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7. 회의 □
이젠 다 털어버렸다고 생각했다.
미술학원도 같이 다녔고, 대학입시도 내가 이겼다.
심지어 마무리 문자까지 선물했다.
'상조 녀석...'
하지만 아니었다.
김상조의 얼굴을 보자 씁쓸한 전생의 기억이 떠올랐다.
'어쩌면 상조부터가 아니었을까.'
전생의 어렸던 나는 어떻게든 더 나은 기회를 갖고 싶었다.
그래서 아등바등 준비해서 디자인과로 전과했다.
정식 미대입시를 준비한 사람에 비해서는 확실히 실기력이 부족했다.
'하지만 나 역시...'
교칙에 따른 평가를 치르고 전과를 했다.
그러니 실력이 부족해도, 절차를 밟은 엄연한 디자인과 학생이었다.
하지만 상조는 뒤에서 날 비웃고 따돌렸다.
'대학생이 유치하게 따돌림이라니.'
당시 상조는 서양화과와 디자인과를 복수전공 하고 있었고, 탁월한 실기력에 회화 동아리 대표까지 맡아, 따르는 선후배가 많았다.
'그런 다 가진 녀석이.'
내 뒷담화는 물론, 가끔은 강의실에서 내가 들으라고 자리에 없는 사람처럼 날 비웃곤 했었다.
당시 나는 가만히 둬도 힘든 상황이었다.
없는 살림에 어머니에게 손을 벌려서까지 비싼 디자인 수업을 따라가야 했다.
친구도 없었고, 수업은 뒤처지고.
그런데 거기에 상조까지.
덕분에 내 학교생활은 완전히 밑바닥이었다.
'어쩌면 상조가 시작은 아니었을까.'
내 우울하고 무기력하고, 사람을 믿을 수 없게 된 전생의 시작.
그땐 상조가 대단하게 보였다.
그래서 상조가 나를 비난하면 마치 내가 문제가 있는 것처럼 여겨졌다.
'하지만 이젠 아니야.'
김태민, 유나, 남동민.
실력으로는 상조를 까마득히 뛰어넘을 친구들과 나는 당당히 경쟁하고 있었다.
그리고 한국대를 비난하면서도 한국대를 시험치고, 또 낙방까지 한 상조의 이중적인 모습도 알고 있었다.
'자기가 무슨 벌써 화가가 된 양 떠들지만.'
사실 상조 역시 디자인과를 복수 전공했고, 나중엔 입시미술학원도 운영한다.
상조 자신이야말로 지극히 현실적이고, 타협적인 인간이었다.
그땐 이해하지 못했다.
'그림도 잘 그리고, 친구도 많은 녀석이 왜 보잘 것 없는 나를 뒤에서 험담하고 다녔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
하지만 이제는 알 것 같았다.
그게 상조의 자존감을 높이는 방법이었을 것이다.
나를 욕하고, 나를 비웃으면서 자신이 나와 다르다는 것을 확인하고 안도하는 것이었다.
사실 그런 식의 따돌림은 세상에서 흔한 일이었다.
'사람들은 보통 다 그러니까.'
언제나 어디에서나 있을 법한 일.
하지만 김상조의 별 생각 없는 자존감 찾기에 내 젊은 시절이 희생되었다고 생각하니 분노가 치밀었다.
아직 나와 상조의 뒤풀이는 충분하지 않은 것 같았다.
'상조를 봤더니 머릿속이 지저분해졌어.'
"너 왜 그래?"
"응?"
내 표정이 좋지 않았는지 유나가 걱정하며 물었다.
"아니야. 괜찮아."
유나처럼 착하고 영리한 아이가 내 표정 하나, 하나를 살펴주는 일이 기적처럼 생각되었다.
그래서 더 이상 상조 따위로 내 시간과 기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그때 계단 위에서 한 명이 더 올라왔다.
회색 블라우스를 입은 수수한 여학생.
'혜원 선배?'
하마터면 소리 내어 이름을 말할 뻔 했다.
오늘은 이상한 하루였다.
알던 사람을 둘이나 만나다니.
사실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김상조가 왔으면 같은 학교의 학생이 한 명 더 오는 일은 당연한 일.
그럼 내가 얼굴을 아는 것도 충분히 이곳에 올 수 있었다.
혜원 선배 역시 내 전생과 엮여 있는 사람 중 하나였다.
혜원 선배는 한국 정보대 서양화과 학생이었다.
디자인과로 전과하기 위해서 나는 학교 근처의 성인 화실을 다니면서 소묘와 수채화를 배우고 포트폴리오를 준비했다.
정식 입시 학원은 수업료도 비쌌고, 포트폴리오 준비반도 따로 없었다.
그래서 성인 화실을 다니는 게 당시 내게는 최선책이었다.
그리고 그때 혜원 선배가 그 화실에서 수채화 강사를 맡고 있었다.
우린 같은 학교였고, 나이도 몇 살 차이 나지 않아서 금방 친해졌다.
"우리 학교 디자인과로 가고 싶다고? 거기 엄청 빡센 곳인데. 텃세도 심하고."
"그래도 도전해보고 싶어요. 원하는 전공을 가질 수 있는 마지막 기회잖아요."
"그래, 한 번 열심히 해봐!"
혜원 선배는 웃으며 격려해줬다.
어쩌면 어머니를 제외하고 미술을 해보고 싶다던 나를 진심으로 응원해 준 마지막 사람일지도 몰랐다.
"디자인 수업을 따라가려면 소묘도 중요한데 드로잉을 잘 해야 해. 이건 화실 원장 선생님께 비밀로 해. 내가 드로잉은 따로 가르쳐줄게. 물론 무료로."
그리고 혜원 선배는 내게 드로잉 숙제를 내주었다.
하루 다섯 장씩 그려서 일주일에 두 번 수채화를 배울 때 같이 검사를 받았다.
내가 혜원 선배에 대해 아는 것은 아르바이트를 무척 많이 했다는 것.
그리고 진짜 착한 사람이라는 것.
다만 내가 전과에 성공하고 화실을 그만둔 후로 별로 얼굴 마주칠 일이 없었다.
나는 학교 수업을 따라가기에도 벅찼고, 혜원 선배는 아르바이트로 바빴다.
혜원 선배와 연락이 끊긴 후에도 혼자서 드로잉 연습은 꾸준히 했다.
부족한 실력에 억지로라도 수업을 따라갈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혜원 선배의 드로잉 과외 때문일 지도 몰랐다.
그런데 상조와 혜원 선배 두 사람을 동시에 이곳에서 만나다니.
참 별난 하루였다.
'아, 맞다. 두 사람 같은 회화 동아리였어.'
아마 그랬던 것 같다.
'동아리 이름이 무슨 바스키아였나?'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아무튼 그런 비슷한 이름 같았다.
어쨌든 그래서 두 사람이 함께 이곳에 온 것 같았다.
"너 진짜 괜찮아?"
내 표정이 다시 안 좋아 보였는지, 유나가 한 번 더 물었다.
난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혹시 전시 때문에 오셨어요?"
윤혜원이 다가와서 상냥하게 물었다.
"네, 맞아요."
유나가 대답하자 윤혜원이 환하게 웃었다.
혜원 선배는 역시 언제나 모든 사람에게 친절한 사람이었다.
"저희도요. 안녕하세요. 저흰 한국 정보대에서 왔어요. 서명길 교수님이 저희 동아리 지도 교수님이라서요."
"네. 저희는 이준성 교수님 수업을 듣다가 이곳에 왔어요. 저희는 한국대 다니고요."
"어머. 능력자들이시네요."
윤혜원과 유나는 스스럼없이 자신들을 소개했다.
다만 나와 김상조는 멀뚱멀뚱 쳐다보고만 있었다.
"잘 지냈어?"
내가 물었지만, 상조는 대답도 하지 않고 나를 지그시 노려보기만 했다.
"뭐야? 둘이 아는 사이야?"
윤혜원이 물어도 상조는 딱히 대답하지 않았다.
'저 버릇없는 녀석. 선배가 묻는 말에...'
원래 상조는 실력 제일주의에 오만한 성격이었다.
그래서 혜원 선배처럼 착한 사람에게는 충분히 기어오르고도 남을 녀석이었다.
"안녕하세요!"
그리고 계단에서 두 사람이 더 올라왔다.
복학생으로 보이는 남학생 하나와,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여학생 하나였다.
잠시 후.
우린 2층의 큰 테이블에 앉아 카페에서 내주는 커피를 마시며 회의를 시작했다.
먼저 복학생이 말했다.
"전 L대 3학년 이영조라고 합니다. 저희 둘은 오선우 교수님께 회화 수업을 듣다가 교수님 추천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제가 이 중에서 제일 나이가 많은 것 같아서요. 일단 제가 회의를 이끌게요. 괜찮죠?"
또 한 명의 이름은 강주희.
24살이라고 했다.
혜원 선배가 23살이나 22살 쯤 될 것이다.
정확히는 잘 몰랐다.
복학생 이영조가 다시 말했다.
"제가 오선우 교수님께 이것저것 물어봤는데요. 우리한테 벽면 2개 반 정도 내어주실 것 같습니다. 50호 최대 8개 정도 걸 수 있을 거라고 하셨는데요, 그냥 우리보고 다 알아서 하라고 하셨습니다. 어떤 그림을 걸지, 누가 몇 개를 걸지, 전부 다요. 교수님들은 나중에 그림값 매기는 것만 봐주시기로 했습니다."
사람은 6명인데, 그림은 8개.
이준성 교수의 친구들도 다 똑같은 놈들인 게 분명했다.
'우리를 불러놓고 대리전을 치르는 건가?'
전시에 끼워준 것은 고마웠지만, 싸움을 붙이는 것 같아 괘씸하기도 했다.
나는 확인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손을 들고 이영조에게 질문했다.
"저는 이준성 교수님께 수업을 듣는데요. 이준성 교수님은 사실 조금 그러세요. 혹시 오선우 교수님도 조금 그러신가요?"
"그러시다는 게...아...맞아요. 오선우 교수님도 좀 그러세요."
그리고 이영조는 윤혜원을 바라봤다.
그러자 윤혜원도 무슨 말인지 알아 듣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서명길 교수님도 좀 그러세요."
그랬다.
세 교수 다 똑같은 놈들이었다.
아무튼.
이영조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이렇게 하는 게 어떨까요? 이렇게 모인 것도 인연인데, 한 사람이 하나씩 그림을 가져오고, 크리틱을 해서 두 사람만 그림을 하나씩 더 거는 겁니다. 아마 교수님들은 우리끼리 경쟁해서 더 좋은 그림을 제출하기를 원하시는 것 같은데, 제 말대로 하면 경쟁도 되고, 우리 모두 전시에도 참여할 수 있으니까 괜찮지 않을까요?"
그리고 이영조는 다섯 사람에게 자기가 인쇄해온 자료를 나눠줬다.
그것은 이번 전시의 정보를 간단히 요약해둔 것이었다.
세 교수의 작가 노트와 전시 제목, 그림 정보들 따위였다.
난 프린트를 훑어보았다.
[ 서명길 : 1년 커피 ]
[ 오선우 : 마흔 다섯 다이어리 ]
[ 이준성 : 여름 풀꽃 ]
여름 풀꽃이란 제목을 읽자 마시던 커피를 뿜을 뻔 했다.
'이 양반이...'
온갖 험한 말을 입에 달고 다니는 사람이 정작 자기 전시 제목은 여름 풀꽃이라고 짓다니.
'가증스러워.'
어쨌든 전시의 컨셉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동년배 작가들끼리 1년에 한 번 모여서 하는 전시인 만큼, 그들의 1년을 돌아보는 자리 같았다.
그리고 제자들이 참여하는 것도 그들의 1년 성과물이란 의미 같았다.
프린트를 읽어본 후 유나가 손을 들었다.
"저도 영조 오빠 말에 찬성이에요. 자료를 읽어보니까 생각보다 순한 맛의 전시 같아요. 그러니 우리끼리 너무 치열하게 경쟁하는 것보다, 함께 의미 있는 전시를 만드는게 중요한 것 같아요."
유나의 말을 듣고 혜원 선배도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찬성이에요. 우리끼리 컨셉도 잘 맞춰서 의미가 이어지는 그림을 전시하면 더 좋을 것 같아요."
두 명이 동의하자 이영조가 환하게 웃었다.
"그럼 제 말대로 하죠. 각자 하나씩 그림을 걸고, 크리틱 후에 두 명만 한 점씩 더 건다. 그리고 혜원씨라고 했죠? 혜원씨 말대로 우리끼리 컨셉도 한 번 맞춰보죠."
그때 한 명이 손을 들었다.
바로 상조였다.
"전 생각이 다릅니다."
이번 생에도 의욕과 자신감이 넘치는 상조.
비록 한국대는 떨어졌지만, 멘탈은 빠르게 회복한 모양이었다.
상조는 전생의 기억 그대로, 목소리를 낮게 깔고 화가의 목소리를 흉내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말씀하신대로 우리보고 다 알아서 하란 말은, 교수님들이 우리를 경쟁시켜서 좋은 그림을 걸도록 하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 멋대로 기회를 나눠서 가지면 교수님들의 의도가 희석됩니다. 그리고 그만큼 당연히 그림도 나빠지겠죠. 교수님들이 우리에게 기회를 준만큼, 우리는 교수님들의 의도를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전생보다 더 느끼하고 거만해진 것 같았다.
상조는 이영조를 보고 말했다.
"영조 선배의 말대로라면 일인당 많아야 단 두 점. 두 점의 그림으로는 자기를 알리기에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전시에 오는 사람 중에 유명한 사람들도 많다고 들었습니다. 이런 기회는 드문 만큼, 한 , 두 명이라도 제대로 된 기회를 갖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상조의 말은 전시의 기회를 몰아주자는 소리였다.
'겨우 1학년 주제에.'
자신감 하나는 인정해줄만 했다.
그런데 내가 들은 이야기와는 다른 부분도 있었다.
'이준성 교수는 유명한 사람은 오지 않는 시시한 전시라고 했는데.'
내가 손을 들고 말했다.
"그림의 개수가 중요한 게 아니지 않습니까? 전시 준비 시간도 짧은 만큼 한 점이라도 제대로 공을 들이는 게 낫지 않을까요? 함께 그림을 거는 것만으로도 경쟁은 충분하다고 보는데요?"
그러자 상조가 나를 비웃듯이 말했다.
"전시라면 아직 시간이 남았어. 한 점만 그리고 말겠다고? 설마 자신이 없는 거야?"
상조가 나를 도발해왔다.
이런 유치한 도발에 내가 걸려들 줄 알고?
걸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