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3. 한 발짝 두 발짝(3)
포포는 원래 밤하늘처럼 검푸른 빛을 띠는 호랑이였다.
다른 소원 요정들처럼 태어나 똑같은 길을 걸었고, 그저 그들보다 오래 살았을 뿐이다.
소원 요정들은 본인의 생명을 중히 여기지 않는다.
다른 생명보다 지독하게 오래 살았고, 그들의 삶을 함께하다 보니 생도 사도 그저 순환이라고 여길 뿐.
그렇기에 계약자와 함께하는 시간에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붓는지도 모르겠다.
보통 소원 요정은 상급 요정이 되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면 다른 삶을 선택한다.
어떤 영혼은 신이 되기도 했고, 어떤 영혼은 윤회의 고리 속으로 들어가기도 했다.
누가 그러라고 시킨 것도 아니건만 다들 비슷하게 살고 그 후 새롭게 태어나는 요정들.
포포는 그런 소원 요정의 삶이 못마땅했다.
그래서 다들 꺼리는 장로직을 꿰차고 여태 버텨온 것도 있었고.
“왜 혼자서 청승을 떨고 있는 게냐.”
“영감탱이 같은 말투는 여전하구먼.”
끌끌거리며 사뿐하게 포포 앞에 내려앉은 것은 다른 장로인 히노였다.
거대한 덩치를 지닌 포포에 비하면 한참 작은, 황금빛이 도는 갈색 여우인 히노.
그녀는 포포와 달리 어린 소원 요정들을 돌보고 싶어 남아 있는 장로였다.
“그리 죽상을 하고 앉아있으니 한마디 얹어주러 안 올 수가 있나.”
“쓸데없는 소리.”
포포는 못마땅한 기색을 숨기지 않고 고개를 팽 돌려버렸다.
“아직도 그 아일 마음에 두고 있었던 게냐, 이 미련한 녀석아.”
“….”
포포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장로직을 맡고 있던 히노.
그녀는 포포가 어린 요정일 때도 장로였다.
“모든 것은 각자 선택하는 게다. 그러니 그 책임도 각자가 지는 수밖에.”
어딘가 쓸쓸한 기색이 묻어나는 히노의 중얼거림에 포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유리, 그 아이가 그렇게 될 거란 걸 선배는 알고 있었지?”
포잉이나 다른 요정들 앞에서는 보인 적 없었던 포포의 슬픈 얼굴에 히노는 오래된 기억이 떠올랐다.
타락해버린 소원 요정.
어떤 종족이든 ‘타락’이라는 단어가 가벼울 리 없을 테지만, 소원 요정은 조금 더 심각했다.
차원을 넘나들고, 무수한 이능을 품고 있는 그들이 타락한다면 여파가 걷잡을 수 없어진다.
여태까지의 긴 역사에서 중급 이상의 요정이 타락한 적은 없다.
언제나 죄를 짓게 되는 것은 어설프게 여물어버린 어린아이들이었다.
평소처럼 딱 좋은 온도에 부드러운 바람이 불고 있었건만, 포포의 가슴은 무척 시렸다.
“너나 나나 다를 것이 있더냐. 그저 짐작만 할 뿐이지.”
“그때 아예 묶어놨어야 했어….”
유리는 동기 요정들 사이에서도 유독 마음이 약하고 착한 요정이었다.
인간에 대한 호기심이 큰 만큼, 중급 요정 시험을 무척이나 기다렸던 아이이기도 했다.
그 아이가 포포의 머리에 앉아 제 계약자에 대해 종알거릴 때, 얼마나 아름다운 목소리였는지 모두가 기억했다.
상냥하고 다정한 유리.
그랬기에 장로들이 예의주시할 수밖에 없었던 아이.
지나치게 다정하고 착한 요정들은 그만큼 크게 상처받곤 했다.
“어떻게든 유리는 계약자를 찾아갔을 게다. 이미 불타오르는 생에 홀린 아이들은 자기가 다 타버리는 줄도 모르고 날아들어.”
히노는 혀를 차며 포포를 위로했다.
그때 직접 그들의 뒤를 쫓았고, 형을 집행했던 것이 포포와 히노였다.
영혼에 해를 끼치는 건 중죄였기에 포포가 직접 유리의 영혼을 조각내었다.
소멸시켜야 한다던 다른 장로들을 설득하고, 혼을 조각내어 세상을 돌며 죄를 씻을 수 있도록 해준 것.
긴 시간이 걸리더라도 죄를 모두 씻은 후에는 제대로 환생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하지만 유리는 그 와중에도 자신의 계약자를 찾아 떠돌았다.
“포잉이 제법 똘똘하게 군다 들었다.”
“아직 한참 멀었지.”
히노는 포포가 아끼던 요정, 포잉을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유리의 타락 후 오래도록 가슴앓이하던 포포가 크게 정을 준 아이라는 걸 안다.
그만큼 겁이 난다는 것도.
포포는 내심 포잉이 잘 자라서 자신의 뒤를 이어주길 바라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히노는 언제나 훌쩍 어디든 떠날 것 같이 굴던 포포를 아직도 또렷하게 기억했다.
더불어 포포의 털이 새하얗게 바래버린 날, 또한 기억했다.
유리의 마지막 비명이 울리던 그때, 포포의 아름답던 털도 함께 바스러졌다.
애달프고 비통한 마음을 견디지 못하고 새하얗게 새어버린 것.
어린 요정들은 포포가 백호인 줄 알았고, 빛을 받아 반짝이는 은빛 털이 아름답다 했다.
오래전 일을 기억하는 요정들은 포포에게 털 이야기를 하지 않았고.
“이미 손을 떠난 죄인 때문에 지금 지켜야 할 아이까지 상처받게 해서는 안 된다.”
“알고 있어, 그놈의 잔소리는.”
“네놈이 명계의 궁을 박살 냈으니 마무리까지 확실하게 해야 할 것 아니냐.”
민망한 듯 괜히 앞발로 자기 꼬리를 툭툭 치는 포포의 모습에 히노는 끌끌거리며 웃었다.
“이번엔 제대로 끝을 봐야지.”
풍성하고 폭신한 히노의 꼬리가 바람을 타고 가볍게 살랑였다.
“과거에 침잠되어 현재의 소중한 것을 도외시하는 건 등신들이나 하는 짓이니라.”
히노는 타박타박 다가오는 기척을 느끼고는 방긋 웃으며 포포에게 한마디 얹어주었다.
“히노 님, 안녕하세요?”
“오냐, 꼬맹이.”
“…휴.”
포포가 애지중지하던 포잉이었다.
쫑긋 선 귀와 부드럽게 흔들리는 꼬리.
영민하게 반짝이는 눈동자와 시큰둥한 표정.
필시 꼬맹이라는 표현에 뚱해진 것이리라.
‘어떻게 이렇게 하나같이 성격도 다르고, 하는 짓들도 귀여운지.’
히노가 삶을 끝내지 않고 어린 요정들을 돌보기로 마음먹었던 이유였다.
“대화 나누시던 중이면 조금 있다가 올까요?”
“되었다. 어차피 곧 가려던 참이니라.”
“너는 나를 찾아와놓고 히노 장로께만 인사하느냐.”
“예에…. 뭐, 거의 매일 보잖아요.”
포포는 히노에게만 깍듯한 포잉의 모습이 못마땅한 듯 바닥을 탕하고 내리쳤다.
하지만 그런 포포의 모습에 기죽을 포잉이 아니었다.
시큰둥한 얼굴로 포포에게 대충 고개를 까딱해 보인 포잉.
포포의 수염이 파르르 떨렸고, 히노는 유쾌한 듯 웃었다.
히노는 삐딱하게 말하면서도 앉은 자세만은 반듯한 포잉의 머리를 다정히 쓰다듬어주었다.
히노는 품 안의 자식들이 귀했다.
그러니 타락하는 요정이 생겨도 아이들을 위해 단호하게 대처할 수 있었다.
포포는 그런 단호함을 배워야 했다.
실수는 누구나 할 수 있지만, 개인의 욕망을 위해 타인을 해쳐서는 안 된다.
포포는 신전을 무너트릴 때조차 사람들이 다치지 않도록 조치를 취했던 착한 요정이었으니까.
“네 녀석은 언제쯤 예의라는 것을 배울 생각이냐!”
“예의가 밥 먹여 줘요? 꼰대처럼 굴지 말고 빨리 방법이나 찾아요!”
콩알만 한 아기 요정이 커다란 장로에게 바락바락 대드는 모습이 꽤 볼만했다.
게다가 인간 세상에서 재밌는 단어를 배워온 듯했다.
꼰대라는 단어 뜻을 아는지 포포의 수염이 부들부들 떨렸다.
“내 계약자는 겁이 많단 말이에요!”
“네 겁까지 그 녀석이 죄다 가져간 모양이구나.”
“이런 게 바로 이상적인 계약자와 소원 요정 아니겠어요? 상호보완적인 관계.”
“아주 고놈의 주둥이는!”
따박따박 말해가며 포포를 몰아치던 포잉은 구경하던 히노를 향해 눈을 몇 번 깜박이더니 방긋 웃었다.
모른 척해달라는 뜻이리라.
히노는 무척 유쾌해졌다.
아까까지는 요정계 땅바닥으로 녹아들 것처럼 우울해하던 포포가 살아나서는 아주 펄펄 날았다.
비록 분노로 펄쩍 날아오른 거지만.
포포가 저 아이를 특별히 여긴다는 건 다들 안다.
상급 요정들 사이에서도 총명하고 똑 부러진 아이라는 평이 지배적이다.
유리와는 전혀 다른 성정의 어린 요정.
히노는 저 아이가 포포의 마음을 치유해줄 것이라 믿었다.
포잉과 투덕거리던 포포는 자기도 모르게 입꼬리를 실룩거리고 있었다.
아깽이가 깡깡거리며 덤빈다고 한들 몇 배나 더 큰 포포에게는 귀여운 재롱이나 다름없을 터.
저 고약한 요정은 즐기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힐끔 포포의 표정을 확인한 히노는 저 덩치만 산만 한 후배님이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는 걸 알아차렸다.
‘후회를 껴안고 살아 무얼 한담.’
저쪽은 괜찮을 테니 자신은 자신의 할 일을 해야 했다.
유리의 계약자가 지난 모든 삶을 기억하는 것을 확인했다.
악의에 집어 삼켜진 인간.
다른 삶을 살 기회가 주어졌지만, 결국 과거를 놓을 수 없었던 인간.
그 원한은 이해하나 그렇다고 다른 생명을 해친 것은 용서할 수 없다.
다른 생명을 해친 순간부터, 그 인간은 제 원수들과 다를 바 없어졌으니까.
히노는 포잉의 계약자라는 어린아이가 겪은 일을 토대로 유리의 상태도 추측할 수 있었다.
아예 혼을 봉인해서 요정계로 데려오거나 그 자리에서 바로 명계의 사자들을 부르기로 했다.
마법도, 이능도 무척 드문 세계라 이런 상황은 처리가 어려웠다.
사람들의 눈을 가려야 했고, 피해가 없어야 했으며, 본래 그곳에 있는 존재들에게 양해를 구해야 했다.
지금도 다른 장로 둘이 지환이라는 아이가 사는 세계로 내려가 양해를 구하고 있었다.
대부분 수긍하고 좋게 넘어가는 편이지만, 가끔 배짱 튕기는 것들이 있어 생각보다 지연되고 있었다.
히노는 혼을 담을 구슬을 만들어야 했다.
힐끔 바라본 두 요정은 금세 진지한 얼굴로 무언가 논의하고 있었다.
‘이쪽은 더 걱정 안 해도 되겠어.’
다정한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던 히노는 후련해진 발걸음으로 소리 없이 그 자리를 떠났다.
* * *
사방에 이불과 쿠션, 인형 등 온갖 폭신하고 따뜻한 것들로 가득 차 있었다.
“내 잠옷 어디가써!”
“빨리 찾아봐, 아까 들고 장난칠 때부터 알아봤다!”
배경음처럼 찬이와 가희 누나의 전쟁 소리가 들렸지만, 이제 그런 건 무시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
“우리 막둥이, 오늘 너무 귀엽네.”
“아, 진짜…. 저도 이제 멋진 거 할거거든요?”
보라색의 보드라운 잠옷을 입은 막내는 이제 툴툴거리기도 할 정도로 감정 표현이 풍부해졌다.
기특하기도 하지.
제 딴에는 부끄러워서 저러는 거라는 걸 알기에 손을 뻗어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입술을 삐죽거리면서도 얌전히 손에 머리를 가져다 대는 이 귀여운 생명체는 뭘까.
“또 그렇게 웃고 있네.”
함박웃음을 지으며 세빈이를 예뻐하는 사이, 연분홍 잠옷을 입은 경환 형이 어슬렁거리며 다가왔다.
“형, 분홍색은 이제 그만 놓아주는 게 어때?”
“왜?”
“아니, 그냥…. 그래, 형이 좋으면 됐어….”
연한 분홍색에 꽂힌 경환 형의 폭주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세빈이와 준이 형뿐인데, 둘 다 막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당사자가 마음에 들어 하는데 무슨 문제냐면서.
“쟤는 언제 의상 갈아입으려고 저러고 있어.”
“아까 노란색 싫다고 징징거리다 잠옷 어디에다 뒀는지 까먹었대요.”
포도주색 잠옷이 잘 어울리는 영빈 형은 내가 입은 잠옷을 잠시 못마땅하다는 듯 바라봤다.
멤버들은 유난히 내가 흰색 옷을 입는 걸 싫어했다.
다만, 서포트 팀 누나들이 가장 잘 어울리는 색이라며 주장했기에 별말 안 하고 있을 뿐.
“정말 솜뭉치들이 이런 걸 좋아할까요?”
세빈이는 나와 형들 사이로 고개를 쏙 밀어 넣으며 걱정스럽다는 듯 말했다.
오늘은 숙소 러그 위에서의 느낌을 살린 스튜디오에서 간식도 먹으며 솜뭉치들과 대화하는 날이었다.
이리저리 뒹굴뒹굴하기도 하고 장난도 치고 하면서 최대한 자연스러운 모습을 보이라고 했다.
간혹 일상 카테고리에 올리던 것보다 훨씬 본격적으로 찍는 느낌이었다.
“너희 영상별 뷰 수 통계 내고, 중간중간 팬카페 통해서 투표 받은 거니까 믿어도 된다.”
찬이를 기다리며 스튜디오 앞에 쪼그려 앉은 우리 위로 다정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런 건 도대체 언제 한 거예요?”
“너희가 일하는 만큼 우리도 열심히 일하고 있다는 증거지.”
온화하고 따뜻한 우진 형의 미소에 자연스럽게 수긍한 우리는 얌전히 세트장에 들어가 각자 자리를 잡았다.
“최힘찬, 아직 멀었어?”
“다 입었어요!”
깜찍한 노란 덩어리가 허둥지둥 뛰어왔다.
다시, 일할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