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외전(14) >
사실 보스턴 내부에서도 그들이 선수에 그렇게 미친 듯이 돈질을 하는 것에 태클을 거는 사람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돈을 좀 쓰더라도 성적을 내는 편이 이득입니다.”
“아니, 좀이라뇨. 좀이 아니잖습니까. 이것 좀 보세요. 사치세만 4천만 달러에요. 4천만 달러!!”
“여기 보시면 지난 10년간의 수익입니다. 최근 2년, 그리고 이번 시즌 초반을 자세히 보시죠. 지금 여기서 반등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그리고 이건 저희가 정말로 탱킹에 들어가서 포스트시즌에 나가지 못하는 시즌이 길어진다면 나올 결과에 대한 예측입니다.”
“맙소사.”
스몰마켓에는 스몰마켓의 운영이 있듯이 빅마켓에는 빅마켓의 운영이 있고, 그중에서도 극성맞은 팬을 가진, 지난 몇 년 동안 꾸준히 잘 나갔던 팀에는 그 팀에 맞는 운영이 있다.
쉬어가는 것 역시 한 번 실패했다고 모든 것을 내던지고 숨을 돌릴 수 없다. 그들은 자리에 잠시 멈춰 숨을 돌리는 데에도 매우 긴 계획이 필요한 빅마켓이었으니까.
***
그렇게 메이저리그의 여름이 흘러갔다.
FA를 거친 베테랑들의 장점은 검증된 선수라는 점에 있다. 물론 검증이니 뭐니해도 폭망하는 선수는 결국 폭망하고 더 폭발할 선수는 폭발한다. 게다가 나이에 따른 노쇠화는 시한폭탄이다. 하지만 이번 보스턴의 베테랑들은 다행스럽게도 별다른 기복 없이, 노쇠화라는 폭탄도 터지지 않은 채 여름을 흘려보냈다. 물론 그들 중 다수가 이미 한차례 노쇠화라는 폭탄을 터트리고 바닥을 친 선수들이었다는 점도 매우 중요한 요인이었다.
하지만 바닥을 쳤다고 해도 그들 대부분은 성공적인 서비스 타임을 보내고 FA를 경험한 선수들이었다. 바닥을 쳤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들이 받는 연봉에 비해서라는 전제가 붙는다. 3에서 4. 터진다면 5 이상의 WAR을 기대하던 선수들이다. 하락세가 완연하다고 하지만 그들 대부분이 시즌 162경기로 환산했을 때 2 이상의 솔리드한 성적을 기록해주었다.
물론 그 와중에 풀시즌 0.2의 WAR을 기록한 에드윈 필립스 같은 녀석도 있었지만 말이다.
-그래도 마이너스 아닌 게 어디냐.-
-년에 3,250만 달러를 받아 가는데 마이너스가 아닌 게 다행이라는 말을 해야 하다니······.-
분명 동부지구 볼티모어 오리올스의 기세는 매서웠다.
마지막까지도 보스턴은 그들을 넘어서지 못했다. 하지만 포스트시즌에 진출하는 방법이 꼭 지구 우승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지구 우승팀들을 제외한 모든 팀 가운데 승률 1위.
보스턴 레드삭스가 가볍게 와일드카드를 획득했다.
***
“솔직히 우리 와일드카드는 그렇게 걱정이 안 되거든? 근데 우리 와일드카드 이겨봤자 뭐하냐고. 에이스 카드 이미 소진한 상태로 볼티모어 오리올스랑 디비전이잖아.”
“그래도 시즌 중에 상대 전적 거의 반반은 하지 않았냐?”
“반반은 무슨. 19경기 중에서 8승 11패인데 그중 3승이 성민이가 등판한 경기였어.”
“아, 몰라. 일단 오늘 이기고 그런 건 나중에 생각할래.”
보스턴 레드삭스의 오랜 팬들이 수군거리며 경기장으로 들어왔다.
3년 만의 포스트시즌이다. 경기장을 가득 채우기에는 충분한 이유였다.
10월의 경기는 언제나 특별하다.
현지 시간으로 저녁 5시 9분. 낮 한때 17도까지 갔던 기온은 저물어가는 해와 함께 떨어져 어느새 14도까지 떨어졌다.
쌀쌀함이 느껴지는 날씨.
마운드 위에 올라오는 성민을 향해 보스턴 시민들이 열렬한 박수와 환호성을 보냈다. 오늘 경기를 직관하러 온 관중들의 8할 이상이 성민의 이름이 박힌 저지를 입고 왔다. 무려 10년이나 보스턴의 든든한 에이스로 존재한 남자다. 보스턴 레드삭스의 팬이라면 성민의 이름이 박힌 저지 하나 정도는 필수다.
이번 시즌 성민은 33경기에 등판해서 210과 2/3이닝. 20승 3패. 2.99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했다. 그는 마찬가지로 33경기에 등판해서 223이닝 19승 5패. 3.07의 평자책을 기록한 브라이언 보일. 32경기에 등판해서 197이닝. 16승 7패. 2.92의 평자책을 기록한 맥스 슈피겐과 함께 가장 강력한 사이 영 컨텐더였다.
‘뭐, 200승을 못 채운 건 조금 아쉽지만, 어차피 올해 던지고 끝날 건 아니니까요.’
과거 20세기 명예의 전당에 조건으로 꼽히던 것은 300승 3천 삼진이었다.
하지만 21세기 이후. 투수가 300승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 돼버렸다. 18승 19승이 다승왕을 차지하는 시대다. 15년 연속으로 다승왕을 해야 가능한 기록 따위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덕분에 현재는 250승 정도가 명예의 전당 프리패스권으로 여겨진다.
물론 11년 커리어에서 사이 영을 네 개나 수상한 투수인 성민이 명예의 전당을 걱정할 일은 없었지만 말이다.
오늘 와일드카드전의 상대인 텍사스 레인저스의 타자들이 의욕을 불태웠다. 여전히 강력한 투수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예전의 그 성민은 아니다. 게다가 텍사스 레인저스는 이번 시즌 서른 개 구단을 통틀어 네 번째로 화끈한 방망이를 자랑했다. 충분히 해낼 수 있다.
그리고 타순 한 바퀴.
성민이, 보스턴 레드삭스가 3이닝 만에 그들의 의욕에 찬물을 끼얹었다.
성민이라는 투수가 중요한 경기에서 얼마나 강력한 모습을 보여주는지를 잊기에 3년은 충분히 긴 시간이었다. 부담감을 등에 짊어질수록 강해지는 사람이 있다.
필 니크로가 떠나고 10년. 단순히 자신을 응원하는 사람들 앞에서 뽐내기 좋아하던 애송이는 어느새 그것을 넘어, 자신을 응원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하고 그 바람을 동력으로 삼을 줄 아는 어른이 되어있었다.
-딱!!
물론 두들겨 맞기도 맞았다.
텍사스 역시 필사적이었고 10월의 쌀쌀한 날씨와 6개월의 터프한 일정은 성민에게 상당히 좋지 않은 영향을 주는 요소들이었으니까.
하지만 그것 이상으로 보스턴의 타자들이 텍사스를 두들겼다.
6이닝 3자책. 퀄리티 스타트라고 한다. 사실 한 경기로만 따졌을 때 이건 그리 대단한 기록은 아니다. 이번 시즌 아메리칸리그의 평균자책점은 4.57로 딱 평균 수준에 불과하다. 하지만 성민은 거기서 한 걸음을 더 나갔다.
퀄리티 스타트 플러스. 7이닝 3실점. 퀄리티 스타트에서 1이닝을 더 소화했다. 고작 1이닝? 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건 정말 큰 차이다. 평자책으로 따지면 4.5와 3.86의 차이이고 불펜을 하나 덜 쓸 수 있는 차이다.
그리고 그사이 보스턴의 타자들은 전력으로 가동되는 텍사스의 투수들을 상대로 무려 8점을 뽑아냈다.
[보스턴 레드삭스-텍사스 레인저스 와일드카드전. 11:5 보스턴 레드삭스의 승리!!]
[김성민 7이닝 3실점 호투!!]
[산 넘어 산? 디비전 시리즈 상대는 이번 시즌 아메리칸리그 승률 1위의 볼티모어 오리올스!!]
이번 대진에 가장 신이 난 것은 지난 2년 동안 포스트시즌 중계로는 별 재미를 보지 못했던 한국의 방송사였다. 코리안 메이저리거들의 맞대결은 언제나 시청률 대박을 약속하기 마련이다. 게다가 지난 몇 년 동안 성민이 너무 터무니없는 활약을 해준 덕분에 한국 내에서도 커다란 경쟁이 붙은 터라 메이저 중계권의 가격은 천정부지로 올랐다. 정규시즌에 2, 3번의 맞대결이 있다지만 그걸로는 본전을 회수하기 힘들다.
“좋았어. 앞뒤로 특집 프로그램 편성하고. 다큐는 어떻게 됐어?”
“김성민 선수 쪽은 여전히 어렵습니다. Fox에서 자기들 독점으로 하겠다고 송출권도 나눠줄 생각이 없답니다.”
“개자식들. 또 넷플릭스야?”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
“박동엽은?”
“그쪽은 지금 저희 직원들 붙어서 이미 1회분 촬영 끝냈고 편집실 이제 들어갈 예정입니다.”
“최대한 시즌 중에 김성민이랑 붙었던 경기들 넣어주고 중간중간 우리가 따냈던 김성민 인터뷰도 좀 넣어. 예고편에 김성민 내보내는 비중도 높이고. 어?”
***
“재밌네.”
“뭐가요?”
앤드류 딘이 불퉁한 표정으로 라만 그레고리를 바라봤다.
이 남자가 대단한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친해지기는 힘들다. 사실 이것은 앤드류 딘만의 잘못은 아니었다. 라만 그레고리 역시 어느 정도 주변에 벽을 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모처럼 만의 포스트시즌이기 때문일까? 함께 타고 가는 비행기에서 자신의 등판을 걱정하는 앤드류 딘에게 라만 그레고리는 자신도 모르게 한 마디를 내뱉고야 말았다.
“아니, 사실 10년쯤 전에 월드 시리즈를 앞두고 이거랑 비슷한 일이 있었거든.”
“그레고리 씨도 비슷하게 걱정을 했었다. 뭐 그런 이야기입니까? 하긴, 사이 영도 받고 다 해보셨었지만 포스트시즌은 보스턴에 와서 처음 경험해보셨었죠?”
“아니, 나 말고. 난 그때도 지금이랑 비슷한 느낌이었지.”
“그러면? 아, 설마?”
“그래, 브라이언. 너와 맞상대할 오리올스의 1선발.”
당시 라만 그레고리는 브라이언 보일에게 자신 있게 너의 공을 던지라고 충고해줬다. 사실 브라이언 보일만 한 투수에게는 그거면 충분했다.
“그래서 결과는 어떻게 됐는데요?”
“0.2이닝 5실점 패배였을 거야.”
앤드류 딘이 들고 있던 생수병을 내려놓으며 어처구니없다는 목소리로 답했다.
“아니, 뭡니까 그건. 지금 뭐 저도 경기 망치라는 소리예요? 후배 사랑이 너무 대단하신 것 같은데요.”
라만 그레고리가 잠시 당황했다. 말하다 보니 뭔가 이상한 소리가 돼버린 것 같았다.
그리고 그때, 바로 뒤의 좌석 한 줄을 혼자 차지하고 있던 성민이 상체를 들어 그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너랑 걔랑 같냐?”
“네?”
“그 당시 걘 이제 막 3년 차에 애송이었잖아. 뭐 너도 포스트시즌 못 나가본 건 걔랑 똑같지만 넌 FA로 무려 1억 8천만 달러를 받고 온 선수고.”
“하지만······.”
“그러니까 굳이 비교하자면 넌 당시의 이 녀석과 비슷한 입장이겠네. 격려를 들어야 하는 쪽이 아니라 누군가를 붙잡고 격려를 해줘야 하는 쪽. 라만, 너 그때 성적이 어땠지?”
“7이닝 3실점. 9삼진에 1볼넷. 승리. 1회 초에 선두타자로 나왔던 마르타 블랑코한테 솔로홈런 맞고 정신이 번쩍 들어서 정말 무아지경으로 던졌었지.”
라만 그레고리의 머릿속에 그때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아직도 어제 일처럼 생생한 기억이었다. 그 경기를 끝으로 그는 다시는 포스트시즌 무대를 밟지 못했다. 조금 더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그가 리그 에이스급 활약을 뽐냈던 것은 그 2034시즌이 마지막이었다. 콜로라도 로키스 시절의 그는 정말 최악이었으니까.
“들었지? 너도 그냥 하던 대로 하면 돼. 더 잘하려고도 하지 말고, 그렇다고 대충하는 건 더더욱 안 되지만. 넌 1억 8천만을 받을 자격이 있는 투수야. 그리고 뭐, 나머지는 저기 저 친구들이 알아서 해줄 거야.”
성민의 시선이 저 앞에 앉아있는 매튜 쿠퍼를 비롯한 야수들을 향했다.
절대 고효율이라고는 할 수 없는 보스턴의 야수진들이다. 하지만 그래도 괜찮다. 굳이 저비용 고효율일 필요는 없었다. 효율이 조금 나쁘면 돈을 바르면 된다.
디비전 시리즈 1차전.
앤드류 딘과 브라이언 보일의 맞대결.
그들의 승부를 결정 지은 것은 미쳐 날뛰는 타자의 방망이였다.
[맙소사!! 매튜 쿠퍼. 경기 두 번째 홈런!! 쓰리런입니다!!]
그렇게 혼자서 7타점을 쓸어 담은 타자가 경기를 지배했다.
< 외전(14) > 끝
ⓒ 묘엽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