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외전(7) >
메이저리그에서 성공했다?
사실 사람마다 말하는 성공의 기준이 다른 만큼 칼로 자르듯이 누구는 성공이고 누구는 실패라고 이야기하기는 힘들다.
예컨대 라만 그레고리 같은 경우 총 수령액이 2억 달러가 훌쩍 넘는 선수다. 돈만 생각한다면 명백하게 성공한 선수다. 하지만 누군가는 ‘커리어 통산 2천 이닝도 안 되는 선발투수가 성공한 선수라고?’ 딴지를 걸 수 있다.
그런 의미로 본다면 동엽은 어떨까?
동엽은 볼티모어와 2+1년, 700만+500만의 계약을 맺고 메이저리그로 진출했다. 그때 많은 사람은 ‘KBO를 폭발시킨 것도 아닌데 메이저에서 버틸 수 있겠어?’ 혹은 ‘2년간 미국으로 휴가 잘 갔다 오겠구나.’ 정도의 반응을 보였다.
그리고 3년 차.
볼티모어는 동엽과의 팀 옵션을 실행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최근 2년 동안 254경기에 출장하여 1,087타석 977타수 237안타 91볼넷 26홈런 17도루(4실 패). 0.243/0.305/0.410의 성적을 기록했다. 그리고 이런 성적을 기록한 ‘유격수’를 사용하는 데 500만 달러는 쓸만했다.
물론 그렇다고 동엽이 메이저 최고 수준의 유격수였다 뭐 그런 말은 절대 아니었다. 그 2년 동안 동엽보다 좋은 타격을 보여준 유격수는 18명이나 되고 그렇게 보자면 동엽은 딱 메이저 평균에 살짝 모자라는 선수였다.
평균보다도 못한 것을 성공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을까? 당연히 드물 것이다.
하지만 동엽은 타이밍을 맞출 줄 아는 남자였다. 그는 팀 옵션이 실행됐던 3년 차에 133경기에 출장하여 596타석 531타수 141안타 57볼넷 19홈런으로 0.266/0.336/0.460의 성적을 기록했다. wRC+가 무려 104. 유격수뿐만 아니라 메이저 전체를 통틀어서도 평균 이상의 공격력을 보여줬다는 의미다. 그보다 높은 타격을 기록한 유격수는 리그 전체를 통틀어서도 고작 다섯뿐.
본래 인생이란 타이밍이다. FA 직전 만들어낸 그 성적은 동엽에게 생각보다 큰돈을 안겨주었다. 볼티모어 오리올스와 4년 5,500만 달러. 그가 월드 시리즈에서 부러움에 가득 찬 눈으로 지켜봤던 루시 알베리와 비교했을 때 거의 2배에 달하는 거금이었다.
그리고 다시 2년.
동엽의 나이도 어느새 만으로 32세.
대부분 경우 만 27세부터 인간의 몸은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늙어간다. 그리고 이것을 보충하는 것이 기술적인 성숙이다. 그리하여 우하향하는 피지컬과 우상향하는 기술이 만나는 지점은 보통 만 30세. 그 전후로 3년. 27세부터 33세까지의 기간이 대부분 선수의 절정기다.
단단한 육체와 이제는 완성됐다는 표현이 어색하지 않은 기술.
이제는 베테랑이라는 표현이 어색하지 않은 박동엽이 오리올 파크 앳 캠든 야즈의 타석에 들어왔다.
[투아웃 주자 없는 상황. 볼티모어 오리올스의 6번 타자. 박동엽 선수가 타석에 들어옵니다.]
[직전 이닝 정말 대단한 수비를 보여줬었죠? 공격에서는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참 기대가 됩니다.]
[이 선수 같은 경우도 한 방이 있는 타자죠. 게다가 스타성이 있어요. 해야 할 때 뭔가를 해주거든요. 덕분에 항상 기대하게 됩니다.]
[그렇죠. 지난 5시즌 동안 볼티모어에서 뛰는 동안 홈런이 총 81개. 동판 역시 두 개나 새겼습니다.]
[그리고 그 두 개가 모두 결승타였다는 점이 이 선수의 스타성을 설명해주죠.]
메이저 6년 차.
이제는 마이너 강등 거부권을 손에 넣은 박동엽이 마운드의 투수를 노려봤다. 동양인답지 않게 풍성한 수염과 구레나룻 사이로 꾹 다문 입술이 그의 단단한 의지를 보여줬다.
최근 한참 상승세를 타고 있는 팀의 기세를 이어가겠다는 의지다.
초구.
-부웅!!
“스트라잌!!”
힘 있는 스윙.
제대로 맞으면 그대로 담장을 넘겨버릴 수 있는 힘이 느껴졌다.
동엽이 뛰는 볼티모어의 홈구장인 오리올 파크 앳 캠든 야즈는 특별한 전통이 있다. 캠든 야즈 우측 담장 너머에는 1905년에 지어진 B&O 웨어하우스라는 건물이 있는데, 그 사이의 길을 유타 스트리트라고 한다. 그리고 그 유타 스트리트로 떨어진 홈런은 그 자리에 팀과 선수 이름, 날짜 그리고 비거리가 새겨진 동판을 박아준다. 동엽은 지난 5년 동안 무려 2개의 동판을 그 거리에 박아넣었다.
두 번째.
-뻐엉!!
방망이가 반쯤 돌아갔지만, 심판의 손은 올라오지 않았다.
동엽이 가볍게 숨을 고르고 다시 타석에 섰다. 5년간 타율이 2할 6푼이 채 되지 못한다. 낮은 타율이다. 하지만 동엽에게는 그를 대신할 참을성 그리고 위협적인 힘과 그 힘을 활용할 수 있는 빠른 발이 있었다.
세 번째.
-부웅!!!
“스트라잌!!!”
까다롭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네 번째.
‘지금이다!!’
-딱!!
힘있게 돌아간 방망이가 야구공을 두들겼다. 손끝이 찌릿하다. 동엽의 발이 일루를 향하여 질주했다. 갈 수 있을까?
루시 알베리가 빠르게 달려 나와 공을 잡아냈다. 그리고 그대로 왼손 손목을 가볍게 튕겨 글러브 안의 공을 뽑았다. 수비 원 툴로 메이저에 버틴다는 평가를 듣는 유격수다운 깔끔한 처리다. 그리고 그대로 일루까지.
-뻐엉!!
“아웃!!”
젠장할.
동엽이 인상을 찌푸렸다.
역시 잘못된 선택이었다. 재계약을 하던 당시 그래, 이제 그 형도 한국 나이로 마흔인데 뭐 얼마나 더 해 먹겠어? 라고 생각했는데, 와 이걸 이렇게까지 꾸역꾸역 더 해 먹는다고?
공수 교대.
투수가 마운드에서 내려오면서 모자를 벗고 이마의 땀방울을 훔쳤다. 동엽을 상대하는 것이 힘들어서는 아니다. 그냥 날씨가 더운 탓이다.
오늘 경기 3타석 3타수 무안타 1삼진.
그리고 커리어 통산 56타석 52타수 5안타 0.096/0.107/0.115.
성민이 오늘도 자신의 몫을 완벽하게 해냈다.
***
아메리칸리그 동부지구.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구단인 뉴욕 양키스와 그 라이벌, 혹은 그 라이벌이라 주장하는 보스턴 레드삭스. 캐나다의 유일한 메이저리그 팀인 토론토 블루제이스와 스몰마켓의 기적 탬파베이 레이스.
볼티모어 오리올스는 그 사이에서 항상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신세였다. 탬파베이가 스몰마켓답게 40승이나 찍을 때는 4위. 혹은 3위. 가끔 미쳐 날뛸 때는 4위 혹은 5위. 그들이 지난 20년 동안 포스트시즌에 나간 것은 단 한 번뿐이었고 지구우승은 0회였다.
“하지만 올해는 다르지.”
40경기가 넘어간 상황에서 동부지구 1위.
물론 이러다가 시즌 막판에 DTD(내려갈 팀은 내려간다)를 시전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기는 했지만 그래도 정말 올해는 느낌이 달랐다. 유망주들이 일제히 터졌고, 지난 2000년 알버트 벨 이후 볼티모어 오리올스의 유구한 전통이었던 팀 내 최고 연봉자는 먹튀라는 공식도 깨졌다.
처음 그들의 단장이 만 29세의 투수에게 7년 2억3천만의 계약을 준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그들이 보였던 반응은 ‘아, 크데 치운 지 얼마나 됐다고 이걸 또 시작한다고?’였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 투수는 지난 2년 동안 그 돈값 이상을 했다. 에이징 커브를 감안하더라도 이대로라면 이 계약은 성공적인 FA 사례로 남을 가능성이 컸다.
맙소사. 볼티모어 오리올스에 고액 FA가 모범이라니.
그리고 그 볼티모어 오리올스의 최고연봉자. 맥스 슈피겐이 무알콜 맥주캔을 손에 쥔 채 고개를 저었다.
“아직 방심할 시기는 아니지. 너희들은 그 양반을 잘 몰라. 아, 아니다. 동엽, 너는 그래도 좀 알겠네.”
“내가 그를 잘 모르다니. 지난 7년이나 치가 떨리게 당했던 상대인데 내가 잘 모를 리가.”
“그러니까 네가 아는 그건 마운드에 선 선발투수 김성민이잖아.”
“어차피 내가 상대하는 건 그건데 그거 말고 또 알아야 할 게 뭐가 있다고. 그리고 설사 알았다고 하더라도 성민도 예전의 그가 아닌 건 확실한 사실이지. 보스턴이 예전의 보스턴이 아닌 것처럼 말이야.”
맥스 슈피겐은 지난 4년 차가 되던 해에 서비스 타임 이후 FA 기간 2년을 커버하는 5년 7천만짜리 계약에 사인했었다. 그리고 그 계약이 끝났을 때, 보스턴은 그에게 6년 1억 8천만의 계약서를 내밀었다. 나쁜 계약은 아니었다. 다만 시장에 7년 2억 3천만 달러를 들이미는 볼티모어 오리올스가 있었다는 점이 나빴을 뿐이다.
보스턴을 좋아하기는 했다. 무려 4개나 되는 반지를 끼게 해준 팀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겠지. 하지만 기간은 1년이 더 긴데 금액은 AVV는 오히려 더 높다? 이건 거절하기에는 너무 큰 금액이었다.
무엇보다 당시 맥스 슈피겐에 대한 시장의 평가는 6년 1억 8천만이면 후하게 쳐줬다는 평이었다. 하물며 QO로 픽 손해를 감수하는데도 7년 2억 3천만? 이건 그냥 볼티모어가 또 볼티모어 했다고밖에는 평가할 수 없는 액수였다.
“9년 전에 사람들이 그랬어. 보스턴 그 콩가루는 끝장이라고. 실제로 우린 압도적으로 꼴찌를 했었지. 그런데 그 직후 결과 기억나?”
“아니, 그거야 당시에 워낙 포텐셜이 높았던 선수들이 득실거렸잖아. 툭 건드리면 쾅 할 선수들 말이야. 너를 비롯해서 말이지.”
“그래, 그랬었지. 근데 그거 알아? 이 바닥에 널린 게 유망주고 걔들은 전부 툭 건드리면 쾅 하고 터질 선수들이라는 거? 중요한 건 쾅 하고 터질 가능성만이 아니야. 툭 하고 건드려주는 누군가지.”
“그게 성민이다?”
“전형적인 클럽하우스 리더는 아니야. 그건 오히려 에두아르도 쪽이 더 가깝지. 실제로 그가 은퇴하고 팀이 좀 흔들리는 거 보면 말이야. 물론 공을 던지는 성민은 경기를 지배하지.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성민은 마운드에 선 것보다 덕아웃에서, 그리고 라커룸에서, 경기장 밖에서 발휘하는 긍정적인 효과가 훨씬 큰 남자야. 하지만 공을 던지지 않는 성민은 시즌을 지배했어.”
“거참, 무슨 음모론 같은 이야기네.”
“아니, 나도 맥스 생각에는 동의해. 물론 마운드에서 발휘하는 영향력 이상이라는 말은 동의하기 힘들지만 말이야. 그 선배는 진짜 어휴······.”
“동엽, 그건 그냥 네가 성민을 상대로 워낙에 호ㄱ······.”
“그만. 거기까지. 나도 알고 있어. 사실이야!! 하지만 그 사실을 입 밖에 내는 건 용서할 수 없다!!”
맥스 슈피겐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고 말을 이어갔다.
“어쨌거나 중요한 건 올해가 우리에게 찾아온 최고의 기회라는 점이야. 잊지 마. 올해 우리가 우승하면 무려 60년 만이야. 그렇게만 되면 우리는 모두 볼티모어 오리올스에 전설로 남는 거라고.”
“거참 마음에 드는군. 전설이라.”
“나야 고향에서는 이미 전설이긴 하지만. 뭐 미국에서도 전설로 남는 거, 나쁘지 않겠어.”
***
“엄마, 이번에 우리 형아네 집에서 많이 많이 있는 거야?”
“그럼, 왜? 형 만난다니까 좋아?”
“응!! 아가들이랑 놀아줄꺼야!!”
형, 그리고 아가.
사실 조금 어색한 표현이기는 했다. 일곱 살짜리의 형이 만으로 마흔이고 아가라고 부르는 녀석 중 하나는 그와 고작 두 살밖에 차이 나지 않았으니까.
찰스 윌슨.
권 여사가 자신의 늦둥이 아들과 함께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 외전(7) > 끝
ⓒ 묘엽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