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력천재 미대생-48화 (48/203)

■ 48. 개시 □

나는 미대생.

그림을 그리고 싶어 학교에 왔다.

하지만 다른 학생들과는 상황이 달랐다.

학교를 다니려면 직접 돈을 벌어야 한다.

그리고 방학은 사업을 다지기 위한 좋은 기회였다.

그래서 진짜 정신없이 일했다.

우리의 새 사업 분야, 부동산 전문 웹 에이전시.

드디어 한철이의 작업이 완료되었다.

디자인은 내가 전부 담당했다.

사무적인 디자인이라 수월하게 작업했다.

그래도 역시 기존의 부동산 에이전시들보다 훨씬 감각적이고 세련된 느낌이었다.

"이제 시작하자."

"그래."

아직 상품이 부족하기도 했고, 몇 군데 눈에 걸리는 곳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부분들은 장사를 하면서 개선하기로 했다.

새 웹 에이전시의 이름은 원 부동산.

물론 사이트만 새로 판 거고, 사업자 등록은 기존의 원 디자인과 같이 갔다.

그리고 키워드 광고를 구매했다.

그런데 재미있는 부분이 있었다.

"원피스, 스커트, 블라우스, 티셔츠...."

의류 쪽 키워드들은 경쟁이 치열했다.

그래서 클릭 당 광고비가 1~2천원을 넘어가기도 했다.

하지만 부동산 웹 에이전시는 키워드 당 1~2백원 수준.

그런데 마진은 반대였다.

동대문 원피스 한 벌을 팔아봤자 잘해야 1~2만원의 마진을 남겼다.

하지만 부동산 사이트는 제일 저렴한 상품 하나를 팔면 100만원 안팎의 수익이 발생했다.

"한철아, 당분간 고객 전화는 너랑 내가 받자. 여름 방학 동안은 꾸준히 출근해서 자리를 지켜줘. 어차피 코딩 작업도 방학 동안은 계속 해야 할 거야."

"그럴게."

웹 에이전시의 전화 상담원은 단순한 고객 담당이 아니었다.

코딩 부분의 기술도 이해해야 했고, 디자인의 쪽도 꿰뚫고 있어야 했다.

거기다 손님을 다루는 기술까지 가져야 하는 상당한 고급 인력이었다.

디자이너인 동시에 유능한 고객 상담원인 승희 씨는 그런 의미에서 최고의 인력이라 할 수 있었다.

아무튼 원 부동산의 동향을 파악할 때까지 새로운 상담원 고용은 무리였다.

그래서 나와 한철이 일단 직접 그 역할을 맡기로 결정했다.

따르릉.

역시 검색 광고의 위력은 대단했다.

2만원짜리 청바지의 첫 주문에는 거의 1주일이 걸렸다.

하지만 최저가 150만원인 웹 에이전시는 광고를 건 다음 날, 첫 전화가 걸려왔다.

우린 눈빛으로 누가 전화를 받을 건지 의논했다.

살짝 한철이의 긴장이 느껴졌다.

하지만 두려움은 극복해야 하는 법.

"한철아, 한 번 해봐."

그리고 한철이가 수화기를 들었다.

[ 네, 원 부동산입니다. ]

그리고 한철이의 고객 상담이 시작되었다.

생각보다 잘했다.

프로그래머는 어눌하고 말이 서툴 거라는 건 전부 고정관념이었다.

[ 네, 최저가 상품은 150만원인데, 사실 현장에서 쓰시기에 아무 불편이 없습니다. 타사의 250만원짜리 웹 사이트보다 기능적인 면에서 오히려 더 뛰어날 겁니다. 디자인은 직접 확인하시면 아실 테고요. ]

'제법인데, 한철이.'

처음엔 목소리가 떨리기도 했지만, 곧 말이 술술 나왔다.

[ 아니요. 저희가 부동산 쪽은 신생이 맞습니다. 하지만 쇼핑몰 디자인 판매는 오래 했습니다. 그리고 그 영화 아시죠? 김제우 감독이 연출한 얼마전 개봉한. 예, 맞습니다. 그 홈페이지에 가면 저희 회사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아무래도 저희가 디자인 전문 회사라 다른 회사들이 저희를 따라올 수가 없습니다. ]

한철이가 고객 상담하는 모습을 나와 이소영은 웃음을 머금고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후.

[ 네, 고객님. 충분히 생각해보시고 연락 주십시오. 다른 업체와도 비교해 보시고요. 아마 저희가 탁월할 겁니다. ]

그렇게 여유 있는 마지막 멘트까지 남기고 한철은 전화를 끊었다.

"잘했어요!"

이소영은 박수까지 치며 한철을 칭찬했다.

그리고 오래 걸리지 않았다.

30분 쯤 후, 다시 전화가 왔다.

[ 네, 그 수정 부분은 특별히 무료로 해드리겠습니다. 150만원의 절반을 선금으로 입금하시면 곧바로 작업 들어가겠습니다. 말씀하신 수정 사항들은 이메일로 정리해서 보낼 테니 확인 후 답신주시면 됩니다. ]

딸깍.

전화를 끊고 한철은 주먹을 쥐고 외쳤다.

"내가 첫 주문을 따냈어!"

한철이 오늘 첫 주문을 받았고, 150만원짜리 사이트를 팔았다.

내가 직접 디자인했기 때문에, 프로그래머의 보수를 빼면 전부 내 몫이 되었다.

얼핏 백만 원이 넘는 금액.

그리고 다른 모든 장사가 비슷하겠지만, 웹 에이전시의 매출은 눈 굴리기와 비슷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커질 것이다.

"자! 오늘 점심은 유나 오면 내가 크게 쏠 테니까, 배고파도 조금만 참아요!"

"와우! 대표님 최고!"

나는 샘플 사이트 하나당 한철이에게 1~2백만원을 지급했다.

부동산 에이전시를 만들면서 샘플 다섯 개, 본 사이트 한 개, 모두 6개의 사이트를 맡겼다.

그래서 원 부동산 건으로만 한철이에게 지급할 돈이 거의 700만원이었다.

"당장 필요한 돈도 아니니까, 그 보수는 수익이 발생하면 천천히 줘."

한철이 그렇게 말해준 덕분에 초기 부담을 대폭 줄일 수 있었다.

물론 사이트를 판매할 때마다 커스터마이징 비용은 추가로 지급해야 한다.

지금 추세라면 한철이의 대금도 금방 청산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그렇게 원 부동산은 순조로운 스타트를 끊었다.

* * *

원 부동산에 비해 하이 유나의 매출은 잔잔했다.

이틀에 한 벌, 하루에 한 벌, 그러다 가끔 하루에 두 벌.

동대문까지 왕복 차비까지 고려하면 하이 유나는 매일 적자였다.

그래도 우린 꾸준히 동대문에 나갔고 조금씩 상품 수를 늘려갔다.

도매 시장은 건물마다 옷의 성격이 달랐다.

어떤 건물은 흔하고 대중적인 옷.

어떤 건물은 조금 더 고급스런 느낌.

또 어떤 건물은 일본풍.

그러니 여러 도매 시장을 부지런히 둘러보고 예쁜 옷을 발굴해서 잘 섞는 것이 옷 가게 사장의 역량이었다.

새벽 2시.

우리는 한산한 도매 건물을 둘러보고 있었다.

주로 중국 수입 의류를 다루는 건물이었는데 특이한 옷이 많아서 유나와 자주 오곤 했었다.

다만 여대생 일상룩을 지향하는 우리가 바로 쓸 수 있는 옷은 적은 편이었다.

그렇게 느긋하게 도매상 사이를 걷고 있는데, 그때 누가 우릴 불렀다.

"어이, 총각. 아가씨. 이리 좀 와 봐요."

[ 은성사 ]

도무지 옷가게 같지 않은 간판이 걸려 있었고, 가게 안에는 인심 좋아 보이는 중년 부부가 앉아 있었다.

그리고 우리에게 다짜고짜 자기들 노트북을 들이밀었다.

"혹시 아가씨가 이 모델 맞아요?"

"맞네. 자주 오는 사람이다 싶어서 봤더니만, 가까이서 보니까 더 곱네."

우린 약간 얼떨떨했다.

실제로 유나를 알아보는 사람을 만나다니.

나는 재빨리 가게 안을 둘러봤다.

그냥 평범한 도매상.

다만 옷뿐만 아니라, 악세사리나 슬리퍼 같은 것들도 함께 있었다.

그런데 남자 사장이 여자 사장에게 말했다.

"여보, 그것 좀 가져 와 봐요."

"그래요. 내가 가져올 테니까, 당신은 커피라도 좀 시켜요."

"그럴게."

동대문 도매상은 전화 한통이면 커피가 가게로 배달되었다.

곧 남자 사장이 커피 네 잔을 주문했고, 우린 졸지에 그들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잠시 후.

커피보다 여자 사장이 먼저 도착했다.

손에는 커다란 비닐봉지를 들고 있었다.

그리고 봉지 안에서 꺼낸 것은 다름 아닌 신발이었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기본형 캔버스 스니커즈.

전혀 새로울 것 없는 상품이었다.

그리고 우리에게 물었다.

"어때요?"

나는 여자 옷에 대해서는 감각이 제로였다.

그래서 옷의 사입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유나가 담당했다.

유나는 잠시 신발을 살펴본 후,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냥 흔한 캔버스화네요."

유나와 나는 시장조사를 철저히 했기 때문에 이런 기본 아이템의 가격은 거의 꿰고 있었다.

기본 캔버스화는 꾸준히 팔리는 아이템이었다.

하지만 중국에서 직접 수입해서 인터넷에 파는 상인들도 있었다.

때문에 우리 같은 소매상들은 인터넷 가격 경쟁력이 없었다.

'물론 우리가 상품이 많다면...'

다른 옷을 팔면서 같이 팔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이라면 우리에겐 필요 없는 상품이었다.

그런 우리 생각을 읽었는지, 남자 사장이 말했다.

"맞아요. 요즘 인터넷에 풀린 거랑 같은 신발이에요. 지금 C마켓에는 이게 9900원에 팔리고 있을 거야. 하지만 우리가 먼저 수입해서 여기서 8000원에 팔았지."

도매가가 8000원이면 우리는 소매가 13000원에 팔 수 있다.

하지만 다른 판매자는 9900원.

역시 우리에게 필요 없는 상품이었다.

그래도 우리는 커피까지 받았으니, 일단 사장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래서 이 신발을 말이요. 이제 그만 수입하려고. 다른 업체한테 가격에서 밀리니까. 그래서 우리한테 아주 조금 남았는데, 혹시 이걸 가져가서 한 번 팔아볼래요? 켤레 당 3000원에 줄게. 어차피 땡 치면 우린 그 값도 못 받거든."

"3000원이요?"

유나가 되묻자, 사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여사장이 덧붙였다.

"대신에 240, 245 사이즈가 품절이야. 다른 사이즈도 수량이 많지는 않아요."

유나와 나는 서로의 눈을 쳐다봤다.

지난 며칠간 옷을 몇 벌 팔긴 했다.

그런데 특이하게 대부분 손님들이 중, 고등학생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가격에 굉장히 민감했다.

그래서 우린 같은 생각을 했다.

'3000원이면 해 볼 만해.'

여사장이 돋보기를 꺼내더니 수첩을 뒤져서 더듬더듬 말했다.

"어디보자, 230이 60켤레, 235가 72켤레, 250이 34켤레 남았어요."

여자 신발은 230~240 사이가 제일 많이 나갔다.

240이 없는 게 아쉽긴 하지만, 가격이 워낙 저렴했다.

나쁘지 않은 조건이었다.

이제 내가 나설 차례.

결제에 관한 부분이었다.

"그럼 여기 있는 신발들을 한 번에 다 사야 하는 건가요?"

그러자 사장 부부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럴 필요 없어요. 이제 장사 시작하는 사람들 같은데 무슨 돈이 있다고. 그런데 두 사람 몇 살이에요?"

우리는 상인들에게 우리가 대학생이라고 밝히지 않았다.

우릴 쉽게 볼까봐 그런 것도 있었고, 또 한국대 생이라고 하면 말이 길어질까 봐 그런 면도 있었다.

그래서 누가 나이나 신분을 물어볼 때마다 대강 얼버무렸다.

"스무 살이요."

유나가 대답하자 사장 부부는 다시 웃었다.

"좋을 때다. 그냥 주문 들어오면 그때그때 가져가요. 계산은 가져가는 만큼만 하고. 대신 이 신발은 두 사람한테만 줄게."

우리에겐 너무 완벽한 조건이었다.

다만 왜 이렇게까지 해주는 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또 내 생각을 읽었는지 남자 사장이 설명했다.

"우릴 봐요. 우린 나이 들어서 이제 인터넷을 못 해. 아들이 가르쳐주는 데 아무리 들어도 모르겠어. 그런데 요샌 인터넷을 안 끼면 장사가 안돼.

그래서 우리도 인터넷을 붙잡긴 해야겠는데, 맘에 드는 사람이 있어야지. 그런데 며칠 전부터 두 사람이 부지런하게 매일 오더라고.

내가 이 바닥에서 장사를 25년 했어요. 이제 그냥 보면 알아. 될 사람들인지 안 될 사람들인지."

"그리고 얼굴도 제일 예쁘고."

여사장이 옆에서 추임새를 넣었다.

은성사.

우린 그냥 흔한 도매상이라 생각하고 쉽게 스쳐 갔었다.

그런데 이곳 사장들은 우릴 지켜보고 있었다.

유나와 나는 놀랍기도 하고, 고맙기도 해서 적당한 대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

"두 사람 아직 결혼 안했지?"

남자 사장이 갑자기 훅 들어왔다.

"네?"

동대문에는 원래 젊은 커플끼리 같이 옷가게를 만드는 경우가 흔했다.

그래서 도매상들은 대부분 우릴 당연히 커플로 생각했다.

은성사 사장들도 그런 모양이었다.

"네...네. 아직입니다."

내가 머뭇거리며 대답하자 남자 사장이 내 어깨를 툭툭 쳤다.

"그래, 부지런히 벌어요. 나도 동대문에서 장사 배워서 결혼도 하고 집도 사고 그랬어. 부지런히 벌어서 적금 넣어서 결혼해요. 저런 참한 아가씨 또 없어."

난감하긴 했지만, 어느 정도 동의하는 부분도 있었다.

그리고 차마 친절한 사장님의 상상을 함부로 깰 수가 없었다.

"네, 노력하겠습니다."

그래서 꾸벅 인사하며 큰 소리로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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