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 김대성 □
나는 앞으로 나가 신문지와 랩을 벗겼다.
내가 준비한 가면은 붉은 빛의 테라코타 가면.
흙으로 가면을 만들고 불에 초벌 구이한 것이었다.
초벌구이하면 흙이 수축되기 때문에 몇 개의 가면을 동시에 만들어 그 중 하나를 골라야 했다.
테라코타는 김미숙 교수의 작업실에서 전기 가마에 구웠다.
다행히 재미있는 가면이라며 김미숙 교수가 적극적으로 도와줬다.
"뭐냐. 흙으로 만들고 구운 거냐."
내 작품을 보고 이준성 교수가 아는 체 했다.
나는 내 가면을 강의실의 학생들 쪽으로 들었다.
흙이라는 소재만 특이할 뿐, 밋밋하고 평범한 가면이었다.
"가면은 쉽게 쓰고 쉽게 벗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쩌면 착각이 아닐까요? 가면을 쓰고 내가 어떤 행동을 한다면, 그 행동은 영원히 자신과 함께 남습니다. 그래서 사실 세상의 모든 가면은 한 번 쓰면 절대 벗을 수 없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이건 내 경험담에서 따온 것이다.
난 어린 이주원의 가면을 쓰고 어린 이주원처럼 행동하려 했다.
그랬더니 어느새 성격도 점점 어린 이주원이 되고 있었다.
가면은 한 번 쓰면 벗지 못하고, 내 영혼과 섞이게 된다.
자, 이쯤에서 한 번.
유나를 보고 씽긋 웃어주며 도발을 시전 했다.
유나는 이주원 한정으로 단세포 생물이라 틈틈이 도발해두면 생각이 단순해진다.
그리고 발표를 이어갔다.
"그래서 저는 한 번 쓰면 벗을 수 없는 가면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어떻게?'
학생들과 이준성 교수가 똑같이 의혹에 가득 찬 표정을 지었다.
잠깐 뜸을 들인 후, 나는 내 얼굴에 직접 테라코타 가면을 썼다.
그리고 손으로 꾸욱 가면을 눌렀다.
잠시 후.
내가 가면을 벗자 내 얼굴에는 알록달록한 무늬가 찍혀 있었다.
나는 주머니에서 손거울을 꺼내 살짝 얼굴을 확인했다.
'역시."
연습한 대로 제대로 무늬가 찍혀 나왔다.
테라코타 가면의 바깥쪽은 일부러 투박하고 단순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속임수였다.
가면의 안쪽에는 복잡하고 현란한 무늬를 새겨두고, 붓으로 수성 잉크를 발라두었다.
랩으로 감싸고, 신문지로 가려둔 것은 가면을 감추기 위한 것도 있었지만 잉크가 마르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태민이의 도자기 흙 도장에서 아이디어를 얻었지.'
김미숙 교수는 김태민에게 흙에 도장을 파서 도자기에 무늬를 찍는 요령을 가르쳐줬다.
'그렇다면 만약 얼굴 전체에 도장을 찍는다면 어떨까?'
내가 만든 가면은 테라코타 가면이 아니라, 테라코타 안쪽에 새겨진 무늬였다.
가면을 벗었을 때, 비로소 진짜 가면이 얼굴에 씌워져 있는 것이었다.
"흐흐. 역시 웃긴 놈."
이준성 교수가 만족스런 웃음을 지었다.
좋은 징조.
그리고 학생들 몇몇이 질문을 위해 손을 들었다.
괜찮은 반응.
유나는 이글거리는 눈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역시 괜찮은 반응이었다.
"괜찮은 아이디어인 것 같습니다. 특히 얼굴에 찍힌 무늬가 기묘하고 아름다워서 가면이라는 컨셉과 잘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내가 가면 안쪽에 새긴 것은 페이즐리 패턴이라는 무늬였다.
원래 알고 있긴 했지만, 최근에 하이 유나의 가을 옷 신상을 보면서 이 무늬에 더욱 관심을 갖게 되었다.
페이즐리 패턴.
아메바 무늬, 고사리 무늬라고도 부르는 패턴으로 인도와 페르시아에서 유래된 신비한 무늬이다.
이후 영국 페이즐리 지방에서 대규모로 생산되었고, 현대에는 각종 명품 의류와 침구 등에 널리 쓰이는 상업적으로도 성공한 무늬였다.
특히 세포나 미생물의 모양을 연상시키고, 또 종교 의식 등에 사용되기도 하는 등, 단순한 시각적인 아름다움을 넘어서는 신비로운 매력이 있었다.
그래서 페이즐리 무늬는 가면이나 문신에도 아주 잘 어울렸다.
도자기 도장과 페이즐리 무늬.
일상에서 접하던 두 요소를 합쳐서 이번 과제를 해치운 것이었다.
"이건 페이즐리 패턴이라는 무늬로······"
나는 간단하게 내 가면의 무늬에 대해 설명했다.
크리틱에서는 아는 체를 많이 하면 가산점을 받으니까.
"좋은 시도였다. 흔히들 패션을 단순히 상품과 산업의 영역으로 간주하는 오류를 범하곤 한다. 하지만 패션 역시 가장 치열한 예술의 현장이라고 볼 수 있다. 예술과 패션은 늘 다양한 방식으로 융합이 일어났다. 특히 미국이나 유럽처럼 예술이 발전한 곳에서는 더욱 빈번히 두 분야가 결합한다. 또 모르지. 너희들 중에서도 나중에 의류 회사에서 일하는 놈이 나올지. 아무튼 옷에서 가져온 무늬를 사용한 것도 참신했다."
이준성 교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내 가면을 칭찬했다.
"그나저나 넌 항상 네 문제를 잘 알고 있구나. 좋은 자세다."
아마도 이준성 교수는 내 고민에 대해 눈치 챈 것 같았다.
이제까지 나는 모든 과제의 완성도를 최대한 끌어올리려 했다.
너무 힘이 들어있다고 해야 할까.
'예술은 철학이 아니니까.'
예술은 직관적이고 즐거울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제까지 너무 잘하려고 고민을 많이 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완성도는 조금 부족하더라도 기발한 시도에 중점을 뒀다.
'어쨌든 결과는 만족.'
내 페이즐리 테라코타 가면은 나름 성공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값을 매길 차례.
나와 유나는 간절한 시선으로 이준성 교수의 입을 바라보았다.
"도자기를 이용한 가면, 거기에 가면을 벗을 때, 비로소 가면이 착용된다는 참신한 발상. 적절한 자기 반성. 여러모로 마음에 든다. 모두 이 놈을 보고 배우도록. 칠십. 넌 칠십 만원 쳐주마."
예스.
유나를 이겼다.
소원 하나.
소원이 생긴 것도 기쁘지만, 유나가 분해하는 모습을 보는 것도 재미있었다.
"그럼 교수님. 저는 잠시 세수를 하고 오겠습니다."
그리고 강의실 뒷문으로 빠져나가려는 찰나.
그때 유나가 번쩍 손을 들었다.
"뭐냐?"
"교수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분명 이주원씨는 한 번 쓰면 벗을 수 없는 가면을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과제 발표가 끝나자마자 이주원씨는 세수를 하러 나가고 있습니다. 이는 가면을 벗으려는 행위입니다. 이것은 심각하게 예술적 진정성이 결여된 자세입니다."
"흐흐흐흐."
이준성 교수가 웃음을 터뜨렸다.
"교수님. 저는 이주원씨의 불성실한 태도를 벌주기 위해 가면의 값을 깎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윽.
유나의 매몰찬 반격.
이준성 교수가 미소를 머금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아주 좋군. 이런 치열한 경쟁. 무척 마음에 든다."
어, 안 돼.
이준성 그러면 안 돼.
유나에게 넘어가지 말라고.
'제길, 방심을 하다니.'
나답지 않은 실수였다.
그리고 이준성이 결론을 발표했다.
"값을 깎는 건 지나치고, 도발적인 놈. 너는 예술적 진정성을 증명하기 위해 수업이 끝날 때까지 그 얼굴로 앉아 있어라."
후우.
다행이었다.
그 정도쯤이야.
"그렇게 하겠습니다."
나는 생글생글 미소를 지으며 사뿐 유나의 옆에 앉았다.
주먹을 쥐고 부르르 떠는 유나의 분노가 공기를 타고 전해졌다.
어쨌든 나의 승리.
소원은 나의 것이다.
그리고 교훈도 하나 얻었다.
'꺼진 유나도 다시 보자. 끝날 때까지 유나는 끝난 게 아니다.'
위험한 반격이었다.
* * *
그리고 드르륵.
드디어 김대성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흐흐흐흐."
마치 먹이를 바라보는 호랑이의 눈빛으로 이준성 교수가 미소 지었다.
김대성은 오늘 이준성 교수의 메인 디쉬였다.
김대성은 거의 50호 캔버스만한 널찍한 무언가를 신문지로 말아왔다.
정말 50호 캔버스라면 나름 대작일텐데.
'대체 뭘 만든 걸까.'
소원을 획득한 나는 즐거운 마음으로 김대성의 발표를 감상했다.
"가면은 무엇일까요?"
뜬금없이 그것이 알고 싶다 진행자 톤으로 김대성이 우리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별로 대답할 생각이 들지 않는 시시한 질문.
"가짜 얼굴. 가면은 믿음입니다. 얼굴만 가리면 다른 존재가 될 수 있다는 믿음. 자신을 속이는 달콤한 기만."
"흐흐흐. 그만 웃기고 어서 신문지를 벗겨라."
이준성이 김대성을 향해 압박을 가했다.
하지만 김대성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마침 가면에 관한 주제가 주어졌을 때, 한국대는 한창 축제 시즌이었습니다. 모두가 축제의 광기에 정신이 팔려 있을 무렵, 저는 이 작품에 관한 영감을 얻었습니다."
일단 한국대 학생 중에서 축제의 광기에 휩쓸린 학생은 한 명도 없을 거라고 자신 있게 말 할 수 있었다.
아무튼 드디어 김대성이 자신의 작품의 신문지를 벗기기 시작했다.
"남들이 모두 얼굴을 가릴 때, 저는 얼굴만 드러내고 몸을 가리는 가면을 생각했습니다."
김대성이 가져온 것은 축제에서 물풍선 던지기를 할 때 쓰는 얼굴이 뚫린 보드판이었다.
김대성이 가져온 구멍 뚫린 보드판에는 수영복을 입은 근육질 남자의 몸이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김대성은 구멍 안으로 자신의 얼굴을 밀어 넣었다.
"어떻습니까? 이게 저의 가면입니다."
강의실의 학생들은 황당함으로 말문을 잃었다.
큭. 큭. 큭.
그리고 이준성 교수의 웃음 참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나쁘지 않은 것 같기도 한데?'
알쏭달쏭했다.
잠시 후, 겨우 웃음을 누른 이준성 교수가 질문했다.
"이 보드판의 그림은 네가 그린 거냐?"
"아닙니다. 축제가 끝나길 기다려서 그냥 얻어온 겁니다. 이 그림은 처음부터 그려져 있었습니다."
"자, 모두 주목."
이준성 교수가 강의실을 향해 소리쳤다.
"내가 이래서 욕을 못 끊는 것이다. 실컷 욕을 먹으면 누구나 해내니까. 자, 모두 반장이 첫 과제를 가져왔을 때를 떠올려라. 난 그때 이놈이 예술적으로 전혀 재능이 없는 한심한 쓰레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쓰레기도 구르는 재주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놈은 해냈다. 얼핏 멍청하고, 미친 짓처럼 보일지 몰라도 예술이 원래 멍청하고 웃긴 짓인 것이다. 너희들은 모두 마르셀 뒤샹을 알고 있겠지? 뒤샹은 변기를 가져다 두고 예술작품이라고 우겼다. 그땐 모두 뒤샹을 비웃었지만, 현대 미술은 그날 시작된 것이다. 자, 모두 반장에게 박수!"
별로 박수를 치고 싶은 생각은 없었지만, 그래도 나는 오늘의 승자.
김대성을 향해 가벼운 박수를 쳐줬다.
그리고 이준성 교수의 말대로 괜찮은 시도인 것 같기도 했다.
짝짝짝.
나 말고도 몇몇이 김대성을 향해 박수를 쳤다.
"물론 반장의 과제는 여전히 멍청하고 한심하다. 하지만 큰 발전이다. 예술은 원래 용기다. 자신을 바꿀 수 있는 용기. 안 하던 짓을 하는 용기. 잘 했다. 그런 의미에서 사진 한 장 찍어도 될까? 심심할 때 한 번씩 꺼내 보게."
이것은 이준성 교수의 특기.
그는 언제나 칭찬인지 욕인지 헷갈리게 말한다.
"찌..찍으십시오."
그래도 김대성은 뿌듯한지 촬영을 허락했다.
"뭐해? 얼굴 안 집어넣고? 네가 얼굴을 넣어야 더 웃기지."
찰칵. 찰칵.
그리고 이준성 교수는 보드판에 얼굴을 넣은 김대성을 촬영했다.
"술자리에서 친구들 보여줘야지."
그렇게 김대성의 발표도 끝났다.
"교수님, 제 작품의 가격은요?"
"뭐? 저걸 돈 받게 팔게? 대충 백만 원으로 하자."
그렇게 김대성이 대충 오늘의 1등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이준성 교수가 강의실을 향해 소리쳤다.
"자, 오늘은 내가 한 턱 내겠다. 마침 그림을 많이 팔아서 내가 주머니가 넉넉하다. 오늘은 모두 과제가 훌륭해서 기분도 좋다. 그러니 모두 참석하도록. 특히 김태민! 그리고 그림 판 두 놈. 너희들도 오늘은 도망가지 말고 꼭 남아라!"
* * *
이준성 교수의 술자리는 악명이 높았다.
그런데 그것은 참석 인원이 적고, 술을 많이 마셨을 때만 해당되는 것 같았다.
오늘은 약간 회식 같은 분위기.
딱히 취할 겨를이 없어서 진상을 부릴 틈도 없었다.
물론 술을 강제로 먹이긴 했다.
"자, 오늘의 활약 눈부셨다. 반장 마셔라!"
"어이, 제주도 촌놈. 원래 예쁘고 잘생긴 놈들이 그림을 잘 그리지. 그림은 작가를 닮거든. 그래서 너도 잘 그릴 줄 알았다. 마셔라."
살짝 거슬리는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타악.
다만 유나는 오늘 술이 땅기는지 주는 대로 다 마시긴 했다.
하지만 오늘의 이준성 교수는 그래도 꽤 점잖은 편.
처음엔 몰랐는데, 아마 김태민을 의식해서 그런 것 같았다.
김용철 작가는 이준성 교수에게 꽤 무서운 선배였던 모양이었다.
"어이, 잘생긴 놈. 안주 많이 먹었냐?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얼마든지 더 시켜라."
보통 그러면 적당히 사양하는데 김태민은 그런 것 없었다.
"아주머니, 육전이랑 해물 떡볶이랑 파전 두 개씩 주시고요. 쭈꾸미 볶음이랑 주먹밥도 주세요. 계란말이도 추가요."
그리고 동기 하나가 이준성 교수에게 물었다.
"교수님. 김용철 작가는 어떤 분이셨어요?"
김태민을 비롯한 모든 학생들이 초롱초롱 이준성 교수를 쳐다봤다.
"글쎄다."
일단 이준성 교수는 쓴 소주 한잔을 들이켰다.
"대단한 양반이지. 개인적인 것을 떠나서 말이다. 일단 한국은 세계 미술계에서 찬밥이다. 일본은 현대 미술의 역사가 깊고. 중국은 거대한 시장과 신흥 갑부들을 가지고 있지. 하지만 한국은 아무것도 없어. 그래서 한국 화가들은 그림 값이 형편없다. 가끔 값을 잘 받는 화가도 있는데 전부 오늘, 내일하는 골골한 양반 밖에 없어. 하지만 용철 형님은 젊어. 그리고 꾸준히 해외 활동을 하지."
그리고 안주를 질겅질겅 씹으며 소주를 한 잔 더 들이켰다.
"가끔 인정하기 싫을 때도 있지만, 한국의 젊은 화가들은 전부 김용철 작가에게 빚이 있는 거나 마찬가지다. 용철 형님이 그렇게 활약하니까 그나마 세계가 잠시라도 한국 미술을 들여다보는 거다. 특히 너희들은 말이다. 용철 형님을 목표로 삼아라."
이준성 교수가 이렇게 말하니까 술자리가 진지해졌다.
"너희들은 한국대 생이지. 사실 한국대 미대는 평이 안 좋아. 재능 있는 놈들을 뽑아서 바보로 만든다고 하지."
그리고 이준성 교수는 김대성을 한 번 슬쩍 쳐다봤다.
"너희들은 이미 싫든 좋든 한국대 생이다. 국가로부터 많은 혜택을 받고, 또 한국이라면 어디서나 주목 받지. 그러니 훌륭한 화가가 되어서 많이 활약해라. 용철 형님처럼. 한국 미술계에 책임감을 가져라."
그렇게 다행히 오늘은 멀쩡한 정신으로 술자리가 마무리 되었다.
전의 약속대로 내가 술값을 내려 하자, 이준성 교수가 말렸다.
"됐다. 넣어 둬. 오늘은 내가 낸다."
역시 김태민이 보고 있어서라고 나는 확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