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력천재 미대생-122화 (122/203)

■ 122. 포항 □

전소혜 비주얼 디렉터의 추천으로 우리 사무실에 손님이 왔다.

그녀는 박혜주 부원장.

강남 대형 미용실의 메이크업 담당으로 광고부터 각종 행사 메이크업 전문이었다.

그래서 현장에서 전소혜와 자주 함께 일하던 사이라고 했다.

나이는 30대 초반.

그리고 상당히 세련된 미인이었다.

어쩌면 메이크업 전문가니까 보이는 걸 전부 믿어서는 안 될지도 모른다.

"거기 엄청 큰 곳 아닌가요? 부원장님이라니 대단하시네요."

"아니에요. 이름만 부원장이에요. 원래 그런 곳은 현장에서 무시당하지 말라고 직함을 거창하게 지어주거든요."

박혜주는 겸손하게 말했지만, 전소혜의 말에 따르면 상당한 실력가에 경력도 화려하다고 한다.

원래 섭외가 쉽지 않은 사람인데, 쇼핑몰 촬영이 재미있어 보여서 오늘 응했다고.

"촬영하다보면 아시겠지만, 입담도 좋은 분이예요. 그리고 살짝 큰언니 느낌도 나고. 그래서 쇼핑몰 고객들에게 반응도 좋을 거예요."

그리고 첫 화장법 수강생은 유미가 하기로 했다.

"진짜요? 오빠? 제가 해도 돼요?"

유미는 좋아서 방방 뛰었다.

이게 뭐라고 그렇게 좋아하는 건지.

하긴 강남 A급 미용실의 부원장에게 자기 얼굴에 맞춰 화장을 배울 수 있는 기회는 분명 드물긴 할 것이다.

그리고 당사자가 좋아하니까 생색도 충분히 냈다.

"그래, 유미야. 이제 논술 시험도 끝났으니까, 내 선물이야."

"고마워요. 정말."

그렇게 시작된 촬영.

"어머 예뻐라. 이제 대학생이 되겠네요. 맞아요. 지금이 화장이 제일 궁금할 때죠. 그럼 오늘은 제가 새내기 화장법을 가르쳐드릴게요."

박혜주는 정말 처음이란 게 믿어지지 않을 만큼 두런두런 잘 해나갔다.

유미도 충분히 예뻤고.

그렇게 첫 촬영을 편집해서 올렸더니 과연 고객들의 반응도 폭발적이었다.

특히 로드샵의 저가 화장품들 위주로 메이크업을 하고, 그 화장품들의 사용 후기를 유미가 직접 세세히 올린 게 아주 유효했다.

덕분에 댓글로 각종 요청과 문의가 끝도 없이 달렸다.

유나's 다이어리는 원래 인기 게시판이었는데, 게시판 개설 후 가장 뜨거운 반응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박혜주 부원장의 화장 강의를 당분간 계속 이어나가기로 결정했다.

'그나저나 나도 이제 여자 화장품을 공부해야겠지.'

나는 무엇이든 철저히 하는 성격.

손님들이 남긴 질문에 답글이라도 남기려면 나도 화장품을 공부해야 했다.

하지만 유나가 몇 번이나 설명해줘도 도무지 쉽지가 않았다.

'왜 똑같이 생긴 화장품들이 이름은 전부 다른 거지?'

그래도 나는 노력의 달인.

계속 공부하다보면 언젠가는 익숙해질 것이다.

그리고 최근 재미있는 사실 한 가지를 발견했다.

우리 사이트의 주문 금액은 대개 5만원에서 20만원 사이.

10대에서 20대 손님이 대부분이라 보통은 그 정도 금액에서 왔다 갔다 했다.

그런데 1~2백만원씩 한꺼번에 주문하는 사람들이 하루 몇 명씩 등장하고 있었다.

심지어 그들은 일주일에 두세 번씩 주문하기도 했다.

'대체 뭐하는 사람들이지?'

처음에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다시 살펴보니 그들 중 일부는 이름이 살짝 한국인과 달랐다.

'외국인이 왜? 설마?'

나는 중국의 오픈마켓 사이트들을 확인해봤다.

그랬더니 역시.

꽤 많은 판매자가 우리 사이트의 사진들을 그대로 캡처해서 우리의 옷들을 판매하고 있었다.

바로 우리의 옷들을 대량으로 구매해간 사람들이 다시 판매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종의 리셀러들.

나중에 들은 바에 의하면 그중엔 전문적인 상인도 있지만, 유학생들이 아르바이트 삼아서 하는 경우도 많다고 했다.

'그런데 그게 타산이 맞긴 한가?'

우린 동대문 도매상에서 가져온 옷을 충분한 마진을 붙여서 소매로 팔았다.

그런데 우리에게 소매로 사서 그 옷을 다시 마진을 붙여서 팔고 있었다.

언뜻 이해되지 않았지만, 그만큼 한국의 옷들이 중국에서 인기가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은성사에서 가져온 옷들은 대부분 중국산인데······'

중국에서 수입한 옷을 마진을 붙이고, 붙이고, 또 붙여서 다시 중국으로 파는 것이었다.

재미있는 일이었다.

우리 하이 유나의 사진을 무단으로 도용하는 것은 조금 찝찝하긴 하지만, 당장 우리가 손을 쓸 방법도 없었다.

그리고 그 리셀러들이 주문하는 금액도 적지 않아서 일단은 그냥 두고 보기로 했다.

'하지만 하이 유나가 계속 성장한다면······'

그렇다면 중국 쪽 매출을 붙잡을 방법도 궁리해봐야 할 것이다.

아무튼 하이 유나는 이쪽, 저쪽으로 꾸준히 성장하고 있었다.

지금은 방송 빨로 큰 재미를 보고 있지만, 방송이 끝나면 착실히 내실을 다져야 할 것이다.

* * *

"내일 나 포항 좀 다녀올게."

유나에게 말했다.

어머니를 뵌 지 너무 오래되었다.

그래서 당일 코스로 다녀올 생각.

"바쁠 텐데, 굳이 뭐 하러 내려와."

어머니는 오지 말라고 하셨다.

하지만 어머니를 뵙는 것은 나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

결승전을 앞두고 있는 상황.

어머니를 뵙고 오면 더 집중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포항까지 왔다가 금방 올라가야 하면 그냥 서울에서 쉬어. 뭐 하러 고생해."

"엄마 보는 게 나한테는 쉬는 거예요."

내가 계속 고집 부리자, 어머니는 내가 먹고 싶은 반찬은 없는지 꼼꼼히 물어보셨다.

어머니는 이제 백반집에서 하루 8시간을 일하신다.

그리고 중간에 브레이크 타임도 있고.

그래서 예전 감자탕집에서 12시간 설거지를 하실 때보다는 많이 여유로워지셨다.

"주원아."

"응?"

"나도 포항 같이 갈까?"

유나가 뜻밖의 말을 했다.

"포항에? 우리 엄마 만나러?"

"아니, 어머니 뵙는 건 아니고. 나도 바람 좀 쐬고 싶어서. 포항이 어떤 곳인지 궁금하기도 하고. 어차피 당일치기라며?"

하긴 모처럼 며칠간 휴가.

그리고 유미의 논술시험도 끝나서 유나도 같이 자유롭다.

내가 포항에 내려가면 유나도 꽤 심심할 것이다.

"같이 내려가서 나는 포항에서 혼자 돌아다니고, 넌 어머니 뵙고. 그리고 같이 올라오자. 대신 내려갈 때 기차타고 가자. 모처럼 책이나 좀 읽게."

당일치기 여행이라서 피곤하긴 하겠지만, 나쁘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다음 날 아침 일찍 출근해 사무실 일을 살펴본 후 유나와 함께 포항으로 출발했다.

"이런 것도 나쁘지 않네."

날씨도 좋았고, 기차 의자도 편했다.

동대구역에서 한 번 갈아타야 했는데, 딱히 불편한 것은 없었다.

나는 유나를 창가에 앉히고 우린 미리 준비해온 추리 소설 두 권을 꺼내 나눠 읽었다.

'오늘은 방송도, 예술도, 옷장사도 모두 잠시 잊어야지.'

그리고 간식 카트를 세우고 김밥 도시락과 콜라와 쥐포와 커피도 샀다.

내가 읽은 책은 'Y의 비극'.

유나가 읽은 책은 '가짜 경감 듀'.

"그래, 그래. 당신이 처음부터 수상했어."

유나는 쥐포를 질겅질겅 씹으며 혼잣말을 했다.

보통 기차는 어딘가로 여행하는 과정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기차에 앉아있다는 것만으로도 벌써 즐거운 느낌이었다.

유나 덕분인지, 간식 덕분인지, 추리 소설 덕분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무튼.

내가 읽은 책도 무척 재미있었다.

[ 잡생각 제거]를 사용했더니 포항에 도착할 때 쯤 추리 소설 한 권을 뚝딱 해치웠다.

'오랜만에 책도 한 권 끝냈다.'

무척 뿌듯한 귀향이었다.

유나와 함께라서 일부러 서울에서 조금 일찍 출발했다.

그래서 포항에 도착했을 때는 아직 어머니는 일하고 계신 시간이었다.

"와아. 포항이다!"

포항역에 도착하자마자, 바닷바람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바다 매니아인 유나는 꽤 들뜬 표정.

우린 시장도 구경하고.

중앙 상가도 산책했다.

어릴 때는 포항도 꽤 큰 도시라고 생각했는데, 서울에서 살다 오니 포항도 시골 같았다.

그리고 우린 천천히 어머니 집 쪽으로 향했다.

"저기가 내가 다니던 미술 학원."

오늘은 바빠서 원장 선생님을 찾아뵙기는 무리였다.

나는 미술학원에서 있었던 일들을 유나에게 들려줬다.

"와. 진짜 좋은 분이다. 그런데 그럼 너는 고작 1년 입시하고 우리 학교에 붙은 거야? 헐. 대박."

그렇게 은근슬쩍 내 자랑도 좀 흘려주고.

"그리고 저기가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

가까이는 가지 않고 멀리 보이는 학교를 가리켰다.

사실 초등학교 다닐 적에 좋은 기억은 별로 없다.

난 집이 가난했고, 아버지도 없었다.

그래서 그땐 빨리 어른이 되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그런데 스물한 살, 어른이 되자마자 엄청 예쁜 친구와 함께 이곳을 다시 오다니.

'물론 중간에 한 번 실패한 인생이 있긴 했지만.'

어쨌든 오늘은 유나 덕분에 내가 승자가 된 기분이었다.

"그럼 항상 이 길을 걸어다닌 거야?"

특별한 관광지도 아닌 도시의 귀퉁이를 유나는 재미있다는 듯 살펴봤다.

"그리고 저기는 내가 신문 배달하던 아파트 단지."

"고등학생 때도 알바 했구나. 힘 들었겠다."

"처음엔 힘 들었는데, 나중엔 재미있었어. 한쪽 겨드랑이에 신문을 끼고, 숨이 찰 때까지 달리면 내가 살아있는 느낌? 아파트 현관에 정확히 신문을 던지면 3점 슛한 느낌도 들고."

유나가 너무 재미있게 들어줘서 나도 모르게 이것저것, 내가 살아온 이야기들을 신나게 떠들었다.

"그래도 비오는 날 새벽에는 정말 나가기 싫었거든. 처음에는 우비 입고 배달했는데, 시야도 가리고 달리기도 불편한 거야. 그래서 나중엔 우비도 벗고, 그냥 실컷 비 맞으면서 배달했어."

"야, 그러다 감기 걸리면 어떡하려고."

그렇게 정신없이 이야기하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인생의 경험이란 누가 귀기울여 들어줄 때 비로소 완성되는 게 아닐까?

힘들었던 내 10대 시절이 지금 유나 덕분에 완성되고 있는 지도 몰랐다.

"우리 주원이 고생 많이 했구나. 그래도 좋은 학교도 가고, 좋은 친구도 많이 사귀고. 참 잘했어요."

유나의 말 한마디에, 힘들었던 기억들이 기분 좋은 추억으로 다시 태어났다.

내 사소한 지난 일들을 궁금해 하고, 재밌게 들어주고, 또 칭찬까지 해줘서 너무 고마웠다.

그렇게 걷다보니 어느새 어머니 퇴근 시간이 다가왔다.

"미안, 같이 저녁 못 먹어서."

내가 어머니를 뵙고, 저녁을 먹는 동안 유나는 혼자 돌아다니다, 카페에서 책을 마저 읽는 것이 원래의 계획이었다.

그리고 같이 밤차로 서울로 가기로 했다.

하지만 유나가 나를 붙잡았다.

"그러지 말고, 나도 같이 집에 가자. 여기까지 왔는데 인사도 안 드리고 그냥 가려니까 더 이상한 것 같아. 나도 같이 가도 괜찮지?"

당연히 괜찮지.

어머니는 유나를 좋아하실 게 분명했다.

지난 생에는 집에 친구를 데려간 적이 없었는데, 또 하나 새로운 업적을 추가하는 기분이었다.

유나는 집 근처에서 과일 바구니도 하나 샀다.

그리고 어머니는 예상대로였다.

처음엔 조금 놀라셨지만, 곧 함박웃음을 지으셨다.

"아이고, 방송에서 봤어요. 방송보다 훨씬 더 예쁘네요. 그리고 그동안 골라서 보내준 옷들 정말 잘 입었어요. 주위에서 부럽다고 난리예요. 대체 그 예쁜 옷들을 어디서 구했냐고."

어머니가 준비한 저녁은 바지락 된장찌개와 오징어 젓갈, 고등어 조림.

지금 일하는 백반집에서 배운 레시피라고 했다.

"너무 맛있어요, 어머니."

오늘 유나는 어머니에게 예쁨 받기로 작정이라도 했는지 와구와구 복스럽게 한 그릇을 뚝딱 비웠다.

옆에서 보고 있던 나마저도 아재 미소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그러니 어머니는 아예 유나에게 홀딱 반해버린 것 같았다.

그렇게 밥도 먹고, 과일도 먹고.

어머니는 궁금한 게 뭐 그리 많은지 유나에게 이것저것 물어보셨다.

거의 두 달 만에 본 아들은 이제 거의 뒷전이었다.

"미안해서 어떡해요. 집이 좀 넓었으면 재워서 보낼 텐데."

어머니는 내 어깨를 때리며 나를 나무라셨다.

"유나까지 데려올 거면 하루 날을 잡아서 느긋하게 오던가. 유나 피곤하게 뭘 이렇게 급하게 왔다 가."

내가 피곤한 건 걱정도 안 하시고.

"아니에요, 어머니. 제가 맘대로 따라온 거예요."

어머니는 내가 구해드린 원룸에서 지내고 계셨다.

'그땐 원룸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나도 이렇게 빨리 며느리 후보를 집에 데려갈 줄은 몰랐지.

"아무튼 너무 고마워요. 우리 주원이 촌스럽고 둔하긴 해도 그래도 꾀도 안 부리고 항상 부지런해요. 엄마 속도 안 썩이고. 그러니 앞으로도 잘 이끌어줘요. 잘못하면 따끔하게 야단치고."

그렇게 어머니는 유나의 손을 꼭 붙잡고 부탁하셨다.

같은 말을 몇 번씩이나 당부해도 계속 아쉬운 지 어머니는 유나의 손을 쉽게 놓지 못하셨다.

그리고 우린 서울행 심야 고속버스에 올랐다.

"아, 배부르다. 저녁도 잘 먹었다. 어머니 너무 친절하시다."

유나는 배를 두드리며 창가 자리에 앉았다.

오늘 하루 내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까지, 거의 내 모습 전부를 유나에게 보여줬다.

그러니 홀가분하기도 하고, 뿌듯하기도 하고.

버스는 출발하고, 유나는 창밖을 바라봤다.

그리고 나는 유나의 옆얼굴을 쳐다봤다.

유나가 너무 똑똑해서 가끔 나이보다 훨씬 어른스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눈꺼풀이나 볼살, 턱에 남아있는 곡선들을 보면 아직 유나가 어리다는 게 실감이 났다.

'내가 미대생이 맞긴 맞구나.'

사람의 얼굴을 외곽선과 양감으로 살피다니.

아무튼.

지금처럼 유나가 어리다는 걸 실감할 때마다, 유나를 잘 보살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보살피고 싶은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이 나를 다시 행복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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