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클볼-129화 (130/287)

< 격동의 겨울(5) >

-존 맥도웰 새끼. 뇌 기능을 머리카락에 분산 해두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 그게 아니라면 머리카락이 날아간 이후로 보여주는 저 행보를 설명할 방법이 없어.-

-인정. 아니, 팀의 미래를 죄다 팔아치우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근데 팀의 미래를 죄다 팔아치운 건 아니잖아. 그래도 핵심 몇 명은 지킨 것 같던데.-

-멍청한 소리 한다. 우리 지금 아메리칸리그 꼴찌임. 동부지구 꼴찌도 아니고 아메리칸리그 전체 꼴찌. 빌어먹을. 당연히 현재의 전력을 팔아서 유망주 모으고 유망주 터지기를 기다려야지.-

-글세, 우리 전력이 그렇게 나빴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데. 그냥 부상이랑 여러 가지 불운이 겹쳐서 그런 거잖아. 유망주 솔직히 터질 만큼 터졌어. 지금은 2018년에 했던 것처럼 미래 자원까지 다 팔아서라도 들이댈 시점이라고 본다.-

이번 겨울.

보스턴의 행보에 대한 보스턴 팬들의 여론은 그리 좋지 못했다. 당연한 일이다. 본래 사람은 손해에는 민감하고 이득에는 둔감하다.

A급 유망주가 A급 선수가 될 확률이 반반이라고 할 때, 그 유망주로 B급 선수를 사 오면 다들 미래의 A급 선수를 내주고 B급 선수를 사오는 멍청한 거래를 했다고 생각한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B급 선수를 내주고 A급 유망주를 사오면 쫄딱 망할지도 모르는 자원을 B급 선수를 내주고 사 왔다고 비난한다.

존 맥도웰 단장은 애초에 보스턴의 여론 따위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극성맞은 보스턴의 언론과 여론을 신경 써서는 보스턴 레드삭스의 단장이 될 수 없다.

지금으로부터 약 3주일 전.

“우리는 내년에 달릴 거야. 가용한 자원을 다 써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갑작스럽게 머리를 빡빡 밀고 나타난 존 맥도웰의 선언에 전력분석팀장이 화들짝 놀라 답했다.

“네? 단장님. 농담이시죠? 우리 팀 올해 성적 아시잖아요. 64승 98패입니다. 아메리칸리그 꼴찌. 승률이 4할이 채 안 된다고요.”

“나도 잘 알아. 3할 9푼 5리.”

“그걸 아시면서 대체 무슨 생각으로 달린다고 하시는 거예요. 내년에는 일단 팀을 정비하고 기존의 계약들을 좀 잘 처리하면서······”

존 맥도웰이 전력분석팀장의 말을 막았다.

“우리 전력은 지금도 충분히 강력해.”

“아니, 단장님 저희 64승 98패라니까요.”

“물론 승패만 보면 그렇지. 하지만 개별적인 기록들을 좀 보자고.”

“그 개별적인 기록들을 봐도 특별히 눈에 띄는 게 없는데요.”

이번 시즌 보스턴 레드삭스의 팀 스탯은 어떤 식으로 해석해도 엉망이었다. 개별적인 기록이고 뭐고 볼 필요가 없을 수준이다. 기본적인 클래식 스탯은 물론이거니와 널리 알려진 가공 스탯. 그리고 보스턴에서 개발해서 쓰는 자체 수식까지.

그리고 거기서 존 맥도웰이 몇 가지 숫자를 지웠다.

“어?”

숫자가 상당히 바뀌었다. 뭐, 워낙에 압도적인 꼴찌였던지라 크게 바뀌지는 않았다. 하지만 분명히 의미가 있어 보이는 수치였다.

“이게 뭐죠?”

“난 그냥 좋은 선수만 모아서 가져다 주면 알아서 되겠거니 하고 생각했어. 하지만 그게 아닌 것 같더라고.”

“이건 어떻게 발견하신 겁니까?”

“그냥 뭐 들려오는 소문도 있고, 그래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좀 건드려봤더니 나온 거야.”

존 맥도웰이 지운 것은 몇몇 선수가 함께 출장한 경기들의 기록이었다.

놀랍게도 그것만으로도 숫자가 상당히 긍정적으로 바뀐다. 즉, 그들은 함께 출장했을 때 자신들의 평균적인 실력보다 못한 성적을 꾸준하게 기록했다는 의미다.

“태업입니까?”

“아니, 그래도 그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하고 싶군. 게다가 자세히 보면 이쪽에 베테랑들도 조금씩 안 좋아지잖아. 그냥 감정에 휘둘리는 게 아닐까? 야구는 멘탈 스포츠고 감정이 격해진 상황에선 흔들릴 수 있으니 말이야.”

“글쎄요, 뭐가 어찌 됐건 변명의 여지가 없는 워크에씩 문제인 것 같긴 합니다만, 이건 확실히 심각하군요. 팀 내 알력이 성적에 영향을 줄 정도라뇨.”

잠시 고민하던 전력분석팀장이 존 맥도웰에게 말했다.

“그래서 이 문제아 녀석들을 싹 내보내고 즉전감으로만 해서 내년 시즌 전력을 꾸리시겠다는 거군요. 어차피 마이너에 모아둔 유망주들도 상당하니, 그 녀석들이 크는 것도 지켜볼 수 있고요.”

존 맥도웰이 답했다.

***

“일단 그런 멍청한 생각을 하지 않았다는 부분은 마음에 듭니다. 하지만 그건 보스턴이라는 팀이 아주 노답은 아니구나. 그래도 나름의 계획은 있구나에 불과하잖습니까. 계획은 어느 팀이나 다 있습니다. 아, 미안합니다. 생각해보니 다저스는 딱히 계획이 필요 없군요. 그런 거 없어도 충분히 우승할 수 있는 팀이니까요.”

성민의 작은 도발에도 존 맥도웰은 흔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 계획만으로도 성민 선수에게는 꽤 좋은 조건 아닌가요?”

“뭐가요? 엉망진창인 애송이들 내버려 두고 적당한 유망주에 베테랑 끼워서 다른 선수들 수급해오겠다는 계획이요? 뭐 보스턴이라는 팀 입장에서 보면 영리한 선택이긴 하죠.”

필 니크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이런 쪽으로 머리를 굴리는 놈들은 다르기는 다르구나. 보통이라면 당연히 문제를 일으킨 놈들을 내쫓는 쪽으로 생각을 할 텐데 말이다. 그런데 성민아, 넌 왜 선수인데 머리가 그렇게 돌아가는 거냐?

‘아니, 보통 사람들은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니까요. 영감님이 너무 운동만 해서 순진한 겁니다. 요즘 사람들이 얼마나 영악한데요.’

-아닌 것 같은데······.

놀랍게도 존 맥도웰의 선택은 감정적인 문제를 일으켰음에도 성적 하락의 폭이 크지 않았던 FA로 영입한 베테랑들을 연봉보조까지 해 줘가면서 판매하는 쪽이었다. 필 니크로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는 선택이었다. 아니 잘못을 한 쪽은 감정에 휘둘려 성적이 엉망이 된 어린 선수들인데 어째서 자신을 잘 추스른 베테랑들을 내보낸다는 것일까? 잘잘못을 떠난다고 해도 그런 것에 휘둘리지 않는 선수 쪽이 당연히 더 좋은 선수가 아닐까?

그에 대한 성민의 답은 간단했다.

프런트는 잘잘못을 따져 상과 벌을 주는 선생님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민의 말은 옳았다. FA로 영입된 베테랑들의 몸값은 그리 떨어지지 않았다. 그들의 성적은 예상했던 만큼 나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망주들은 다르다. 그들의 이번 시즌 성적은 노이즈가 낀 저평가된 값이다. 그리고 그 노이즈를 제거하는 방법도 간단하다. 그렇다면 그들을 매물로 내놓는 것은 어리석은 선택이다.

만약 성민이 존 맥도웰의 자리에 있었다고 해도 존 맥도웰과 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다. 성민이 마음속으로 저 대머리 남자는 제법 쓸만한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12월의 서늘한 날씨.

손수건으로 땀을 다 닦아냈음에도 두피에 새로운 땀방울이 맺힌 존 맥도웰이 자신들의 계획이 왜 성민에게 좋은지를 어필했다.

“성민 선수, 메이저는 제법 빡빡한 위계질서로 돌아간다고 알고 있습니다. 다저스 역시 마찬가지죠. 물론 성민 선수는 KBO에서 11년을 뛴 베테랑인 만큼 완전 루키 취급을 받지는 않는다고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11년을 뛴 베테랑 취급을 받지는 못하죠. 하지만 저희 팀은 다릅니다. 이번에 저희 계획대로 팀이 리빌딩 된다면, 성민 선수는 팀 내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될 겁니다. 프런트에서도 실제로 그렇게 대우를 할 생각이고요. 물론 다저스는 좋은 성적을 내기 쉬운 팀입니다. 하지만 저희 팀의 비전 역시 거기에 뒤지지 않고, 실제로 경기를 뛸 때 환경은 다저스보다 오히려 더 좋을 겁니다.”

성민이 고개를 저었다.

긴 이야기였지만 이번에도 역시 헛다리다. 지금 존 맥도웰이 했던 이야기는 굳이 그가 말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알 수 있는 내용이었다.

성민의 고갯짓에 존 맥도웰이 다시 한번 긴장했다.

“자, 잠깐만요!! 그러니까······”

“단장님, 저는 회사를 다녀본 적이 없지만, 그래도 건너 듣기로 보통 직장인들이 직장을 정할 때는 참 많은 걸 고민한다고 합니다. 직장의 비전? 중요하죠. 누가 매년 적자나 내는 회사에 다니고 싶어 하겠습니까. 사내 복지? 어휴 이것도 엄청 중요하죠. 제 친구가 그러는데 회사 밥이 맛있어서 회사 다닐 맛이 난다고 하더군요. 회사의 분위기도 중요할 겁니다. 팀에 꼰대 같은 상사가 있으면 괴로운 일이고 멍청한 후배가 있으면 그건 더 괴로운 일이죠. 그런데 말입니다. 직장을 구할 때는 그런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훨씬 중요한 일이 있잖습니까.”

성민의 긴 이야기를 멍한 표정으로 듣던 필 니크로가 물었다.

-그런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훨씬 중요한 일? 그런 게 있어?

다행스럽게도 존 맥도웰의 반응은 필 니크로와 달랐다.

“물론 그 부분 역시 당연히 생각해둔 것이 있습니다. 저희가 최초 제시했던 오퍼가 6년 1억1천만이었죠.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조건 면에서는 저희가 월등했었다고 생각하기에 당시 다저스를 선택하셨던 일에는 크게 놀랐었습니다.”

“뭐,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죠.”

존 맥도웰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시에는 성민의 선택을 어리석은 선택이라고 보는 사람들도 많았다. 6년 1억1천만과 3년 6,600만은 분명 큰 차이였으니까.

하지만 1년이 지나 결과가 나온 지금. 당시 성민의 선택을 어리석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결론적으로 그는 콩가루 팀을 피해 우승 반지를 손에 넣었고, 동시에 사이 영 상 2위를 통해 본인의 기량을 보여줌으로써 3년 계약 이후 더 큰 계약이 가능함을 증명했다.

“만약 트레이드 거부를 풀고 저희 팀에 와주신다면 당연히 연장계약을 제시할 생각입니다. 금액적인 부분도 충분히 만족할만한 수준이 될 거로 생각합니다.”

“흐음, 지금 그 말씀은 저랑 더 이상 이야기하기 싫다는 뜻인가요?”

존 맥도웰의 애매모호한 이야기에 성민이 인상을 찌푸렸다. 지금 칼자루를 손에 쥔 것은 성민이었다. 그리고 지금 성민이 원하는 대답은 만족할만한 수준이 될 거라는 애매모호한 소리가 아니다. 성민이 자리에서 일어날 것처럼 소파 팔걸이에 손을 얹었다.

존 맥도웰이 성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설마요. 그런 의미가 절대 아닙니다.”

“그런 의미가 아니라면. 그리고 미리 말씀하셨던 것처럼 저를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신다면 그에 상응하는 증거를 보여주셔야 하지 않을까요? 어린애 소꿉장난도 아니고 말이죠.”

“기존 계약 이후에 6년의 연장계약을 제시하겠습니다. 총액 기준으로 6년 2억4천만. 30대 중반 투수를 기준으로는 역대 최고액입니다. 아니, 모든 선수의 계약을 통틀어봐도 이보다 AVV가 높은 경우는 드물 겁니다.”

성민이 기존 계약이 끝나는 나이는 만으로 32세 시즌이다. 만 33세 시즌부터 38세 시즌을 커버하는 6년 2억 4천만. 과거 잭 그레인키의 경우 32세 시즌부터 37세 시즌까지 2억 650만 달러를 받았다. 30대 중반에 접어드는 투수에게 이만한 금액을 건넨 계약은 2033년인 지금까지도 그가 유일하다.

정확히 똑같지는 않지만, 시간의 흐름에 따른 물가 인상, 그리고 성민의 나이가 한 살 더 많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보스턴은 지금 거의 잭 그레인키 수준의 계약을 성민에게 제시하는 셈이다.

-미쳤군.

메이저에서 11시즌을 뛰며 자신의 기량을 증명했던 사이 영 위너와 비슷한 수준의 대우라니. 심지어 당시 잭 그레인키 역시 터무니 없는 오버페이라는 평가를 받았었다.

존 맥도웰이 주먹을 꾹 쥐었다.

‘실수다.’

협상의 기본은 주고받는 것이다. 아무리 지금 성민이 유리한 위치라고 해도 그것은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분위기 때문일까? 실수를 해버렸다. 제시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조건을 그냥 내밀어버리다니.

하지만 그래도 한 가지 정도는 좋은 소식이 있긴 했다.

“그러면 잘 부탁드립니다. 단장님.”

시종일관 고압적인 자세로 소파에 몸을 파묻고 있던 성민이 앞으로 쑥 다가와 빵긋 웃으며 오른손을 내밀었다.

< 격동의 겨울(5) > 끝

ⓒ 묘엽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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