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2. 문화의 밤. □
날이 제법 쌀쌀해졌다.
어느새 출시된 수진 하프 코트도 순항 중이었다.
[ 헐, 하프 코트를 이 가격에. 역시 믿고 찾는 하이 유나예요! ]
[ 어제 입고 갔더니 우리 반 난리 났어요. 이제 저는 영란 여고 공식 하이 유나 홍보 대사입니다. ]
[ 그런데 나는 왜 진언니 같은 핏이 안 나오죠? 그래도 이 가격에 이런 퀄리티는 어디서도 못 구하니까, 부지런히 입어 볼랍니다. ]
경영자의 입장에서라면, 조만간 텔레비전에 출연해 한 번 더 빵 터뜨려준다면 더 이상 바랄게 없었다.
하지만 나는 20살 친구들과 함께 일하는 회사의 대표.
내가 중심을 잘 잡아야 했다.
'너무 서둘러도 안 되고, 너무 욕심내도 안 돼.'
그리고 똑같이 조심해야 할 게 하나 더 있었다.
바로 유나였다.
소원 내기에서 내게 진 후 유나에게 이상한 버릇이 하나 생겼다.
"유나야. 오피스텔 오는 길에 편의점 들러서 캔 커피 두 개만 사줘."
"캔커피 좀 그만 마셔! 그런데 혹시 그거 소원이야?"
"유나야. 오늘 1식당에 꽁치구이 나온데. 점심은 1식당 가자."
"그래, 그게 네 소원이라면."
유나는 어떻게든 내 소원 쿠폰을 처리하려고 전전긍긍 무척 머리를 쓰고 있었다.
하지만 어림도 없지.
어떻게 얻은 쿠폰인데.
그런데 하루는 학교 게시판에서 흥미로운 벽보를 봤다.
[ 문화의 밤]
[ 단돈 천원으로 명작 영화를 감상하세요. ]
학생 회관에서 종종 영화를 틀어주는 모양이었다.
무료일 때도 있고, 가끔은 돈을 받고 간식이나 음료까지 제공하기도 했다.
천원이면 괜찮은 가격.
'원래는 그냥 지나쳤는데.'
그런데 마침 계절이 영화랑 잘 어울렸다.
낙엽도 흩날리고, 날도 흐리고.
문득 영화가 끌리는 날이었다.
'어디 보자. 상영작은···.'
[ 이터널 선샤인 ]
사실 별로 좋아하는 영화가 아니었다.
워낙 유명한 영화라서 전생에서 몇 번 시도해보긴 했지만, 매번 실패했다.
나랑은 맞지 않는 것 같았다.
'특히 여주인공의 알록달록한 머리가 싫었지.'
하지만 오늘은 영화보다도 문화의 밤이라는 행사에 들러보고 싶었다.
'굳이 영화를 끝까지 볼 필요도 없지.'
나는 다시 돌아온 스무 살 대학생.
가을을 맞아 학교의 자질구레한 행사들에 참여해보고 싶었다.
일종의 대학생 체험이랄까.
그동안 너무 바쁘게만 살았다.
마침 옆에 유나가 서 있었다.
"유나야. 저 영화 보러 가자."
"그거 소원이야?"
절대 안 되지.
소원 쿠폰은 아끼고 아꼈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어둡고 습한 소원에 쓸 생각이다.
"그럴 리가. 싫으면 나 혼자 가고."
유나는 소원 쿠폰을 처리하지 못한 게 분한 모양이었지만 그래도 나를 따라왔다.
어차피 우리는 일도, 학교도, 집도 전부 동선이 겹치기 때문에 같이 다니는 게 편했다.
입구에서 나눠주는 밍밍한 커피를 한 잔 받아들고, 안으로 들어가자 딱딱한 의자들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이런 의자에 어떻게 두 시간을 앉아 있으라고.'
피식 웃음이 나긴 했지만, 그래도 이런 것이 바로 대학생활의 재미일지도 몰랐다.
돈 몇 푼을 아끼려고, 딱딱하고 불편한 의자를 견디는 것.
뭔가 즐거웠다.
역시 한국대 생들은 공부하느라 바빠서, 좁은 강당도 거의 텅텅 비어 있었다.
그리고 시작된 영화.
'역시 나랑은 맞지 않아.'
그래도 영화가 끝날 때까지 그냥 참기로 했다.
재미없는 영화는 강제로 한 두 시간 앉아서 생각할 여유를 만들어주기도 한다.
그러니 나름의 가치가 있었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여주인공의 머리색과 유나가 비슷한 게 아닐까?'
영화의 여주인공은 알록달록한 색으로 머리를 염색하고 나온다.
하지만 사실 그 머리색은 약한 자신을 감추려는 위장이 아니었을까?
유나도 그랬다.
유나는 세상 전부한테 친절하면서 나한테는 항상 짓궂게 장난을 쳤다.
말도 남자아이처럼 하고.
'유나도 사실은 스무 살 어린 아이.'
누군가와 친하게 지내본 경험도 적을 테고, 자신을 드러내는 것도 어색하고 서툴렀을 것이다.
그러니 유나의 짓궂은 행동은 자신을 감추려는 위장색인지도 몰랐다.
그렇게 생각했더니 영화도 견딜 만 했고, 지금 이 순간도 더 즐거워졌다.
난 전생에 몇 번 연애를 한 적이 있었다.
'심지어 결혼은 두 번이나 했지.'
그런데 그 연애들이 성공이라고 생각했던 적은 거의 없었다.
이상하게 내가 열렬히 좋아했던 사람들과는 한 번도 이어지지 못했고, 그냥 편하게 지내던 사람들과는 쉽게 이뤄졌다.
'아마도 내가 너무 서둘렀거나 욕심냈기 때문이겠지.'
그런데 유나는 지난 생에서 내가 가장 열렬히 좋아했던 사람들보다 몇 배나 더 소중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유나에게는 아주 천천히 조심스럽게 접근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가끔 모험을 하고 싶을 때도 있었다.
나는 가만히 손을 뻗어 유나의 손을 붙잡았다.
유나는 그렁그렁한 눈으로 영화에 몰입하고 있었고, 내게 손을 잡혀도 딱히 반응하지 않았다.
'이렇게 약한 손을 트집 잡아서 내기에서 비열하게 이기다니.'
나의 치사함에 약간 웃음이 나기도 했다.
그래도 승부는 승부.
잠깐의 치사함을 견디면 결과는 달콤하다.
덕분에 나는 천금 같은 소원 쿠폰을 얻었다.
어쨌든 그렇게 잠깐 유나의 손을 붙잡았다가 문화의 밤은 끝났다.
이제 다시 오피스텔로 돌아가 주문을 확인하고, 동대문 출근하고 바쁜 일상으로 돌아가야 했다.
* * *
며칠 전.
채널 컬처온의 작가 회의실.
영 아트의 김수희 작가는 최희영 작가에게 한 동영상을 보여줬다.
"이게 뭔데?"
"김진기 작가라고 영상이랑 사진 작업하는 분인데요. 그 블로그에서 찾은 겁니다."
김진기 교수의 블로그는 방송 쪽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자주 보는 곳이었다.
그리고 김수희 작가가 지목한 동영상은 바로 팀 수진의 1학기 과제물이었다.
최희영 작가는 잠깐 동영상을 보다 영상 아래의 설명에 눈이 갔다.
"한국대라고?"
"네, 맞아요. 한국대 서양화과 학생들입니다."
그리고 때마침 화면에는 이수진의 얼굴이 크게 떠올랐다.
흑백 화면에 하얗게 화장한 얼굴.
"괜찮죠? 얼굴도 예쁘고, 거기다가 한국대."
"괜찮냐고?"
최희영 작가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괜찮은 정도가 아니었다.
이 비주얼에 이 학벌이면 쇼를 위해서 반드시 붙잡아야 하는 출연자였다.
"제가 김진기 작가한테 번호 받아서 이 학생들에게 참여를 권유하겠습니다."
그 대답에 최희영 작가가 싸늘한 웃음을 지었다.
"수희야. 니가 나랑 지금 몇 년째 일하니?"
"네? 3년, 아니 4년 째인가?"
"그런데 아직 정신을 못 차려?"
"네?"
김수희 작가는 괜찮은 출연자를 발굴해서 칭찬받을 거라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자기가 정신을 못 차리다니.
"출연을 권유하는 게 아니라, 어떻게든 출연 약속 받아내. 그리고 최대한 빨리 인터뷰도 따내. 이런 걸 내가 일일이 지시해야 아는 거야?"
"아, 알겠습니다. 당장 전화해서 약속 잡고, 제가 가서 인터뷰까지 따오겠습니다."
"한국대잖아. 한국대. 한국인들은 한국대를 선망하면서도 미워하지. 얼마나 좋아? 거기다 심지어 예뻐. 무조건 붙잡아. 인터뷰도 최대한 길게 따고. 알겠어?"
"넵."
여기까지가 이수진이 전화를 받기 전의 상황이었다.
김수희 작가는 마침 운이 좋았다.
전화를 건 상대가 순둥이 이수진이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김진기 교수가 김정화나 이주원의 번호를 줬다면?
그랬다면 김수희 작가는 최희영 작가에게 몇 번 더 깨졌을 것이다.
* * *
그리고 다시 며칠 후.
"그냥 간단한 인터뷰라면서요?"
오피스텔의 문을 열자, 작가와 PD, VJ까지 모두 네 명이 요란한 장비를 들고 들이닥쳤다.
"에이, 방송은 원래 이래요."
별일 아니라는 듯, 김수희 작가가 웃어 넘겼다.
그리고 사무실 안을 둘러보곤 중얼 거렸다.
"대애박."
뭐가 대박인지는 대강 알 것 같았다.
그들이 본 영상에 제대로 된 얼굴은 수진 선배 한 명 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유나에, 태민, 정화 선배까지.
'내 얼굴도 나쁘지는 않지만.'
그래도 대박까진 아니었다.
곧이어 김수희 작가와 PD는 영 아트가 어떤 쇼인지, 우리가 왜 반드시 출연해야 하는지 장황하게 설명했다.
그리고 어느새 인터뷰가 시작되었다.
수진 선배는 갑자기 카메라를 들이대자, 어리버리 버퍼링이 일어났다.
"괜찮아요. 오히려 학생답고 순수해 보여요. 더 예뻐 보여요."
"정말요?"
김수희 작가는 부지런히 수진 선배를 달래며 인터뷰를 마쳤다.
다음은 정화 선배와 유나.
"대단하시네요. 단순한 대학생들이 아니라, 쇼핑몰까지 운영하고 직접 옷까지 제작한다. 젊은 예술가를 찾는 저희 쇼의 취지와 더 부합되는데요?"
"다행이네요. 동대문에 가면 항상 부지런히 일하시는 상인들의 에너지를 충전하는 기분이거든요. 이번 영 아트를 위해 예술적인 에너지도 충전하고 싶습니다."
유나와 정화 선배는 나이가 믿어지지 않을 만큼 여유롭게 인터뷰를 마쳤다.
그때.
"네? 저는 포장 담당인데요?"
김태민이었다.
VJ와 PD가 자꾸 김태민에게 자꾸 다양한 포즈를 요구했다.
"전 디자인에 참여한 적이 없어요. 여자 옷은 전혀 모르고요."
김태민은 억울하다는 듯 항변했지만, 그들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냥 간단해요. 한 손에 연필을 들고, 자체 생산한 코트를 보면서 고개를 끄덕여주시면 됩니다. 그리고 옆에 계신 이수진씨와 눈을 마주치며 옷에 대해 대화하면 됩니다."
그리고 내 차례.
나는 김태민처럼 추가 포즈 요구는 받지 않았다.
약간 씁쓸하긴 했지만, 이해는 한다.
'하긴 내가 등장해봤자, 매출에 도움도 안 되겠지.'
하지만 중년의 회귀자답게, 그리고 쇼핑몰의 대표답게 여유롭게 인터뷰를 마쳤다.
내가 제일 답변을 잘해서인지 내 인터뷰가 제일 길었다.
나름 뿌듯했다.
"이 쇼핑몰의 대표라고 들었습니다."
"네, 맞습니다. 제가 대표입니다. 하지만 직함만 대표일 뿐, 사실 모든 일들은 전부 의논해서 처리하고 있습니다."
"쇼핑몰을 시작한 이유가 있을까요?"
"일단 돈이요? 돈은 중요합니다. 화구도 비싸고, 미대는 돈이 많이 드니까요. 그런데 적당한 아르바이트는 구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직접 만들었죠. 그리고 친구들. 좋은 친구들과 작은 목표들을 정하고 하나씩 이뤄가는 과정이 즐겁습니다."
"친구들이 하나같이 예쁜데, 그래서 쇼핑몰을 생각했나요?"
"네, 모두 예쁘죠. 하지만 내면은 더욱 가치 있는 사람들입니다. 착하고, 영리하고 부지런하고 재미있고, 그래서 같이 있으면 즐겁습니다."
그렇게 시끌벅적 소란 같은 인터뷰가 끝났다.
덕분에 우리가 텔레비전에 나올지 모른다는 사실이 조금씩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며칠 후.
"헐, 이게 무슨 일이야."
정화 선배가 모니터를 보며 중얼거렸다.
갑자기 우리 사이트에 댓글들이 폭주하고 있었다.
[ 헐, 언니들 한국대였어요? 헐. 배신자들. 배신자들! 거기다 미대생이라니······]
[ 레알 다 가지신 분들. 학벌에 외모까지! 그래도 예쁜 옷들 항상 잘 입고 있어요. ]
[ 얼굴도 예쁘고, 공부도 잘하고! 언니들 정말 제 워너비예요. ]
이런 단골들의 원망 비슷한 칭찬부터.
[ 방송 보고 회원 가입합니다. 응원하겠습니다. ]
[ 군인인데 휴가 나왔다가 광고 봤습니다. 제 이상형입니다. ]
[ 얼굴도 예쁘고, 말씀도 잘하시고, 회사도 경영하다니 정말 대단하십니다. 제 딸도 이렇게 자랐으면 좋겠군요.]
이런 남자들 댓글까지.
하이 유나에 방문자수와 회원 가입이 급증하고 있었다.
거기에 덤으로 김태민을 찾는 사람들까지 등장했다.
[ 헐, 남자 사이트도 준비중인가요? 갑자기 웬 모델이? ]
[ 설마 제가 전에 전화 걸었을 때 받아주신 분이 그 분이신가요? 안 그래도 그때 운명을 느꼈거든요. ]
[ 방송에 나온 키 큰 분, 정말 한국대 맞나요? 한국대에 그런 외모가 가능한가요? ]
방송이란 컬처온과 TJ E&M 계열의 채널에서 시작된 영 아트의 광고를 말했다.
광고의 틈새에 몇 초, 우리 사무실과 인터뷰가 잠깐 비친 것이 전부였다.
공중파도 아닌 케이블 방송.
'그런데 겨우 그거로 이 난리가 나다니.'
방송의 위력은 정말 대단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