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클볼-123화 (124/287)

< 상류 사회(3) >

파티에 가기 위해서는 제법 많은 준비가 필요했다.

우선 정장.

성민이 엘렌 바크만을 통해 초대받은 파티는 비교적 젊은 분위기의 파티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파티는 파티다. 청바지에 티셔츠를 입고 갈 수는 없었다.

정장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흐음, 이건 좀 아니네요.”

-왜? 내가 보기에는 괜찮은데? 그거 작년에 샀던 옷 아니야?

“체형이 너무 변했어요.”

지난 1년.

성민의 몸은 조금씩 변했다. 필연적인 일이었다. 강속구를 던지는데 필요한 근육과 좋은 너클볼을 던지는데 필요한 근육은 다르다. 꾸준히 단련했지만, 하체의 근육은 조금 빠졌고, 상체에는 근육이 조금 더 붙었다.

-하긴, 이제 제법 너클볼 투수다운 몸이 되긴 했지. 하지만 그래도 그 정도는 괜찮은 것 같은데.

“뭐, 그냥 입고 다니기에는 나쁘지 않죠. 하지만 이거 파티잖아요.”

-그게 뭐? 파티가 뭐 어때서?

“어휴, 영감님. 이거 그냥 동네 친구들 불러서 나쵸에 맥주 마시는 그런 파티가 아니라 LA에서 열리는 셀럽들의 파티라고요. 앞에 기자들 막 엄청 대기하고, 레드 카펫 깔려있고 파티장 입장하기 전에 사진도 찍어줘야 하는 그런 파티요.”

-레드 카펫? 무슨 영화제야?

“이 동네 파티는 원래 좀 그렇답니다. 그래서 입장 시간도 철저하게 지켜야 한대요. 그래야 동선 안 겹치게 레드 카펫에서 사진 찍고 들어갈 수 있다네요.”

정장을 구매하기 위해 찾은 테일러샵.

“시간상 비스포크는 조금 어려울 것 같고, 수미주라로 하시죠. 몸이 조금 특별하시긴 합니다만 그래도 패턴 내에서 가능할 것 같습니다.”

완전한 맞춤까지는 시간상 무리가 있지만, 테일러샵에서 미리 준비해둔 패턴의 정장은 시간 내로 가능하다는 이야기였다. 옆에서 필 니크로가 어느 옷이 좋고, 어느 옷이 안 좋다느니 이러쿵저러쿵 종알거렸지만 철저하게 무시했다.

“이걸로 부탁하죠.”

“탁월하신 선택입니다. 아무래도 이런 느낌의 원단이 조금 더 캐쥬얼한 느낌을 주죠. 게다가 V존이 깊은 투 버튼 싱글 재킷은 고객님의 넓은 어깨를 강조하고, 허리를 조금 더 잘록해 보이도록 만들어줄 겁니다. 그 뿐만이 아니죠······.”

“계산은 이걸로.”

쉴새 없이 떠들어대는 직원의 입을 카드로 막았다. 뭐 굳이 그 직원의 설명이 아니더라도 성민 본인도 이 옷이 자신의 장점을 극대화하고 단점을 최대한 감출 수 있는 옷이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파티 당일 6시 45분.

에이전시에서 미리 준비시킨 리무진이 성민의 집 앞으로 찾아왔다. 중후한 인상의 기사가 운전석에서 내려 문을 열어주었다. 이런 서비스를 받아보는 것이 처음이라 조금 어색했지만, 최대한 자연스럽게 자리에 앉았다.

넓은 리무진 안에는 가벼운 주전부리들부터 각종 음료 그리고 술까지 모든 것이 구비되어있었다. 물론 입에 들어가는 모든 것에 간섭하는 귀신이 눈에 불을 켜고 있는 상황에서 그런 것을 건드릴 생각은 눈꼽만큼도 없었다.

리무진의 운전기사가 익숙한 솜씨로 LA의 거리를 누볐다.

우선은 오늘 성민의 파트너인 엘렌 바크만의 집이 위치한 비벌리힐스부터.

“와우, 이렇게 보니까 더 근사한데요?”

“엘렌도 오늘 훨씬 더 아름다우시네요.”

성민이 예의를 갖춰 그녀를 칭찬했다. 물론 화려한 드레스로도 막을 수 없는 세월의 흐름이 느껴졌지만, 어머니 또래의 사람이라고 생각하니 저 정도면 곱게 늙었구나 하는 마음 정도는 들었다.

성민과 엘렌 바크만이 초대받은 시간은 8시 20분. 이런 파티의 경우 레드카펫에서 사진을 찍혀줘야 하는 것이 셀럽들의 숙명인 만큼 초대 시간에 약간의 텀을 두는 것이 관례다. 그렇기에 정확한 시간을 맞추는 것은 필수였다.

LA의 혼잡한 교통에도 불구하고 리무진이 파티 장소에 도착한 시간은 정확히 8시 19분.

프로다운 솜씨였다.

성민이 기사에게 약간의 팁을 건넸다. 이번에는 굳이 리무진 기사가 차 문을 열어줄 필요는 없었다. 파티가 열리는 호텔의 직원들이 카펫이 깔린 입구에서 차문을 열어주었다.

파티 장소의 길 건너부터 가드들이 막고 있는 라인 밖으로는 초대받지 못한 기자들과 수많은 파파라치. 한 번이라도 셀럽의 얼굴을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카메라를 들고 몰려있었다.

차에서 내리는 그 순간부터 번쩍번쩍 터지는 프래시 세례. 그 속에서 성민은 우아하게 엘렌 바크만을 에스코트한 채로 레드 카펫을 걸었다.

‘천천히, 옆에 환호하는 사람들이랑 눈도 좀 맞춰주고. 여기선 자연스럽게 포즈를 조금 취해줘야 해요. 이왕 예쁘게 입고 나왔는데 사진도 좀 찍혀줘야죠.’

‘네.’

자신 있는 일이었다.

최대한 멋진 미소. 그리고 자연스러운 포즈. 하지만 동시에 조금 어색한 일이기도 했다.

보통 이런 자리에서 성민은 주인공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이 자리의 주인공은 성민이 아닌 엘렌 바크만이었다.

“저 남자는 누구야? 웬 동양인? 엘렌의 새 남자친구인가?”

“글쎄, 굉장히 어려 보이는데? 근데 덩치는 또 죽여주네? 운동선수인가?”

“멍청이들아. 저거 성민이잖아. 이번에 다저스에서 퍼펙트를 했던 투수. 같이 다저스 경기를 몇 번을 갔는데 그걸 몰라보냐.”

“어? 저 친구가 그 친구야? 모자 벗고 저렇게 있으니까 사람이 완전히 달라 보이는데?”

성민 역시 LA에서는 상당히 인지도 높았던 인물인 만큼 알아보는 사람들은 제법 있었지만, 애초에 여기 모인 사람 대부분이 연예인, 그리고 SNS에 유명한 셀럽들을 보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었다.

무엇보다 성민과 함께 걷는 엘렌 바크만은 그 중에서도 거의 최고 수준의 유명세를 자랑하는 인물이다. 대단한 활약을 보이기는 했지만, 이제 고작 메이저 1년 차에 불과한 성민이 따라잡기에는 아직 많이 부족했다.

“성민!! 여기에요. 이쪽을 봐줘요.”

“멋있어요!!”

그나마 성민의 SNS 담당자인 토니 이시카와가 열심히 일을 해준 덕분에 소수이지만 성민을 보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 역시 존재했다.

성민이 그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렇게 약 3, 4분. 마지막으로 파티장의 문 앞에서 엘렌과 팔짱을 낀 사진을 찍혀준 뒤 입구를 지키는 가드들이 열어준 문 안으로 쏙 들어갔다.

파티가 열리는 호텔의 내부.

고풍스럽고 화려한 샹들리에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이제는 촛불도 사용하지 않는 시대. LED 조명이 주렁주렁 달린 샹들리에라니. 참으로 비효율의 극치다.

하지만 그 비효율이야말로 이런 파티를 즐기는 사람들이 누리는 특권이었다.

홀에는 먼저 들어온 몇몇 사람들, 그리고 호텔의 직원들이 서 있었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 30대 초반 즈음 됐을까? 몸에 쫙 달라붙는 빨간 드레스와 그 드레스에 뒤지지 않는 화려한 미모의 여성이 팔짱을 낀 성민과 엘렌에게 다가왔다.

“엘렌 어서 와요.”

“세레나!! 와우, 오늘 너무 예쁜데?”

“엘렌도 언제나처럼 예쁘네요. 그나저나 이쪽 신사분은? 남자친구?”

“성민. 남자친구는 아니고, 이번에 LA 다저스 우승의 1등 공신이야. 아직 LA 사교계에 친한 사람이 없다고 하길래 내가 냉큼 선점해서 데리고 왔지.”

“아!! 성민. 다저스의 선발투수 맞죠? 저도 경기 몇 번 보러 갔었는데. 이렇게 보니까 몰라보겠네요. 보디빌더 출신의 배우 지망생 같은 건 줄 알았어요. 세레나 스탠이라고 해요. 오늘 파티의 주최자죠.”

“반갑습니다. 미스 스탠. 전 김성민이라고 합니다.”

“어머, 미스 스탠이라뇨. 딱딱하기는. 그냥 세레나라고 불러줘요.”

세레나가 기분 좋게 웃으며 성민의 어깨를 툭 건드렸다.

-작업인가?

‘그럴걸요.’

-유부녀 아니야?

‘일단 공식적으로는 현재는 유부녀가 아니라고 하더라고요. 비공식적인 거야 뭐 모를 이야기고요.’

-하여간, 이 동네는 이래서 정이 안 간다니까. 아주 소돔과 고모라가 따로 없어.

잠깐의 대화를 나누는 사이, 성민과 엘렌의 뒤를 이어 제법 유명한 할리우드 배우가 홀로 들어왔다.

세레나가 성민과 엘렌에게 인사를 하고 그들에게 다가갔다.

“조심해요.”

“네?”

“보통이면 그냥 며칠 재미 보고 끝이겠지만 성민 좀 다르니까요. 그렇게 순진하게 있다가는 자칫 잘못하면 골수까지 빨아 먹힌다고요.”

필 니크로가 크게 웃었다.

-아니, 지금 누가 누구를 걱정하는 거지?

엘렌이 조용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함께 어울려 놀기는 좋은 친구지만, 조심해야 해요. 이혼만 세 번을 했고, 그때마다 더 크게 부자가 됐으니까요. 물론 지금은 본인 자신의 유명세로 돈을 벌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성민은 이제 막 떠오르는 스포츠 스타잖아요. 사교계에 막 데뷔하는 참인데 괜히 휘말리면 이미지만 나빠질 거예요.”

“하하, 충고 감사합니다.”

파티에 초대받은 사람들은 다양했다

연예인, 기업가, 정치인, 유명 기자, 운동선수, SNS 스타 등의 셀러브리티들. 그리고 이제 막 연예계에 발을 디딘 젊고 활기 넘치는 남녀들까지.

그 사이에서 성민은 제법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존재였다.

물론 동양인이라는 이유만은 아니었다. 이곳은 LA. 동양인들도 많이 사는 동네다. 하지만 그 많은 동양인 가운데서도 성민은 조금 이질적이었다.

‘저 남자 괜찮은데?’

‘아서라. 아서. 엘렌이 데리고 온 남자야.’

‘엘렌이?’

엘렌은 전국 중계 TV 쇼를 무려 25년째 진행하고 있는 대단한 인물이었다. 이 자리에 위치한 사람들 가운데서도 그녀보다 비중이 높은 사람은 손에 꼽는다. 그런 그녀가 데리고 온 사람이란 것만으로도 성민은 모두의 시선을 끌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비교적 젊은 사람들을 위한 파티라는 말이 어울리게, 파티장은 점잔을 빼면서 칵테일을 마시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스테이지의 저편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DJ가 디제잉을 하고 있었고 그 앞에서는 젊은 사람들이 흥겹게 몸을 흔들고 있었다.

‘흐음, 역시 이런 분위기로군요.’

-천박하군. 구석에서 마약이라도 할 것 같은 분위기야. 파티라면 무릇 예의바른 사교댄스와 품격있는 음악이 필수이거늘.

‘아니, 무슨 빅토리아 시대 사람도 아니고. 저랑 70년밖에 차이 안 나는 미국인인데 대체 왜 그러시는 겁니까. 거기다가 영감님 시대야말로 마약의 전성기아닙니까?’

-흥, 난 그때에도 마약이나 피우고 다니는 망할 히피 놈들이 아주 싫었어. 내 손에 샷건만 있다면 다 쏴 죽이고 싶었다고.

필 니크로가 파티 자체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다.

하지만 성민이 바라보는 파티장의 정경은 그가 바라보는 것과는 조금 달랐다.

인지도가 부족한 연예인들은 자신들을 각인시키기 위해 애를 썼고, 기자들은 어떻게라도 소스를 얻어내기 위해 귀를 쫑긋했으며, 기업가나 정치가들은 자신들 간의 관계를 공고히 하며 이제 막 사회에 발을 들인 애송이들을 농락했다.

저기서 저렇게 신나게 춤이나 추고 있는 놈들은 멍청해도 되거나, 혹은 멍청한 척 연기를 해야 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진짜 멍청해서 다음부터는 이런 자리에 오지 못할 놈들 뿐이었다.

“어때요?”

“재밌네요.”

“역시 그럴 줄 알았어요. 저 친구가 요즘 상당히 잘 나가는 친구잖아요. 놀고 싶으면 잠깐 가서 놀아도 좋아요. 아무래도 난 저런 춤을 추기에는 이제 슬슬 무릎이 아파서 말이죠.”

엘렌이 성민의 재밌다는 말을 조금 오해했다.

하지만 괜찮았다.

어차피 지금 성민이 어울려야 하는 쪽은 저 노회한 정치가나 기업가가 아니었으니까. 성민이 이 자리에서 챙겨야 할 것은 돈이나 권력이 아니었다.

성민이 스테이지로 걸어 나갔다.

< 상류 사회(3) > 끝

ⓒ 묘엽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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