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력천재 미대생-9화 (9/203)

■ 9. 한국대 시험! □

서울 학원의 한국대 반은 30명 남짓.

하지만 정말 한국대 시험을 친 학생은 7명밖에 되지 않았다.

그 중엔 종예대 같은 다른 학교에 지원한 사람도 있었고, 원서는 냈지만 중간에 포기한 사람도 있었다.

아무튼 눈이 펑펑 쏟아졌다.

시험 치는 장소엔 난 혼자 가게 되었다.

딱히 친한 사람도 없었고, 그나마 상조랑 가끔 말하긴 했었는데 내 실력이 늘자 상조가 알아서 나를 피했다.

나야 뭐, 적당히 혼자가 편했다.

하지만.

"젠장!"

난 진짜 촌놈이었다.

그 학교가 넓다는 소문은 전생에서도 자주 들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와 본 적은 없었다.

그래서 당연히 교문에서 버스를 내렸다.

'보통 교문 앞에 학교 지도가 있으니까...'

난 늘 하던 대로 교문에서 지도를 보고 미대를 찾아가려고 했다.

'그랬는데...교문에서 미대까지 가려면 언덕을 넘어야 하다니.'

하늘에선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고, 땅은 녹은 눈이 얼어붙어 미끄러웠다.

나는 발이 얼어붙는 고통을 느끼며 느릿느릿 모르는 길을 한 시간이나 걸어서 시험장에 도착했다.

정말 시험 치러 가다가 죽을 수도 있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첫째 날 논술 고사.

시험 문제는 평이했다.

최근 언론의 화제가 된 몇 가지 이슈를 거론하고, 그것과 관련해 직업 윤리와 사회 정의를 논하라는 것.

'굳이 무리할 필요가 없지.'

난 회귀자니까 다른 학생들보다 오래 살았고, 상식도 풍부했다.

그리고 신문 배달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신문을 많이 읽기도 했다.

'어차피 다른 응시자들은 전부 어린 학생들.'

그러니 학원에서 배운 판에 박힌 답을 쓸 것이다.

나는 딱히 무리하지 않고, 큰 오류만 없이 무난하게 써내기만 하면 중간은 갈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더니 마음이 편해졌다.

[잡생각 제거] 까지 구매했더니 마음이 더 차분해지고,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느낌이었다.

난 평이한 단어와 논리를 사용해 무난한 답안을 적어냈다.

나는 시간에 맞춰 논술을 끝냈고, 퇴고까지 충분히 마쳤다.

논술 시험이 끝나자 상조가 생각났다.

'그 녀석 답안지 한 번 읽어 보고 싶네.'

상조는 약간 자뻑이 심한 타입.

난 전생에 녀석의 작가 노트를 몇 번 읽어본 적이 있었다.

녀석은 자신의 작품에 대해 장황하게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했고, 게다가 자신이 글을 잘 쓴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뭐, 내가 남의 글을 평가할 만큼은 아니지만....그래도 읽어보고 싶네.'

그런데 또 모르겠다.

한 번 살아보니까, 남들에게 비웃음 당하더라도 상조처럼 자뻑이 심한 녀석이 더 행복하게 사는 것 같기도 했다.

아무튼 첫날 논술 고사는 무난히 넘겼다.

그리고 둘째 날은 기본 실력 평가.

둘째 날 시험은 소묘 시험이었다.

시험장에 들어가니 낡은 이젤과 나무 의자가 중앙에 층층이 쌓여 있었다.

[ 의자와 이젤을 하나씩 가져와 조형적인 모양을 구축하고, 연필이나 콩테를 이용해 그것을 묘사하시오. ]

'음...서두르지 말고 출제의 의도를 파악하자.'

이젤과 의자는 모두 그리기 어려운 정물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화려한 스킬보다는 탄탄한 기본기를 증명하는 것이 더 중요할 것이다.

'게다가 이젤과 나무 의자 모두 평면인 요소들을 조합해 입체를 이루는 구조야. 그렇다면 공간감?'

공간감.

말 그대로 3차원 공간에서 감지되는 느낌.

난 공간감을 최대한 살리기로 작전을 짰다.

학생들은 이미 서둘러 의자와 이젤을 가져와 이리저리 배치하며 독창적인 모양을 만들기 위해 고민하고 있었다.

'멋진 모양을 만들 필요가 없어. 공간감이 잘 들어나는 구도를 짜고, 그것을 그림에 담아낸다.'

나는 정육면체인 의자를 앞세우고, 원근이 살도록 이젤을 옆으로 길게 눕혔다.

그리고 형태나 명암 같은 기본 요소들을 충실히 살려 무난한 그림을 그렸다.

그랬더니 오히려 시간이 꽤 남았다.

'다른 녀석들은 정물의 묘사에만 집중하는 군.'

쉬운 정물인만큼 다들 묘사의 완성도를 높이려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공간감.'

그래서 남은 시간동안 차분하게 배경을 그려서 원근감이 충분히 드러나도록 만들었다.

그랬더니 결과물이 유독 내 것만 튀게 되었다.

'뭐지? 단지 출제의 의도를 분석했을 뿐인데. 사실 난 엄청난 개성파가 아니었을까?'

그리고 셋째 날 시험.

이번 한국대 시험의 메인이라고 할 수 있는 날이었다.

[ 한국은 4계절이 뚜렷한 기후를 가지고 있다. 각각의 4계절의 특성을 잘 드러낼 수 있는 요소를 선정해 4장의 채색화로 그리고 그 이유를 1000자 내외로 서술하라. ]

정말 다른 학교랑은 완전히 다른 입시 문제였다.

며칠 전 치렀던 한국 정보대에서는 석고 정물 수채화를 그렸다.

'4계절? 4계절의 특성이라고? 대체 뭘 그려야 4계절을 담을 수 있지?'

처음엔 좀 난감했다.

역시 난감할 때에는 [ 산책 ]이 최고였다.

그리고 [ 잡생각 제거]도 사용하고, 코인을 쓰는 김에 [ 밝은 눈 마사지]까지 풀코스로 즐겼다.

그랬더니 조금 여유가 생겼다.

'미대 입시라면 역시 컨닝이지.'

미대 입시는 칸막이 없이 다들 우르르 모여 시험을 친다.

여유를 찾은 나는 주위를 쓰윽 훑어보았다.

'이런...'

4계절이니까 모두 봄부터 그리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어째 그림이 다 비슷비슷했다.

꽃, 나비, 새싹.

구도도 색도 소재도 전부 비슷했다.

모두 한국대 입시반에서 기출 문제를 분석하고 외워서 왔으니 비슷할 수밖에 없었다.

'하긴 나도 크게 다르지 않지. 두 달간 열심히 외웠으니까.'

겨울이라...

아직도 시험 고사실 밖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눈을 보자 뭔가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그래, 맞아. 겨울을 그리라고 하면 학생들 모두 흰 눈을 그릴 거야. 그럼 흰색 말고 다른 색 겨울을 그려볼 순 없을까?'

난 문득 이틀 전 한국대 미대에 오기 위해 언덕을 넘으며 고생하던 일이 떠올랐다.

오늘은 물론 버스를 타고 왔다.

'흰색 말고 다른 색 겨울이라...'

이틀 전 그날.

눈을 흠뻑 맞고 내 운동화가 축축하게 젖었다.

그래서 발이 얼어붙는 줄 알았다.

버스가 지나간 길은 눈이 녹은 흙탕물이 질퍽했다.

나는 차가운 흙탕물을 밟고 흰색 눈이 쌓인 언덕길을 걸어왔다.

'그래. 발자국을 그리자. 발의 촉감.

남들은 다 4계절의 색을 그리지. 난 4계절의 촉감을 그려보자. 겨울하면 언제나 발이 제일 고통스럽지. 그리고 여름엔 맨발이고. 봄에는 부드러운 잔디 정도? 그렇다면 가을은?'

그렇게 나는 네 장의 그림을 그렸다.

봄은 잔디, 여름은 모래사장 위의 발자국, 가을은 젖어서 촉촉한 단풍잎. 겨울은 눈 위의 검은 흙탕물 발자국을 그렸다.

[ 저는 계절의 감각은 시각보다 촉각으로 먼저 다가온다고 생각합니다.

봄과 가을은 쉽게 실감하지 못하지만, 겨울은 언제나 발끝에 추위로 제일 먼저 느껴집니다.

그래서 눈 위에 복잡하게 새겨진 지저분한 발자국을 그렸습니다. 여름은 반대로 따뜻하게 데워진 모래밭 위의 발자국을 그렸습니다. 봄은 부드러운 잔디밭 위를 걷는 느낌을 표현했습니다. 가을 낙엽을 맨발로 밟아본 적은 없지만 만약 밟아본다면 이런 느낌이지 않을까 상상해서 그려보았습니다. ]

이런...

그렇게 네 장의 그림을 완성하고 봤더니 이번에도 주위와 그림이 확실하게 달랐다.

다른 학생들은 대부분 비슷했다.

봄에는 꽃과 나비.

여름에는 녹색 숲과 과일.

가을엔 밤과 곡식, 단풍.

겨울엔 눈과 고드름.

그에 비해 내 그림은 그저 수수한 네 장의 풍경화 같았다.

'역시 나는 사실 엄청난 개성파가 아니었을까?'

시험 칠 때는 몰랐는데, 시험이 끝나자 다른 학생들과 다르게 그렸다는 사실이 불안하게 느껴졌다.

어쨌든 그렇게 시험이 끝났고, 나는 최선을 다해 그렸다.

시원섭섭한 기분이었다.

* * *

그렇게 입시가 끝나고 나는 포항에 내려왔다.

다른 수험생들은 한창 자유를 만끽할 시간이었지만 난 곧바로 일을 찾았다.

노력 상점을 유지하려면 하루 6시간의 노력을 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 집은 가난하니까 한 달이라도 바짝 일해서 등록금에 보태야 했다.

나는 가게 인테리어 현장에서 잡부로 일했다.

포항은 포스코 덕분에 1년 내내 부유한 도시였고, 계속해서 새로운 식당과 술집이 생겨나고 있었다.

그 말은 폐업하는 식당도 많다는 뜻.

그래서 겨울이지만 일거리가 적지 않았다.

처음엔 어리다고 걱정하던 현장 감독도 내가 열심히 일하자 날 무척 예뻐했다.

'나이를 먹고는 몸을 쓰는 게 두려웠지. 가만히 서 있는 것도 힘들었었는데.'

공사판에서 잡부로 일하는 느낌이 너무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무거운 벽돌을 들고 계단을 오르는데 무릎이 아프지 않다는 사실이 너무 충격적이었다.

오늘은 저녁 6시에 퇴근하며 핸드폰을 봤는데, 날짜가 눈에 익은 숫자였다.

'오늘이 무슨 날이었나? 아차. 한국대 발표날이구나.'

그리고 미리 저장해뒀던 번호로 ARS 전화를 걸었다.

[ 수험번호를 입력하세요.]

난 지갑을 꺼내 메모해둔 수험 번호를 입력했다.

삐잇. 삐잇. 삣.

번호를 누를 때마다 차가운 기계음이 들렸다.

그리고 무뚝뚝한 여자 목소리가 대답했다.

[ **308 이주원님 축하드립니다. 합격하셨습니다.]

어?

합격?

합격했구나.

내가 한국대 서양화과에 합격했구나.

멍하니 서 있다가 한참 만에 다시 뇌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다시 전화를 걸어 내 수험 번호를 눌렀다.

'전혀 축하하는 목소리가 아닌데. 그래도 이렇게 듣기 좋다니...'

삣. 삐잇. 삣.

[ 합격하셨습니다. ]

와. 내가 한국대 서양화과에 합격했다.

그리고 무작정 달리기 시작했다.

한참 달리다가 정신을 차렸다.

"어디로 가지?"

가야할 곳이 너무 많았다.

어서 가서 합격을 보고해야했다.

"일단 어머니 일하는 감자탕집으로 가자."

전화를 해서 말해도 되는데, 그냥 몸이 달리고 있었다.

그냥 그렇게 계속 달리고 싶었다.

하루 종일 인테리어 현장에서 일했는데, 몸은 조금도 피곤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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