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0. 어디서 뭐해(5)
준이 형은 혼이 나간 얼굴로 형들로 가득 찬 현관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딘지 신난 듯한 막내 라인은 그렇다 쳐도, 저 사람들이 여기 다 들어와서 앉을 수는 있는 거야?
앞이 캄캄해졌다.
“진우는 조금 있다가 온대.”
“온다고요? 여기를요?”
“허, 우리 영빈이가 이제 진우를 이렇게 홀대하네.”
“그게 아니잖아요!”
여기에 아직 누가 더 온다는 말에 영빈 형은 정신이 어질어질하다는 듯 이마를 짚었다.
진우가 서운해할 거라는 둥 가영 형은 영빈 형을 놀려대느라 바빴다.
우르르 들어온 형들은 솜씨 좋게 자기들끼리 대충 자리를 나눠 앉았다.
그리곤 들고 온 큰 박스를 뜯더니 평소 우리가 쓰던 작은 밥상을 놔두고 형들이 들고 온 큰 상을 조립했다.
직사각형으로 긴 타입이라 다행히 다 같이 앉을 수 있는 사이즈였다.
아니, 이게 다행이 아니잖아?!
“왜, 아니… 형? 상은 왜?”
“그동안 상이 작아서 불편해 보이더라고. 우리 병아리들 맛있는 거 많이 먹어야 하는데.”
키스 형이 씩 웃으며 답하는데 순간 나는 가영 형이 말하는 건 줄 알았다.
어떡하냐, 우리 키스 형이 한가영한테 물들어버렸다….
“그거랑 상이랑 무슨 상관이에요….”
멍청하게 서 있던 나와 준이 형, 영빈 형은 눈만 끔뻑거리다 형들이 들고 온 보따리로 눈을 돌렸다.
“그건 또 뭐예요?”
“너희 첫방을 볼 때 간식이 빠지면 안 되지.”
“아니, 무슨 데뷔 무대도 아니고…!”
“팀장님한테 허락받아왔죠?”
“당연하지.”
찬이가 눈을 반짝이며 세비 형을 바라봤고, 세비 형은 다정하게 웃으며 찬이 머리를 쓰다듬었다.
너무 자주 있는 일이라 이제는 뭐라 할 기운이 없었다.
“우리 병아리, 다 같이 맛있는 거 먹으면 좋잖아. 형은 처음 왔는데 싫어?”
“아뇨, 그건 아닌데 집이 좁잖아요….”
쪼글쪼글해지는 내 어깨를 토닥여준 건 하겸 형이었다.
“단우 형, 저번에 보내준 거 어떻게 됐어요?”
“당연히 그 새끼를 발라줬지.”
“개쩐다, 진짜!”
찬이는 단우와 또 뭔가를 주고받았던 건지 자기들끼리 통하는 이야기를 하며 낄낄거렸다.
저저, 어휴.
보나 마나 또 게임 얘기겠지.
경환 형은 금방 신나서 가영 형이랑 뭔가 떠들고 있었고, 세빈이도 단우 형 옆에 붙어서 눈을 반짝이고 있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나는 한쪽 구석으로 도망쳤다.
“저기에 자리 있잖아요. 저기로 가요.”
“싫은데? 난 병아리 옆에 앉을 건데?”
굳이 옆에까지 쫓아온 하겸 형, 시끌벅적한 거실, 가영 형에게 붙들려 체념한 듯 ‘허허’웃고 있는 준이 형.
어느새 세비 형과 신나게 대화 중인 영빈 형.
슬그머니 옆에 온 키스 형이 내 품에 쿠션 하나를 밀어주었다.
“고마워요, 형.”
“이제 좀 진정됐어?”
갑자기 사람이 밀려들어 당황하긴 했지만, 싫지는 않다.
당황스러움이 49%라면 좋은 마음이 51% 정도 될까.
물론 가영 형과 하겸 형이 한자리에 있는 건 무척 걱정스럽지만.
세비 형도 있고 단우 형도 있으니까 어떻게든 되겠지.
“다진 형은 또 도망갔어요?”
“원래 같이 오려고 했는데 누님한테 멱살 잡혀서 끌려갔어. 오늘 어머니 생신인데 잊고 있었더라.”
“저런…. 그건 멱살 감이긴 하네요.”
다진 형은 제대했어도 얼굴 보기가 쉽지 않다.
키스 형 말로는 쉴새 없이 어딘가로 헤매고 다니는 인간이라 그러려니 한다고.
아무리 그래도 엄마 생일은 잊으면 안 되지.
“너희가 뭘 좋아하는지 잘 몰라서 일단 아무거나 시켰어.”
“고기면 대부분 다 잘 먹어요.”
“다행이네. 대부분 고기거든.”
하겸 형은 오는 길에 미리 음식을 주문했다고 했다.
더불어 네가 해산물을 별로 안 좋아하니 해산물은 빼고 시켰다고 말해줘서 아주 조금이지만 감동했다.
곧 도착할 거라는 말을 하던 순간, 기다렸다는 듯 울리는 벨.
“음식 왔나 보다. 받아올게.”
“같이 나가요!”
자리에 앉아있던 세빈이가 벌떡 일어나 현관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현관문 앞에는 각종 음식점에서 보낸 배달 음식을 든 배달 기사님들이 서 있었다.
그러다 하겸 형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지만, 별다른 말 없이 거실 안쪽을 힐끔거리다 가셨다.
형과 세빈이가 현관문 앞을 지키고 있었기에 밖에 사람은 안쪽을 보기 힘들기도 했고.
“누가 집주인인지 모르겠네.”
“그러게요. 하하, 어차피 저는 세입자니까요. 뭐.”
우리가 집이라고 부르지만 일단 자가는 아니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묘한 내 뉘앙스를 눈치챈 키스 형은 피식거렸고, 머리에 턱 하니 손을 얹었다.
“고생했다, 진짜.”
“형도요.”
같은 사건을 겪은 동질감.
키스 형의 목소리에는 꽤 많은 것들이 담겨있었다.
자세한 설명은 하지 않았지만, 방화 사건이 남긴 여파는 작지 않을 것.
포잉을 졸라서 들은 바로는 새벽 숙소의 가스레인지가 인덕션으로 바뀌었다고 했다.
나는 스킬 덕인지 포잉의 보호 덕인지 불을 다루는 게 마냥 두렵지는 않았지만, 형들은 더 심한 듯했다.
우리 애들도 불을 꺼리는 것 같아 인덕션으로 바꾸자는 말이 있기는 했다.
원래 흡연자였던 종범 형이 담배를 끊은 것 같다는 말도 들었다.
종범 형이 흡연자라는 건 전혀 몰랐기에 조금 놀라기도 했다.
우리와 있을 때도 담배 냄새를 풍기지도 않았고, 그런 기색도 전혀 없었다.
형이 건강해지는 건 좋지만, 트라우마로 고통받는 건 싫다.
포잉이 장로들이 다른 사람들이 트라우마로 고생하지 않도록 조금씩 회복시키고 있다는 말은 들었다.
치료가 모두 끝나면 보통 사람 정도로 불을 느낄 수 있을 거라고.
그나마 다행이긴 했지만, 그래도 마음이 좋지 않다.
괜한 일에 휘말려 힘들게 된 것 같아서, 아무렇지 않게 넘기는 건 내게는 어려운 일이다.
잠깐 생각에 빠진 사이 새벽 형들이 사 온 음식과 하겸 형이 배달시킨 음식이 새 상에 주르륵 차려졌다.
냉동실에는 아이스크림이, 아일랜드 식탁 위에는 케이크가.
“누가 보면 파티하는 줄 알겠어요.”
“파티지. 무사 귀환과 첫 방영 축하 파티 정도로 이름 붙이면 되려나?”
준이 형이 요란한 밥상 위를 보며 기가 질린다는 듯 말했지만, 가영 형은 능청을 떨며 웃었다.
“몇 시쯤 시작한다고 했지?”
“한 한 시간 남은 것 같으니까 일단 먹으면 될 듯?”
“먹자!”
“먹고 죽자!”
“제발 조용히 해.”
“이러다 신고당하면 내일 연예면 1페이지 기삿감 아니냐?”
“상상만 해도 끔찍하니까 말도 꺼내지 마.”
자그마치 아이돌그룹 셋이 모여서 전쟁처럼 음식을 흡입하고 있었다.
게다가 최근엔 방화 사건에 휘말려서 안정을 취하고 있다던 그룹이 둘이다.
이 멤버로 고성방가로 신고당하면 참 많은 사람이 재밌어할 것이다.
상상만으로도 진저리난다는 듯 단우 형은 고개를 저었다.
“열애설이나 마약 사건 터지는 것보다 그런 걸로 1면 가는 게 낫지 뭐.”
“무슨 그렇게 무서운 말을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해요!”
“연애야 다 할 수 있는 거지, 뭐.”
“형도 해봤어요?”
슬슬 대화가 너무 자유분방해지자 준이 형이 슬그머니 경환 형에게 눈빛을 보냈다.
경환 형은 닭 다리를 들지 않은 손으로 찬이 옆구리를 퍽 때렸고.
“모쏠인 우리 찬이가 상상도 못 할 연애를 했지.”
“제발 그 입 닥쳐. 타임들이 알까 겁나니까.”
낄낄대던 하겸 형은 단우 형의 일갈에 정말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하겸 형은 데뷔하고 연차 차고 나이가 좀 들고 나서는 다들 몰래몰래 연애한다고 했다.
물론 안 들킬 자신 있으면 몰래 하고 그럴 자신 없으면 매니저한테 알려두는 게 좋다고 찬이한테 속닥거렸다.
“우리 애한테 이상한 바람 넣지 말아요. 출입 금지시킬까 보다.”
“좋은 사람 있으면 만날 수도 있지, 뭐.”
“지금 저희한테는 턱없는 미래 일이니까 하는 말이죠.”
못마땅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하겸 형에게 틱틱거리자 찬이가 한마디 거들었다.
“내 연애는 관심 없어도, 남의 연애는 재밌댔어.”
“그 말 누가 했어?”
그때까지 잠자코 있던 준이 형이 다정하게 웃으며 물었다.
그 미소에 심상치 않다는 걸 느낀 찬이는 더듬거리며 이름을 실토했다.
“그, 정우던가?”
“플라이하이, 마크였지?”
하겸 형이 ‘정우’라는 이름을 듣더니 툭 뱉었다.
“앞으로 정우랑 친하게 지내지 마라. 물든다.”
“아니, 그냥 가끔 수다 떨긴 하는데 친하진 않아요!”
상냥한 준이 형의 타이름에 찬이는 바짝 기합이 들어간 대답을 외쳤다.
쯧, 한동안 형한테 시달리겠네.
준이 형은 평소에도 늘 우리가 해이해질까 봐 걱정했다.
인기가 조금 생겼다고 건방져질까 봐, 마음이 흐트러질까 봐 늘 자신을 조이고 우리를 다독였다.
그런 형 앞에서 연애니 어쩌니 했으니 당연히 혼나야지.
“곧 시작하겠는데?”
“진짜?”
찬이에게는 정말 다행히도 곧 프로그램이 시작할 시간이 됐다.
* * *
사실 촬영 처음에는 여러모로 걱정을 많이 했다.
보통 역사 프로그램은 지루해하기 마련이니, 여행의 탈을 썼다고 해도 시청률이 나올까 싶기도 했고.
게다가 연예인이 아니라 다른 본업을 가진 분들이 나온다고 해서 많이 긴장했다.
우리가 실수 없이 합을 잘 맞출 수 있을까 싶어서.
그래도 서로에 대해 적응이 끝난 후에는 꽤 즐겁게 촬영했으니 만족했다.
PD님도 우리를 부르길 잘한 것 같다며 좋아해 주셨으니까, 뭐.
하지만 슬프게도 프로그램 시작은 우리의 청승맞은 모습이었다.
아니, PD님.
이렇게 배신을 한다고요?
촬영 당시를 떠올리며 흐뭇해하던 나는 옹기종기 모여있는 우리 등짝 모습에 짜게 식어갔다.
다른 분들 오시기 전에 일찍 도착해서 우리끼리 나름대로 공부하던 중이었다.
단지 찬이의 눈높이를 맞춰주기 위해서 만화로 된 책을 고른 것뿐인데….
“환이가 애들 가르치는 건 잘한단 말이지.”
“별로 하고 싶지 않아요….”
자체 영상 찍을 때 자꾸 선생님 역을 했던 영향인지 자연스럽게 내가 막내 라인을 가르치고 있었다.
우리끼리 공부하던 영상을 이렇게 또 써먹으시네.
“원래 저기서 말씀하신 거 아니지 않아?”
“편집의 힘이지, 뭐.”
그런 우리 모습 바로 뒤에 다른 출연진분들이 다가오며 기특해하는 장면이 연출되었다.
당시에는 우리보다 한 시간 정도 늦게 오신 데다, 처음엔 저렇게 기특해하지 않으셨었는데.
“이게 이렇게 되네.”
“하루 이틀이야?”
입을 삐쭉거리는 찬이에게 세빈이가 한마디 했다.
일 년이 넘도록 돌아다녔는데 우리 애들이라고 모를까.
하지만 그럼에도 이런 편집의 무서움은 적응이 어렵긴 했다.
내가 언제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전부 계산하고 살 수는 없는데.
그마저도 여기저기서 잘라다 섞어버리기 일쑤니까.
인사하고 다 같이 경주로 이동하는 사이, MC역의 기태 선배님의 주도하에 분위기는 한결 편안해졌다.
교수님도 생각보다 딱딱하지 않았고, 작가님은 뛰어난 입담으로 우리 막내들을 사로잡으셨다.
입을 헤- 하고 벌리고 넋 놓은 듯 작가님을 바라보는 막내들 모습이 프로그램 내내 몇 번이나 나왔을 정도로.
“…저렇게 바보 같은 얼굴이었어? 화나, 왜 말 안 해줬어?”
“난 분명히 표정 관리하라고 몇 번 찔러줬다.”
“그냥 장난친 줄 알았자나….”
우리 찬이는 자기 이제 부끄러워서 얼굴을 못 들고 다닐 거라고 중얼거렸고, 단우 형은 새삼스러울 것 없다고 냉정한 답을 내놓았다.
세빈이는 자기 모습이 못내 충격이었는지 질끈 눈을 감아버렸다.
“과거의 세빈아, 입 다물어. 제발….”
TV 속 자신을 향해 음산하게 중얼거리는 낯선 세빈이 모습에 가영 형이 슬그머니 떨어질 정도였다.
“그래도 이런 분위기면 생각보다 많이 볼 것 같은데?”
“그쵸? 저도 걱정했던 것보다 포인트가 잘 잡힌 것 같아서 다행이에요.”
하겸 형은 시청자로서 냉정하게 판단한 거라며 준이 형을 다독였다.
“옛날에는 포석정에 술잔을 띄우고 놀았다던데 우리가 본 건 너무 휑했어.”
“물에 뭔가를 띄우고 즐기는 건 낭만 있긴 하지.”
포석정뿐만 아니라 경주 구석구석 헤집고 다니다 저녁 무렵 환하게 불이 켜진 동궁과 월지를 방문했었다.
빛 사이에 자리 잡은 그곳은 화면으로 다시 봐도 아름다웠다.
“저기를 예전에는 안압지라고 불렀대요.”
“오, 찬이가 그런 걸 기억해?”
형들과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모니터링하던 우리는 촬영 당시를 떠올리며 즐거워했다.
쫄래쫄래 쫓아다니며 교수님과 작가님의 설명을 듣고, 질문도 하고.
MC와 우리 막내 라인의 대환장에 준이 형과 교수님과 나란히 서서 머리를 부여잡는 장면까지.
꽤 다양한 모습과 예쁜 장면이 많이 잡혔다.
하지만 곧 프로그램이 끝날 시간이었다.
“밤에 있었던 건 아예 날렸나.”
“밥 맛있었는데.”
그렇게 약간 아쉬워하던 그때.
놀이 공원의 목줄 풀린 강아지처럼 신나서 뛰어다니는 우리 애들 모습이 나타났다.
“?”
“왜 이게….”
“우리 병아리들, 도대체 뭐 하고 다니는 거니?”
형들의 시선이 막내 라인에게 꽂혔고, 준이 형과 영빈 형, 나는 슬그머니 몸을 뒤로 뺐다.
자유 시간이랬잖아요, PD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