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9. 마법 □
이미연의 사무실.
이미연은 차가운 웃음을 머금고 앉아 있었다.
그리고 김우철 PD와 이기호 CP, 최희영 작가까지 환한 얼굴로 이미연과 마주 앉아 있었다.
"어제 신문 기사입니다. 방송 전부터 저희를 비난하던 신문인데, 이제 태도가 180도 바뀌었습니다. 젊은 예술가들을 위해, 시즌제로 나와도 되지 않겠냐고 썼네요."
시즌제는 무슨.
이미연은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이미연은 친동생처럼 여기는 김태민이 이 쇼를 통해 주목받기를 원했다.
김태민의 실력은 진짜였고,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었다.
그녀는 그렇게 믿었다.
하지만.
'그래, 무대 조명까지는 그렇다 치자. 그래도 감자튀김은 정말 너무 했잖아. 이 녀석들이 진짜······'
평생 대부분의 일을 뜻대로 해 온 이미연.
이제 그녀의 인내력은 거의 바닥을 드러냈다.
그런데 타버린 그녀의 속을 당연히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영 아트의 평가도 좋고, 시청률도 좋았다.
귀국하자마자 첫 기획에 이정도면 대박인 셈이었다.
그러니 모두들 신나게 아부와 공치사를 퍼부었다.
"아, 한국대 팀이 4강까지 오를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4강에 남은 유일한 아마추어 팀입니다. 역시 실장님의 안목이 탁월하십니다. 처음부터 이 팀을 주목하라고 하셔서 왜 그런가 했더니, 역시 예감이 있으셨군요."
예감은 무슨.
이미연의 뜻대로 된 건 하나도 없었다.
4강까지 진출한 건 분명 대단하다.
하지만 김태민에 대한 언급은 '잘생겼다'는 댓글뿐이었다.
이건 절대 그녀가 그린 계획이 아니었다.
이기호 CP의 아부에 이미연은 오히려 짜증만 났다.
거기에 이어지는 김우철 PD의 칭찬.
"그거 보셨어요? 이 친구들 운영하는 하이 유나가 여성복 사이트 부문, 한국 랭크 3위에 올랐더군요. 이 친구들도 뒤로 대박쳤어요. 쇼도 살리고 자기들도 챙길 거 다 챙기고. 귀여운 친구들이에요."
"아, 맞다. 까먹을 뻔 했네요. 배동식 감독이 이수진의 오디션 문의를 TJ 엔터에 넣었다더군요. TJ 엔터는 거절할 이유도 없고, 오히려 밀어줘야 하나 고민 중이라더군요."
"저는 그 신춘문예 그 친구가 재밌더군요. 아주 그냥 현장에서 보고 있으면, 저희가 원하는 말만 어찌 그리 쏙쏙 골라서 해주는지. 방송 천재입니다. 방송 천재."
이 사람들도 진짜······
"그래요. 잘 됐군요. 알겠으니까 모두 나가보세요."
하이 유나? 팀 수진? 신춘문예?
기껏 밥상을 차려놨더니 엉뚱한 사람들이 숟가락을 얹고 있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의 원흉은 이주원이라는 그 꼬마가 분명했다.
확신은 없지만 그냥 그럴 것 같았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벌써 4강이라는 것.
이제는 진짜 경쟁을 해야 한다.
좀 늦은 감이 있긴 하지만, 이젠 더 이상 김태민을 숨기기도 힘들 것이다.
'그래, 요놈들. 누가 이기나 보자.'
이미연은 이마를 누르며 이를 악물었다.
* * *
이제 우리도 5회차 경연.
나름 방송에 익숙해졌다.
그래서 쉬는 시간 쪼르르 옆 대기실로 찾아가는 여유가 생겼다.
거긴 바로 강우 Crew의 대기실이었다.
똑똑똑.
이제까지 우리는 정신이 없어서 인사를 받기만 했다.
하지만 상대는 꽤 괜찮은 아티스트들.
그리고 우리보다 나이도 많으니까 먼저 인사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이렇게 인사를 하며 긴장도 풀고, 상대가 어떤 사람들인지 탐색도 하려는 계획이었다.
"안녕하세요. 팀 수진입니다. 인사드리러 왔습니다."
수진 선배는 어떤 사람이든 강제로 호감을 끌어낼 수 있다.
그래서 우린 수진 선배를 앞세우고, 강우 크루의 대기실 안으로 들어갔다.
"아, 반가워요."
강현민과 우정용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우리를 반갑게 맞아줬다.
강현민은 힙합 의류 브랜드의 파트너고, 우정용은 타투이스트로도 일한다.
그래서 굉장히 쎈 사람들일 줄 알았는데, 실제로 보니 순박한 공대 형님들 이미지였다.
특히 둘 다 안경을 쓰고, 단정한 스포츠머리를 하고 있어서 뒷골목 예술가의 포스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친절한 태도 안에서 은근히 자신감이 풍겼다.
'실력이 주는 당당함 같은 걸까.'
경연 상대이긴 하지만 그런 점은 닮고 싶은 부분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이제까지 계속 팀 수진을 응원했습니다. 여러분들 보면서 정말 감탄했습니다. 우린 여러분 나이 때, 여러분의 반의 반도 못했거든요. 이번에도 기대하겠습니다."
"기대는요. 저희야 말로 열심히 하겠습니다. 많이 가르쳐주세요."
그렇게 덕담도 하고, 악수도 나누고 훈훈하게 대기실을 나왔다.
긴장을 풀려고 간 건데, 그들을 봤더니 오히려 더 긴장되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이 어떤 작품을 할지, 또 우린 거기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기대되기도 했다.
그렇게 정신없이 시작된 방송.
진행자인 정경아는 오늘도 역시 과장된 목소리로 크게 외쳤다.
5회 차 녹화라도 저 하이톤은 적응되지 않았다.
'이거 끝나면 다시는 방송 근처에는 얼씬도 안 해야지. 그리고 얌전히 졸업이나 하자.'
나는 그렇게 마음속으로 굳게 다짐했다.
그리고 스튜디오의 대형 스크린에는 젊은 가수들이 소개되었다.
"네, 이 분들은 최근 주목받고 있는 홍대의 인디 밴드들입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젊고 신선한 음악을 하시는 분들이죠. 그렇습니다. 이번 경연의 주제는 바로 인디 밴드의 음악입니다."
반갑기도 하고, 안 반갑기도 한 주제였다.
홍대의 인디 밴드들은 원래 미대생들과 협업을 자주 한다.
앨범 재킷부터 공연 포스터, 무대 연출이나 뮤직 비디오, 의상까지.
대학생이나 인디 밴드나 모두 가난하니까 서로 돕고 사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공통점도 있는지, 유난히 미대생 출신 밴드도 많다.
물론 나야 뽕짝을 좋아한다.
그래도 인디 밴드의 노래라면 팀 수진의 멤버들이 다른 팀보다 공감하는 부분이 더 많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강우 크루의 경우엔 예외.
그들은 이미 힙합 뮤지션들과 협업 경험이 있으니 우리보다 훨씬 유리할 것이다.
"이번 4강전 준결승을 위해 저희 영 아트가 모두 6팀의 밴드들을 모셨습니다. 4팀의 경연자들은 여섯 밴드 중 한 팀의 노래를 골라, 그 음악을 작품으로 표현해주시면 됩니다."
그리고 정경아가 다시 외쳤다.
"공정성을 기하기 위해, 다른 팀이 고른 밴드를 골라도 상관없습니다. 여러분이 만든 작품은 여러분이 고른 음악과 함께 전시됩니다. 뮤직 비디오든, 조각이든, 그림이든, 혹은 다른 영상이든 무엇이든 음악을 주제로 자유롭게 표현해주시면 됩니다."
이번에 주어진 기간은 6일.
노래는 3분 남짓한 길이다.
하지만 뮤직 비디오의 경우, 온갖 이미지와 감각이 총동원된다.
그러니 절대 길지 않은 시간.
우리가 어떤 형식을 취할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이번에도 정말 바쁜 주제였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
난 영 아트 측에서 정해준 여섯 곡의 노래를 꼼꼼히 들으며 생각을 정리했다.
다른 멤버들도 마찬가지.
일단 여섯 곡 중 우리 노래를 골라야, 더 깊은 의논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시간이 짧은 만큼, 머뭇거릴 겨를이 없었다.
* * *
나는 여섯 개의 노래 중 한 곡의 앨범 재킷을 확인했다.
가수의 이름은 '이세연 밴드'.
밴드라고는 했지만 멤버는 단 한 사람 이세연 뿐이었다.
노래의 제목은 '이브닝'.
[ 집에 오는 길, 늘 타던 버스, 늘 지나던 길. 거리를 유심히 살펴봐. 오늘은 글자를 읽을 수 있는지.]
그렇게 소곤소곤 시작되는 노래였다.
'이 노래가 제일 우리랑 닮았어.'
우리와 비슷한 나이의 가수가 독백하는 것.
편하게 들리는 가사와 멜로디.
그리고 시각적으로 설명되는 가사들.
우리에게 적당하다고 여겨졌다.
나는 그 생각들을 회의에서 말했다.
너무 당연하게, 오히려 신기할 만큼 모두 동의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이세연의 이브닝이 제일 끌려. 하지만 다른 팀도 마찬가지 아닐까? 그래서 같은 노래를 골라서 서로 비교되지는 않을까?"
"그건 어쩔 수 없어. 그리고 적어도 강우 크루는 이세연 밴드를 선택하지 않을 거야. 거긴 남성적인 밴드를 고르지 않을까?"
결국 우린 이세연 밴드로 결정했다.
다른 팀의 선택이 두려워 피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이제 노래는 정했네. 그럼 그 다음은?"
"브레인스토밍 식으로 아무거나 편하게 말해 보죠. 저부터 시작할게요."
내가 먼저 나서서 의견을 말했다.
"뮤직 비디오든, 그림이든 뭘 선택하든 반드시 신경 써야 할 부분이 있다고 생각해요. 이 노래의 길이는 3분 20초. 모든 음악 안에는 시간이 포함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어떤 작품을 만들더라도, 그 안에 3분 20초가 포함되어 있어야 해요."
"동의해."
"시간을 포함한다는 게 어떤 의미야?"
김태민이 진지하게 물었다.
"음악에 맞춰 움직이거나, 혹시 고정된 작품이라면 적어도 3분 동안 관객들의 시선을 붙잡을 수 있어야 해."
내가 답하긴 했지만, 나도 대책이 있어서 대답한 건 아니었다.
그냥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을 뿐.
"움직이는 작품이라면 키네틱 아트를 말하는 거야?"
이 질문은 형원 선배.
키네틱 아트란 말 그대로 움직이는 예술 작품을 말한다.
모빌처럼 자유롭게 움직일 수도 있고, 로봇처럼 전기 장치에 의해 움직일 수도 있었다.
로봇을 만들 경우에는, 관절과 구동장치를 정교하게 만들고, 아두이노로 프로그램을 짜서 움직임을 제어한다.
다시 말해 우리의 능력 밖이라는 이야기였다.
참고로 우리나라에도 유명한 키네틱 아트 작가들이 꽤 있다.
"키네틱 아트도 있지만, 영상도 고려해볼 수 있어요."
그리고 정화 선배가 인터넷을 검색해 강우 크루가 출연한 뮤직 비디오를 재생했다.
힙합 가수의 랩에 맞춰, 강우 크루 두 사람이 벽에 스프레이로 즉석에서 그림을 그렸다.
"이런 건 너희들도 할 수 있지 않아? 미대생들은 전부 금손이잖아."
형원 선배가 해맑게 물었다.
일단 적어도 나는 못한다.
김태민은 글쎄.
붓으로 종이 위에 그리는 건 가능할지는 몰라도, 락카 스프레이로 벽에는 그리지는 못할 것이다.
"그래피티라면 즉흥적으로 그리는 과정이 예술의 일부로 의미를 가질 수 있어요. 하지만 우리가 그리는 그림이라면 달라요. 그리는 과정 자체는 큰 의미는 갖지 못할 거예요. 눈요깃거리는 될 수 있겠죠."
"그렇구나."
우리는 이런 식으로 계속 의논했지만, 모두 뾰족한 아이디어는 내놓지 못했다.
그리고 마침 김수희 작가에게서 문자가 왔다.
"그럼 이세연 본인에게도 물어보죠. 방금 번호가 도착했거든요."
나는 스피커폰으로 노래의 주인인 이세연에게 전화를 걸었다.
"안녕하세요. 영 아트에 출연중인 팀 수진의 이주원입니다."
"아, 안녕하세요!"
해맑은 대답이 살짝 얄미웠다.
나는 이세연에게 우리가 그녀의 노래를 선택한 사실을 설명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혹시 노래에 관한 부연이나, 아니면 저희에게 바라는 점이 있으세요?"
"음, 글쎄요."
이세연은 한참 뜸을 들였다.
스피커폰이 끊어진 건지 확인하려 할 때 쯤 그녀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이브닝, 그 노래는 그러니까, 이런 순간을 담은 거예요. 평범한 일상이 갑자기 낯설어지고, 그래서 당연하다고 생각하던 순간들이 사실은 마법처럼 신비로웠던 건 아닐까. 설레기도 하고 그립기도 하고······"
마법이라······
답을 얻으려 건 전화인데 더 난해해져 버렸다.
설레면서 그리운 작품을 6일 안에 준비하려면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네, 알겠습니다. 그럼 고민해 보겠습니다."
"네, 수고하세요!"
이세연은 한 번 더 우리의 절망을 아랑곳하지 않는 상큼한 인사를 남겼다.
나는 꾸욱 통화 종료를 눌렀다.
회귀자의 승승장구도 여기까지인 것인가?
한숨이 나왔지만, 팀원들에게 약해 보일 순 없지.
그래서 속으로 삼켰다.
그런데 그때.
"저기······"
김태민이었다.
"응?"
"마법이라니까 말인데, 마법까지는 아니고, 내가 마술 비슷한 거는 할 수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