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 충전 □
서진석 교수가 우리를 향해 싱긋 웃었다.
과제를 내기 직전의 잠깐의 친절함.
이젠 속지 않는다.
"자, 드디어 한 학기가 끝나가고 있습니다. 대학생이 되고 첫 학기 즐겁게 보내셨습니까?"
서진석 교수의 질문에 잠깐 지난 학기를 돌아봤다.
하고 싶던 카페 일도 해 봤고, 정신없이 바쁜 회사도 차렸다.
사진도 배웠고, 그림도 열심히 그렸다.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있을까?
짧은 학기가 꿈같이 지나갔다.
형원 선배와 한철이.
재미있는 형과 좋은 친구도 생겼다.
수진 선배와 정화 선배.
착한 선배들도 생겼다.
그리고 유나.
잠 안자고 일한다고 야단도 쳐주고, 도움이 필요할 땐 언제나 도와주는 귀여운 친구도 생겼다.
그럭저럭 김태민까지.
알차게 보낸 한 학기였다.
"이제 시작일 뿐입니다. 이번 학기가 불만스러웠다 해도 여러분들은 아직 일곱 번의 기회가 더 있습니다. 물론 낙제하는 분들은 그 이상의 기회를 가질 수도 있겠지요. 대학이 끝나고도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무엇이든 배울 수 있습니다."
서진석 교수와의 수업도 괜찮았다.
빡세긴 했지만, 덕분에 첫 유화에 나도 모르게 적응했다.
"이제 이번 학기의 마지막 과제를 내려고 합니다. 사실 이 과제는 제가 3학년 수업을 할 때 주로 내는 과제였습니다. 하지만 이번 1학년은 아주 열정적이라, 이 과제를 내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또 제 생각이 많이 바뀌기도 해서 그렇습니다."
이번에는 또 무슨 과제일까.
나뿐만 아니라 모든 학생이 긴장했다.
"안심하셔도 됩니다. 이번 과제는 그림이 아닙니다. PPT 발표입니다. 기초 서양화 시간이긴 하지만, 서양화를 배우는 시간이지, 꼭 서양화를 그려야 하는 시간은 아니니까, 이런 과제를 해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PPT 발표?'
조금 뜻밖이었다.
사진의 이해도 그렇고, 기초 서양화까지.
아카데믹하다는 오해와는 달리 한국대 미대 수업은 굉장히 자유로웠다.
"여러분은 정말 많은 노력을 해서 지금 이 자리에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그림은 정말 큰 의미겠지요.
이번 과제의 제목은 '앞으로 어떻게 계속 그림을 그릴 것인가'입니다. 말 그대로입니다. 인생 계획이라고 불러도 좋고, 그냥 꿈이라고 말해도 좋습니다.
여러분의 인생 그림 계획을 PPT로 정리해서 모두에게 들려주면 됩니다.
만일 졸업하고 그림을 그릴 생각이 없는 사람이라면 왜 그런 결심을 했는지를 말하고, 그림 대신 무슨 일을 할지 들려주면 됩니다."
정말 3, 4 학년에게나 낼 법한 과제였다.
인생 그림 계획이라.
'내 처음 계획은 뭐였지.'
그러고 보니 그냥 무작정 미대에 가고 싶다고만 생각했다.
생각보다 나도 대책이 없었다.
미대에 가면 실컷 그림을 배울 것 같았고, 미대에 안 가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았다.
미대 외의 계획은 따로 세우지도 않았었다.
'어쩌면 내게 딱 맞는 과제일지도.'
인생 계획을 공개적으로 발표한다는 것은 좀 그랬지만, 그것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유나나 김태민의 계획이 궁금하기도 했다.
'역시 서진석 교수.'
나랑 잘 맞는 교수였다.
서진석 교수는 다시 말을 이어갔다.
"이제까지 1학년 수업을 몇 번 맡은 적이 있었지만, 1학년에게는 계획이나 꿈같은 것들을 한 번도 묻지 않았습니다. 너무 어리니까 인생이나, 미술에 대해서 잘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오래 학생들을 가르치다 보니 생각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3, 4 학년이 되어도, 심지어 교수로 있는 저까지도 인생에 대해서는 여전히 잘 모르는 것 같더군요.
그리고 인생 계획은 오히려 인생에 대해 잘 모를 때 세워야 하는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많이 알수록, 할 수 있는 게 적어지는 경우도 있으니까요."
교수의 말에 동의했다.
나는 2회차 인생이지만, 내가 인생에 대해 잘 아느냐고 질문 받는다면 절대.
스무 살짜리 대학생이나 마찬가지라고 대답할 것이다.
물론 전생의 기억을 이용해 나는 많은 돈을 벌고 있었다.
돈은 중요하다.
하지만 돈을 버는 기술은 인생의 지식 중 아주 일부일 것이다.
나이를 먹어서 배운 것 중 안 좋은 것도 많았다.
사람들을 믿어서는 안 되는 이유들.
선량한 사람들이 실패하는 이유들.
적당히 사는 게 대부분의 경우 항상 이익인 이유들.
그런 몰라도 되는 지저분한 지식들도 내 머릿속에 잔뜩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니 나는 인생에 대해서 여전히 혼란스러웠고, 스무 살짜리나 마찬가지였다.
어쩌면 더 못할 지도 몰랐다.
"계획을 세우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이번 과제에서 언급했던 내용들을 나중에 하나도 이루지 못한다 해도, 여러분을 놀릴 사람은 없습니다.
그냥 여러분들이 지금 정말 원하는 것을 고민하고, 그것들을 솔직히 발표하면 됩니다. 이번 과제는 절대 어렵지 않습니다."
그렇게 기초 서양화1 의 마지막 과제가 내려졌다.
교수는 쉬운 과제라고 주장했지만, 내게는 꽤 어려운 과제로 여겨졌다.
물론 그림 그리는 것보다 몸은 훨씬 편할 것이다.
* * *
수업이 끝나고 1학년 과대가 강의실 앞에서 외쳤다.
"자, 잠시만 주목! 우리 1학년 이제 곧 방학인데, 동기 엠티 가자는 의견이 나왔거든!"
우리학교 서양화과는 선, 후배 간의 터치나 간섭이 거의 없었다.
같은 학년 내에서도 마찬가지.
군기, 간섭, 단결 같은 것은 절대 없었다.
모두 각자 바빴다.
그래서 엠티도 없었다.
엠티 이야기는 3월에도 한 번 나왔지만, 모두 각자의 사정이 바빠서 흐지부지 됐었다.
겨우 술자리 한 번 가진 게 전부였다.
"자, 1학년 때 엠티 못가면 졸업할 때까지 못 간대! 그러니 이번에는 꼭."
과대가 외칠 때, 남동민이 번쩍 손을 들었다.
"미안, 나는 특강 때문에 못 갈 것 같아. 난 먼저 가 볼게."
그렇게 얄밉게 퇴장했다.
한 명이 빠져나가자, 사정을 말하고 몇 명 더 따라서 나갔다.
과대는 시무룩 힘이 빠졌다.
'하지만, 나도 미안.'
남동민처럼 당장 초를 치진 않겠지만, 나 역시 엠티는 불가능했다.
당분간 일이 바빠서 방학 후에야 여유가 생길 것 같았다.
난 적당히 눈치를 보다 유나랑 함께 강의실을 빠져나왔다.
* * *
"그런데, 이주원."
무슨 일인지 유나가 내 이름을 성까지 포함해 정식으로 불렀다.
"응?"
"해결해야 할 문제가 하나 있는데."
"뭔데?"
"전에 혼자 밥 먹기 싫을 때 부르라던 거, 오늘도 가능해?"
난 또 뭐라고.
요새 내가 너무 바쁘니까 유나답지 않게 눈치를 본 모양이었다.
밥이야 나도 먹어야 하니까.
겸사겸사 유나도 챙겨 먹이면 나도 보람이 있었다.
"당연하지. 몇 식당 갈까? 오늘 학식 메뉴가..."
"아니, 학식 말고. 따지고 보면 너도 이 일에 책임이 있어."
"?"
난 결국 유나에 이끌려 버스를 타고 학교를 빠져나왔다.
"전에 옷상자를 보냈더니, 엄마가 반찬이랑 나물들을 그 상자에 그대로 담아 보내셨어."
"옷이 두 박스였지?"
"그러니까. 냉장고도 작은데, 나보고 어떡하라고. 우리 집에 가서 밥이나 먹고 가."
뜻밖의 초대였다.
뭐, 환한 대낮이고 처음 가보는 것도 아니니까, 게다가 처치곤란의 반찬을 먹으라고 부르는 거니까...
그래도 기분이 좋은 것은 사실이었다.
예상 못한 시간 소모이긴 했지만, [압축 잠 진한 맛] 등등을 써서 충분히 만회할 수 있었다.
비싼 [진한 맛]은 자주 쓰진 않지만, 가끔 바쁠 땐 무척 유용했다.
그러니 느긋하게 밥 한끼 먹을 순 있었다.
'유나 어머니 솜씨라...'
궁금하기도 했다.
* * *
1학기가 끝나가고 있었다.
날씨는 아직 덥다기 보다는 많이 따뜻하단 느낌.
집에 들어서자 유나는 창문을 활짝 열었다.
작은 방에 환한 햇빛이 들었다.
유나의 방에선 정체는 알 수 없지만 항상 좋은 냄새가 났다.
"조금만 기다려."
유나는 분주하게 움직였다.
나는 시키는 대로 멍하니 앉아서 기다렸다.
최근에 너무 바빠서 그랬는지, 잠시 아무것도 안 하는 게 큰 휴식처럼 여겨졌다.
독신자용 작은 밥솥은 금방 끓었고, 유나는 달그락 거리며 밥상을 차렸다.
작은 밥상에는 고사리나물이랑, 오징어채 조림, 무말랭이 같은 밑반찬들이 올랐다.
내가 나이가 많아서 그런지, 아니면 기숙사 생활을 해서 그런지 특별한 요리보다 이런 밑반찬들이 더 반가웠다.
유나는 작은 버너에 콩나물국을 끓이고 김가루도 뿌렸다.
여학생이라 그런지 혼자 사는 자취방에 이것저것 조미료도 많았다.
늘 장난치는 모습만 보다가 요리하는 모습을 보자 느낌이 새로웠다.
"그런데 넌 왜 기숙사 신청 안 하고 자취해?"
"자취에 대해 환상을 가지고 있었거든. 형제가 많으니까 혼자 조용히 살아보고 싶었어. 그래서 아빠한테 말했더니 방을 구해주셨어."
유나의 아버지는 대를 이어 제주도에서 식당을 운영하셨다.
큰 식당은 아니지만 꽤 바쁜 곳이라고 들었다.
유나의 어머니는 학교 선생님.
그러니 크게 부자는 아니라도 경제적으로 불편은 없는 것 같았다.
"그런데 자취하고 나서 정말 후회 했어."
"왜?"
"자취하니까 돈 나가는 곳이 많더라고. 거기에 미대 재료비까지. 내가 얼마나 경제관념이 없었는지 자취하면서 깨달았어."
그럴 수도 있지.
고 3이었으니까.
안 그래도 똑똑한 유나는 경제관념까지, 실시간 진화 중이었다.
"다 됐다. 잠깐만 기다려."
유나는 장난감 같은 2인용 밥솥에서 두 그릇 밥을 펐다.
그리고는 곧바로 다시 쌀을 씻어서 밥솥에 밥을 안쳤다.
"한 그릇 먹고 또 먹어."
"그럴게."
충분히 가능할 것 같았다.
젓가락을 들어 맛을 보니, 반찬들이 전부 맛있었다.
"고사리가 제주도 특산물인 거 알아?"
"몰랐어. 나 고사리 좋아하는데."
기분 좋으라고 한 말이 아니라, 제주도 고사리는 진짜 특별한 것 같았다.
어머니 솜씨도 훌륭했고, 그래서 웬만한 고기반찬보다 고사리나물이 훨씬 맛있었다.
내가 너무 잘 먹으니까 유나는 기분 좋은 얼굴로 쳐다봤다.
"고사리 좋아하면 내가 담아줄게. 가져가서 한철이랑 형원 오빠랑 학식 먹을 때 같이 먹어."
동생이 둘이나 있어서 그런지, 유나는 장난도 잘 쳤지만 챙겨주기도 잘 챙겨줬다.
그래서 유나랑 있으면 늘 든든하고 따뜻했다.
금방 한 그릇을 비웠고, 두 번째 밥이 완성되기를 기다리며 유나의 콩나물국을 들이켰다.
"어? 맛있네?"
"장난해? 나 요리 잘하거든?"
사실은 나도 요리는 자신이 있었다.
"다음에 기회가 생기면 한 번 승부를 겨루자. 내가 진정한 자취 요리를 맛 보여줄게."
"그 도전 받아주지. 감히 겁도 없이 식당집 딸을 도발하다니."
그렇게 두 그릇이나 고봉밥을 깨끗이 비웠다.
그리고 유나가 타주는 달달한 믹스 커피까지 마셨다.
오늘 유나는 완전 천사 모드였다.
물론 평소의 유나를 고려한 상대적 천사이긴 했다.
기분 좋게 배가 불렀다.
배도 불렀지만, 영혼도 같이 불러왔다.
최근 들어 가장 충만한 날이었다.
'2회차 인생은 참 여러모로 행복하군.'
주변 사람들에게 기회가 있으면 꼭 회귀하라고 말해주고 싶을 정도였다.
나는 유나가 챙겨주는 반찬통까지 가지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동기 엠티는 못 가는 거야?"
"응. 시간이 너무 없어. 대신에 이번 일 끝나면 동대문도 가고, 영화도 보러 가자. 크리스털 시네마에서 티켓을 여러 장 받았거든."
"누가 너한테 같이 놀아 달랬냐? 바쁘면 그냥 티켓만 줘도 괜찮아."
그건 내가 별로.
티켓만 줄 생각은 없었다.
"잘 먹었어. 이것도 잘 먹을게."
난 들고 있던 반찬통을 가리켰다.
"이런 초대라면 언제든 환영이야."
"됐거든. 반찬이 너무 많아서 오늘만 부른 거야."
하지만 분명 또 오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앞으로 유나의 자취방과 친하게 지내고 싶었다.
약간 죄송한 생각도 들었다.
'유나의 어머니는 반찬을 보내시면서 엉뚱한 녀석이 이렇게 많이 먹을 줄 아셨을까.'
"아무리 바빠도 잠은 챙겨 자면서 일해."
"그럴게."
그렇게 에너지도 충전하고, 다시 일하기 위해 학교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