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력천재 미대생-79화 (79/203)

■ 79. 연출 □

TJ E&M의 기획실장 이미연의 사무실.

이미연 앞에는 채널 컬처온의 국장 최승률, 컬처온의 유명 PD인 김우철, 김우철과 오랜 시간 손발을 맞춰온 최희영 작가가 있었다.

똑똑똑.

"들어오세요."

문이 열리고 한 명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분은 제가 직접 FOX TV에서 스카웃한 이기호 CP님입니다. 이기호 CP님은 영 아트 아메리카에서 메인 PD로 일하셨고, 이번에 제가 프로그램 포맷을 수입하는 데도 많은 도움을 주셨습니다. 이제 컬처온에서 CP로 함께 일하게 되셨습니다."

이미연은 새로 들어온 사람에게 사무실에 같이 있던 일행을 소개했다.

"이분은 이미 아시죠? 컬처온 최승률 국장님. 그리고 이분은 김우철 PD님. 지난 주 보여드렸던 스크립트와 기획은 김우철 PD님과 여기 최희영 작가님이 함께 구상하신 겁니다."

이미연이 말을 마치자, 이기호와 김우철, 최희영은 서로 인사했다.

직접 만나는 것은 처음이지만, 셋 다 각자 자기 영역에서는 거물이라 서로에 대해 알고 있었다.

"어땠습니까? 저희의 기획이?"

김우철 PD가 묻자, 이기호 CP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미국과 한국의 예술계 전반 환경과 정서가 많이 다릅니다. 그래서 실장님이 프로그램을 수입하겠다고 했을 때 솔직히 확신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절묘하게 고친 포맷을 보고 확신이 들더군요. 이거라면 분명 쇼도 성공하고, 한국 미술계에 공헌도 할 수 있겠다. 꼭 제대로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도 동감이에요."

이미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영 아트 아메리카는 미국의 젊은 예술가들이 팀을 이뤄 상금을 두고 경연하는 오디션 프로그램의 일종이었다.

이미연은 유학을 마치고 회사로 복귀하면서 자신만의 색을 회사에 덧입히기를 원했다.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면서 또 한국 예술계에 기여하는 방법.

그게 바로 영 아트 아메리카였다.

이미연은 미국의 인기 오디션 프로그램인 영 아트 아메리카를 수입했고, 직접 EP로 참여해 쇼의 제작을 지휘하고 있었다.

"특히 유명 연예인과 인기 예술가들을 섭외해 시드를 준다는 설정이 절묘했습니다. 아무래도 한국인은 순수 미술에 관심이 없고, 또 어려워하죠. 아트 엔터테이너들을 섭외해 그들에게 시드를 주고 참여시키면 딱 한국인의 수준에 걸맞는 프로그램이 될 겁니다. 다만 얼마나 인지도가 있는 아트테이너를 섭외하느냐가 관건입니다."

이기호의 말을 듣자 최희영 작가가 웃음을 지었다.

"실은 거의 섭외가 된 사람이 하나 있습니다. 이 CP님도 아실겁니다. 영화배우 우인호씨요."

"우인호요?"

이기호 CP가 재미있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외국에서 오래 살았지만 그도 우인호는 알고 있었다.

"우인호는 A급 스타 아닌가요? 예능도 나오나요?"

"우인호가 최근 삼청동에 스튜디오를 구입했거든요 그리고 자기 아트 크루들을 입주시켰죠. 곧 전시도 연다고 해요. 우인호가 최근에는 예능을 자제하지만, 데뷔 초기에는 저와 오래 함께 작업했습니다. 특히 그 친구가 요즘 예술뽕을 제대로 맞았거든요. 방송의 취지를 설명했더니 자기 크루들과 꼭 함께 하고 싶다고 말하더군요."

"대단하군요."

이기호가 감탄하자, 이미연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인호는 곧 제가 직접 만나 계약을 마무리 지을 겁니다."

이미연의 말에 이기호 CP가 말을 보탰다.

"실은 저 역시 최성진 작가와 미국에서부터 알고 지내는 사이입니다."

"최성진이라면?"

최성진은 요즘 가장 핫하게 떠오르는 젊은 교포 예술가였다.

"하지만 그 사람은 나이가 많지 않나요? 저희 방송은 30세 이하로 나이 제한을 두기로 했는데."

"괜찮습니다. 그 친구는 미국 국적이거든요. 한국 나이로는 33이지만 미국 나이로는 30이라고 억지로 우기면 될 겁니다."

이기호의 말에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이기호가 한 마디 더 꺼냈다.

"또 하나 의견이 있습니다. 미국에서 한국 오는 비행기에서 계속 생각한 게 있습니다."

"말씀해보세요."

"미국의 영 아트는 예술과 성취에 집중 했습니다. 쇼 자체는 성공하긴 했지만 밋밋한 부분도 있었습니다. 미국이니까 성공할 수 있는 쇼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한국판에는 좀 더 간질간질하고 걸쭉한 양념들을 더 넣었으면 합니다."

"간질간질이요?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시겠어요?"

"드라마요. 한 명, 한 명, 참가자에게 초점을 두고 학벌, 재산, 외모 등등의 갈등과 극적 요소를 최대한 도출해내서 쇼의 일부로 포함시키는 겁니다."

"동감입니다. 예술에 대한 이해도가 낮을 테니, 그만큼 참가자들에게 초점을 나눠서 재미를 뽑아내자 이 말씀이시죠?."

"맞습니다."

"이거, 역시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모이니까 회의가 술술 진행되는 군요."

최승률 국장은 옆에서 열심히 분위기를 띄웠다.

"이미 국내 대학과 미술계와 광범위하게 접촉하면서 합당한 출연자들을 물색하고 있습니다. 아마 곧 홈페이지도 오픈하고 정규 루트로도 출연자를 섭외할 겁니다. 세세한 인터뷰를 통해, 합당한 출연자를 가리고, 또 CP님이 말씀하신 간질간질한 것들도 찾아볼 겁니다. 실장님은 이 쇼가 매년 시즌제로 열리면서 한국의 젊은 예술가들을 꾸준히 발굴하길 원하십니다. 그만큼 시즌1의 성공을 위해 모든 수단을 강구할 계획입니다."

김우철 PD가 계획을 밝히자 이기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미연이 갑자기 생각난 것처럼 말했다.

"아 맞다. 시드 하나는 내가 맡을 게요. 줄 사람이 있어요."

"아, 역시. 실장님이 그쪽으론 인맥이 두터우시겠군요."

"아직 어리긴 하지만, 수상 경력도 화려하고, 외모도 훌륭해요. 혹시 자격이 부족하다면 적당히 방송으로 만들면 되고. 제가 한 번 물어보고 다시 말씀 드릴게요."

"물어보고 다시 말씀하시다니. 상금 3억원에, 유학의 기회. 호화 레지던시에 단체전 기회까지. 거기에 TJ 대준문화재단의 후원. 과연 한국의 젊은 예술가 중에 거절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그러게 말이에요."

최희영 작가의 질문에 이미연은 웃으며 대답했다.

* * *

다시 한국대 서양화과 강의실.

TJ E&M에서 열리는 회의와 상관없이 수업은 진행되고 있었다.

"자, 다음은 누구냐? 어떤 쓰레기가 나를 열 받게 할 거냐?"

이준성 교수가 쩌렁쩌렁 강의실이 울리게 소리쳤다.

이제 남은 사람은 나와 유나와 김대성.

일단 김대성은 자기가 마지막에 발표하겠다고 선언했다.

남은 사람은 나와 유나.

"누구냐고! 어서 나와!"

나는 이준성 교수가 아무리 소리쳐도 느긋했다.

하지만 유나는 더 버티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가 발표하겠습니다."

나를 한 번 노려보고는 강의실 앞으로 나가 가면을 감싼 신문지를 벗겼다.

"으하하. 얼마나 대단한 걸 만들었길래 신문지로 말아왔냐."

이준성 교수의 놀림을 무시하고 유나는 발표를 시작했다.

"자유로울 것. 그래서 저는 가면의 정의에 정면으로 도전했습니다. 가면은 얼굴에 써서 자신을 숨기기 위한 도구입니다. 하지만 쓸 수 없는 가면이라면 어떨까요?"

유나가 작품은 철사로 엮어 만든 가면이었다.

철사를 두텁게 감아서 면을 만들고 그것으로 가면 모양을 만들었다.

중간 중간에 철사로 고풍스런 무늬를 넣기도 해서 장식성도 추구했다.

얼핏 보면 꽤 예쁜 가면이었다.

하지만 가면 중간 중간에 날카롭게 자른 철사들이 여러 방향으로 솟아 있었다.

마치 철조망이나 가시 넝쿨을 연상시키는 모습이었다.

곧 학생들이 손을 들고 의견을 내놓았다.

대부분 칭찬이었다.

"가면의 무늬가 예뻐요. 조형적인 완성도가 훌륭합니다."

"쓸 수 없는 가면, 장미 가시를 연상시키는 모습이 뭔가 비극적으로 보여요."

심지어 이준성 교수도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러니는 예술적 충격과 재미를 주는 가장 빠르고 확실한 방법이지. 훌륭하군. 뾰족하게 튀어나온 가시들이 공격적인 동시에 자신을 방어하는 여성성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의미적으로, 형태적으로 모두 역설적인 가면이군."

칭찬 일색.

하지만, 이제 내가 초를 칠 차례.

유나는 정말 내 소중한 친구다.

그리고 나는 무척 유나를 아낀다.

어쩌면 어머니 다음으로 제일 아끼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기는 내기.

이겨야 한다.

어영부영 봐주기에는 내기에 걸린 상품이 너무나 컸다.

가시 가면을 만드느라 손을 많이 찔렸는지 유나는 열 개의 손가락 중 일곱 개에 밴드를 감고 있었다.

그런데 살색 밴드가 아니라, 흰색 캐릭터 밴드였다.

나는 씨익 웃음 지었다.

'내가 유나를 알지.'

약국에 살색 밴드가 없었다면 모를까, 유나가 저런 눈에 띄는 캐릭터 밴드를 할 리가 없었다.

심지어 유나가 좋아하는 캐릭터도 아니었다.

나는 번쩍 손을 들었다.

"그래, 도발적인 놈. 말해 봐라."

"한유나씨는 손에 밴드를 많이 감으셨는데요. 가면을 만들다 다치신 겁니까? 분명 니퍼로 철사를 휘어서 가면을 만드는 것은 쉽지는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너무 많이 다치신 것 아닌가요? 혹시 발표를 위한 연출입니까?"

내 질문에 유나의 눈동자가 빠르게 흔들렸다.

역시 나는 한유나 마스터.

유나는 내게 딱 걸렸다.

"연출이라니요. 제가 밤새서 열심히 철사 작업을 하다보니 철사에 찔린 겁니다."

나 자신이 좀 치사하게 느껴지긴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시작한 이상 반드시 이겨야 했다.

"그럼 제가 임의로 지목한 손가락의 밴드를 풀어보실 수 있습니까?"

유나는 대답대신 인상을 썼다.

그때 이준성 교수가 웃으며 끼어들었다.

"밴드를 풀 필요는 없다. 어이, 촌놈. 그냥 내가 묻는 말에 솔직히 대답하면 된다. 손가락의 밴드는 철사에 찔려서 다친 거냐? 아니면 저 놈 말대로 연출이냐?"

잠시 후.

유나는 나를 한 번 노려보고는 대답했다.

"밤새 졸면서 작업하다 다친 겁니다. 더 근사한 작품을 만드는 것만 생각했더니, 아픈 것도 몰랐네요. 연출이 아닙니다."

"그러냐? 아쉽군. 연출이라면 가산점을 주려고 했다. 예술가라면 모름지기 자기를 포장할 줄 알아야 한다. 전에도 말했듯이 화가가 그림을 파는 것은 자기를 파는 것과 같은 뜻이다. 앤디 워홀도 그랬고, 살바도르 달리도 그랬고, 심지어 백남준도 그랬다. 적당히 자신을 연출하는 것은 관객들이 작가의 작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기도 하지. 만약 의도적인 연출이라면, 만든 이의 상처를 통해 태어난 가면. 그렇게 또 하나의 역설이 추가될 수도 있었을 텐데. 거기까진 생각하지 못했나 보군."

이준성 교수가 아깝다는 듯 능청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동시에 유나는 분노로 이글거리는 눈으로 나를 노려봤다.

"그래도 잘했다. 한유나라고 했나? 제주도 촌놈. 네 가면은 육십 만원이다."

육십이라.

꽤 잘 받은 가격.

하지만 해볼 만 하다.

쿠웅.

나는 유나 쪽을 쳐다보지 않았지만, 유나가 자신의 분노를 전하기 위해 일부러 시끄럽게 자리에 앉았다.

나는 일부러 유나를 약 올리기 위해 생글생글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약 올리는 것 역시 승부의 일환이었다.

그리고 의자 옆에 둔 신문지 뭉치를 손에 들었다.

"흐흐흐. 뭐냐. 네놈도 꽁꽁 싸매서 가져온 거냐? 흐흐. 웃긴 놈들."

이준성 교수가 징그럽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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