겠지.'

최성진은 참 부지런히 사는 사람이었다.

부모님은 LA에서 슈퍼마켓을 운영했고, 최성진은 형제들을 따라 의과 대학원에 진학했다.

하지만 곧 중퇴.

그리고 미술을 전공했다.

'내가 최성진에 대해 왜 이렇게 잘 아느냐면······'

그 과정을 최성진이 책도 쓰고, 아침 방송에 나오고, 인터뷰도 하며. 자기 입으로 직접 부지런히 알렸기 때문이었다.

그게 고스란히 인터넷에 있었다.

'그런데 그림 그리기 전에 의과 대학원에 다녔던 사실이 대체 왜 중요한 거지······'

하지만 그건 내 생각일 뿐이다.

다른 사람들의 생각은 다른 모양이었다.

최성진의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최성진의 전시는 연일 매진이었다.

최성진은 전시도 많이 했고, 다른 작가들과의 콜라보는 물론, 제법 큰 행사의 예술 감독을 맡기도 했다.

최성진은 분명 지금 대한민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작가 중 한 명이었다.

그림도 훌륭한 편.

'약간 세련된 남동민 느낌?'

물론 고작 미대생이자 실패한 인생의 회귀자인 내가, 다른 예술가를 함부로 평가하는 건 절대 금물이다.

내가 이제까지 친구들의 작업에 날을 세운 적은 많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같이 배우는 과정일 뿐이었다.

다만 이런 생각은 했다.

'그냥 최성진이 글은 쓰지 말고 그림만 그렸으면 어땠을까? 그럼 훨씬 더 있어 보이는 예술가가 되지 않았을까.'

미리보기로 읽어본 최성진의 글은 크게 공감이 가지 않았다.

물론 책 한 권을 다 읽어본다면 또 생각이 달라질 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냥 중년 아재인 내 눈에는 최성진은 너무 수다스럽고, 요란하게 자기를 파는 것으로 보였다.

그런데 그게 잘 먹히고 있었다.

'그게 문제야.'

대중들은 최성진을 좋아한다.

대중들에게 최성진은 멀리 예술 선진국 미국에서 건너온, 예술을 위해 안정된 삶을 포기한 젊고 잘생긴 천재 예술가였다.

'그러니까 고작 1학년짜리 미대생인 우리가 최성진을 이기려면······'

단순히 심사위원들의 인정을 받는 것으로는 부족했다.

시청자들의 납득을 끌어내야 했다.

심사위원들의 눈이 아무리 정확해도 상관없었다.

'그 사람들이 절대 우리를 위해 모험을 하진 않을 거야. 가장 안전한 평가를 내리겠지.'

그러니까 심사위원 전에 먼저 시청자들의 인정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나는 최성진의 파트너도 검색해봤다.

영 아트는 팀전.

그래서 최성진은 영 아트에 참가하기 위해 윤상희라는 젊은 사진 작가와 팀을 이뤘다.

윤상희 역시 꽤 유명한 젊은 예술가.

특히 강렬한 흑백 사진으로 유명했고, 연예인들 화보로 대중에 이름을 알렸다.

'솔직히 내 생각엔······'

나는 윤상희 쪽이 최성진보다 훨씬 감각적인 예술가 같았다.

하지만 기사든 댓글이든 전부 최성진만 집중했고, 윤상희는 살짝 소외되는 느낌이었다.

아무튼 결승전인 만큼 이번은 정말 쉽지 않은 승부일 것 같았다.

유인호는 예술이 부업이니 그래도 비벼 볼만 했고, 강우 크루는 너무 강력해서 아예 마음을 비우고 싸웠다.

하지만 최성진은······

'꼭 이기고 싶어. 꼭 이기고는 싶은데 그게 쉽지는 않아 보여.'

하지만 우리는 방법을 찾아내겠지.

여기까지 온 이상 쉽게 물러설 생각은 없다.

그리고 강우 크루의 응원도 있었다.

멋진 형들마저 꺾고 왔는데, 최성진에게 지고 싶지는 않았다.

"자, 완성이다! 유현아, 밥 퍼!"

"넵!"

김태민이 외치자 기다렸다는 듯 유현이가 수학 문제집을 접었다.

그리고 차려지는 밥상.

"와, 맛있겠다."

음.

김태민식 부대찌개.

햄이든 스팸이든 두툼하게 썰었다.

나라면 적당히 재료를 아꼈을 텐데.

부대찌개부터 뭔가 부르주아 느낌이 난다.

그렇게 우린 허겁지겁 술과 밥을 먹기 시작했다.

"어때? 맛있어?"

한참 먹다가 김태민이 물었다.

심지어 김치는 제주도 식당에서 공수한 김치.

이게 맛없을 수가 있나.

"다행이다. 영 아트 끝나면 아버지랑 이렇게 한 잔 하고 싶었거든. 그런데 아버지가 입맛이 까다로우셔서 걱정했거든."

그런 사연이 있었군.

그럼 우리는 실험용이었던 걸까.

하긴 김용철 작가처럼 유명한 사람이면 매일 맛있는 것만 먹을 지도 모른다.

아무튼 찌개는 맛있었다.

"형. 찌개가 맛없어도 아들이 이렇게 끓여오면 아버지들은 맛있게 드시지 않을까요?"

유현이가 옆에서 어른스럽게 말했다.

"그런가?"

김태민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사실 나 아버지랑 제대로 술 마셔본 적은 없거든."

"그래?"

좀 뜻밖이었다.

난 김용철 작가가 김태민을 이것저것 많이 챙겨주는 줄 알았다.

그리고 김태민도 모난 곳이 없는 성격이고.

그래서 두 사람이 자주 어울리는 줄 알았다.

난 김태민을 격려했다.

"이렇게 찌개 끓여서 가져가면 정말 좋아하실 거야. 그러니까 처음부터 소주를 많이 준비해서 가."

"그럴까?"

이런 사소한 격려에도 김태민은 굉장히 좋아했다.

그리고 김태민이 말했다.

"실은 말이야. 이번에 팝업 만들면서 생각을 많이 했어."

"그래? 어떤?"

"어렸을 때, 아버지랑 어머니 때문에 집에 작가 형들이 많이 찾아왔거든. 집에는 거의 손님이 끊긴 적이 없을 정도였어. 그래서 내가 좀 밀려나는 느낌이 들었어. 그런데 내가 그림을 그려 가면, 손님들도 아버지도 모두 좋아하는 거야. 그래서 나이 먹고 이런 생각을 했어. 나는 참 불순한 동기로 그림을 시작했구나. 아빠, 엄마 칭찬에 길들여져서 그림을 그렸구나."

불순한 동기치고는 너무 잘 그리는데.

사람들마다 각자의 고민이 있다는 사실이 재미있게 느껴졌다.

"그런데 이번에 팝업 만들면서 친구들 모두 내 계획대로 움직여주고, 같이 좋아해주고, 또 결과물도 맘에 드니까 너무 신나는 거야. 어릴 때 칭찬 받던 느낌이었어. 그래서 이런 생각을 했어. 내가 원래 그냥 칭찬을 참 좋아하는구나. 아버지가 날 칭찬으로 길들인 건 아니었구나. 내가 미대에 와서 참 다행이구나."

"그랬구나."

나는 김태민의 잔에 소주를 채웠다.

같이 팝업을 만든 게 김태민한테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이었다.

어쩌면 사람들은 어디서든 각자 자기의 대답을 찾고 있는 건 아닐까?

"그래서 아버지한테 미안해서 부대찌개를 연습한 거야?"

"그렇지."

김태민은 뿌듯하게 찌개냄비를 바라보았다.

나는 김태민이 대견하기도 하고, 부럽기도 했다.

공익이긴 하지만, 내 아버지는 내가 군대에 가는 것조차 모르고 있을 것이다.

어머니와 이혼한 후, 아버지는 금방 재혼했다.

그리고 울산에서 공장에 다니셨다.

포항에서 한 시간 정도 거리?

그런데도 나는 두 분이 갈라선 후, 아버지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양육비를 받은 적도 없고, 몇 번 돈이 급해서 어머니가 전화했을 때도 아버지는 항상 변명만 늘어놓았다.

지금은 완전히 연락이 끊긴 상태.

'하지만 지금 굳이 내 이야기를 해서 분위기를 망칠 필요는 없겠지.'

나는 소주 한 잔 마시며 쓴웃음을 삼켰다.

"정말 좋아하실 거야. 찌개도 맛있고. 그러니까 자신감 가져."

"고마워."

"나도 얼른 스무 살 돼서 아버지랑 소주 한 잔 하고 싶다. 그런데 우리 아버지는 식당을 하시니까, 아버지한테 직접 끓이라고 해야 겠어요."

유현이가 너스레를 떨었다.

고등학생 때 수업시간에 국어 선생님이 이런 말을 했었다.

은퇴할 때가 다 된 나이가 많은 선생님이었다.

"내가 학생들을 참 많이도 가르쳤어. 그런데 학부모들을 만나면 말이야, 그 학생들의 미래가 보여. 외모도 그렇고, 직업도 그렇고, 성격도 그렇고. 너희들이 커서 어떤 사람이 될지 궁금하면 지금 너희 아버지를 보면 된다. 수십 년을 가르치면서 거의 틀린 적이 없어."

그땐 그 말이 참 싫었다.

그런데 지난 생 이혼하고 나서 그 국어 선생님이 떠올랐다.

'정말 아버지처럼 살고 싶지 않았는데, 나도 이혼을 했구나. 나도 아이가 있었으면 모른 척 했을까?'

그땐 그런 생각을 하며 비참해 했다.

하지만 이번 생은 다를 것이다.

나는 아버지도, 내 운명도, 국어 선생님의 예언도 모두 이겨낼 것이다.

나도 김용철 작가나 장인어른처럼 꼭 아들이 같이 한 잔 하고 싶어하는 아버지가 될 것이다.

'물론 그 전에 유나에게 고백부터 성공해야겠지만.'

그리고 결혼하고, 아들도 낳고, 스무 살까지 길러야 한다.

'정말 갈 길이 멀구나.'

그런데 부대찌개에 쓱쓱 밥을 비벼 먹던 유현이가 뜬금없이 김태민에게 질문했다.

"태민이 형, 궁금한 게 있어요."

"뭐?"

"형이랑 수진 누나는 대체 무슨 사이예요?"

오, 한유현 나이스 타이밍!

역시 유나의 동생이라 머리가 좋다.

나도 사실 좀 많이 궁금했다.

다만 질문할 기회를 찾지 못했는데, 오늘 유난히 김태민이 기분이 좋아보였다.

그리고 취기도 조금 오른 상태.

솔직한 대답을 듣기에 최적의 찬스였다.

"아, 수진 누나······"

김태민은 수진 선배의 이름만 듣고서도 벌써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허술한 녀석.

질문은 유현이에게 맡긴다.

쓸데없는 재촉은 진실을 캐내는 것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조용히 김태민의 술잔을 한 번 더 채웠다.

자, 이것 마시고 술술 불어라.

"크으."

김태민은 소주를 반잔 쯤 마시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처음 수진 누나를 봤을 때, 세상에 이렇게 예쁜 사람이 정말 있구나, 하고 생각했어."

"야, 너 전에는 유나보고 예쁘다며."

김태민에게 살살 분위기를 맞춰가며 정보를 캐야 하는데, 나도 모르게 발끈해버렸다.

"아, 유나도 예쁘긴 한데, 유나는 좀 사납잖아."

아니거든?

물론 수진 선배와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사납긴 하다.

그래도 적응하면 견딜 만 하다.

나름 스릴도 있고.

"맞아요. 우리 누나는 좀 사납죠."

유현이가 재빨리 끼어들어 상황을 정리했다.

그리고 김태민의 앞접시에 스팸을 떠주며 다시 분위기를 띄웠다.

김태민이 느릿느릿 다시 털어놓기 시작했다.

"수진 누나 정말 착하고 예쁘고 귀엽고 말도 잘 통하는데······ 그런데 내가 이제 군대 가야 하니까······"

김태민은 그렇게 말끝을 흐렸다.

아, 군대.

군대가 또 한 남자의 가슴을 부수는구나.

나는 비록 공익이지만, 같이 마음이 아파왔다.

중 3인 유현이조차 그 고통에 같이 아파했다.

대한민국 남자에게 역시 군대는 크고 두려운 존재였다.

"그리고 얼마 전까지는 내가 계속 그림을 그릴 지도 확신이 없었거든. 그래서 누군가를 함부로 좋아할 엄두가 나지 않았어."

"그랬구나."

모든 걸 다 가진 것 같은 김태민도 나름의 아픔이 있었다.

어쩌면 세상은 꽤 공평한 지도 모른다.

"그래서 널 좀 원망하기도 했어."

"날?"

"응. 네가 수진 누나한테 영화 오디션 소식 전해줬잖아. 수진 누나가 너무 유명해져 버릴까봐. 네 잘못 아닌 것 알면서도, 그래도 좀 원망스러웠어."

그래, 충분히 그럴 수 있다.

누굴 좋아하는 일은 사람을 비합리적으로 만드니까.

나는 김태민과 잔을 부딪치고 쓴 소주를 들이켰다.

"그런데 태민아."

"응?"

"누굴 좋아할 땐 좀 이기적이어도 되는 것 같아. 이것저것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그냥 좋으면 좋다고 말하는 게 나을지도 몰라."

내가 이런 말을 하니까 좀 많이 부끄럽구나.

그래도 원래 남의 문제는 쉽게 답이 보이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충고질이란 게 어쩌면 자기가 듣고 싶은 이야기를 남에게 들려주는 과정일 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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