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외전(15) >
미친 타자는 시즌을 지배한다.
하지만 미친 선발 투수는 경기를 지배할 수 있다.
시리즈 2차전.
볼티모어 오리올스의 맥스 슈피겐이 그 말을 여실하게 증명했다.
무려 8이닝 1실점.
그리고 보스턴의 홈에서 이어지는 3차전.
포스트시즌이다. 시즌 중에야 어지간하면 5선발 로테이션을 지켰지만 두 경기 혹은 세 경기하고 하루씩 휴식일이 있는 포스트시즌에서 굳이 그럴 이유는 없었다.
그렇다면 대체 누구를 불펜으로 내릴 것인가. 사실 이번 시즌 4선발 투수인 루이스 로스나 5선발인 라만 그레고리의 최근 성적은 엇비슷했다. 하지만 그리 큰 고민은 없었다.
언제든지 불펜으로 투입될 수 있는 투수와 포수에 따라서 그럴 수 없는 투수. 둘의 실력이 엇비슷하다면 당연히 불펜으로 투입해야 하는 투수는 언제든지 올라갈 수 있는 쪽이다.
보스턴 펜웨이파크.
여기까지 다시 돌아오는데 무려 10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그래, 10년. 매우 긴 시간이었다.
돌이켜보면 그의 인생에서 가장 빛났던 순간은 탬파베이 시절 3년 차에 사이 영을 받았던 때가 아니었다.
2034시즌. 모두가 하나가 되어 우승을 위해 노력하고 결국 그것을 쟁취해냈을 때. 모두가 전성기의 그 모습을 찾을 수 없으리라 이야기했지만, 결국 놀라운 활약으로 팀의 우승에 큰 공헌을 했던 바로 그때야말로 그가 가장 빛났던 순간이었다.
그리고 지금.
라만 그레고리가 생각했다.
그때에도 사람들은 3년 차에 받았던 그 사이 영이 플루크라고 수군거렸다. 다시는 그때의 놀라운 활약을 보여주지 못할 것이라 예단했다.
그리고 지금.
많은 사람이 그를 향해 끝났다고 이야기 할 때, 그는 묵묵히 너클볼을 던졌다. 그가 다시 메이저의 마운드에 섰을 때, 그것만으로도 사람들은 그를 향해 인간승리라며 박수를 쳐줬다.
하지만 아니다.
아직은 박수를 받을 타이밍이 아니다. 그가 바라는 것은 단순히 메이저 마운드에서 공 몇 번 던지는 것이 아니다. 그가 이 마운드에 남긴 미련은 고작 그런 것으로 해소될 수 없다.
여전히 두렵다.
작은 실패들과 큰 실패. 그는 이 마운드에서 너무 많은 실패들을 경험했다. 실패의 경험은 영혼에 새겨지고 그것은 사람을 위축시킨다. 하지만 그런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라만 그레고리는 공을 던졌다. 그가 던질 수 있는 최선의 공이었다.
만화나 영화를 보면 주인공들은 항상 이런 타이밍에 멋지게 각성 같은 걸 한다.
하지만 아쉽게도 현실은 달랐다.
-딱!!
그렇게 최선을 다한 공을 두들겨 맞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무너지지도 포기하지도 않았다. 야구는 본래 6이닝 동안 3실점만 해도 평균은 가는 스포츠다. 좀 두들겨 맞는다고? 그게 뭐 어떻단 말인가.
[매튜 쿠퍼!! 쳤습니다. 큼지막한 타구!! 좌측 담장 상단을 두들깁니다!!]
우리 타자들 역시 놀지만은 않는다.
나는 상대방 타자들을 완벽하게 틀어막을 수 없다. 하지만 괜찮다. 그저 상대보다 덜 얻어맞으면 된다. 그뿐이다.
6이닝 4실점.
그리고 승리투수.
보스턴 레드삭스가 대부분의 예상을 깨고 볼티모어 오리올스를 상대로 승기를 굳혀갔다.
그리고 마침내 4차전.
볼티모어 입장에서는 벼랑 끝 승부.
그들은 고작 사흘을 쉰 브라이언 보일을 마운드 위에 올렸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부족한 휴식일이었지만 그럼에도 현재 볼티모어 오리올스에서 가장 좋은 투수는 그 휴식일이 부족한 에이스였으니까.
“진짜 에이스라면 감당해야 할 부분이지.”
“그래, 부디 그 감당 잘해서 내 차례까지 꼭 돌아오게 해야 한다. 5차전까지만 가면 내가 억지로라도 승리를 떠먹여 줄 테니까 말이야.”
등판 당일임에도 불구하고 언제나처럼 맥스 슈피겐과 가볍게 투닥거렸다.
탬파베이에서 보스턴으로 이적했을 때는 정말 우울했지만, 이 녀석을 만난 것만큼은 운이 좋았다는 생각이 든다. 사사건건 시비나 걸어대는 열 받는 자식이지만 언제나 향상심을 갖게 만드는 좋은 적수다.
지금의 브라이언 보일 자신이 이만큼이나 좋은 투수가 된 데는 이 녀석의 공로도 코딱지만큼은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4차전.
팬웨이파크의 마운드에 그가 올라왔다.
젠장. 이건 인정할 수밖에 없다. 메이저리그의 그 어떤 투수를 데리고와도 저 팬웨이파크의 마운드가 저만큼 잘 어울리는 남자는 없을 것이다.
그는 온몸으로 소리치고 있었다. 내가 바로 이 마운드, 이 경기장의 주인이라고.
마운드의 성민이 크게 와인드업했다.
너클볼.
어디로 갈지 아무도 알 수 없는 공이 타자의 방망이를 농락했다. 보스턴 팬들의 얼굴에 희망이 가득했다. 펜웨이파크의 마운드. 김성민이라는 남자가 10년 동안 쌓아 올린 신뢰는 그만한 힘이 있었다.
-딱!!
에드윈 필립스가 공을 쫓았다.
그가 보스턴에 올 때만 하더라도 그가 상상했던 미래는 이런 것이 아니었다. 2030년대의 지배자인 보스턴 레드삭스. 그는 자신의 합류가 이 팀에게 정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부상과 부상과 부상이 그것을 망쳤다고 하지만 그런 과정들은 결과를 덧칠해주지 못 한다. 결국, 그는 영원히 보스턴의 먹튀로 기억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손을 놓는 것은 취향이 아니다. 비록 아무리 발버둥을 친다고 해도. 절대 3,250만 달러 치의 활약을 할 수 없다고 해도. 어떻게 해도 먹튀 소리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해도.
에드윈 필립스의 글러브가 멀리 날아온 야구공을 낚아챘다.
아웃!!
1회 초.
볼티모어 오리올스가 삼자범퇴로 물러났다.
그리고 마운드에 브라이언 보일이 올라왔다.
-뻐엉!!
“야, 너 그거 아냐? 만화나 영화, 게임에 나오는 동료의 법칙”
“그게 뭔데?”
“있잖아. 뭔가 강력한 적이 우리 편이 되면 갑자기 잉여가 되고 우리 편에 있을 때 그럭저럭이던 놈이 적으로 돌아서면 각성 같은 거 해서 막 최종보스급 포스 뿜뿜하고 그러는 거.”
“아, 하긴 좀 그렇지. 근데 그게 왜?”
“지금 우리가 좀 그런 것 같지 않냐? 다른 팀에서 포스 뿜뿜하던 애들 데리고 왔더니 잉여롭고 우리 팀에서 나간 애들은 무슨 다 끝판왕이잖아. 안 그래?”
고작 사흘의 휴식.
하지만 마운드의 투수는 그것이 뭐가 어땠냐는 기세로 공을 뿌렸다.
-부웅!!
“스트라잌!! 아웃!!”
그는 유망주 시절부터 아주 좋은 선배들에게 많은 것들을 배우며 자라났다. 곁에는 최고의 적수가 그를 자극했고, 앞에서는 넘을 수 없는 장벽이 그를 가로막았다. 지금의 브라이언 보일은 브라이언 보일이라는 재능이 다다를 수 있는 한계점에 가까웠다.
리그 에이스의 포텐셜.
거기에서 포텐셜이라는 말을 지운 투수가 보스턴의 타자들을 압박했다.
2035년인가? 36년인가?
성민과 이런 대화를 나눴던 적이 있다.
“뭐? 상대 투수가 디아고 헤밍턴이라서 신경이 너무 쓰인다고?”
그는 브라이언의 고민에 크게 웃으며 이렇게 답했다.
“네가 상대하는 건 디아고 헤밍턴이 아니야. 네가 상대할 건 다저스의 타자들이지. 디아고 헤밍턴을 신경 써야 하는 건 우리 타자들이라고.”
물론 그 말 좀 들었다고 디아고 헤밍턴을 향한 신경이 뚝 하고 끊어질리는 만무했다. 당시 그는 그 경기에서 1.1이닝 만에 7실점을 기록하며 형편없이 무너졌다.
그리고 오늘.
20대 중반의 브라이언 보일은 성민의 조언을 실행으로 옮길 수 없었다. 하지만 32세의 브라이언 보일은 누군가에게 똑같은 이야기를 조언해줄 수 있을 만큼 완성된 투수로 거듭났다.
중요한 것은 내 눈 앞의 타자들이다.
1회 말.
마찬가지로 삼자범퇴.
이어지는 2회.
성민은 마땅히 자신이 보여야 할 피칭을 선보였다.
그리고 브라이언 보일은 그가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피칭으로 보답했다.
성민은 브라이언 보일의 피칭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어쩌면 욘 마르틴이 자신을 보면서 느꼈던 감정이 이와 유사하지 않았을까? 이제 선배의 시대는 갔습니다. 슬슬 자리에서 내려오시죠. 라는 말을 온몸으로 하는 것 같은 저 모습이라니.
‘하지만 아직 한참 멀었죠. 안 그렇습니까? 영감님?’
경기가 계속됐다.
40세의 성민.
32세의 브라이언 보일.
하지만 오늘 두 사람에게는 나이만큼이나 중요한 차이점이 존재했다. 나흘을 쉰 투수와 사흘을 쉰 투수라는 점이 바로 그 점이었다. 게다가 그 기간에는 이동일 역시 존재한다. 무엇보다 너클볼 투수는 그 특성 상 연투에 유리하다.
4회를 넘어 5회. 그리고 6회.
아마 브라이언 보일이 조금만 나쁜 투수였다면 그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감독도 조금 더 일찍 투수를 교체했을 테니까.
하지만 그는 매우 강력한 투수였고 파탄의 그 순간까지도 그것은 변함이 없었다.
단 한 번의 실수.
오늘 수많은 타자를 돌려세웠던 그의 슬라이더가 삐끗했다. 중앙으로 몰린 밋밋한 행잉 슬라이더.
메이저리그의 타자라면 놓칠 수 없는 공이었다. 타석에 선 타자는 3,250만 달러짜리 먹튀 소리를 듣는 남자였지만, 시즌 평균 30개의 홈런을 만들어냈던 대타자였던 남자 에드윈 필립스였다.
-딱!!
완벽하게 잡아당긴 타구가 펜웨이 파크의 녹색 담장을 넘어갔다.
디비전 시리즈 4차전.
리그 최고의 투수에게는 그 1점으로 충분했다.
***
“참 재밌단 말이지.”
“재밌기는. 솔직히 우리가 뛰던 시절이 훨씬 재밌었지. 뭐, 쟤들도 대단하긴 하지만 난 페드로나 그렉, 랜디, 클레이튼 같은 녀석들이 저 녀석들보다 못하다는 생각은 전혀 안 들어. 게다가 우리가 뛰던 시대에는 그 녀석들 말고도 괴물 같은 놈들이 아주 바글거렸다고.”
“물론 그야 그렇지.”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거의 모든 노인들이 그렇듯 그들 역시 자신이 젊었던 시절이야 말로 가장 역동적이며 위대한 시대였다고 생각했다. 다만 다른 노인들과 조금 달랐던 점은 그들의 그런 생각에는 제법 타당성이 존재했다는 점이다.
90년대 후반부터 00년대를 거쳐 10년대 초반까지.
그 시대를 지배했던 두 노인 중 하나가 TV 속의 투수를 다시 한번 뚫어지게 바라봤다. 참 재밌는 일이었다.
그는 두 번의 삶을 살았다. 첫 번째 삶에서 그는 성공한 사업가이자 투자자였다. 그리고 이번 삶에서 그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야구 선수’라는 명성을 얻었다.
자신의 영향력 때문일까? 정말 많은 것들이 달라졌다. 그 모든 달라진 점들은 그를 매우 흥미롭게 했다.
하지만 그 모든 흥미로움 가운데서도 이만한 일은 드물었다.
그가 기억하는 2030년대 그리고 40년대의 지배자는 오직 디아고 헤밍턴 하나였다.
그는 앞서 프레스톤 윌슨이 말했던 페드로 마르티네즈, 그렉 매덕스, 랜디 존슨, 클레이튼 커쇼 등과 비교해도 조금도 부족하지 않은, 아니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더 대단한 남자였다.
그런데 그런 남자와 쌍벽을 이루는 투수라니.
그것도 김성민이라니.
만약 그가 김성민이라는 남자를 아예 몰랐더라면 그렇게까지 재밌는 일은 아니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제는 기억도 가물한 첫 번째 삶. 그가 기억하는 김성민이라는 남자는 지금과는 많이 다른 사람이었다.
야구 선수 출신.
부산지역의 성공한 청년 사업가.
그리고······.
“뭐, 어찌 됐건 이런 모습도 나쁘지 않군.”
노인이 일루로 달려갈 힘이 사라질 때까지 방망이를 휘두른 것처럼 TV 속 성민은 여전히 힘차게 공을 던지고 있었다.
어쩌면 일루로 달려갈 힘이 사라질 때까지 말이다.
< 외전(15) > 끝
ⓒ 묘엽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
너클볼은 이제 정말 진짜로 끝입니다.
지금까지는 주인공이 은퇴하는 이야기까지 썼었는데 이상하게 성민이의 이야기는 여기까지만 쓰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글의 조금이라도 좋았던 점은 모두 여러분 덕분이고
글의 부족했던 부분은 저의 부족한 능력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조만간 더 좋은 글로 찾아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