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력천재 미대생-66화 (66/203)

■ 66. 빚 □

"저는 반대로 시도해보았습니다. 사람들을 불러 모으지 않고, 단 한 사람만을 위한 포스터를 그려보면 어떨까."

그림에 관해 설명할 때엔 언제나 발가벗는 기분이 든다.

그런 점에서 남동민의 풀 몬티 포스터가 맘에 들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약간 요령이 생겼다.

발표하다 떨리면 유나를 한 번 본다.

언제나 날 응원해 줄 친구란 걸 알기에 유나를 보면 힘이 난다.

그리고 김태민을 한 번 본다.

'김태민을 보면...'

그림도 못 그리는 주제에 어설프게 떨지 말자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김대성도 한 번 본다.

'저 병신...'

김대성을 보면 그냥 갑자기 의욕이 생긴다.

김대성 앞에서는 나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잠시 자신감을 충전하고 발표를 이어갔다.

"얼마 전 친한 선배 형이 제게 말했습니다. 그 선배 형은 이제 26살. 대학교 4학년, 아직 어리다면 어린 나이입니다. 그런데 내정된 회사에 가지 않고, 새로운 선택을 하는 게 두렵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나는 내가 그린 그림을 가리켰다.

내가 그린 포스터는 어머니였다.

나는 막을 내린 연극 무대 위에서 객석을 향해 인사를 하는 어머니를 그렸다.

어머니는 비닐 장화를 신고, 비닐 앞치마를 입고 계셨다.

그리고 손에는 고무장갑을 쥐고 있었다.

객석에는 박수를 치는 사람들을 검은 실루엣만으로 그려 넣었다.

어렴풋이 기억을 뒤져서 어머니가 일하는 감자탕집의 직원들을 몇 명 그려 넣었다.

나도 그려 넣었고, 전에 살던 집 집주인 할아버지도 그려 넣었고, 몇 년에 한 번 보는 외삼촌도 그려 넣었다.

그리고 포스터의 위에 텍스트도 적어 넣었다.

[ 이제까지 잘 하셨어요. 앞으로도 잘 해내실 거예요.]

포스터라기보다는 어머니께 보내는 감사편지에 가까웠다.

나는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포스터 대신 어머니 단 한 사람을 위한 그림을 그렸다.

[ 도자기의 특성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 역시, 도자기의 특성을 존중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겠죠. ]

기초 도예 김미숙 교수의 말에 힌트를 얻은 것이었다.

"그런데 마침 저희 어머니도 곧 직업을 바꾸시게 되었습니다. 저희 어머니는 그 선배보다 거의 두 배나 나이 드셨습니다. 그리고 거의 한 곳에서 15년이나 일하셨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어머니도 그만큼 더 무섭지 않으셨을까. 그래서 지금 어머니에게 필요한 건, 거창한 직업 가이드보다는 잘 해내실 거라는 작은 응원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교수님은 포스터는 목적 뒤에 숨을 수 있는 그림이라고 하셨지만, 저는 반대로 제 이야기를 담아보았습니다."

말해 놓고 보니 얼굴이 화끈 거렸다.

너무 화끈 거려 어떻게든 빨리 끝내고 싶었다.

'그래, 발표는 여기까지니까 실컷 욕을 퍼부으라고.'

발표를 어서 끝내만 준다면 이준성 교수에게 감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눈을 감고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마음의 각오를 다졌다.

하지만 한참 기다려도 욕설은 들리지 않았다.

'뭐해? 이준성. 어서 소리치라고. 날 보고 쓰레기라고 말해!'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욕은 들리지 않았다.

나는 조심스레 눈을 뜨고 고개를 들었다.

'응?'

교수는 내 그림에 얼굴을 들이밀고 그림을 관찰하고 있었다.

그리고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역시, 이번에도 웃기는군."

완전 나쁜 상황은 아닌 것 같았다.

"가끔 입만 산 놈들이 있지. 그림은 뭐같이 그려놓고 온갖 이유와 이야기를 지어내는 놈들이 있다. 그런 놈들은 죽을 만큼 욕을 먹여준다. 하지만 너는 그림에 대해서도 고민한 흔적이 보인다. 그림도 잘 그리고, 입도 잘 터는 놈은 결국 그림 장사꾼이 된다."

그리고 이준성 교수는 내게 물었다.

"왜 연극 무대를 그렸지? 마치 어머니를 배우처럼 표현한 특별한 이유가 있나?"

나는 더듬더듬 대답했다.

"교수님이 보여주신 옛날식 포스터들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물랑루즈의 배우들을 그린 경쾌한 포스터들이 좋아보였습니다. 어머니는 분명 힘든 일을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림까지 힘들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를 배우처럼 그렸습니다. 글자와 배경색도 노랑과 빨강 배색으로, 옛날식 포스터처럼 밝고 흥겨운 느낌을 흉내 냈습니다."

"그리고?"

교수는 또 다른 의도가 있냐는 듯 나를 추궁했다.

"어머니께서 그동안 어머니 역할은 충분히 잘 해내셨으니 이제..."

아무리 나라도 더 이상은 오글거려서 말할 수 없었다.

나는 어머니가 배우처럼 이제까지 어머니의 역할을 수행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제 배역을 내려놓고, 어머니에게 진짜 자신의 삶을 살아도 된다고 말하고 싶었다.

예술가는 원래 자기 자신을 남 앞에 드러내고 설명하는 직업이었다.

그리고 화가들은 전시에 앞서 작가 노트를 길게 적어 관객들에게 자신을 고백하기도 했다.

하지만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거기까지만 말하고 입술을 다물었다.

"좋다. 이 그림도 맘에 든다. 그림도 마음에 들지만, 자기 마음대로 포스터를 해석하고 재정의 하는 것도 마음에 든다. 화가라면 과제뿐만 아니라, 뭐든지 자기가 필요한 것은 마음대로 재정의 하는 용기도 필요하다. 그림도 좋다. 웃긴 놈이 말한 것처럼 옛날식 포스터의 멋과 흥취를 잘 살렸다. 이 놈도 그림이 뭔지 아는 놈이다. 이번 1학년 놈들은 재미있는 놈들이 많군."

후우.

나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칭찬 비슷한 것을 듣자 마음이 놓였다.

이준성 교수가 또 다시 평을 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놈은 세일즈 포인트를 잘 찍었다. 나이든 어머니를 응원하는 아들. 노골적으로 문구까지 직접 박아 넣었다. 간지럽긴 하지만, 이런 걸 좋아하는 사람도 많다. 한 사람을 위한 포스터라고 말했지만, 오늘 이곳에서 제일 잘 팔릴 것 같은 그림이다. 나이든 어머니를 모시는 입장에서, 나 역시 고개가 끄덕여진다."

쩝.

이준성 교수는 잠깐 망설이더니 다시 말했다.

"이 놈도 그림 값은 유보다. 한 번 생각해봐야겠다."

그리고 학생들 몇이 손을 들고 의견을 말하기도 하고, 칭찬을 건네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긴장이 풀려서 모두 건성으로 대답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나도 잘 몰랐다.

"어머니도 이 그림을 보면 무척 좋아하실 것 같습니다."

마지막에 유나가 한 말만 기억에 남았다.

"자, 여기까지. 커피 한 잔 하고 와서 수업을 이어가겠다."

그렇게 선포하고 잠시 휴식을 가졌다.

쉬는 시간.

난 마음을 진정시키며 혼자 친구들의 그림을 다시 살펴봤다.

그리고 내 마음대로 순위를 매겨 보았다.

'1등, 유나. 주제에도 충실하고, 그림도 괜찮아. 2등, 태민. 그림이 압도적으로 좋아. 남동민과 내가 공동 3위. 내 그림도 계속 보니까 나쁘지 않은 것 같아.'

사실 3등부터는 별 의미가 없으니까 누가 이기든 크게 상관이 없었다.

'전시를 못 해도 상관없어.'

어머니 여행 경비 정도는 내가 마련할 수 있으니까, 적당한 어떤 핑계를 만들면 될 것이다.

그리고 유나나 김태민에게 진다면 아쉽긴 해도 수긍할 수 있었다.

그리고 쿵, 쿵, 쿵.

드디어 강의실에 이준성 교수가 돌아왔다.

* * *

"자, 미리 해 둘 말이 있다. 오늘 모두 수고했다. 너희들은 아직 어리고, 발전할 여지가 많다. 그러니 기회는 계속 생길 거다. 물론 여전히 한심한 쓰레기를 가져온 놈도 있지만, 다음번엔 나아질 거라고 믿는다."

그리고 이준성 교수는 노골적으로 김대성을 노려봤다.

김대성은 애써 교수의 시선을 회피했다.

"내가 너희 중 둘을 데려가겠다고 한 전시. 생각만큼 대단한 전시가 아닐 수도 있다. 그냥 그림을 팔고, 아저씨, 아줌마들끼리 친목을 다지는 그런 자리일 수도 있다. 제대로 된 미술 관계자도 오지 않고, 팔다 남은 그림만 거는 그런 자리일 수도 있다. 그러니 뽑히지 않더라도 너무 실망하지 마라."

드디어 발표의 시간.

"자, 내가 데려갈 놈은 거기 너."

그리고 이준성 교수는 턱으로 유나를 가리켰다.

"제주도 촌놈. 잘했다. 지난 번 그림도 그렇고, 네 그림은 지금 바로 걸어도 잘 팔릴 거라 생각한다. 여러 가지로 매력이 많은 그림이다. 스무 살다운 풋풋함도 있고, 학생 같지 않은 노련함도 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이준성 교수가 나를 바라봤다.

"그래, 너. 웃긴 놈. 그림도 나쁘지 않았지만, 특히 이번 전시에 잘 어울린다. 아저씨와 아줌마들이 좋아할만한 그림을 그린다. 일단 너희 둘을 데려가겠다."

내가 뽑혔다.

이게 뭐라고, 가슴이 쿵쾅 거렸다.

물론 이게 전시 확정은 아니다.

교수의 친구들이 데려온 다른 학생들과 한 번 더 크리틱을 해야 한다고 들었다.

그래도 작은 목표를 이뤘다는 사실이 솔직히 즐거웠다.

유나를 바라보자, 유나도 마침 나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나를 향해 눈을 찡긋했다.

"자, 두 놈을 데려가지만, 그냥 우리 전시에 잘 맞는다는 것뿐이지, 절대 그게 그림의 우열은 아니다. 명심하도록."

그리고 이준성 교수는 몇몇 그림들에 대해 부연 설명을 했다.

"일단 잘생긴 놈은 그림은 좋다. 그런데 저 놈은 약간 4차원이야. 그래서 어쩌면 이런 전시에 맞지 않을 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늙은 놈. 넌 그림이 계속 좋아질 거다. 그러니 굳이 서둘러 전시 같은 걸 할 필요가 없지."

모처럼 이준성 교수가 친절하게 이유까지 설명했다.

그럴듯한 이유라서 모두 납득할 수 밖에 없었다.

김태민과 남동민도 교수의 말에 수긍하는 것 같았다.

특히 김태민은 처음부터 전시에 별 미련도 없어 보였다.

그렇게 이번 크리틱도 마무리 되었다.

* * *

3일 후.

유나와 나는 이준성 교수가 보내준 주소로 버스를 타고 이동했다.

잘 모르는 장소라 대중교통이 편했다.

유나가 창가에 앉고, 내가 그 옆에 앉았다.

"옛날 생각난다."

유나의 말에 피식 웃음이 났다.

옛날이라고 해봤자 겨우 몇 달 전.

우리가 쇼핑몰을 시작하기 전, 동대문에 갈 때마다 이렇게 버스를 타고 나란히 앉았었다.

난 버스를 타는 것도 좋아했다.

'나는 항상 정신없이 사니까.'

가끔 이렇게 대중교통의 의자에 앉아서 멍하니 자신을 비우는 시간도 필요했다.

그리고 창밖을 바라보는 유나의 뒷모습을 보는 것도 무척 즐거웠다.

하얗고 가느다란 목.

부드러운 솜털. 음. 에헴.

"몇 달 만에 우리 생활이 많이 바뀌었다. 그치?"

유나가 들뜬 것처럼 말했다.

우리 둘 다 무척 바빠서, 오랜만의 외출이었다.

거기다 원하던 전시 기회에 한 걸음 다가가서 유나는 무척 기분이 좋아보였다.

난 대답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유나가 들뜨면 내가 차분해지고, 내가 헷갈리면 유나가 중심을 잡아주고.

같이 회사를 운영해서 그런지 우린 이제 손발이 잘 맞았다.

나도 지난 몇 달을 돌아보았다.

쇼핑몰도 하나 생겼고, 김태민과도 친해졌고, 원하던 대로 유나와 보내는 시간도 길어졌다.

다만 티격태격하거나 장난치기보다는 서로를 배려하고 조심하는 마음이 더 커졌다.

그래서 1학기가 그리울 때도 있었다.

웹 에이전시와 쇼핑몰 둘 다 무난히 궤도에 오르고 있었다.

매출이나 이익도 중요하지만, 학교와 병행하는 내게는 안정감도 중요했다.

다행히 승희씨나, 팀 수진의 도움으로 두 회사 모두 틀을 갖추고 있었다.

"나 사실 고백할 게 있어."

멍하니 있는 내게 유나가 말을 꺼냈다.

"응?"

"실은 전에 기초 도예 자소상 만들기 말이야. 혼자 무척 헤매고 있었거든. 그래서 넌 어떻게 하고 있나 싶어서 네 자소상을 봤어. 그런데 네 스케치랑 사진이 있더라고. 네 스케치를 보고 내가 어디가 틀린 지 알아차렸어. 그게 컨닝한 기분이 들어서, 계속 미안했어."

아, 난 또 뭐라고.

일부러 보라고 거기 둔 거였는데.

실은 나도 유나의 사진을 보고 자소상의 답을 찾았다.

하지만 쇼핑몰용으로 촬영한 사진을 내가 마음대로 들여다 본 것을 말하면 또 한 번 내 옆구리에 주먹이 꽂힐 게 분명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생색을 내야 했다.

"내 스케치를 맘대로 봤구나. 너 나한테 빚진 거야."

"그..그래."

물론 크게 빚을 받아낼 생각은 없었다.

그냥 유나의 발은 요새 잘 지내나 살짝 궁금한 정도였다.

곧바로 말을 꺼냈다간 거절당하고 한 대 맞을 게 분명하니, 기회를 잘 포착해야 했다.

'절대 거절할 수 없는 순간을.'

아무튼.

이런저런 잡담을 하다 보니 어느새 도착이었다.

"그냥 시시한 카페 전시라고 하지 않았어?"

유나가 고개를 치켜들고 말했다.

"카페도 카페 나름인가봐."

그냥 시시한 카페가 아니었다.

정기적으로 전시를 하는 3층짜리 대형 카페였다.

4층 건물을 통째로 쓰고 있었는데, 1,2,3층이 전부 카페인 것 같았다.

카페 1층에 들어서자, 직원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주문하시겠습니까?"

"그게...이준성 교수님의 소개로 왔는데요."

"아, 잠시 만요."

잠시 후, 카페의 매니저가 다가와서 우리를 안내했다.

"지하와 2, 3층을 전시 공간으로 쓰고 있어요. 다른 작가님들도 오시기로 하셨으니까 편하게 카페를 둘러보시며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2층엔 중앙에만 탁자들이 있고, 커피를 마시며 전시도 보는 구조였다.

그리고 3층엔 탁자는 없고 그림들만 전시되어 있었다.

엘리베이터도 있었지만, 계단 옆에도 작은 그림들이 걸려 있어서 우린 계단으로 올라갔다.

아직 다른 작가의 전시가 진행 중이라 어떤 식으로 그림이 전시되는지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우리 말고도 그림을 보는 손님들이 몇몇 보였다.

이준성 교수는 시시한 전시라고 했지만, 제법 크고 근사한 카페였다.

이만하면 삼청동의 작은 미술관보다는 오히려 훨씬 나은 것 같았다.

"나, 떨려."

유나는 무척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그렇게 3층 전시까지 돌아보고 있는데, 또각또각 누군가 계단으로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뭔가 이상한 예감.

나는 계단 쪽을 노려보며 기다렸다.

이런..

잠시 후 계단에서 올라온 사람도 나를 보고 놀랐다.

"어?"

우린 같은 감탄사를 뱉었다.

너무 익숙한 그 얼굴.

한동안 잊고 지냈지만, 한때는 원망하고 무서워했던 얼굴이었다.

그림 실력도 없으면서 디자인을 배운다고 뒤에서 비웃던 그 녀석.

한 때는 절대 넘을 수 없던 산처럼 여겨지던 그 녀석.

한국대가 그림은 못 그리면서 지나치게 아카데믹하다고 비난하면서, 사실은 한국대 시험을 봤던 그 녀석.

바로 김상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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