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7. 어쩌나(2)
포잉은 섣불리 입을 열지 않았다.
히노의 잔잔한 목소리에 담긴 말들이 날카롭게 가슴을 찔렀지만, 내색할 수는 없었다.
“아가야, 소중한 아가야.”
히노는 잘게 떨리는 포잉의 눈동자를 지긋이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방황하고 고민하고 계속해서 생각하거라. 그러다 네 고민이 버거워질 때는 우리가 있다는 것을 잊지 마렴.”
히노는 포잉이 마음 깊숙이, 어디에도 꺼내지 않고 숨겨두었던 생각을 눈치채고 흔들었다.
“여기를 좀 보렴. 너라면 들리겠지.”
건물 지하에서 무수한 혼이 울부짖고 있었다.
건물 전체가 숨이 막힐 만큼 지독한 악취에 잠겨있었다.
동물, 사람 할 것 없이 많은 생명이 자기 삶을 빼앗겼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사람이 이렇게까지 변할 수 있는 건지 포잉은 이해할 수 없었다.
“계약자가 너를 무척 애틋하게 여긴다는 것은 안다. 너도 아마 그럴 테고.”
포잉은 무언가 대꾸하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타락해버린 그 아이들이 무엇을 욕심냈는지,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 이제 모두 알겠지. 어떤 생명도 영원히 살 수는 없기에, 모든 종족에게 그들이 감당할 수 있는 수명만 주어지는 거란다.”
쓸쓸히 말하던 히노는 돌연 엄한 얼굴로 변했다.
“유리의 계약자가 행복해 보이더냐.”
“…아뇨.”
“유리가 계약자를 보며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똑똑한 너라면 알고 있겠지.”
천에 하나, 만에 하나라도 만약 자신의 계약자가, 그 작은 아이가.
설령 그럴 리 없겠지만 혹시라도 환생을 거부하고 포잉과 이별을 거부한다면.
포잉은 단호하게 잘라낼 자신이 없었다.
이렇게나 소중해졌는데.
언젠가는 이별해야 한다니.
영영 볼 수 없게 되어버린다니.
상상만으로도 작은 심장이 미친 듯이 쿵쿵거렸다.
하지만 포잉으로 인해 지환이 망가지는 것은 더 견딜 수 없었다.
두 번째 삶조차 너무 힘겨워했던 계약자.
눈이 마주칠 때마다 말로 다 하지 못할 애정을 담아 바라보는, 바보 같은 내 계약자.
그 작은 아이가 포잉의 말에 힘내보겠다며 열심히 발버둥 쳤고, 포잉에게 인간의 삶을 알려주었다.
더불어 지환에게는 함께 살아가는 인간들도 무척 소중하다는 것을 안다.
그들을 전부 먼저 보내고 지환만 남는다면, 지환은 절대 행복해질 수 없으리라는 것도 안다.
그 덕분에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는 못했지만, 짐작할 수는 있었다.
유리라는 그 요정이 제정신이었다면, 차라리 죽고 싶어 했으리라는 것을.
그 요정에게 자신의 계약자가 지금 포잉에게 지환만큼 소중했다면, 그런 몰골을 바랐을 리 없다.
“망가지지 말거라. 늘 기억해야 한다.”
히노는 처음, 이 일에 포잉이 함께하는 것을 반대했다.
아직 다 여물지 못한 아이들에게는 너무 잔혹하고 슬픈 일이라 알리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알게 되었고, 포잉은 영리한 아이니 마음을 다잡도록 도와주고 싶었다.
그런 식으로는 행복해질 수 없다는 것과 언제나 자신들이 어린 요정들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이 일을 순리대로 마무리하고 난 후, 아마도 포잉은 지금보다 한 뼘은 더 자랄 수 있을 것이다.
잘게 떨리던 포잉의 눈동자가 제자리를 찾고, 포잉의 몸에서 흘러나오던 향도 안정되어갔다.
‘포포, 고 녀석이 잘 가르쳤구먼.’
히노는 자신을 다잡고 갈무리하는 포잉을 대견하다는 듯 지켜보았다.
소원 요정들은 첫 지성체 계약자와의 계약 기간이 가장 위험하다.
그걸 무사히 넘기도록 돕는 것이 장로들의 역할이었고.
많이 흔들리는 만큼 더 단단하게 다져지리라는 것을 알기에 히노는 포잉의 머리를 다정히 쓰다듬어주었다.
“아가, 너희는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우리의 소중한 아이들이란다. 그동안 너희가 자라는 모습을 지켜보았는데 어찌 소중하지 않을까.”
“네…. 감사해요, 히노 님.”
고분고분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포잉을 귀엽다는 듯 바라보던 히노는 한쪽 눈을 찡긋했다.
“포포에게는 비밀로 해주마.”
“아니, 뭐. 꼭 그렇게는….”
“그럼 가서 말해주랴?”
“괜찮습니다!”
냉큼 말하지 말라는 포잉의 모습에 히노는 크게 웃었다.
“자, 그럼 너는 이제 네 계약자에게로 돌아가려무나. 나는 이곳을 마저 정리해야겠구나.”
포잉은 잊지 않겠다는 듯, 작은 지옥을 구석구석 살폈다.
머릿속, 가슴 속에 이 풍경을 꼭 새겨놓고 잊지 않겠다는 듯.
그렇게 포잉을 지환의 곁으로 보내준 히노는 허공을 향해 말했다.
“이제 일을 해봅시다.”
허공에서 나타난 건 말끔한 정장을 차려입은 명계의 사자들이었다.
“어지간히 난장판을 쳐놓았군요.”
세 명의 사자는 저택을 쭉 훑어보더니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게 다 자네들이 일 처리를 소홀히 했기 때문 아닌가.”
“제 담당이 아니었다니까요, 히노 님.”
그들 중 가장 날카롭게 생긴 사자가 푸념하듯 대꾸해보았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콧방귀를 뀐 히노는 코끝으로 그들에게 지시했다.
“부지런히 움직이지 않으면 야근하게 될 테니 고생하시게. 아, 참 제단 쪽은 아직 건드리지 말게. 거긴 일이 마무리된 후에 손대야 해.”
이치카가 막 나가는 중이라지만, 아직은 유리가 있어 마지막 선은 넘지 않았다.
제단이 유리와 이치카를 묶는 매개체니, 그것은 마지막에 해결해야 했다.
“예에….”
명계의 사자들은 얌전히 히노의 말에 따라 주변을 돌아다니며 정리해나갔다.
죽은 자들이 뿌린 원독으로 죽은 땅을 정화하고, 혹시라도 이치카가 돌아오면 잡을 수 있도록 결계를 만들고.
이치카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야금야금.
‘이곳의 바람도 요정계의 바람과 다르지 않은데.’
히노는 살랑이는 바람의 향을 맡으며 슬프게 웃었다.
곧 이 진저리나는 술래잡기가 끝날 것이다.
* * *
‘어디 갔다 왔어, 포잉?’
‘어서 이 일을 마무리 지어야지, 이 모자란 계약자 놈아.’
말없이 자리를 비웠더니 그새를 못 참고 포잉을 찾아대는 지환.
기특함에 입꼬리가 씰룩거리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일을 돕고 싶다는 지환에게 포잉이 부탁한 것은, 아무런 티 내지 않고 일상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직업의 특성상 상대방은 지환의 일정을 금방 파악할 수 있다.
그러니 타격이 없는 것처럼 건재한 모습을 보여 그들이 조바심 나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그 말이 그저 부담감을 덜어주기 위한 발언이라는 것을 지환도 안다.
하지만 그마저도 포잉의 부탁이기에 지환은 기꺼이 그러겠다며 웃었다.
혹시라도 수상한 점이 있으면 꼭, 바로 포잉에게 말할 것.
불꽃이 다시 보이는 즉시 포잉에게 연락할 것.
절대 혼자서 무언가 해보려 하지 말 것.
포잉은 그 외에 자잘한 방침을 정해두었지만, 지환에게 짐을 지울 생각이 없었다.
이것은 요정들이 해결해야 하는 문제니까.
새벽 멤버들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불온한 이들을 견제하기 위해 다른 상급 요정이 파견되었다.
최대한 티 내지 않고 위험한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이미 다친 진우를 위해 다른 상급 요정이 그 곁에서 상주하고 있었다.
바로 회복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라 옆에서 혹시 모를 습격에 대비하며 더 튼튼해지도록 돕고 있었다.
지환이 누나인 연희 곁에는 진즉에 상급 요정 한 명이 붙어 있었다.
한 세계에 이토록 많은 소원 요정이 내려온 것은 손에 꼽는 일이라 했다.
조금씩, 조심스럽게 적의 숨통을 조여가면서 무고한 이들을 지키기 위해.
‘포잉?’
포잉이 복잡한 머릿속 때문에 잠시 멍하니 앉아있는 사이.
지환은 포잉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꼭 끌어안았다.
언제나 아플까 봐 조심스럽게 안아오는 세심한 손길, 빈말로라도 좋다고 하지 못할 성격을 다 받아주는 착한 본성.
조금 소심하긴 했지만, 지환은 무척 좋은 계약자다.
애정이 듬뿍 담긴 눈빛과 몸짓, 손길, 사랑스러운 말들까지.
‘이 순해 빠진 바보 같은 놈!’
‘바보니까 포잉이 꼭 옆에서 지켜줘야지. 나는 포잉 없으면 안 되잖아.’
포잉은 처음으로 울음을 삼킨다는 게 어떤 것인지 경험했다.
종종 지환이 힘겹게 웃으며 포잉을 끌어안을 때마다 이런 기분을 느꼈으리라는 것도 깨달았다.
투박한 포잉의 혀로는 제대로 표현할 수 없는, 아릿하고 씁쓸한 그런 맛의 감정.
여린 나뭇가지가 눈을 지고, 시린 바람에 떨며 애처롭게 피워낸 한 송이 매화를 닮은 향이었다.
그 먹먹한 기분을 표현할 수 없어 지환에게 벌컥 짜증을 냈다.
끌어안은 가느다란 팔을 앞발로 팡팡 내리치며 잔뜩 투정을 부렸다.
하지만 지환은 그런 포잉을 더 꼬옥 끌어안으며 몸을 쓸어주었다.
‘괜찮아, 포잉. 다 괜찮아.’
‘괜찮기는 개뿔이 괜찮냐!’
‘우리는 괜찮을 거야. 내 요정님은 유능한 소원 요정인걸.’
‘어휴, 이 모자란 계약자 놈아.’
포잉은 지환이 얼마나 죽음을 겁내는지 안다.
덜덜 떨면서 자신이 언제 죽냐고, 죽는 날을 알고 있느냐고 묻던 날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 한마디를 묻기 위해 처음 만난 날부터 속앓이했던 것도 알게 되었다.
무서운 건 하도 질색해서 조금만 어두워지면 빽빽거리며 포잉을 부른다.
전생에 부리지 못했던 응석을 이번 생에 다 풀어내는 걸 알기에 투덜거리면서도 전부 받아주었다.
그래서 포잉은 유리의 마음을 일부나마 이해했다.
내 손을 떠나서 이 아이가 어떻게 살아갈지, 또 혼자 울고 있진 않을까 걱정되어.
차마 놓을 수가 없었던 그 마음을 아주 조금은 이해했고, 공감했다.
그래서 두려웠다.
자신이 혹시라도 똑같은 실수를 할까 봐.
지금부터라도 더는 애정을 쏟지 않도록 노력해야 할지, 정을 떼는 연습을 해야 하는 건지 어려웠다.
그런 마음을 히노는 꿰뚫어 보고 있었다.
‘계약자야.’
‘네, 요정님.’
‘까불지 말고.’
풍랑 속 작은 배처럼 금방이라도 뒤집힐 것처럼 울렁이는 감정들을 애써 삼켰다.
포잉은 절대 지환을 울리고 싶지 않다.
‘혹시라도 내가 실수하는 일이 있다면, 괜찮다고 하지 말고 꼭 이야기해 줬으면 좋겠다.’
‘포잉?’
뜬금없이 진지한 얼굴로 낯선 말을 뱉고 있자니, 지환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포잉을 살폈다.
‘네놈은 툭하면 괜찮다고 말해서 그 말을 하나도 믿을 수 없으니 꼭 확실하게 의사를 표현해야 한다.’
그래도 예전보다는 더 잘 말하지 않냐고 지환은 뚱한 얼굴로 조잘거렸다.
이 자라다 만 병아리 같은 계약자의 투정에 흐물흐물하게 녹으려던 마음을 간신히 다시 붙들었다.
어디서 요망한 것만 배워서 이렇게 소원 요정 마음을 흔들어 놓는지.
‘그 뺀질이랑은 이제 적당히 놀고. 나쁜 물 들어 가지고 네놈도 자꾸 뺀질거리는 것이 큰일임.’
‘뺀질이면 가영 형 말하는 거야?’
‘네 주변 뺀질이 중에는 그놈이 제일이니 꼭 경계해라.’
지환은 포잉이 주변 인간들에게 관심을 두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면 무척 즐거워했다.
가장 친한 친구에게 새 친구를 소개하는 것 같다나 뭐라나.
‘그놈 말고 그 뻔뻔한 놈도 조심해야 한다. 그렇게 웃고 다니는 놈들일수록 속이 시커먼 법이야.’
‘설마 그거 하겸 형 말하는 거야?’
‘시커먼 놈은 그놈 말고 또 누가 있음?’
지환은 포잉이 하나씩 꼽아가며 잔소리할 때마다 웃느라 바빴다.
이렇게 사람을 마냥 믿고 어리숙한 계약자를 돌보느라 포잉은 매일 매일 골치가 아플 지경인데.
‘내가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도록 포잉이 꼭 함께 있어 줘.’
‘당연하지. 나는 약속은 지킨다.’
‘나도 포잉한테는 전부 다 말할게. 속상한 것도, 아픈 것도.’
그렇게 포잉과 지환은 제법 긴 시간 동안 서로의 마음을 나누었다.
주어진 시간 동안 더 많은 것들을 함께 하고 행복한 추억을 잔뜩 만들자고 약속했다.
그리고 절대로 그들처럼 잘못된 선택을 하지 말자고, 지환은 포잉에게 속삭였다.
정곡을 찌르는 지환의 속삭임에 포잉은 그러겠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포잉이 무엇을 우려하고 있는지 입 밖으로 꺼내지도 않았는데 눈치채버렸다.
평소에는 그렇게 나사 하나 빠진 것처럼 굴던 아이가 꼭 이럴 때는 예리했다.
‘포잉은 계속 까칠한 요정님으로 남아줘.’
‘이 계약자 놈이?’
‘포잉은 까칠한 게 매력인걸?’
한숨을 푹 내쉬는 포잉과 키득거리며 포잉의 이마에 제 이마를 댄 지환.
‘우리 포잉이 있어서 얼마나 내가 행복한지 모를 거야.’
‘네놈을 만나서 내가 얼마나 골치 썩는지 모를 것임.’
포잉은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은 기분이 돼버렸다.
이게 계약자 놈 때문이라고.
힘없이 속으로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