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8. 동대문. □
밤에는 동대문에 갔다.
같이 간 멤버는 나, 김태민, 한유현, 수진스 세 명, 그리고 유미.
이런 걸 빈익빈 부익부라고 표현해도 될까.
동대문은 처음 쇼핑몰을 시작하는 사람에게는 상당히 냉혹하다.
'요샌 개나 소나 쇼핑몰을 한다'라고 할 만큼 쇼핑몰을 쉽게 생각하고, 쉽게 도전했다가 쉽게 접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었다.
창업비용이 크지 않으니까 그런 사람들은 '좋은 경험 했다고 치지 뭐.' 그래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도매상인들이 쇼핑몰 시작하는 사람들을 귀찮아하는 게 이해가 되기도 해.'
물론 그 중에는 정말 열심히 하는 사람들도 있다.
우리도 그 중 하나였고.
하지만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고 나면 동대문과 쇼핑몰의 입장이 반대가 된다.
쇼핑몰들은 가만히 있어도 도매상들이 알아서 촬영용 협찬을 제공하고, 어떻게든 자기 옷을 사이트에 올리려고 애쓴다.
그래서 우리의 사입대행 업체는 우리가 주문한 옷 말고도 매일 한 보따리씩 도매상들이 강제로 들려 보내는 협찬들을 가지고 오곤 했다.
처음에는 촬영용 협찬이 들어오면 좋아했다.
'공짜로 상품을 늘릴 수 있는 기회니까.'
하지만 이제는 협찬이 너무 많이 들어와서 사전 협의 되지 않은 협찬은 그냥 돌려보낼 정도였다.
그래서 우린 동대문에 나가지 않고 쇼핑몰을 운영해도 별 문제가 없을 정도였다.
사무실에 가만히 앉아 있어도 잘나가는 매장들의 인기 신상들을 다 받아볼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럼 안 되지.'
동대문에 나가는 것은 신상 이상의 의미가 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는다.
어떤 옷이 인기인지, 어떤 옷이 잘 팔리는지 가장 빠르고 정확하게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동대문 출근이었다.
도매상 앞의 손님 줄은 어떤 패션 잡지나 MD의 분석보다도 훨씬 더 정확한 지표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동대문에 오거나,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모두 옷에는 자신 있는 사람들.'
그래서 그들이 입고 있는 옷이나 마네킹, 혹은 직원들의 코디는 항상 새로운 아이디어를 주기도 한다.
그리고 거래처들이 들려주는 이야기와 정보들도 꽤 유용하다.
최근에 뜨는 사이트는 어디인지, 그들은 어떤 스타일로 옷을 입고, 어떤 포털에 광고하는 지.
동대문은 늘 소식에 민감하다.
'아마 우리 소문도 곳곳에 퍼지고 있겠지.'
아무튼 그런 이유들로 나와 유나는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은 동대문에 나가려 한다.
물론 낮에 학교에 다니는 사람들이 밤에 시장에 나오는 것은 쉽지가 않다.
'하지만 세 사람은 동대문을 좋아하니까.'
그나마 다행.
싫어하는 사람들을 억지로 새벽에 동대문에 보냈으면 미안했을 것이다.
'아마 그랬다면 옷 장사를 했으면 안 됐겠지.'
어쨌든.
최근에는 바빠서 한 번 빼먹었다.
그러니 그만큼 오늘은 돌아야 할 곳이 많았다.
태민과 유현이를 짐꾼으로 딸려 보내고, 나는 수진스 세 명과 헤어졌다.
"주원아, 너도 짐 많잖아. 나는 너를 도와주면 안 될까?"
순진했던 태민이가 이제 점점 영리해지고 있다.
"아니, 태민아. 난 괜찮아. 요즘 방송 때문에 세 사람 유명해졌으니까 네가 잘 지켜줘. 그럼 부탁할게."
"그럼, 형. 저라도 형을 따라가서 도울까요?"
"아니. 너도 이제 당당한 남자야. 샴페인도 마셨으니까. 누나들을 잘 지켜줘. 유현아, 파이팅!"
그렇게 나는 지옥에서 혼자 탈출해 여유롭게 내 일을 봤다.
그리고 오랜만에 은성사에 들렀다.
"오, 이사장 오랜 만이야."
"잘 지내셨죠?"
은성사 사장은 오랜만에 만난 삼촌처럼 나를 환영했다.
은성사 사장은 중국 의류 수입의 고인물이었고, 괜찮은 옷을 괜찮은 가격에 공급할 수 있는 루트를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그렇게 번 돈으로 동대문 상가들을 사들였기 때문에, 그 상가에 입주한 상인들을 내게 소개해주기도 했다.
'처음엔 내가 일방적으로 신세지는 입장이었지만······'
갑자기 하이 유나가 성장하는 바람에 이제는 공생하는 대등한 거래처가 되었다.
결국 하이 유나의 성공은 은성사 사장님의 안목을 증명하는 또 한 번의 기회가 된 셈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왜 혼자 계세요?"
은성사는 항상 사장님 내외가 같이 매장을 지키곤 했다.
그런데 오늘은 남자 사장 혼자 있었다.
"아, 둘째 놈이 귀국했거든. 군대 때문에. 그래서 와이프가 챙긴다고 못 나왔어."
은성사 사장님 내외는 구수한 시골 아저씨처럼 생겼다.
그런데 두 분의 아들들은 영국이며 미국이며 조기 유학해서 세계를 누비며 학위를 수집하는 중이었다.
공부를 굉장히 잘하는 느낌은 아니고, '역시 돈 많은 집 자제들은 한국을 떠나는 구나', 정도의 느낌.
은성사는 항상 시끌벅적 환영해주는 분위기였는데, 남자 사장님 혼자 있으니 분위기가 색달랐다.
그런데 갑자기 사장님이 진지한 표정을 짓더니 주위를 한 번 쓰윽 둘러봤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이, 이 사장. 잠시 이리 안으로 들어와 보게."
"네?"
나는 높이 쌓인 옷더미를 건너서 매장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사장님이 건네는 종이컵 커피를 받아들었다.
"저기 이 사장."
"네."
"내가 오늘은 자네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네. 나이든 사람 노파심일 수도 있는데 걱정돼서 하는 말이니 그냥 들어주게."
"말씀하시죠."
"자네 요즘 여기저기서 연락 많이 오지? 원래 젊은 사람이 돈 벌면 어떤 식으로든 사람들이 꼬이게 마련이야. 괜찮은 땅이 나왔다. 잘 나가는 사람은 요즘 이 차를 탄다. 자기가 기막힌 아이템을 찾았는데 선착순으로 투자자를 모집한다. 그런 식으로 말이야."
"아······"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그런데 정말 그렇게 연락하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다만 나는 너무 바빠서 전화 수신 차단을 걸어뒀다.
그래서 내게 전화를 걸 수 있는 사람은 내 전화기에 저장된 몇 명이 전부였다.
그랬더니 하이 유나 고객 센터로 하루에도 몇 건씩 이상한 전화들이 와서 내게 번호를 남기곤 했다.
물론 나는 회귀자.
그런 유혹에 빠질 만큼 어리지는 않았다.
"이 사장. 자네는 워낙 똑똑하니까 그래도 큰 걱정은 안 하네, 그래도 자네는 너무 어려. 어린 사람은 원래 잘 속기 마련이지. 돈은 쉽게 벌려고 하면 안 돼. 쉽게 벌 수 있다는 사람들은 전부 사기꾼이야. 그리고 젊은 남자들이 돈 벌면 꼭 외제차를 사. 외제차 타면 안 돼. 돈이 들어오는 건 결국 한 때니까, 들어올 때 수도꼭지를 잘 잠가야지. 알겠나?"
뭐라 해야 할까.
같은 말이라도 누가 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는 것 같다.
다른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면 꼰대의 잔소리로 들렸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말 동대문의 큰손이, 게다가 나를 여러 가지로 챙겨주던 사람이 이런 말을 하니까 오히려 고맙게 여겨졌다.
"알겠습니다. 외제차는 절대 사지 않겠습니다."
"언제까지나 사지 말라는 게 아니야. 충분히 벌어놓고 사라는 거지. 내가 한 두 명 본 게 아니야. 여긴 옷 한 벌 터지면 십억, 이십억이 금방이야. 그럼 좋은 차 사고, 여자 만나고, 도박하고, 동업자끼리 싸우고. 그러다 결국 길바닥에 나 앉아. 준비가 안 된 사람들은 성공이 오히려 독이야. 이 사장은 안 그럴 거라고 내가 믿겠네."
난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쉽게 돈 벌려고 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하나 더. 젊은 남자가 돈을 지키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 뭔지 아나?"
"뭐죠?"
"결혼이야. 그것도 그냥 결혼으로는 안 돼. 요즘은 쉽게 헤어지니까. 애까지 낳아서 품에 딱 안아야 해. 남자는 간호사가 아이를 안겨주는 순간, 정말 정신이 번쩍 들거든. 사람들은 내가 쉽게 성공한 줄 알아. 하지만 나도 와이프랑 아이들 없었으면 지금 뭘 하고 있을까, 생각만 해도 아찔할 때도 있어."
"그 정도로 세상이 달라지나요?"
"달라져. 확 달라져. 그러니 꼭 빨리 결혼하게. 아이도 많이 낳고."
음.
나를 진심으로 걱정해서 해주는 말이니까 은성사 사장님의 조언을 꼭 따라야 할 것 같다.
'아이를 받아서 품에 안으면 정신이 든다라······'
그 느낌이 정말 궁금하기도 했다.
'사장님이 유나도 불러서 같은 말을 한 번 해주면 크게 도움이 될 텐데······'
하지만 아쉽게도 거기까지 챙겨주진 않았다.
그리고 유나에게 전화가 왔다.
"우리 토스트 먹을 거니까, 빨리 달려와!"
동대문 곳곳에는 토스트를 팔았다.
식빵을 마가린에 눅진하게 구워서 야채와 함께 구운 계란을 가운데 넣고, 설탕과 케첩을 잔뜩 뿌린 토스트.
음료수도 같이 팔지만, 길거리 토스트는 역시 오뎅 국물이랑 같이 먹어야 제 맛이다.
토스트를 주문하고, 오뎅 국물을 컵에 미리 담아두면 토스트가 나올 때 쯤 국물이 알맞게 식는다.
내가 밖으로 나가니까 팀 수진 멤버들이 포장마차 앞에서 토스트를 하나씩 손에 쥐고 저마다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귀엽기도 하고, 안심이 되기도 했다.
사기를 당하거나, 아니면 동업한 친구들끼리 싸우거나 하려면 일단 돈 욕심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겨우 계란 토스트에 이렇게 행복해하면······'
사기를 당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내 든든하고 안전한 친구들.
"국물 식으라고 미리 떠 놨어."
내가 먹는 방법을 아는 유나가 종이컵과 토스트를 건넸다.
큼지막한 토스트는 언제나처럼 맛있었다.
그리고 토스트를 다 먹고, 우린 닭볶음탕도 먹으러 갔다.
외제차를 사지 않는 대신, 친구들 먹이는데 돈을 쓸 생각이다.
* * *
그리고 드디어 결전의 날이 밝았다.
진짜 본격적인 결전은 아니고, 다음 경연을 위한 미션을 받는 자리.
이제 4팀 밖에 남지 않아서, 그만큼 남은 팀들을 꼼꼼히 촬영한다.
그래서 방송국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VJ들이 우리를 따라다니며 질문을 건넸다.
"강우 크루와 겨루게 되었는데 긴장되지 않으세요? 상대팀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강우 크루는 이번에 우리와 겨루게 될 아티스트 팀.
역시 시드 배정자다.
노련한 회귀자답게 나는 전부터 강우 Crew를 꼼꼼하게 조사했다.
강우 Crew는 강현민과 우정용 두 친구로 시작한 그래피티 팀이었다.
두 친구의 성을 따서 강우 Crew.
그래피티라면 흔히 락카 스프레이로 그리는 그림만 떠올린다.
하지만 강우 Crew는 스프레이 뿐만 아니라, 붓과 페인트로 직접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판화 스텐실로 벽에 그림을 찍기도 했다.
시작은 둘 뿐인 작은 그래피티 팀이었지만, 실력이 소문나며 둘을 따르는 Crew도 많아졌다.
그리고 힙합 아티스트의 앨범 재킷부터 의류 브랜드, 각종 광고까지 영역을 넓히더니 최근에는 미술관 전시까지 했다.
또 강우 Crew는 세계적인 그래피티 팀인 브릭스에 참여해 정기적으로 세계 순회 전시까지 했다.
그야말로 한국을 대표하는 그래피티 아티스트 팀.
유인호는 영화배우의 유명세를 이용하기를 망설이지 않았다.
다른 시드 배정자인 최성진도 미국 교포 엄친아 이미지를 적극 활용했다.
하지만 강우 Crew는 진짜 실력으로 승부했다.
오히려 그래피티가 한국에서는 마이너라서, 해외의 유명세에 비해 한국에서는 조금 덜 알려진 측면도 있다고 했다.
"강우 Crew의 작품들을 꼼꼼히 찾아봤습니다. 멋진 형들과 같이 방송하게 되어서 정말 영광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긴장은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강우 Crew와 겨룬다기보다는, 많이 배우면서 즐겁게 우리의 작품을 만들고 싶습니다."
형원 선배가 카메라를 향해 답변했다.
그런데 답변을 위한 답변이 아니라, 우리 모두 정말 그런 생각이었다.
우린 겨우 20대 초반의 미대생.
그래서 상대의 작품을 평가하는 것에는 조심스러워야 한다.
하지만 인터넷으로 강우 Crew의 작품들을 찾아보며 우린 모두 같은 생각을 했다.
'이 팀은 진짜야.'
어쩌면 이번에야 말로 팀 수진이 사상 최강의 상대와 겨루게 된 것인지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