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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력천재 미대생-8화 (8/203)

■ 8. 촌놈 □

지금보다 나아지지 않으면 한국대는 불가능했다.

한국대.

우리나라 최고 천재들의 대학.

하지만 난 천재가 아니다.

혹시 모른다고?

'내게도 숨겨진 재능이?'

절대.

내가 평범한 19살 소년이었다면 조금의 기대라도 해 볼 것이다.

하지만 난 이미 한 번의 인생을 겪었다.

다만 노력의 천재는 될 수 있었다.

'그래. 붙어보자. 내 모든 것. 마지막 한 방울까지 다 짜내주마.'

[ 압축 잠 진한 맛]은 1시간만으로 하루의 피로가 전부 풀린다.

하지만 15코인.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쓰지 않기로 했다.

'다행히 1년간 꾸준히 신문 배달한 게 도움이 된다.'

덕분에 체력에 자신 있었다.

그래서 일반 [압축 잠]을 사용해 하루 1~2시간 자는 것으로 만족했다.

일반 [압축 잠]은 1시간에 4시간을 자는 효과를 준다.

[밝은 눈 마사지]와 [전신 스트레칭], [엉덩이 축소]는 꾸준히 했다.

최상의 컨디션을 위해서.

그리고 최고의 엉덩이를 위해서.

아침 9시부터 밤 11시까지 학원에서 계속 그림을 그렸다.

고시원에 돌아오면 11시 반.

그럼 다시 아침 6시까지 좁은 방에서 혼자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2시간 잔 후에 다시 학원에 갔다.

식사는 하루 두 번.

고시원에서 제공 하는 밥과 김치로 아침과 밤에 배불리 먹었다.

근처 마트에서 할인하는 3분 짜장도 대량 구매해서 종종 곁들어 먹었다.

3일에 한 번 정도는 고추 참치를 먹기도 했다.

학원에서는 점심과 저녁 두 번의 식사 시간을 주지만, 난 우유와 초코파이로 대강 때우고 그 시간에도 그림을 그렸다.

식사시간을 아끼는 것만으로 4 노력 코인이나 모을 수 있었다.

거기다 서울은 밥값도 비쌌다.

'된장찌개가 4천원 이니까, 한 끼를 참으면 3분 짜장 5개, 참치 한 캔을 살 수 있구나.'

난 가능한 내가 번 돈으로 최대한 버티고 싶었다.

어머니가 용돈을 주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미대는 준비만으로도 돈이 많이 든다.

4B연필과 물감, 콩테와 파스텔, 종이, 기타 등등.

게다가 나는 남들보다 3~4배나 많이 사용했으니까 그것도 만만치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계속 흘렀다.

한국대 반은 학생들간 경쟁을 위해 매일 시험을 치고, 그 등수를 발표했다.

2주가 지나자 꼼짝 않던 내 등수가 오르기 시작했다.

[ 이주원 14등 ]

[ 이주원 11등 ]

[ 이주원 8등 ]

그러더니...

[ 1등 박종현 ]

[ 2등 김상조 ]

[ 6등 이주원 ]

결국 6등까지 먹었다.

"너 그림 많이 늘었더라."

그러자 평가가 끝나고 상조가 내게 와서 말했다.

얼핏 칭찬 같기도 한 말.

'하지만 난 너를 알고 있지.'

내 그림이 늘었다는 그 말은, 이제까지 나를 자기보다 낮게 봤다는 뜻이었다.

같은 입시생인 주제에 자신이 내 그림을 평가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뭐, 내 실력이 부족한 것은 사실이니까.'

난 웃으며 대답했다.

"고마워. 아직 멀었지, 뭐."

지금의 상조는 결국 고등학생.

어린 애와 일일이 대립할 필요는 없었다.

상조와 진짜로 겨루는 것은 한국대 입시, 단 한 번이면 충분했다.

상조는 내 그림에 다가와 몇 군데를 가리켰다.

"여기랑, 여기. 여기 양감이 좀 약한 것 같고, 여기는 대비를 더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상조의 말대로 다시 살펴보니, 그런 것 같기도 했다.

"어, 고마워. 정말 그러네. 고쳐야 겠다."

그런 식으로 상조가 지적해준 것을 순순히 고쳤다.

난 성장을 위해 누구에게든 배울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또 그의 이야기 몇 가지를 참고 들어줬다. 그랬더니.

"야, 캔커피나 한 잔 하자."

상조가 나를 옥상으로 불렀다.

옥상에 올라가자 상조가 내게 레스비 캔을 건넸다.

"처음엔 너랑 종현이 형은 안 될 줄 알았어.

그런데 너 그림 진짜 빨리 늘더라. 한국대는 힘들지 몰라도, 지금 속도면 인서울은 무난할 거라고 생각해."

"그래, 다행이네. 고마워."

"한국대는 플러스 알파를 보거든."

"그게 무슨 소리야?"

"전국에 그림 좀 한다, 하는 녀석들은 다 모일 거 아니야. 그러니까 거긴 실력 말고도 개성과 재능도 필요하단 거지."

이 녀석...

한국대를 아카데믹하다고 까던 놈이.

"그래도 종현이 형은 그림 잘 그리지 않아?"

"그 형이 가진 건 나이뿐이야. 지방대 나와 봤자, 미술로는 돈 못 버니까, 매년 미대 입시를 다시 치는데 결과는 항상 안 좋지. 입시는 정직하거든.

나이를 먹으니까 자연스레 기본기는 탄탄해졌겠지. 하지만 시골 출신들은 촌스럽다 해야 하나? 재능이 없다고 해야 할까? 다른 대학은 몰라도 한국대는 힘들 거야."

난 상조가 나를 옥상에 불러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자신이 계속 박종현에게 지자, 박종현의 험담에 동조해줄 동료가 필요했던 것이다.

'내가 요 며칠 잘 맞춰주니까, 말이 통한다 생각했냐?'

이제야 조금 알 것 같기도 했다.

상조는 그저 자기 합리화의 달인일 뿐이었다.

원칙도 없고, 뇌도 없었다.

그저 자기가 필요할 때, 자기가 필요한 논리만 옳다고 여기는 놈이었다.

'이제까지 이 놈한테 열등감을 가졌던 게 아깝게 느껴지네.'

그래도 상조가 아직 나보다 실력이 뛰어난 것은 사실이었다.

나는 녀석을 실력으로 이기고 싶었다.

"다른 녀석들이랑 강사쌤이 종현이 형 칭찬하는 것보고 여기도 시시하다고 생각했거든. 어서 빨리 시험쳐서 한국대 들어가고 싶을 정도였어. 그런데 너처럼 말 통하는 녀석을 알게 돼서 다행이다. 입시 끝나고 학교가 갈리더라도 우리 종종 연락하면서 지내자."

'이 미친 새키가...'

'너 한국대 떨어져, 임마' 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불필요한 자극을 주고 싶지 않았다.

"그래, 고마워. 연락하고 지내자."

난 중년 아재의 내공을 발휘해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그리고 상조가 내려간 뒤 잠시 혼자 옥상에서 고민했다.

'개성? 플러스 알파?'

상조의 말이 맞는 부분도 있었다.

난 촌놈이었고, 세련된 감각은 없었다.

그런데 어쩔 수 없었다.

'그게 나야. 나는 촌놈이야.'

한 평생을 촌놈으로 살았는데, 한 달 남은 시간동안 세련된 플러스 알파를 만드는 것은 불가능했다.

'해오던 대로 하자. 열심히 그리고, 또 그리고. 맘에 들 때까지 고치고. 촌스럽고 투박하고, 무식하게. 그게 나의 플러스 알파야. 내가 할 수 있는 걸 제대로 하자. 제대로 촌놈이 되자.'

그리고 다시 학원으로 내려가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다시 며칠 후.

또 조금씩 순위가 바뀌기 시작했다.

[ 1위 김상조 ]

[ 2위 박종현 ]

[ 3위 이주원 ]

[ 2위 이주원 ]

[ 3위 박종현 ]

[ 1위 이주원 ]

[ 2위 김상조 ]

드디어 내가 1등을 먹었다.

상조를 이겼다.

한 평생이 걸린 것이다.

그런데 생각보다 많이 기쁘진 않았다.

내 목표는 한국대였고, 그건 우리 학원 1위를 하더라도 장담할 수 없는 목표였다.

그런데 그날 저녁 상조가 다시 나를 옥상으로 불러냈다.

'이 녀석...이번엔 캔커피를 안주는 군.'

조금 아쉬웠다.

"강사쌤있잖아, 홍대 출신인 거 알지?"

"알지. 이 학원은 다 홍대잖아."

"맞아. 홍대랑 한국대 입시가 다른 건 알지? 홍대는 기교를 선택했어. 그래서 홍대가 자꾸 뒤처지는 거야. 강사쌤도 진짜 실력 있었으면 한국대 갔겠지. 그러니까 너도 방심하지 말라고. 친구라서 말해 주는 거야."

그리고 상조가 또 말했다.

"재밌는 거 말해줄까? 나 사실 학원비 10% 할인 받았어. 수능 점수가 높거든. 우리 학원은 고득점자 할인해 주는 거 몰랐지?"

몰랐다.

사실 알 필요가 없었다.

난 공짜였으니까.

"우와. 몇 점이길래?"

"비밀로 해야 해. 298점이야. 아까워. 한 문제만 더 맞췄어도 300점 넘는 건데."

"대단하네..."

내 점수는 374점이었다.

참고로 한국대 법학과 지원 가능 점수가 380점 후반대였다.

그리고 상조가 웃으면서 말했다.

"한국대는 실기만 보는 게 아니야. 수능 점수도 보고, 논술도 보고, 전에도 말했듯 플러스 알파도 본다고. 그래서 그림이 다가 아니야. 머리도 좋아야 해.

그러니까 최근 며칠, 홍대 강사한테 인정받았다고 너무 좋아하지 말고 착실히 준비해. 친구라서 말해주는 거니까."

자기 할 말을 다 마친 상조는 후련한 표정을 지으며 먼저 내려갔다.

'재밌는 녀석. 다음부터 불러낼 땐, 캔커피라도 준비하라고.'

특강이 끝날 때까지 한 번 뒤집힌 등수는 다시 바뀌지 않았다.

나는 착실하게 배운 대로 그렸고 늘 1등을 차지했다.

그리고 상조는 더 이상 나를 친구로 여기지 않는지 옥상으로 불러내지 않았다.

물론 캔커피도 주지 않았다.

그리고 드디어 대망의 한국대 시험 날이 다가왔다.

시험은 가, 나, 다 군 세 번으로 나뉘어 치러진다.

가군은 한국 정보대.

내가 제일 처음 가고 싶었던 학교였다.

경험 삼아 간단하게 치렀다.

나군은 대망의 한국대.

시험은 무려 3일간 치러진다.

논술, 1차 실기, 2차 실기.

나의 본 게임이었다.

시험 치기 전날부터 서울에는 함박눈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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