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 프로젝트 □
한철과 나는 새벽까지 함께 기숙사 책상에서 같이 일했다.
한철은 노트북을 두드리고, 나는 노트북에 모니터를 물려서 디자인을 짰다.
플래시 게임도 제대로 만들려면 엄청 손이 많이 가는 일이었다.
예를 들어, 작은 움직임에도 가속도와 탄성 효과를 넣어줘야 했고, 효과마다 이미지를 추가해야 했다.
직접 만들 수 없는 이미지는 돈을 주고 사야했는데 그것도 비용이 만만치 않았다.
디디디디.
전화벨이 울렸다.
또 소영씨였다.
어차피 우리는 서로 새벽까지 깨어있는 걸 아니까, 밤 늦게 전화해도 상관없었다.
그래도 승희씨는 밤 10시가 넘으면 전화하지 않았다.
하지만 소영씨는 달랐다.
소영씨는 일하다 궁금한 게 생기면, 메신저 로그인만 되어있으면 밤이든 새벽이든 가리지 않고 전화했다.
"네. 소영씨. 알겠습니다. 보내주신 파일 확인하고 답 드릴게요."
나야 상관없었다.
오히려 열심히 일하는 직원이 대견했다.
"소영씨라. 또 새로운 이름이 등장했군."
한철과 내 덕분에 같이 깨어있던 형원 선배가 중얼거렸다.
학기 말이지만 4학년인 형원 선배는 별로 바쁘지 않았었다.
하지만 열심히 움직이는 두 동생에게 자극받았는지 형원 선배도 뭔가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사실상 두 동생이 형원 선배한테 민폐를 끼치는 상황이었는데, 형원 선배는 조금도 싫은 티를 내지 않았다.
미안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했다.
어설프게 여학생을 밝히는 것만 빼면, 형원 선배는 상당히 대인이었다.
덕분에 우리 방은 새벽까지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 * *
지지직. 지지직.
형원 선배의 노트북에 연결된 잉크젯 프린트가 작동했다.
형원 선배는 장난스런 이미지와 달리 꽤 아날로그 타입이었는데, 자기가 쓴 글은 꼭 종이에 프린트해서 다시 읽어 보았다.
"글 쓰세요?"
"응. 사진의 이해 과제 때문에 오랜만에 글 썼더니 재밌더라고. 마침 괜찮은 공모전도 있길래, 급하게 도전 중이야. 한 번 읽어볼래?"
형원 선배는 한철과 내 앞에 인쇄된 종이를 내밀었다.
정식 원고는 아니고, 새로 쓸 단편 의 구상과 세세한 시놉시스였다.
나는 한철이와 같이 형원 선배의 프린트를 읽었다.
"SF예요?"
"맞아. 과학 장르소설 공모전이야. 몰랐는데 갑자기 새로 생겼나봐. 상금도 꽤 크고. 내가 원래 SF 영화를 좋아하거든. 그래서 편하게 도전해 보려고."
"재미있는데요? 형 말대로 정말 할리우드 SF 영화 같아요."
나보다 먼저 원고를 다 읽은 한철이 말했다.
"음..."
재미있긴 했다.
한철이 말 대로 정말 SF영화를 보는 느낌.
세세한 설정들이 아기자기했다.
"주원아, 넌 어때?"
대답하기가 망설여졌다.
내가 소설에 대해 잘 아는 것도 아니고, 잠깐 본 시놉시스를 가지고 남의 글에 대해 말하는 것도 주제넘었다.
하지만 그런 내 생각을 읽었는지 형원 선배가 다시 말했다.
"편하게 말해줘도 괜찮아. 어떤 생각이든 환영이야. 내가 알아서 잘 걸러 들을 테니까. 사실 지금 쓴 글, 열심히 쓰긴 했는데 나한테 와 닿지가 않아. 그런데 어디가 잘못된 건지 도무지 모르겠어."
이런...
사실은 내 생각이 형원 선배가 방금 말한 것과 완전히 똑같았다.
잘 만든 설정인 것은 알겠는데, 와 닿지가 않았다.
물론 시놉시스 만으로 그런 걸 논하는 것은 너무 성급할지도 몰랐다.
"형, 그저 방금 떠오른 생각일 뿐이에요. 너무 신경 쓰진 마세요."
"그래."
"과학 장르 소설 공모전인데 갑자기 생겼다고 그랬죠?"
"맞아."
"상금도 크고."
"그렇지."
"SF 영화를 좋아하니까 편하게 도전하신다고."
"맞아."
"그런데 너무 SF같아요."
"응? SF니까."
"갑자기 열리는 공모전인데 상금이 크다? 그렇다면 SF를 좋아하면서, 글에는 자신 있었던 사람들이 한 번씩 다 찔러보진 않을까요?
그럼 그 사람들이 쓴 글이 전부 이 시놉시스랑 비슷할 것 같아요. 기발한 설정이 조금 추가된 어디선가 본 듯한 SF."
내 말을 듣자 형원 선배의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였다.
내 말에 격렬히 동의하는 것 같았다.
"맞아. 거기까지 생각했어야 했어. 내가 뭘 쓸 건지도 중요하지만, 남들이 뭘 쓸 건지도 생각해야했어."
공모전이라면 언제나 차별성이 중요할 것이다.
"만약 저라면, SF 요소를 최소화하고 반대로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강조할 것 같아요. 그럼 주목받을 테니까요. 그리고 SF를 처음 쓰는 형이 남들보다 잘 하는 분야일 테니까요."
"멋진 생각이야, 이주원!"
형원 선배가 소리쳤다.
그리고 찌익.
자기가 방금 인쇄한 종이를 다 찢어버렸다.
그리고 처음부터 다시 쓰기 시작했다.
그냥 순간 떠오른 생각을 말한 것뿐인데...
내 조언을 좋게 받아들여줘서 고맙기도 하고, 걱정되기도 했다.
* * *
그렇게 이왕 이야기의 포문을 연 김에, 우리 셋은 각자 노트북을 두드리며 캔맥주를 깠다.
우리 기숙사 방의 구석에는 몰래 가져다둔 맥주캔들이 감춰져 있었다.
미지근했지만, 아쉬운 대로 그럭저럭 마실만했다.
그렇게 새벽의 일판 겸 술판이 벌어졌다.
원래 밤샘 작업의 묘미는 알콜 작업이었다.
'다만 전생엔 이렇게 진심을 터놓을 수 있는 친구들이 없었지.'
아직 어렸지만, 이번 생은 저번 보다 많이 나아졌다.
친구도 있고, 일도 있었다.
우린 맥주를 마시며, 일을 하며, 수다를 떨었다.
먼저 한철이 시작했다.
"조소과 누나가 아직 전화를 안 해요. 제가 찾아가서 팔뚝 내밀면서 어서 석고로 뜨세요, 라고 할 수도 없잖아요. 그냥 팔운동만 죽어라 하고 있어요."
한철이 하소연했다.
"기다려. 기다려, 한철아."
"네?"
"연애는 원래 많이 기다릴수록 유리해지는 거야."
형원 선배가 마치 현자처럼 이야기했다.
옳은 말 같았다.
다만 형원 선배는 얼굴도 모르는 사람을 계속 혼자 기다리는 중이라 그게 문제였다.
한철이 다음에 나도 최근 이야기를 꺼냈다.
"서양화 수업 시간에 교수님이 인생 계획을 짜오랬어요. 그런데 막상 그런 과제를 받으니까, 머릿속이 텅텅 빈 느낌이었어요.
어떻게 살고 싶다 막연한 생각은 있었는데, 거기 접근하는 구체적 계획을 세우려니까, 갑자기 꿈이 내게서 멀어지는 느낌이에요."
내 말에 형원 선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실은 나도 비슷해."
형원 선배는 4학년.
졸업을 앞두고 있으니까 더 그럴 지도 몰랐다.
"나는 당연히 졸업하고 기자가 될 거라고 생각했어. 신춘문예도 탔으니까 순조로웠고. 그런데 막상 졸업이 현실로 다가오니까 꽤 힘 들더라고.
이 길이 정말 내 길인지 확신도 없고, 더 나은 미래가 있을 까봐 무섭기도 하고.
그동안 믿었던 내 꿈이 내게서 도망치는 기분이었어.
어쩌면 내가 실없이 굴고, 여학생 만날 궁리만 하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인지도 몰라."
형원 선배가 모처럼 진지하게 말했다.
"에이, 그건 아니죠, 형."
"맞아요. 형은 그냥 여자를 좋아하는 사람이에요."
"자기를 인정하세요, 형."
나와 한철이 한 마음이 되어 형원 선배를 공격했다.
"한철아, 넌 어때? 넌 인생 계획이 있어?"
"나도 마찬가지야. 전망이 좋다고 해서 컴퓨터를 배웠어. 그래서 경력을 쌓고, 벤처 회사를 만들고, 재벌이 되고, 막연히 그런 환상만 있었어. 하지만 세부적인 계획은 하나도 없어.
그런데 요즘은 확실히 이런 생각이 들어. 내가 정말 재미를 느낄 수 있는 분야를 찾아야 한다고. 사진의 이해 과제 때 생각 많이 했거든."
그 과제가 도움이 되었다니 내가 다 뿌듯했다.
한철은 잘 해낼 것이다.
한철은 영리했고, 일도 잘했다.
몸만 봐도 얼마나 성실한지도 알 수 있었다.
형원 선배도 그렇게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한철아. 나중에 재벌 되면 형 잊지 마라."
"나도."
"당연하죠. 제가 재벌 되면 셋이 모여서 같이 재밌게 노는 겁니다."
맥주 탓인지.
아니면 요즘 일이 잘 풀려서 느슨해진 탓인지, 나도 오늘은 이야기를 많이 했다.
"1학년 과대가 엠티를 가자고 했는데, 가겠다는 사람이 없었어요. 그래서 엠티가 취소되었어요. 나도 당장은 못 가겠지만, 그래도 방학하면 시간이 좀 날 텐데."
"아쉬웠겠네, 그래도 대학 왔으면 동기 엠티는 한 번 가봐야지...타닥."
맞장구를 치던 형원 선배가 갑자기 노트북 키보드를 강하게 두드렸다.
"그래, 그거야!"
"네?"
또 뭘 생각하신 겁니까.
걸작 소설의 소재라도 찾았나 싶어 우리는 형원 선배에게 주목했다.
"모든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찾았어."
"모든 문제라면?"
"한철이의 조소과 선배와 주원이의 엠티."
그 문제를 왜 형원 선배가 해결하는 지 알 수 없었지만, 어떻게 해결했는지는 궁금했다.
"뭐죠? 그 방법이?"
"기말이 끝나고, 팀 수진이 엠티를 가는 거야."
빠지직.
한철이 맥주캔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형은 천재예요!"
그런데 정말 괜찮은 생각 같았다.
나도 엠티를 한 번은 꼭 가보고 싶었다.
유나도 무척 좋아할 테고.
호흡이 잘 맞는 팀 수진이라면 정말 재밌게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잘 봐."
형원 선배는 종이를 꺼내 관계도를 그리며 설명했다.
"조소과 친구들은 수진이의 말을 듣고, 수진은 정화의 말을 듣고, 정화는 주원이 말을 듣지."
정확했다.
정화 선배와 내가 특별히 친하진 않았지만 정상인들 사이의 의리 같은 것이 있었다.
역시 관록의 4학년답게 형원 선배는 인물 간 사슬을 완벽히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주원이 김정화를 설득하면 팀 수진은 엠티를 간다."
나한테 떠넘기는 것 같아 억울하긴 했지만 논리적으로 완벽했다.
"그래요. 할 수 없죠. 제가 정화 선배를 맡겠습니다. 그럼 형원이 형은 장소와 세부 계획을 짜 주시고, 한철이는 그때까지 영화사 일을 마무리해줘."
그렇게 우린 한국대 특유의 행동력으로 팀 수진 엠티 프로젝트를 가동했다.
* * *
그리고 정말 대박이 터졌다.
나 말고 안수정의 크리스털 시네마.
헐값에 수입한 영화가 조용히 입소문을 타고 관객을 모으더니, 끝내 해외 영화제에서 수상까지 하고 말았다.
국내 흥행에도 가속이 붙을 게 분명했다.
"끼약! 진짜 해냈어요! 대표님 말대로 대박이 터졌어요!"
영화 덕에 안 그래도 바빴을 텐데, 안수정은 굳이 내게 전화해서 소리소리 질렀다.
'그런데 내가 안수정한테 대박이 터질 거라고 말한 적이 있었나?'
그냥 안수정 대표가 혼자 신나서 자기 마음대로 기억을 조작하는 것 같았다.
어쨌든.
"정말 축하드립니다. 잘 되실 줄 알았습니다."
안수정의 대박이 진심으로 기뻤다.
돈도 중요했지만, 나를 믿어주는 사람이 잘 되니까, 나까지 들뜨고 같이 신났다.
그리고 남을 위해 진심으로 기뻐할 수 있는 자신이 대견하기도 했다.
아무튼 이것으로 나는 크리스털 시네마의 홈페이지까지 확실히 확보한 셈이다.
안수정은 영화가 성공할 경우, 나에게 회사 홈페이지를 맡기기로 약속했었다.
'그 말은...'
상당한 금액의 회사 운영자금이 생길 거란 소리였다.
사업가는 회사가 잘 돌아갈 때 구름 위를 걷는 기분이 되는 것 같다.
물론 이 정도 성공으로 나를 진짜 사업가라고 부르기엔 아직 부족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