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아이돌의 꽃길을 위해 (432)화 (432/456)

432. 한 발짝 두 발짝(2)

“처음에는 나만 참으면 된다고 생각했어요.”

찬이 눈이 순간 아득해졌다.

잠시간의 침묵.

과거의 어느 순간을 더듬는 듯 아득해졌던 눈에 다시 초점이 잡히고, 찬이는 반짝이는 눈으로 우리를 바라봤다.

“내가 괜히 나섰다가 더 일이 얽히는 것보다는 얌전히 있는 게 나을 거라고. 나한테 무슨 일이 생겨도 그냥 꾹 참고 입 다물면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상 위에 손을 얹고 있었던 찬이가 몇 번 손을 꽉 쥐었다 폈다.

또랑또랑하게 말하고 있어서 긴장하지 않은 줄 알았는데, 잘 견디고 있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나만 그런 게 아니더라고요. 우리가 모두 다 그렇게 자기 일을 넘기려고 하고 있었어요.”

잠깐의 침묵 후, 찬이 말을 경환 형이 받았다.

“맞아. 내 생각에도 그래.”

자기 속을 잘 드러내지 않던 형이, 어둑한 눈을 하고 말을 받았다.

“무슨 일이 생겨도 조금 있으면 지나갈 일이라고 생각했어. 굳이 말해서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 없다고 생각했어.”

자연스럽게 이야기는 찬이에게서 경환 형으로 넘어갔다.

평소와 달리 말을 이어가는 멤버들 외에는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또렷하게 귓가에 울리는 목소리가 이상하게 생소했다.

늘 들어오던 목소리고 눈을 감아도 누군지 맞출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목소리들인데.

“그런데 생각보다 나 자신을 통제하는 게 어렵더라고.”

경환 형은 최근 일을 꺼냈다.

이상한 꿈. 그리고 꿈이라 치부하고 넘기려 했지만 결국 현실에 영향을 끼쳤던 일들.

마치 내가 아닌 듯했다며, 그동안 짜증 내는 자신을 지켜봐 주고 다독여주어서 고맙다고 했다.

“환이가 와서 물어봐 주고 말을 꺼내줘서 나도 말할 수 있었던 것 같아.”

“아니, 그건 그냥 내가 룸메니까….”

갑자기 전해진 따뜻한 눈빛에 당황했다.

갑자기 왜 그렇게 다정하게 웃고 그래, 이 형님이?

쑥스러움에 부러 불퉁하게 말을 했지만, 멤버들은 조용히 웃을 뿐 놀리지 않았다.

이상하게 평소랑 다른 분위기에 자꾸만 나만 주춤거렸다.

뭐야, 우리 원래 이러지 않았잖아.

멤버들 앞이 아니었다면, 손에 든 연필 끝을 자근자근 물었을 것 같았다.

애꿎은 노트에 줄을 벅벅 그으며 어색한 기분을 억누르던 그때.

준이 형이 입을 열었다.

“사실 형은 너희에게 말하지 않고 넘어간 일들이 많아.”

잠시 몽글몽글해졌던 분위기가 다시 한번 조여졌다.

우리 중 누구도 하준 형에게 함부로 하지 못하는 건, 형이 우리를 위해 얼마나 고생하는지 알기 때문이다.

우리는 맏형들이 어떤 노력을 기울이는지 보면서 자라고 있고, 형들의 보호 아래 비교적 안전하게 있다.

하지만 그런 형들의 희생은 다 알지 못했다.

형들이 그 부분에 관해 우리에게 일절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너희를 위해서, 팀을 위해서라고 말하면서 우리끼리 독단적으로 결정 내린 적도 많아.”

준이 형의 말이 이어지는 동안 영빈 형은 고요한 시선으로 우리를 바라봤다.

“하지만 그때로 돌아가도 아마 우리는 같은 결정을 내릴 것 같아.”

“그게 우리가 너희를 지키는 방법이었으니까.”

준이 형과 영빈 형의 목소리가 거실을 가득 채웠다.

많은 사람이 두 형의 성격이 확연히 다른데 어떻게 이렇게 친해졌는지 신기해하곤 했다.

하지만 지금 우리에게 들리는 둘의 목소리와 말투는 무척 닮아있었다.

두 형은 작정한 듯, 그동안 형들이 우리에게 말하지 않고 넘긴 일들을 하나씩 이야기해 주었다.

함께 출연했던 프로그램에서 처음에 어떤 리액션과 대사를 원했었는지, 따로 한 스케줄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아이돌을 가수가 아닌 광대로 여기는 사람들이 어떤 것들을 요구하는지.

회사가 쳐내고 나름대로 검증을 거친 프로그램에서도 개인적으로 그런 요구를 해왔으며, 덕분에 형들 둘만 출연했던 프로그램에서 어떤 취급을 당했었는지 등.

연예인 패널을 불러놓고 다양한 주제로 이야기하는 프로그램이었다.

그 프로그램에 원래 출연하기로 했던 건 나와 힘찬이었다.

갑자기 팀장님이 맏형들을 보낸다고 해서 그런가 보다 했었는데….

공정한의 일이 있고 난 후에 섭외되었던 프로그램이었다.

하겸 형에게 넌지시 그쪽의 꿍꿍이를 들은 준이 형이 바꿔 달라고 요청했다고 했다.

하겸 형은 여기저기 연줄이 많아서 들리는 소식의 질이 우리와 달랐다.

나와 찬이 가정사를 은근히 캐보려던 PD가 형들을 보고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 안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그때 거의 분량 없었구나.”

“어쩐지 이상하다 했어….”

출연하면 늘 보통 이상 분량을 챙겼던 우린데, 유독 그 프로그램 모니터링 때는 형들 분량이 적었다.

그때 형들은 ‘우리 리액션이 마음에 안 들었나 봐’하고 웃고 말았었는데.

우리를 대표해서 회사 운영진들에게 불려가는 일도 많았다.

그 자리에서 있었던 일들은 우리에게까지 전해지진 않는다.

지금이야 직원 대다수가 우리에게 호의적이지만, 초반에는 그러지 못했다.

회사에서 대거 물갈이가 진행되고 나서부터 분위기가 잡히기 시작한 거니까.

연습생 시절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형들이 늘 한발 앞에서 지켜주었기에 우리는 무사할 수 있었다.

“속상해?”

“그걸 말이라고….”

침울해진 우리 얼굴을 보고 준이 형이 부드럽게 웃었다.

“아마 작든 크든 우리는 모두에게 그렇게 하고 있을 거야.”

나만 참으면.

나만 견디면.

“그런데 찬이랑 경환이가 와서 이야기하다 보니까 우리가 이러는 게 정말 너희를 위한 일일까 싶더라.”

속으로 꾹꾹 눌러 쌓인 감정들은 고이다가 결국 까맣게 썩는다.

속에서부터 썩기 시작하면 사람이 어떻게 버틸 수 있을까.

“우리가 그렇게 감추기 급급한 모습을 보여서 그런가 어느 날부턴가 너희도 그러고 있더라고.”

아직까진 대부분의 활동이 단체 스케줄이지만, 이제는 개인 스케줄도 제법 있다.

당장 찬이만 해도 예능 프로그램에 조금씩 얼굴을 비추고 있다.

경환 형과 찬이 조합이나 찬이와 세빈이 조합을 원하는 PD들도 있었고.

늘 좋은 사람들만 있는 건 아니다.

당장 나만 해도 드라마 촬영장에서 내 얘기를 하는 사람들을 보았고, 은근한 따돌림을 당했다.

하지만 멤버들이 걱정할 걸 알기에 대화할 때는 좋았던 일만 말한다.

그런 생각을 과연 나만 했을까?

“얘들아, 우리 조금 솔직해져 볼까?”

“이런 경험치를 서로에게 나눠준다고 생각하자.”

형들도, 찬이도 담담한 척 자기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내게 혼자 끙끙대지 말고 제발 이야기해달라고 하는 소리였다.

이 중에서 내 이야기를 가장 안 하는 게 나니까.

이야기하는 동안에도 멤버들의 시선이 몇 번이나 나를 스쳐 지나갔다.

안타깝게 보기도 했고, 서운함을 담고 있기도 했다.

몇 번이나 솔직하게 말하겠다고 멤버들에게 이야기했지만, 다 말할 수는 없었다.

포잉 이야기를, 내가 죽었다 살아난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누구에게 할 수 있을까.

그것들을 제외해도 무심코 웃으며 참고 넘어가고, 흘려보내는 모든 일을 멤버들은 말하고 있었다.

더불어 최근 들어 불안해하는 내 모습을.

묵묵히 우리 대화를 듣고 있던 포잉이 꼬리로 툭 내 다리를 건드렸다.

‘얘네는 믿어도 괜찮지 않음?’

‘…나 미워하면 어떡해?’

‘왜 널 미워해.’

‘나 때문에 고생하는 거잖아.’

‘그게 왜 네 탓임?’

‘그야….’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

나 때문에 멤버들이 아프고 힘들다고 생각했는데, 그동안 포잉과 했던 대화가 떠올랐다.

포잉은 포잉대로 자기 때문에 이런 일이 생겼다고 생각했고, 나는 내가 있어서 멤버들이 피해 본다고 생각했다.

그때마다 우리는 서로의 탓이 아니라고 했다.

그저 타락한 요정과 그 계약자가 나쁜 거라고.

그렇게 계속 얘기해놓고도 정작 나는 내 탓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 나 진짜 멍청인가….”

생각이 늘 한 방향으로만 튀다 보니 버릇처럼 내 탓만 하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중얼거린 말에 멤버들의 시선이 내게 꽂혔다.

두렵지 않은 건 아니다.

다 말할 수도 없다.

하지만, 종범 형이, 소현 팀장님이 믿어줬던 일이라면 우리 애들도 믿어주지 않을까.

이래서 버릇이 무섭구나.

나는 또 시도하기도 전에 포기하고 있었다.

멤버들이 들어보고 선택할 기회조차 주지 않고 내 짐작으로 벽을 세웠다.

맏형들이 굳이 자신들이 해온 행동을 오늘 꺼낸 것도 아마 그런 뜻이겠지.

“형들이 나한테도 이런 얘기를 다 해줘서 좋아요.”

어지럽게 엉킨 생각을 싹둑싹둑 잘라버렸다.

시작점을 찾아 더듬거리는 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고, 해결 방법은 어차피 명확했다.

내 성격이 문제지만, 다행히 내게는 든든한 조언자와 항상 믿어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마음을 가다듬는 사이 조그만 목소리가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덩치만 컸지 여전히 아가 같은 우리 막내.

“재준이나 반에 다른 친구들이 하는 얘길 들었어요. 막내라서 다른 멤버들이 자기한테는 말을 안 한대요.”

세빈이 또래 친구면 팀에서도 막내인 경우가 많다.

“그런데 저한테는 형들이 솔직하게 이런저런 거 다 말해주잖아요. 어리다고 무시하지도 않고.”

“어리다고 하기엔 네 덩치가 이미….”

“눈치 챙겨, 찐빵아.”

세빈이가 우리를 향해 믿어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중간에 잠깐 찬이의 툴툴거림이 있었지만, 다행히 경환 형이 잘 제압했다.

“그래서 저는 꼭 제가 형들한테 힘이 되어주고 싶어요. 아직 형들만큼 할 수 있는 게 많지는 않지만….”

할 줄 아는 게 없다며 시무룩해지자 영빈 형은 금방 세빈이 어깨를 토닥였다.

준이 형은 우리 막내가 얼마나 똑똑하고 야무진지 구구절절 늘어놓았고.

이 팔불출들 진짜.

“저도 고백할 게 있어요. 우리 막내가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숨길 수가 없네요.”

나도 팔불출이기에 어쩔 수 없었다.

여태까지 조용히 있던 내가 입을 열자 멤버들이 멈칫했다.

몇 번 자리를 마련하고 말을 하면서 내게 자신들을 믿어달라고 말했던 사람들.

그런데도 늘 다 말할 수 없기에 죄짓는 기분으로 살아온 나.

- 너희 속마음을 알 수 있어.

- 난 원래 지환이가 아니야.

- 다른 차원에서 너희 팬이었어.

- 원래 나는 방구석 폐인이었어.

이런 말들은 할 수 없지만, 적어도 함께 지내는 동안 생기는 일들은 당사자도 알아야 한다.

그들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어야 나름대로 대처하지 않겠냐던 포잉의 말이 맞았다.

“음, 이야기가 조금 긴데, 괜찮아요?”

“괜찮으니까 하고 싶은 이야기 다 해.”

“어차피 못 자는 건 하루 이틀 아니잖아.”

이야기하겠다고 하자마자 주변에서 열렬한 호응을 해와서 웃음이 흘러나왔다.

멤버들이 대놓고 물었으면 아마 더 부담스러웠을 것 같다.

자리를 마련해주고, ‘네가 이상한 게 아냐. 우리 모두 그래,’ 라고 말해주고.

너무 많은 것들을 늘 받기만 했던 터라 부끄러워졌다.

나 자신이 너무 부끄러워져 쓴웃음이 절로 흘러나왔다.

그렇게 시작된 그동안의 일들.

팀장님께 이야기했던 것처럼, 어떤 것이 보였고, 그로 인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간략히 털어놓았다.

더 자세한 이야기를 할 수 없다는 게 미안했지만, 모든 걸 다 말하려면 그 전에 설명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았다.

다행히 멤버들은 진지한 얼굴로 이야기를 들어주었고, 찬이와 경환 형은 무언가 깨달은 듯한 얼굴을 했다.

“그때 내가 헛걸 본 줄 알았는데.”

“꿈에 나왔던 게 그건 거 같네.”

찬이는 호텔에서 봤던 기이한 불꽃을 말했고, 경환 형은 꿈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미안해요, 미리 말했어야 했는데 너무 이상한 일이라….”

“그런 일이 생기면, 누구나 믿기 어렵지. 당장 나만 해도 들으면서도 긴가민가 싶었는데. 용기 내줘서 고마워.”

준이 형은 미안해하는 내 말을 자르며 단호하게 말했다.

“가만있다가 누가 와서 시비 걸고 때린 건데 왜 피해자가 사과를 해. 그 각얼음인지 귀신인지가 잘못한 거지.”

“소현 팀장님 이름 센스 진짜.”

“우리 그러면 귀신이랑 싸우는 거야?”

걱정했던 것과 달리 이야기를 모두 들은 멤버들은 갑자기 전투력이 상승한 듯 주먹을 불끈 쥐었다.

걱정하고 무서워할까 봐 우려했던 것과 너무 다른 분위기에 멍해졌다.

“뭘 그렇게 멍청한 얼굴로 앉아있어. 그냥 단순하게 생각해. 누가 우리를 쳤고, 우리는 잘 버티기만 해도 이기는 거잖아.”

“찬이 형이 맨날 하는 게임 같은 거네.”

아무렇지 않은 듯 가슴을 쭉 펴고 말하는 찬이도, 세빈이도.

직접 괴로워했던 경환 형도.

준이 형이나 영빈 형도 모두 나를 보며 웃고 있었다.

아, 진짜.

내 새끼들은 어쩜 이렇게 다정하고 용감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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