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클볼-280화 (281/287)

< 외전(9) >

사람들은 종종 이런 이야기를 한다.

아무리 좋아하는 일이라도 직업이 되면 의무가 되는 법이라고. 하지만 포틀랜드 시독스의 홈구장인 해드록 필드를 바라보는 앤드류 딘의 가슴은 여전히 두근거렸다.

무려 일 년 하고도 석 달만이다.

‘이번에야말로.’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에서 22살에 콜업되어 6년. 그는 항상 촉망받는 유망주였고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훌륭한 투수였다.

하지만 보스턴과 29세부터 34세를 커버하는 6년 1억 8천만의 계약을 체결한 이후는 조금 달랐다. 사람들의 기대는 컸고, 그는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괴로운 일이었다. 그렇기에 더 노력했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그것은 이룰 수 없는 일이었다.

“멍청아. 네가 왜 1억 8천만이나 받는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건 네가 지금까지 해온 방식이 옳았기 때문이야.”

당시, 보다 못한 매튜 쿠퍼가 앤드류에게 한 마디를 해줬었다. 매튜 쿠퍼의 이야기는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시절 당시의 그가 했던 것이 옳다는 말이었지만 앤드류 딘은 지금 자신이 하는 것을 믿고 가라는 말로 받아들였다.

그 결과 그는 수술대에 올랐고, 무려 일 년 삼 개월이나 제대로 야구를 하지 못했다. 온몸이 근질거린다. 의사는 말했다. 수술은 매우 잘 됐고, 이제 이전보다 훨씬 쌩쌩하게 공을 던질 수 있을 거라고.

감독과 인사를 하고 불펜 세션 날짜를 잡았다. 그는 6년 1억 8천만짜리 선수다. 남은 계약 기간만 4년. 무려 1억 2천만 달러가 달려있다. 포틀랜드 시독스의 관계자뿐만이 아니라 레드삭스의 관계자들까지 대거 참가했다.

-뻐엉!!

1년 3개월의 공백.

아직 완벽하게 풀리지 않은 몸. 하지만 그럼에도 구속은 무려 93.2마일이 찍혔다.

“상당한데요?”

“수술은 완벽하게 끝났다고 들었는데, 사실인 것 같네요.”

“실전에서 조금 더 지켜봐야 알겠습니다만 지금 눈으로 봐서는 크게 문제는 없어 보입니다.”

“슬라이더가 좀 불안하긴 한데, 그것도 1년 3개 월만이라는 걸 생각하면 나쁘지 않군요.”

코치들은 그의 공을 보며 제법 만족을 표했다. 하지만 그 공에 모두가 만족한 것은 아니었다.

‘노렸던 것보다 너무 높은 곳에 공이 몰리고 있어. 더 낮게 깔려고 했더니 아예 원바운드 볼이 돼버렸고. 이대로는 곤란해.’

공을 던진 앤드류 딘이 그 불만의 주인공이었다. 아직 부족함이 많았다. 보통의 투수라면 이 정도에 만족해버려도 괜찮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는 무려 1억 8천만 달러의 주인공이었다. 현재 팀의 가장 좋은 투수인 성민조차도 그보다 적은 연봉을 받는다. 물론 성민의 경우 이닝에 워낙 큰 옵션이 붙어있어 실제로는 얼추 비슷한 금액이라고는 하지만, 어쨌거나 보장 연봉으로만 따지면 앤드류 딘이 받는 연 3천만은 투수 가운데 가장 높은 금액이다.

큰돈에는 큰 책임이 따르는 법이다.

앤드류 딘이 입술을 깨물며 연습용 마운드에서 내려갔다.

“그나저나 미리 말씀드렸던 것처럼 여기까지 온 김에 하나만 더 보고 가시죠.”

“아, 그 친구요? 어떻습니까? 좀 괜찮나요?”

“생각보다는 괜찮습니다. 조금 불안하기는 한데, 다듬어만 진다면······.”

앤드류 딘의 뒤를 이어 라만 그레고리가 마운드에 올라왔다.

침착하게.

나는 5만 5천 명의 관중을 두고 월드시리즈 무대에서도 뛰어본 사람이다. 고작 코치 몇 명이 지켜보는 이런 자리 따위 아무것도 아니다.

근데 왜 이렇지?

심장이 이상하게 빨리 뛴다.

침착하게 호흡을 한번 내뱉었다. 그래, 이전까지의 내가 1억 9천만 달러의 투수였다면 지금의 나는 새롭게 시작하는 너클볼 투수다. 이건 나의 새로운 시작이고 긴장되는 게 당연하다.

침착하게 공을 움켜쥐었다.

중요한 것은 내려치는 팔과 밀어내는 손의 조화다. 지난 1년간의 연습으로 조정한 그 감각 그대로. 너클볼을 위한 거대한 미트가 홈플레이트 너머로 선명하게 보였다.

초구.

-뻐엉!!

“흐음, 이건?”

“그냥 배팅볼인데요?”

“당장 내가 타석에 서도 담장을 넘길 수 있겠네요.”

“아무리 몸이 덜 풀렸다고 해도 이건 좀······.”

최악이다.

초구부터 완벽한 실투가 들어갔다. 가슴이 쿵쿵거리고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눈을 한 번 질끈 감았다가 뜬다.

“하지만 투수라면 실투는 당연히 나오는 법이죠.”

“일단 조금 더 지켜보시죠.”

라만 그레고리가 두 번째 공을 뿌렸다.

-뻐엉!!

“오오, 이건 제법?”

“이 정도라면 괜찮은데요?”

32개.

그리고 그 가운데 다섯 개의 실투.

“흐음, 실투가 조금 많은 것 같긴 합니다만, 그래도 공 자체는 나쁘지 않군요.”

“뭐, 실투라고 무조건 쳐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일단 조금 지켜볼 가치는 있는 것 같습니다.”

마운드에서 내려온 라만 그레고리가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래, 이 정도면 성공적이다.

그리고 그것을 지켜보던 앤드류 딘이 고개를 갸웃했다. 고작 저 정도에 만족한다고?

***

앤드류 딘의 리햅 첫 경기.

“오오, 이게 다 뭐야?”

“역시 1억 8천만 달러의 사나이!! 화끈하구만.”

최근 마이너의 식단도 예전보다는 많이 나아졌다. 하지만 그래도 메이저와는 큰 차이가 있다. 헌데 오늘 그들을 위해 준비된 점심은 메이저 이상이었다. 앤드류 딘이 사비를 털어 포틀랜드에서 가장 잘 나가는 식당의 요리사에게 하루 출장 요리를 부탁한 덕분이다.

그리고 선수들 역시 먹은 밥값은 해내겠다는 각오로 최선을 다했다.

5이닝 3피안타 1실점 6삼진.

투구 수는 67개. 훌륭한 결과였지만 만족할 수 없었다. 이곳은 빅리그가 아닌 AA다. 여기에서 가장 잘 치는 타자도 빅리그에서는 평범 혹은 그 미만에 불과하다.

“오늘 아주 좋던데?”

“뭐, 그럭저럭이었죠.”

“그럭저럭이라니. 넌 지금 아주 잘하고 있는 거야.”

라만 그레고리가 앤드류 딘을 격려했다. 하지만 앤드류 딘은 그 격려가 이상하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하루 뒤.

라만 그레고리의 차례.

마찬가지로 훌륭한 음식들이 그들에게 선사됐다.

“이거 이러다가 나 살찌는 거 아니야?”

“그래서? 안 먹을 거야? 그러면 내가 좀 더 먹고.”

“아니, 그건 곤란하지.”

3.1이닝 볼넷 세 개. 6피안타. 그중 홈런이 두 개. 7실점.

그야말로 엉망진창으로 깨졌다.

그럼에도 라만 그레고리의 얼굴은 그리 일그러지지 않았다. 이번에도 역시 앤드류 딘은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렇게 3주의 시간이 흘렀다.

***

-딱!!!

[쳤습니다!! 좌측 방면!! 강한 타구!! 빠릅니다!!]

방망이를 내던진 에드 맥밀란이 빠르게 1루를 향해 달렸다. 물론 그 빠름의 기준은 어디까지나 객관이 아닌 에드 맥밀란의 주관이었지만.

그래, 여기까지.

그린 몬스터를 직격하는 강한 타구였지만 에드 맥밀란의 발은 일루에서 멈췄다. 보통이라면 이루타. 발이 아주 빠른 주자라면 삼루를 노릴지도 모르는 좋은 타구였다. 하지만 현재의 에드 맥밀란은 그 유명한 우익수 앞 땅볼도 가능한 남자다.

실제로 얼마 전 그는 그린 몬스터를 직격하는 안타를 치고 이루까지 달리다 여유롭게 아웃된 적도 있었다. 1루까지 5.78초. 리그에서 그보다 느린 주자는 다섯이 채 되지 않는다.

하지만 괜찮았다.

[에드 맥밀란!! 일루에서 멈춰 섭니다. 그리고 그사이 일루 주자는 이루 돌아 삼루!! 삼루 지나 홈까지!!]

-뻐엉!!

“세이프!!”

[7회 말. 투아웃 주자 1루 상황에서 에드 맥밀란이 1타점 적시타를 기록합니다!!]

[요즘 에드 맥밀란 선수의 타격감이 물이 오른 게 느껴지는군요. 오늘 벌써 3타수 2안타를 기록 중이에요.]

[지명 타자로 출장하기 시작하면서 체력적인 안배를 받는 것이 주요했던 것 같습니다. 확실히 클래스는 어디 가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어요.]

시큰거리는 통증은 여전하다. 하지만 방망이를 돌리는 순간 찌릿함은 상당히 사라졌다.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했다. 에드 맥밀란은 메이저 역사에 남을 공격형 포수로 손꼽히던 남자다. 부상이 그의 몸을 갉아 먹었지만, 그 빛나던 재능은 편린으로나마 남아있었다.

“잘했어.”

“잘하기는. 내가 조금만 제대로 달렸더라면 추가점도 가능했을 텐데.”

“그런 식으로 따지자면 내가 조금만 더 빠르게 공을 던졌더라면 무실점도 가능했겠지. 하지만 이제 너도 알잖아.”

“그래, 여전히 마음에 안 들기는 하지만. 뭐, 인정할 건 인정해야지.”

어린 시절에 꿈을 그렸고 자라나며 그것을 하나하나 채워나갔다. 그리고 어느 순간에는 그 모든 것을 손에 넣은 것 같은 순간도 있었다.

그리고 다시 시간이 흘렀다. 이제 필요한 것은 내가 그것들을 잃어버렸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것은 지독하게 괴로운 일이다. 나의 내일이 오늘보다 못할 것이고 또 모레는 내일보다 못할 것이라는 점을 알게 되는 일.

사람이 오늘의 괴로움을 견뎌낼 수 있는 것은, 나의 내일이 오늘보다 괜찮으리라는 희망 때문이다. 하지만 서른일곱 살의 포수와 마흔 살의 투수는 나의 내일이 오늘보다 더 약해진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그러니까 올해여야 해.”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렇기에 그들은 포기할 수 없었다. 다음을 기약할 수 없었기에 더 간절하게, 그리고 더 강렬하게 현재를 살아간다.

앞으로 펼쳐질 긴 인생에서 최고의 기회는 바로 지금이다. 만 37세의 지금 당장 은퇴해도 이상하지 않은 노장이 그보다 더 늙은 투수를 향해 미트를 내밀었다.

마찬가지로 전성기의 터무니 없던 공과 비교한다면 초라한.

-부웅!!

“스트라잌!!”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성민의 너클볼은 타자들의 방망이를 성공적으로 헛돌렸다.

***

-쾅!!

“젠장!!”

앤드류 딘이 자신의 라커를 발로 걷어찼다.

6이닝 동안 볼넷 2개 포함 7피안타 1피홈런 4실점. 오늘 그가 기록한 성적이었다.

“이봐, 진정하라고. 화를 내는 건 좋지만 그러다가 괜히 다치는 수가 있어.”

포틀랜드 시독스의 다른 선수들은 그를 말릴 수 없었다. 입지 자체가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라만 그레고리는 달랐다. 비록 망가졌다고는 하지만 그는 1억 9천만 달러를 받았던 투수이자 무려 사이 영 위너이며 보스턴에서 반지까지 손에 넣었던 남자다. 커리어만 따졌을 때 앤드류 딘은 감히 비교할 바가 못 된다.

“더 잘 던질 수 있었어요. 빌어먹을. 더 잘 던질 수 있었다고요.”

“그래, 나도 잘 알아. 하지만 이미 경기는 끝났어. 너 자신에게 화난 건 잘 알겠지만 일단 진정하자고. 응?”

“젠장. 그레고리 씨는 속 편해서 좋으시겠습니다. 어차피 다 끝났잖습니까. 그러니까 그렇게 매일 싱글벙글일 수 있는 거 아닙니까. 하지만 전 달라요. 그래요. 오늘 경기는 끝났죠. 하지만 제 계약은 아직 한참 진행 중이에요. 빌어먹을 3천만 달러를 받는 투수가 AA에서 3주를 이러고 있다고요.”

-쾅!!

눈치를 살피던 포틀랜드 시독스의 선수들이 슬금슬금 라만 그레고리에게 다가갔다. 아무리 화가 났다고 하지만 저건 선을 세게 넘었다. 당장 그레고리가 주먹을 날려도 이상하지 않았다. 실제로 라만 그레고리는 맹렬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이걸 일단 한 대 날리고 설교를 시작할까, 아니면 설교를 하고 한 대를 날릴까?

역시 한 대를 먼저 날리는 게 좋겠지? 그리고 바로 그 때.

“진짜 이래서 사람은 오래 살아야 해. 설마 저것보다 더 멍청한 놈이 나올까? 싶다가도 이렇게 더 멍청한 새끼가 툭툭 튀어나오니까 말이야.”

라커룸의 입구.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성민?”

< 외전(9) > 끝

ⓒ 묘엽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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