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9. 어쩌나(4)
온라인 게임처럼 죽으면 세이브 포인트에서 다시 살아날 수 있는 그런 게임이 아닌데.
지나친 공포는 현실도피를 불러왔다.
눈앞에 현실이 행복해질수록 더 커지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
매일 매일 죽음의 공포와 싸워야 했다.
남은 생이 몇 년이나 될까.
아니면 며칠?
포잉에게 물어봐야 하나?
난 빈 적 없었던 소원이 뭐길래.
그런 생각들이 늘 머리에 콕 박혀서 포잉에게 털어놓기까지 무척 오래 걸렸다.
그때 나는 두려움을 억누르고 포기하지 않기 위해 이 시스템이라는 것에 더 신경 썼었다.
사용법을 궁리하다 불친절한 시스템에 짜증 내기도 했고.
속마음을 엿보면서 느끼던 죄책감이 어느 순간부터는 무뎌지는 것을 눈치챘을 때.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 삶은 하기 싫은 일을 게임 속 퀘스트처럼 건너뛰면서, 대충하고 싶은 것만 골라서 즐기는 그런 게임이 아닌데.
내 주변 사람들도 NPC가 아니고.
“시스템을 쓰면 쓸수록 현실감이 사라지는 것 같아서 무서웠어요. 느껴지는 감정들은 너무 선명한데.”
난 내가 소심하고 겁이 많다는 걸 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것들을 숨기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배웠다.
내게는 좋은 사람들이 많고, 그들을 통해 함께 살아간다는 것을 배우고 있다.
“저는 착각하고 싶지 않아요. 사람이니까 사람답게 살고 싶어요.”
길게 설명하진 않았다.
그저 포잉과 나누었던 이야기를 조금 꺼냈을 뿐.
- 그런 것 치고는 최근에도 스킬을 쓰지 않더냐.
포포는 간혹 내가 스킬을 사용하는 점을 꼬집었다.
그럴 거면 아예 쓰지 않아야 하는 것 아니냐고.
“전 약하니까 최대한 조절해가며 쓰고 있죠. 있는 것도 못 받아먹으면 그건 바보라고 포잉이 그러더라고요.”
- 네 말이 모순이라는 것은 알고 있겠지?
“그럼요. 그러면 어때요. 어차피 이건 그냥 제게 주어진 건데. 다시 가져가신다고 해도 상관없어요.”
내 말이 이상하게 들렸는지, 자꾸만 고개를 갸웃거리는 포포가 귀여워 보여서 웃었다.
아까는 좀 멀게 느껴졌는데 이제는 조금 더 가까운 느낌이었다.
혼자 무언가 중얼거리기도 하고 고민하는 듯하던 포포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 네 생각은 잘 알았다. 지금처럼 시스템에 관해 불편한 점이나 개선했으면 하는 게 있다면 알려달라더구나.
“고객센터가 없는 줄 알았는데.”
- 그런 것은 없지만, 포잉을 통해 내게 전달해주면 내가 그 망종에게 전달하마.
“네. 다음에 생각나는 게 있으면 그렇게 할게요.”
포포에게 설명이 너무 불친절하고 사용법을 익히기 어렵다는 의견은 전달해두었다.
뭐든 간에 직접 해봐야 익숙해진다지만, 이건 그보다 조금 더 심했으니까.
- 궁지에 몰린 쥐는 고양이를 물기도 한다 했다. 최대한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노력할 테지만, 그런 상황이 와도 당황하지 말았으면 좋겠구나. 포잉은 반드시 널 구할 테니.
“네. 저도 제 요정님이 절 구해줄 거라는 걸 믿어요.”
포포는 나를 마주하고 처음으로 정말 자연스럽게 미소 지었다.
-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제대로 대화를 나눴으면 좋겠구나. 시간이 다 되었으니 다음을 기약해보자꾸나, 작은 아이야.
“저도 다음에 또 뵈었으면 좋겠어요.”
이제는 꿈에서 깰 때가 다가온 듯했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포포에게 포잉의 어린 시절 이야기가 듣고 싶었다.
“다음에 제게 포포 님과 포잉의 이야기를 들려주셨으면 좋겠어요.”
- 나도 그런 날이 왔으면 좋겠구나.
다행히 포포와 나는 마주 보며 웃을 수 있었다.
* * *
“아아, 솜뭉치들, 잘 들려요?”
“오늘은 우리 둘이 왔어요!”
어쩐 일로 회사에서 막내들 둘이 방송하도록 허락해주었다.
아무래도 어디로 튈지 모를 탱탱볼 같은 막내들이다 보니 다들 걱정을 놓지 못했다.
보통은 멤버들과 팀장님이 힘찬과 세빈 둘만의 작업을 반대했는데 의외의 일이었다.
“오늘은 저랑 막내랑 솜뭉치들만 같이 놀 거예요, 어때요? 상상만 해도 막 신나죠?”
“찐빵 형이 하는 말은 대충 흘려들어도 괜찮아요.”
이제는 둘도 회사와 멤버들에게 신뢰받는 것인가 하는 들뜸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여태까지 그들은 아무래도 지켜지는 쪽이었으니까.
배부른 투정이라는 걸 알지만, 그래도 한 번쯤은 지키는 쪽에 서고 싶었다.
더군다나 힘찬은 지환과 동갑이었으니까.
늘 지환이 무언가 팀을 위해 일을 해낼 때마다 고마운 마음이 들면서도 부럽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망설이지 않고 계속 프로그램에 출연했다.
다행히 힘찬은 자신과 예능이 제법 잘 맞는다는 걸 알았다.
엉뚱하고 활기찬 캐릭터.
열심히 공부한 덕인지 밉지 않게 적절한 선을 지키는 장난꾸러기 이미지를 얻게 되었다.
그 이미지를 얻은 것도 지환의 조언이 큰 역할을 했다.
‘넌 눈치는 어느 정도 볼 수 있으니까 리액션만 잘하면 될 거야.’
힘찬이 생각보다 분위기를 잘 읽는다는 것을 지환이 가장 먼저 눈치챘다.
말주변이 없어서 그렇지, 문제의 핵심을 잘 찌른다는 것도.
힘찬은 지환의 조언을 진지하게 생각했고, 예능에 출연할 때마다 열심히 입을 열었다.
무조건 리액션은 크게.
놀랄 때도, 기쁠 때도, 힘들 때도 할 수 있는 한 가장 크게 반응했다.
방긋방긋 웃기만 하는 병풍이 아니라는 걸 온몸으로 드러내다 보니 조금씩 맡은 역할이 커졌다.
대사도 한 줄씩 늘어났고, 그만큼 더 열심히 아등바등 매달렸다.
얼마 전, 경환 형과 함께 출연했던 어떤 프로그램에서는 둘 다 뛰어난 반사신경을 자랑하기도 했다.
아이돌 그룹에서 몇 명씩 뽑아 자잘한 게임을 몇 판씩 이어가는 프로그램이었다.
고전 게임의 재림이라며 밀가루 판에 넣은 사탕을 먹는 것. 줄에 달린 과자 뜯어 먹기. 땅따먹기 등.
요새는 TV에서 보기 힘든 옛날 게임들이었다.
한 사람당 사탕을 하나만 찾으면 되는 게임에서 힘찬은 혼자 사탕 5개를 찾아서 모조리 입에 물었다.
심지어 한 개를 찾아서 무는 상대방보다 빠르게.
대신 얼굴이고 옷이고 전부 밀가루를 한가득 묻혔지만, 두 번째 게임으로 뛰어나가는 속도는 비슷했다.
높은 줄에 매달린 과자를 입으로만 물어서 먹어야 하는 게임에 나간 경환은 순식간에 매달린 과자를 다 뜯어 먹었고.
닭이 모이를 쪼아먹듯 과자를 입으로 하나씩 낚아채는데 속도가 수준급이었다.
처음에는 같은 팀 선수들조차 이게 무슨 짓이냐고 당황했다.
게임 시작 전, 자기들이 앞에서 길을 뚫어놓을 테니 나머진 그들에게 맡기겠다고 힘찬이 말을 하긴 했다.
같은 팀 사람들은 당연히 기록을 단축하겠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경환과 힘찬이 전혀 생각지도 못한 방법으로 길을 뚫어버린 것.
릴레이 방식으로 게임을 가장 빠르게 클리어하는 팀이 이기는 게임이었다.
각 팀원이 5명이니 준비된 물품들도 모두 5개씩.
그런 게임이 총 5개임 준비되어 있었다.
처음에는 어리둥절해 하던 제작진은 언래블의 두 명이 게임을 파괴하는 걸 흥미진진하다는 듯 지켜봤다.
엉뚱한 방식이긴 했지만, 이렇게 하면 안 된다고 한 적도 없으니.
제작진이 게임을 설명할 때 한 말은 다섯 개의 게임을 최대한 빨리 클리어하는 쪽이 이긴다는 것뿐이었다.
제작진의 묵인 아래, 둘은 앞의 게임 두 개를 혼자 다 끝장냈다.
반대팀에서 가볍게 항의했지만, 제작진은 자기들이 말한 룰을 어긴 게 아니라며 둘의 손을 들어주었다.
게임을 파괴하듯 없애버려서 남은 팀원들은 세 개의 게임만 하면 되는 셈이었다.
힘찬과 경환이 게임을 작살내놓고도 상대 팀 선수와 비슷하게, 혹은 간발의 차로 늦게 클리어했다.
덕분에 그 뒤를 이은 멤버들은 비교할 수 없는 속도로 결승선을 통과했고, 결국 이겨버렸다.
밀가루와 과자 부스러기를 잔뜩 묻히고 기뻐하던 둘은 같은 팀원들에게 살면서 처음 보는 타입이라는 칭찬 아닌 칭찬을 들었다.
그 후에는 PD에게도 불려가 칭찬받았다.
판에 박힌 방법이 아닌 참신한 방법으로 진행해서 덕분에 재밌는 장면이 나올 것 같다고.
특히나 경환이 미친 듯한 정확도로 매달린 과자를 쪼아먹었던 건 희귀한 영상이 될 듯하다며 활짝 웃었다.
그 상황에서도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었던 탓에 PD는 더 마음에 들었던 것 같았다.
다만, 그 상황을 지켜봐야 했던 종범만 머리를 감싸 쥐고 괴로워했다.
도대체 이걸 선배님에게 무어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면서.
그런 경험치가 하나씩 쌓여 드디어 막내 라인도 카메라를 쥘 수 있게 된 것이었다.
그러니 감회가 색다를 수밖에.
잔뜩 신난 찬이와 세빈의 표정과 몸짓에는 숨길 수 없는 들뜸이 있었다.
“오늘 저희가 여러분이랑 어떤 걸 할거냐면요.”
“저희가 제일 하고 싶었던 걸 할 거예요!”
“바로바로…! C.I 형 옷장 정리를 도와줄 거예요!”
GIVE 앱을 지켜보던 솜뭉치들은 막내들이 작정했다는 걸 직감하며 신나게 웃기 시작했다.
“형 옷장을 보면 진짜 한숨밖에 안 나와요.”
“애당초 옷장이 왜 필요한가 싶은 거 있죠.”
“맞아! 환이랑 C.I 형, 이렇게 둘은 옷장이 왜 있나 싶어요.”
최근에 이렇게 서로 장단이 잘 맞은 적이 있나 싶은 정도로 막내 둘이 주거니 받거니 하고 있었다.
언래블에서 옷에 가장 관심이 없는 둘.
그 둘이 같은 방을 쓰다 보니 옷장에는 선물 받은 옷과 본인들이 갖춘 옷을 다 넣어도 반도 채우지 못했다.
앙퀴라에서 줬던 의상들은 몇 벌을 제외하고는 다 회사에서 보관하고 있었다.
힘찬과 세빈은 각자 구매한 옷만 해도 한가득해서 숙소에는 보관할 자리가 부족한데.
“형, 들어와요!”
세빈의 외침에 기다리고 있었던 건지 조금 머쓱해 보이는 경환이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C.I입니다.”
“오늘 방송 주제는 아시죠?”
“네, 알긴 아는데 굳이…?”
경환은 막내들이 함께 촬영하자고 주제를 말했을 때 회의적이었다.
남의 옷 정리가 재밌을 게 있나?
하지만 경환은 자신이 크게 착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막내들은 그동안 벼르고 있었던 만큼, 경환의 옷을 모조리 꺼내서 하나씩 혹평을 퍼부었다.
제발 검은색 옷은 이제 버리고 분홍색 옷도 그만 사라고.
“세빈이가 예쁘다고 했는데….”
멤버들은 경환이 생각보다 밝은색과 파스텔 톤이 잘 어울린다며 그런 색상의 옷을 많이 권했다.
하지만 정작 결제하는 옷은 대부분 검은색 아니면 분홍색이었으니.
힘찬은 매의 눈으로 낡은 옷과 버려야 할 옷을 골라냈고, 세빈은 다시 넣을 옷을 예쁘게 접고 있었다.
둘의 모습에 신난 솜뭉치들도 계속 메시지를 보내왔다.
“이거요? 이건 엄마가 선물해주신 거라….”
이거 꺼내 봐라, 저게 더 예쁘다, 우리 애 옷장에는 왜 다 저런 옷밖에 없냐 등등
“아, 그건 제가 산 건데 되게 편해요.”
옷마다 무슨 사연들은 또 그리 많은지.
“그냥 버려! 버리고 새로 사라고!”
결국 참지 못한 힘찬이 경환을 붙들고 짤짤짤 흔들어댔다.
흔들리면서도 표정에 흐트러짐이 없는 경환의 모습에 세빈은 속이 터진다는 얼굴을 했다.
그리고 그 방송을 막내 라인 몰래 지켜보던 나머지 멤버들은 연습실에 모여 한숨을 삼켜야 했다.
“아직, 막내 라인만 방송하는 건 조금 생각을 더 해봐야 할 것 같아요.”
지환이 허허 웃으며 조심스럽게 소감을 말하자 맏형들은 얼굴을 감싸 쥐었다.
아무래도 앞으로 한동안은 막내 라인만 방송하는 일은 없을 듯했다.
* * *
‘오늘, 장로들이 그들을 덮칠 것임.’
‘그럼 오늘 다 끝나겠네?’
자잘한 사고가 몇 번 더 있을 뻔했지만, 다행히 다른 요정분들이 막아주었다.
처음에는 사람이 벌이는 짓들을 대처하기 힘들었다.
포잉의 몸은 하나고 우리는 어디에서 어떻게 공격이 들어올지 알 수 없으니까.
하지만 요정들이 대거 투입되면서 사고가 일어나기 전에 조금씩 상황을 틀었다.
준비가 끝날 때까지 상대방이 눈치채면 안 된다는 것 때문에 소극적으로 대응한 것.
저 여자가 눈치채고 직접 숨을 끊기라도 하면 다시 잡아넣기 막막해진다고 했다.
영혼이 명계로 넘어가면 더 쉽게 잡지 않냐고 포잉에게 물었었다.
하지만 포잉은 그 여자는 제 목숨도 도구로 쓸 인간이라 그렇게 쉽게 끝나지 않을 거라고 했다.
더 큰 재앙을 불러올 가능성이 큰, 위험한 인간이라고.
그런 시한폭탄 같은 인간의 목줄을 타락한 요정이 잡고 있는 것.
‘포잉은 안 가봐도 괜찮아?’
‘가야 함.’
가봐야 한다는 말과 달리 포잉은 좀처럼 내 무릎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이 요정님이 왜 그러나 하고 고개를 갸우뚱하다 떠올랐다.
불안한 거구나.
이대로 나를 놓고 간다는 게.
그런 포잉이 고맙고 사랑스러워 꼬옥 품에 안았다.
‘포잉, 나 얌전히 있을게. 다녀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