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 반성 □
딸깍.
방문이 열리고 먼저 유나가 걸어 나왔다.
가을 메이크업으로 바뀐 얼굴.
마음에 들었는지 자신감도 넘쳤다.
'회귀가 좋긴 좋군.'
나름 디자인 전공이었는데도, 지난 생 내내 여자 화장에 관해서는 모르고 지냈다.
가끔 머리색이나 입술색 정도만 감지했을 뿐.
하지만 분위기가 달라진 유나의 얼굴을 보자 여자들이 왜 화장을 하는 지 알 것 같았다.
"와, 예뻐요!"
이소영이 호들갑스럽게 칭찬했다.
'나는 살짝 어색하기도 한데.'
유나가 어려서 그런 건지, 아니면 내 눈에만 그런 건지.
'왠지 유나는 지금보다 몇 년 후에 더 예뻐질 것 같아.'
뭐, 나야 이쪽 분야는 잘 모르지만 그냥 그럴 것 같았다.
몇 년 후가 기대 되었다.
'그런데 과연 그때까지 우리가 계속 친하게 지낼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아무튼.
본인도 좋아하니, 일단 성공이었다.
다음은 정화 선배.
정화 선배도 걸어 나와서 자기 화장을 자랑했다.
어른스러운 느낌이라 그런지 훨씬 화장이 잘 어울렸다.
그리고 제일 놀라게 한 사람은 역시 수진 선배.
수진 선배는 평소에 청순한 느낌이었다.
'이목구비가 커서 그런가.'
하지만 화장을 하자 완전 분위기가 달라졌다.
왜 그렇게 많은 남학생들이 고백을 하는지 단번에 이해되었다.
한철이와 김태민의 표정을 보니 나만 그런 건 아닌 모양이었다.
"와, 진짜 연예인 같아요!"
심지어 이소영까지.
세 명 다 이 오피스텔에만 보기에는 과분하게 예뻤다.
* * *
"옷이 반값이라며!"
탁!
탕수육을 먹던 정화 선배가 젓가락을 탁자 위에 내려놓으며 소리쳤다.
분명 예전에 한 번 봤던 반응이다.
옆에서 유나가 머리를 긁적였다.
유나가 화장을 하며 동대문 도매상에 관해 이야기한 모양이었다.
내가 수습해야 했다.
"그렇긴 한데 가면 엄청 힘들어요. 시장이 넓어서 계속 걸어야 해요."
"옷이 반값이라며!"
탁!
이번에는 수진 선배.
정화 선배를 흉내 내긴 했지만, 정화 선배만큼 무섭진 않았다.
"쇼핑하듯이 옷을 만져보지 못해요. 옷이 막 쌓여 있는데, 눈으로만 봐야 해요."
"옷이 막 쌓여 있다고?"
수진 선배의 눈이 초롱초롱해졌다.
의미가 잘못 전달된 것 같았다.
자기가 듣고 싶은 내용만 가려서 듣고 있었다.
"동대문 가는 것도 힘들어요."
유나와 나는 갈 때는 주로 버스.
올 때는 택시를 탔다.
차비도 만만치 않아서 자동차 리스를 알아보고 있었다.
어차피 회사 경비로 비용처리하면 되기 때문에, 리스를 하는 것이 대중교통보다 더 절약일 수도 있었다.
다만 신중하고 싶어서 잠깐 기다리고 있을 뿐.
"옷이 반값이라며!"
탁!
이번에는 김태민.
이 녀석은 또 왜 이래.
최근 많이 심심했는지 동대문까지 따라올 모양이었다.
"나 엄마 차 가져왔으니까, 그럼 내 차 타고 가면 되겠다."
불쌍한 녀석.
김태민은 지금 스스로 불길로 뛰어드는 한 마리 불나방이었다.
'넌 그곳이 어떤 곳인지 몰라.'
난 지금 스무 살인데, 내년에 곧바로 스물다섯 살이 될 것 같았다.
동대문은 그만큼 남자에겐 힘든 곳이었다.
하지만 교통편까지 제공한다면 기꺼이 받아줄 수밖에.
"그래, 그럼 다 해결 됐네."
정화 선배가 그렇게 결론 내려 버렸다.
사실 결론은, 옷이 반값이란 것을 알게 된 시점에서 이미 내려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그때, 유나가 말했다.
"언니들, 이왕 동대문 가는 길에 이번에 모델도 한 번 해 볼래요? 촬영까지 같이 해 봐요."
난 유나가 말도 안 되는 제안을 한다고 생각했다.
누가 내게 그런 제안을 한다면 난 1초도 망설이지 않고 바로 거절했을 것이다.
그런데 둘의 반응은 내 예상과 달랐다.
"그래 볼까?"
"재미있을 것 같긴 해."
둘은 쉽게 승낙해버렸다.
두 사람이 평소에 자신감이 있어서 그런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보다는 약간 여자의 본성 같은 것을 느꼈다.
'예쁜 옷을 입고, 한 번 쯤 모델이 되어 보는 것.'
여자들은 항상 그런 기회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친한 친구들끼리 작은 쇼핑몰 모델이라면, 부담도 적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들에게 거절할 수 없는 달콤한 제안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둘이 도와준다면 한 번에 많은 옷을 올릴 수 있을 것이다.
화장은 물론, 옷을 갈아입는 수고도 삼분의 일로 줄어든다.
'그렇다면...'
평소에 올리지 못한 옷들을 몰아서 업로드 할 수 있을 것이다.
계절과 상관없는 기본 티셔츠 등등 꾸준히 팔리는 필수 상품들도 많이 있었다.
여름옷도 빨리 작업해서 올릴 수만 있다면 지금부터 제법 팔릴 것이다.
그럼 하이 유나는 이번 기회에 제대로 된 쇼핑몰의 모습을 갖추게 될 것이다.
그렇게 네 사람, 김태민까지 다섯 사람의 뜻밖의 여정이 결정되었다.
* * *
우린 저녁 12시 쯤 동대문에 도착했다.
"왜 이런 곳을 21년이나 모르고 살았지?"
"한국에 디즈니랜드가 있었어."
밤늦은 시간이지만, 정화 선배와 수진 선배는 동대문에 발을 내딛는 순간 자동 충전이 되었다.
그리고 목줄 풀린 강아지처럼 마구 뛰어다녔다.
고마운 생각에 동대문 간식들을 아끼지 않고 먹였더니 더 그런 것 같았다.
와아...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어디서나 눈빛이 느껴졌다.
셋을 향한 감탄과 호기심, 약간의 질투까지.
유나, 수진, 정화 세 사람이 상가를 걸으면 상인들은 물론 손님들까지 한 번씩 다 쳐다봤다.
'이거 은근히 기분 좋은데.'
유나 혼자 왔을 때도, 한산한 시간에는 상인들이 붙잡고 말을 걸곤 했었다.
그런데 셋이 걷자, 평소의 세 배였다.
"언니들 어디서 왔어?"
"이 옷 한 번 보고가. 셋이 진짜 사진발 잘 받겠다."
동대문 도매상은 절대 이렇게 친절한 곳이 아니었다.
하지만 세 사람은 상인들의 배려 속에 편안하게 쇼핑을 즐겼다.
그리고 셋은 옷 한 벌을 볼 때마다 같이 의견을 나누고 코디 계획을 짰다.
난 많이 반성했다.
'옷에 관해 의논할 게 이렇게 많았구나. 난 그동안 보릿자루처럼 그냥 멀뚱멀뚱 보고 있었으니 유나 혼자서 힘들었겠다.'
그동안 유나에게 일을 너무 떠넘긴 것 같아 많이 미안했다.
'어쩌면 같이 쇼핑몰 하자고 했던 게 너무 무모했었나.'
더 늦기 전에 알아서 다행이었다.
앞으로 유나를 도울 방법들을 많이 고민해봐야 할 것 같았다.
유나도 2학기가 되면 학교와 일을 병행해야 한다.
'그림만 그려도 바쁠텐데.'
그러니 그 전에 부담을 덜어줘야 했다.
그런 생각들을 하는 사이.
헉. 헉.
사입 가방까지 어깨에 맨, 김태민은 혼자 사막 한 복판을 걷는 부랑자 같았다.
난 이미 단련이 되어 괜찮았다.
하지만 김태민은 죽어가고 있었다.
"너...대체 이제까지 혼자서 어떻게..."
'분명 자기가 따라오겠다고 했으니까.'
난 책임이 없었다.
다만 집에 돌아갈 때 안전 운전을 해야 하니, 좀 있다 커피를 많이 먹여야 할 것 같았다.
새벽 3시쯤, 잠깐 쉬는 시간.
세 사람이 같이 화장실에 갔다가 유나가 먼저 나왔다.
김태민은 정신 차리라고 강제로 세수를 하러 보냈다.
나 혼자 있는 것을 보고 유나가 말했다.
"생각해봤는데 미안. 두 언니들 동대문 데려오는 일이랑 모델 제안한 것, 너한테 미리 의논했어야 했나 싶어서. 다음부턴 중요한 일은 미리 의논할게."
난 또 뭐라고.
난 오히려 유나가 두 사람에게 제안해줘서 다행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전혀 미안해할 필요가 없었다.
"내가 미안하지. 그 동안 셋이서 해야 할 일을 너 혼자 하고 있었잖아. 내가 앞으로 더 노력할게."
"아니야. 혼자 했다고 생각한 적 없어."
유나가 웃으며 대답했다.
유나가 웃어서 다행이었다.
그리고 아직 서로에게 사과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같이 살거나, 같이 일했다가 나중에 서로 원수가 되는 사람들을 너무 많이 봤었다.
지난 생의 나는 사람들 관계는 원래 그런 것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유나와 지금의 친구들과는 절대 그러고 싶지 않았다.
'내가 절대 그렇게 내버려두지 않을 거야.'
앞으로 더 긴장하고 노력해야 할 것 같았다.
그렇게 길고 힘든 밤은 무사히 지나갔다.
그럭저럭 김태민도 살아남았다.
* * *
다음 날 안과밖 건축 사무소의 안영우 실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나는 이틀 전 홈페이지의 제안서를 이메일로 그에게 보냈었다.
"안녕하세요, 실장님. 제안서는 확인하셨습니까?"
"네. 재미있더군요. 저희 사무실로 한 번 더 와주실 수 있을까요?"
"무슨 일이죠?"
"무슨 일이긴요. 계약서에 서명하셔야죠."
난 수화기 너머 들리지 않도록 주먹을 쥐고 만세를 불렀다.
그 이후의 대화는 건축사무소 실장실에서 이뤄졌다.
"영업팀에서 반대하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그 쪽 사람들은 화려한 걸 좋아하거든요. 360도 회전 같은 거요. 영업하기 좋으니까요"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지만 저를 포함해서 제안서가 괜찮다고 하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똑같이 하는 말들이, 엄청 튈 것 같다고 하더군요. 튀기만 해도 일단 성공이니까요. 기획팀에서 두 명을 차출해 소개해드리겠습니다. 같이 작업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나는 안영우가 내미는 서류들에 서명했다.
"맞다. 혹시 김동윤 작가님을 찾아가셨습니까?"
"어? 어떻게 아셨죠?"
김동윤은 내가 조언을 구한 사진 작가였다.
안영우가 웃으며 대답했다.
"김 작가님이 저희 아버지 고향 후배십니다. 한 달에 한 두 번, 두 분이 만나서 소주 한 잔 하시는 사이입니다. 저희 집에도 가끔 오시고요."
이런.
그것도 모르고 홈페이지 제작이 힘들다고 고백했으니.
내 밑천이 들통 난 기분이었다.
그런데 그런 것치고는 안영우의 표정이 너무 밝았다.
"김 작가님이 아버지한테 이 대표님 칭찬을 엄청 하셨습니다."
"네?"
"기본이 됐다고 하시더군요. 보통 홈페이지 제작은, 사이트만 만들고 자료는 회사에서 주는 걸로 채워 넣으니까요. 그런데 직접 건물들을 답사하셨다면서요? 사실 이 제안서는 저희가 회의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아버지가 그 말씀을 듣는 순간, 벌써 통과된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번엔 진짜 운이 따랐던 것 같다.
저번 일을 잘해서 새로운 업체를 소개받는 것은 엄밀히 따지면 행운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김동윤 작가가 안동진 대표의 고향 후배일 줄은 몰랐다.
그리고 내가 힘들다고 고백한 것을 오히려 좋게 볼 줄도 몰랐다.
억울한 생각도 들었다.
'벌써 통과될 제안서를 작업하느라 며칠간 고생했었다니.'
그래도 행복한 억울함이었다.
나는 이번 제안서에 4500만원을 적어냈다.
그리고 추가 촬영비는 건축 사무소가 부담하기로 했다.
프로그램보다는 디자인의 비중이 높은 홈페이지라서 내 수익이 훨씬 커질 것이다.
"선금 2000만원은 내일 오전까지 입금될 겁니다. 그럼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이 건으로 통장 잔고는 4000만원이 넘게 된다.
잔금까지 받으면 6000이 넘을 지도 몰랐다.
하이 유나를 위한 총알도 충분히 확보되었고, 앞으로 몇 개월간 회사 운영비는 걱정이 없게 되었다.
'이 추세로 잘 이끌면 연말까지 1억도 모을 수 있지 않을까.'
전생에서 나이 들면서 돈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린 것 같았다.
1억, 2억이 별 의미 없어지고, 통장에 돈이 있어도 내 돈같이 여겨지지 않을 때도 있었다.
그냥 잠시 머물다 사라질 숫자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어려져서 그런지 돈을 보면 다시 심장이 뛰었다.
그리고 이 돈으로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일들이 떠올랐다.
"아버지가 사장실에서 이 대표님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네?"
"저희 아버지가 실은 한 달에 서너 번 출근하십니다. 그런데 오늘 이 대표님이 오신다고 해서 일부러 출근하셨습니다. 뵙고 가시죠."
"알겠습니다."
대답은 시원하게 했다.
하지만 안동진 대표는 위엄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만날 생각을 하니 벌써 긴장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