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클볼-124화 (125/287)

< 상류 사회(4) >

처음에는 가볍게 몸을 흔들면서 사람들의 춤을 지켜봤다.

물론 운동선수는 몸을 쓰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두가 춤을 잘 추는 것은 아니다. 애초에 춤에 필요한 신체 능력과 운동을 하는데 필요한 신체 능력은 달랐으니까. 게다가 춤 역시 제법 복잡한 동작이고, 그만한 연습이 필요하다.

-어?

성민의 몸이 리듬에 맞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춤을 추는데 필요한 운동능력은 크게 협응력과 균형 그리고 유연성을 들 수 있다. 하나같이 투수에게 가장 필요한 재능들이다. 그리고 성민은 유령이 공인한 세계에서 가장 재능이 넘치는 투수 중 하나였다.

무엇보다 성민은 춤이 처음이 아니었다. 한참 잘나가던 시절 마음 맞는 동료들과 클럽에서 춤추다가 걸려서 언론도 몇 번 탔던 남자다.

지금 저들이 추는 동작은 생소했지만, 따라 하는 것이 어렵지는 않았다. 그저 처음 잡아보는 그립으로 변화구를 던지는 느낌으로 가볍게 툭툭. 그리고 동작이 익숙해지는 순간부터는 조금 더 과감하게.

같은 동작이더라도 느낌이 달랐다.

큰 키와 긴 팔다리. 쭉쭉 뻗는 동작에 힘이 넘친다.

-너 뭐냐?

사람은 대체 어떤 춤을 보고 잘 추는 춤이라 느끼느냐에 관한 논문이 있다. 무려 네이처지에 실린 논문이다. 모든 쓸모없는 논문이 그렇듯 이번에도 역시 영국 대학 연구팀의 연구 결과물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사람은 춤을 추는 사람의 몸이 각 부위를 독립적, 그리고 비대칭적으로 움직일 때, 그리고 그 동작이 다양하고 과장되며 약간씩 어긋나게 움직일 때 춤을 잘 춘다고 느낀다.

그리고 성민은 그 설명에 딱 맞는 춤꾼이었다.

마찬가지로 쓸모없는 그 연구 결과 가운데, 댄서의 신체 중 어디에 더 끌리는지를 묻는 조사가 있었다. 이때 남자의 경우는 팔의 움직임에, 여자의 경우는 다리의 움직임에 더 끌리는 경향을 보였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성민은 완벽했다. 그의 스텝에는 남들과는 다른 무언가가 있었다. 분명 동작만 본다면 스테이지에서 춤을 추는 사람들과 같은 스텝이다.

하지만 달랐다. 1/32박? 아니 1/64박? 그 알 수 없는 미세하게 당겨서 들어오는 박자감이 성민의 춤을 더 돋보이게 했다.

그것은 마치 합창단을 뒤에 둔 솔리스트가 노래를 부를 때, 분명 같은 음계이지만 홀로 미묘하게 높은 피치의 납작한 소리를 냄으로써 30명의 합창 가운데 자신의 소리를 분명하게 드러내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처음에는 성민의 주변에서 춤을 추던 사람들이, 그리고 점차 ‘쟤들 왜 저쪽을 보고 춤을 추는 거야?’ 하는 궁금증에 합류하는 사람들까지. 하나, 둘. 춤을 추던 사람들의 시선이 성민에게 모여들었다.

무대 위에서 디제잉을 하던 이바 타일러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제법인데?’

커다란 키. 어두운 조명 탓에 순간 댄서인가? 하는 생각을 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고 하기에는 몸이 너무 두툼하다.

운동선수다.

하체만 두껍고 상체는 빈약한 축구 선수는 절대 아니고, 격투기 선수라고 하기에는 승모근이 너무 부실하다. 미식축구? 하지만 미식축구선수 중에서 동양인이라면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는데.

아!! 동양인. 그 순간 이바 타일러는 현재 LA에서 가장 유명한 동양인 운동선수를 떠올릴 수 있었다.

‘분명 김이었는데. 이름이 뭐였더라.’

잘 기억은 나지 않았다. 뭐 괜찮다. 그리 중요한 일은 아니니까. 성민으로 인해 스테이지의 분위기가 훨씬 달아올랐다. 사람들의 동작이 시원시원하게 뻗어나간다. 모두가 음악을 즐기는 분위기다.

사실 이런 파티는 많은 돈을 받을 수 있고, 본인의 인지도도 높일 수 있는 기회이기는 하지만 이바 타일러 스타일은 아니었다. 그녀가 좋아하는 것은 역시 라스베가스의 클럽에서 즐기는 디제잉이다. 모든 사람이 미쳐 날뛰는 파티.

그에 비하자면 여긴 너무 얌전하다.

음악이 바뀐다. 박자도 바뀐다.

110비트짜리 곡에서 70비트로.

박자 감각이 부족한 사람들은 여기서 당황할 수 있다. 하지만 성민은 달랐다. 그의 춤이 느려지는 대신 더 격렬하게 바뀐다. 중간중간 커다란 동작에서는 박자를 통으로 다 사용했다. 머릿속으로 계산한 동작이 아니다. 본능적인 움직임이다.

이미 스테이지의 중심은 성민이었다.

스테이지 바깥, 칵테일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던 사람들도 이제는 성민을 지켜봤다. 프로들의 무대도 충분히 지켜봤던 사람들이다.

“훌륭하네요.”

“마빈 당신이 보기에도 그런가요?”

“제대로 배운 것 같지는 않은데 재능이 있어요. 본능적으로 박자를 가지고 노는군요. 유연성이랑 균형도 괜찮고요. 본격적으로 춤을 가르쳐볼 만한 자질이 있는 친구 같네요.”

이제는 나이를 먹어 무대에 서기보다는 강단에 서는 것이 더 어울리는 장년의 댄서가 성민을 평가했다. 평소 그에게 듣는 이야기라고는 멍청이, 머저리, 당장 때려치우고 고향의 끈적이는 스트립클럽에서 랩댄스나 추라는 폭언밖에 없는 그의 학생들이 들었다면 기겁할 만큼 대단한 칭찬이었다.

하지만 그와 대화를 나누던 여자는 그 칭찬에 만족하지 않았다.

“글쎄요, 내가 보기엔 그냥 그 정도가 아닌 것 같은데요?”

“리듬감도 좋고 동작도 시원하지만, 동작과 동작 간에 밸런스가 맞지 않아요. 그야말로 즉석에서 추는 춤이죠. 당장 제 부족한 제자놈들도 춤 자체로만 보면 저만큼은 할 겁니다. 다만······”

“다만?”

“춤도 춤이지만 그냥 저 사람 본연의 기묘한 매력이 있군요. 나 정도 되는 사람이 아니면 저기서 주의를 뺏어오기는 쉽지 않을 것 같아요. 물론 이젠 늙어서 그럴 기력도 없긴 하지만 말이죠.”

“와우.”

한바탕 춤사위를 끝낸 성민이 자신에게 시선이 몰린 것을 느꼈다. 종종 시내의 클럽에서 느꼈던 바로 그 시선이다.

-뭐야? 너 춤을 왜 이렇게 잘 추는 거야? 대체 너 정체가 뭐냐? 왜 야구만 못 해?

‘저 사이 영 컨텐더거든요? 야구를 못 하기는 뭘 못 합니까.’

-아니, 그거야 나를 만난 덕분에 하는 거고. 대체 너 왜 야구를 했던거냐?

‘저 KBO 신인왕에 메이저에서도 러브콜 오는 기대주였거든요?’

-그리고 쫄딱 망해서 사업이나 하라는 소리 듣던 노망주였지.

‘그 정도는 아니었거든요? 구속만 되찾았어도 지금만큼은 아니더라도 FA 대박 충분히 가능했을 거라고요.’

-대신 마린스 우승은 없었겠지.

‘뭐 그건 그렇죠. 솔직히 마린스 우승은 사람의 힘으로 가능한 건 아니었으니까요.’

성민의 쿨한 인정에 필 니크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봐, 춤 좀 추던데?”

“어디서 온 거야? 아시아 쪽 가수인가? 아니면 배우? 미국 진출이라도 하는 거야? 이 파티는 누구랑 온 거야?”

“멍청아. 성민이잖아.”

“성민? 그게 누군데?”

“LA다저스의 선발투수.”

“엥? 야구 선수라고? 무슨 야구 선수가 이렇게 춤을 잘 춰?”

스테이지에서 잠시 벗어나 테이블에 놓인 생수병을 집어 들었다. 사람들이 그런 성민을 바라보며 수군거렸다.

“내가 한 번 가서 말 걸어볼까? 같이 놀자고?”

“JJ 네가? 괜찮겠어?”

“괜찮겠냐니. 나 JJ야. 거시기 똑바로 달린 녀석이라면 내 권유를 무시할 수가 없지.”

“하긴, 네가 속은 그 모양이라도 껍데기는 꽤 그럴싸하지.”

필 니크로가 성민에게 물었다.

-그런데 말이다. 네가 춤을 잘 추는 건 알겠는데. 대체 여기서 춤은 왜 춘거냐? 인지도를 올리는 건 파티에 참가하는 걸로 충분했을 텐데, 차라리 저기 우아하게 서있는 사람들과 교분을 나누는 편이 더 좋지 않았을까? 애초에 야구의 주 시청자들, 그리고 투표권을 가진 기자들에게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사람은 저 사람들 아니더냐.

‘그건 그렇죠.’

-그러면 대체 왜?

‘영감님이 그랬잖아요. 너클볼로 세계에 우뚝 서는 투수가 되어달라고.’

-그랬지.

‘뭐, 솔직히 제가 영감님 말 꼭 들어줘야 하는 강제 계약 같은 건 없었지만, 그래도 영감님은 제 소원 들어주셨잖아요.’

-소원? FA 대박?

성민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소원이랄 것도 없었죠. 솔직히 말해서 재활만 똑바로 했어도 뭐 지금처럼 1년에 250억씩 버는 터무니 없는 수준은 아니겠지만, 평생 먹고 살기 부족함 없는 FA는 가능했을겁니다. 제가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은 소원이 아니죠.’

-그러면 설마?

‘네, 마린스 우승이요. 그건 아시안게임 나가던 당시 전성기의 제가 돌아와도 절대 이룰 수 없는 꿈이었어요. 올해 제가 빠진 마린스가 거둔 성적만 봐도 확연하죠. 영감님 덕분이었습니다.’

성민의 담담한 인정에 필 니크로가 살짝 놀랐다. 매일같이 티격태격거리기만 하던 녀석이 너무 진지하다. 적응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저도 영감님 소원을 들어드리고 싶었어요.’

-그래, 그것 참 고맙구나. 그런데 말이다.

‘네?’

-대체 세계에 우뚝 서는 투수랑 여기서 춤을 춘 거랑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이냐?

성민이 답했다.

‘그냥 메이저리그 최고의 투수도 아니고,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 투수도 아니고 세계에 우뚝 서는 투수라면서요.’

-그래, 분명 그랬지. 근데 그게 뭐가 다를까?

‘메이저리그 최고의 투수는 그냥 사이 영을 받으면 그 해 메이저리그 최고의 투수고,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 투수는 한 10년 꾸준히 사이 영 컨텐더로 뛰면서 사이 영 두세 개 정도 받아주고 이번처럼 월시 우승도 해주면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 투수죠.’

-그렇지.

‘근데 그거 해봐야 월드클래스 운동선수 못 되잖아요.’

-응?

‘야구에서 마지막 월드클래스급 선수는 마크 맥과이어잖아요. 뭐, 좀 후하게 쳐주면 데릭 지터나 강진호도 월드클래스급 선수라고 할 수 있겠네요.’

-응?

필 니크로는 지금 성민이 하는 이야기를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야구 자체가 로컬스포츠잖아요. 애초에 미국으로만 따져도 야구만 해서는 전국구가 되기 힘든데 월드클래스는 어휴. 야구 백날천날 잘해봐야 무리죠.’

-잠깐, 잠깐만. 그러니까 지금 네 말은?

‘답은 한 가지뿐입니다. 김성민 하면 아, 그 야구 선수? 가 되는 게 아니라. 야구!! 하면 아 그 김성민이 하는 운동? 이 돼야죠. 그러니까 굳이 따지자면 농구보다 유명한 농구선수인 마이클 조던처럼?’

-이런, 미친!!

그야말로 상상조차 해보지 못한 원대한 스케일이다.

-대체 그런 이야기를 왜 이제야 하는 거냐!! 미국에 오기 전에 했어야지 그런 건.

‘아니, 뭐 그때는 미국에서 내가 제대로 할 수 있을지도 미지수였는데 정작 미국에 와 보니까 메이저리그 야구도 별거 아니기도 하고. 마린스에서 우승한 일이 정말 대단한 일이었다는 건 새삼 와닿고. 그래서 겸사겸사 영감님 소원도 제대로 이뤄줘야겠다 생각을 한 거죠.’

비록 뇌혈관은 없지만 현기증이 날만큼 아득한 헛소리에 필 니크로가 뒷목을 잡았다. 그런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거 분명 헛소리인데 그러니까 헛소리 맞는데 대체 왜 우스갯소리가 아니라 이렇게 현실감 있는 포부로 들리는 것일까?

-후, 그래. 알겠다. 알겠는데. 그래서 그 월드클래스 선수가 되는 거랑 여기서 춤을 춘 게 대체 무슨 상관이냐.

‘유명해져야죠.’

-유명해진다고? 아니, 잠깐만. 그래 유명해져야 한다고 치자. 그런데 여기서 춤을 춘 것만으로 유명해지겠다고? 어차피 본 사람도 몇 없는데? 기자들이야 몇 있기는 하지만, 야구 선수가 춤 좀 췄다고 기사를 내보내주진 않을 거 아니냐.

‘어휴, 영감님. 하여간 구세대라니까. 유명해지기 위한 가장 쉬운 길이 뭔지 아세요?’

-가장 쉬운 길이라니?

‘이미 유명한 사람들과 친해진다.’

-어?

예쁘게 태닝된 구릿빛 피부에 염색한 것이 분명한 진한 금발. 시원시원한 이목구비를 가진 전형적인 백인 미녀가 성민에게 다가왔다.

“이봐요. 우리 잠깐 저기 풀에서 놀껀데 같이 가지 않을래요?”

최근 ABC 인기 시트콤의 여섯 번째 시즌에 레귤러 조연으로 합류한 조이 제임슨이었다.

< 상류 사회(4) > 끝

ⓒ 묘엽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