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아이돌의 꽃길을 위해 (412)화 (412/456)

412. 괜찮아도 괜찮아(2)

기운은 처음 ‘그믐달’이라는 노래를 들었을 때, 그 오묘한 기분이 이렇게 오래 남을 줄 몰랐다.

무딘 자신의 심장을 싱숭생숭하게 만들 정도니, 섬세한 작가의 마음을 건드리기는 충분했다.

무엇보다 무대가 근사했다.

한복에서 따온 의상은 겹겹의 천으로 만들어져있어, 춤추는 아이들을 따라 나풀거렸다.

과하게 정신 사납지도 않고, 아쉽지도 않았다.

회사에서 꽤 힘줘서 만든 안무고 무대구나 싶은 게 보자마자 딱 느낌이 왔다.

처음 김다희 작가가 노트북을 들고 왔을 때는 뭔가 싶었다.

가뜩이나 김다희 작가는 기운이 대하기 어려운 타입이었다.

작가로서의 위상도 그렇고 성격도 그렇고.

아무래도 드라마 판이 작가 위주로 돌아가다 보니 더 눈치 보이는 것도 있고.

그때 김 작가는 노트북을 들이밀면서 이것 좀 보라고 외쳤다.

이거 우리 드라마랑 잘 맞을 거 같다고.

그렇게 접한 것이 언래블의 무대였고, 노래였다.

반쯤 사전 제작으로 만들다 보니 김 작가도 기운도 여러모로 불안한 마음이 있었다.

이미 돈을 쏟아부었는데 실시간으로 대응하기 어려워졌으니까.

괜히 드라마 판에 쪽대본이 날아다니는 게 아니었다.

시청자들의 니즈를 반영해 스토리 흐름이 변하는 건 흔한 일이었다.

기운은 무대 감상 후 근래에 드물게 김다희 작가와 마음이 통했다.

둘은 그 자리에서 신나게 이리저리 예쁘게 써먹을 궁리를 잔뜩 나눴다.

이대로만 된다면 드라마에 큰 도움이 되리라.

하지만 결국 그 총대를 멘 건 정기운이다.

우리 작가님은 바쁘다고 쏙 빠졌고, 기운은 속으로 욕할지언정 앞에 대고 불만을 토로할 수는 없었다.

어쨌든 김다희 작가랑 척지면 곤란한 건 자신뿐이니까.

ON 엔터와의 다툼 후 고생했던 걸 반면교사 삼아 나름대로 성장을 해서 다행이었다.

상황을 얼추 해결하고 김 작가까지 불러서 정윤 실장과 소현 팀장, 이렇게 넷이 죽어라 술을 부었다.

김 작가는 정윤과 소현을 무척 마음에 들어 했다.

소현이 서글서글하니 잘 맞춰준 것도 있었고.

그렇게 좋게좋게 이야기를 나눴고, 숙취를 겨우 떨쳐내고 마련한 자리였다.

방심하면 본래 성질이 튀어나올까 봐 기운은 속으로 불경을 외우고 이 자리에 나왔다.

딱히 종교가 있는 건 아니었지만, 필요하다면 어느 종교라도 절실한 신자가 될 수 있는 게 기운이다.

언래블에 대한 소문은 워낙 극에서 극이라 제대로 계약서에 도장을 찍기 전에 직접 보고 싶었다.

이 바닥만큼 소문을 못 믿을 동네도 있을까.

선후배나 조연출, 스태프들을 통해 알음알음 들려온 연예인들의 성격은 외부에 알려진 것과 매우 달랐다.

기운이 지난번 함께 작업했던 어떤 아이돌은 팬들에게 사슴이라고 불린다고 했다.

순한 눈망울과 작은 덩치, 예쁘장한 얼굴이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그와 촬영을 끝낸 후 기운은 진저리를 쳤다.

사슴은 개뿔, 야차도 그보다 순하겠다.

그런 연유로 언래블을 처음 마주한 기운은 적어도 소문 중 하나는 진실에 가까울 것 같다고 생각했다.

회사 팀장과 스스럼없이 친근한 관계를 유지하는 아이돌.

활기찬 목소리와 웃음이 잘 어울리는 아이돌.

그 와중에도 눈치와 예의를 차리는 아이돌.

시작은 힘들었지만, 어쩌면 이들과의 작업은 무척 즐거울지도 모르겠다고.

기운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활짝 웃었다.

* * *

예민하게 생긴 아저씨가 착한 척 웃고 있으니 영화에 나오는 악당이 따로 없어 보였다.

흠칫 놀란 세빈이가 슬며시 내 옆으로 붙었다.

손등을 토닥여주며 괜찮다고 웃어주자 그제야 안심하고 방긋 웃는 우리 막내.

준이 형은 찬이를 끌어당겨 자신의 옆에 두었다.

혹시라도 돌발행동을 할까 걱정되어 그런 것 같았다.

경환 형은 영빈 형을 슬쩍 봤고, 영빈 형은 경환 형을 쳐다봤다.

둘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혔지만 둘 다 가볍게 고개를 흔들더니 알아서 앉았다.

그 모습에 웃음이 터져 나올 뻔했지만, 입 안쪽 살을 깨물어 겨우 참았다.

“앉아서 계속 이야기 나눌까요? 다리 아프게 서 있을 필요 있나요.”

소현 팀장님이 자리를 권했고 모두가 적당히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번에 특집으로 방영될 드라마 홍보 영상을 언래블과 만들어보면 어떻겠냐는 제의가 있어. 이번 앨범과 무척 잘 어울릴 것 같다고 하시네.”

소현 팀장님은 이전 우리에게 간략히 설명했던 내용을 조금 더 세세하게 풀어놓기 시작했다.

그러다 그때, PD님이 양해를 구해왔다.

“소현 팀장님, 자세한 내용은 내가 설명해도 될까요? 아무래도 당사자들 이야기도 좀 들어보고 싶어서요.”

날카로운 눈빛이 우리를 스쳤다.

적의는 없어 보이는 데 왜 이렇게 등골 서늘한 눈을 하는지.

‘포잉, 속을 한번 보는 게 좋겠지? 어때?’

‘저 인간은 뭔가 애매함. 까보는 게 좋을 것 같음.’

포잉은 선인과 악인은 향으로 단번에 구분할 수 있지만, 인간은 그 두 가지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절대 선도, 절대 악도 그렇게 흔한 부류는 아니니까.

대다수 사람이 저마다 속에 약간의 선과 악을 모두 가지고 살아간다.

소현 팀장님은 눈가를 살짝 찌푸렸지만, 금방 평소 표정으로 돌아왔다.

“다음 달에 방영할 드라마에 방송국도 우리도 여러모로 기대를 걸고 있어요. 그런데 내용을 스포하지 않는 선에서 홍보하려니 기사로는 한계가 있더군요.”

물론 메이킹 영상을 조금씩 풀고 있지만, 큰 한방이 없어서 아쉽다고 했다.

유명한 작가님의 작품이고 워낙 내용이 좋아서 기대 중이라고.

그러면서 우리 무대를 무척 인상 깊게 봤고, 마침 드라마와 잘 어울릴 것 같다 느꼈다고 했다.

드라마는 개화기를 배경으로 하는 터라 우리 뮤직비디오와도 잘 어울릴 거라고.

거기까지 들은 나는 무척 유명한 어떤 드라마를 떠올렸다.

제목이 떠오르자마자 바로 스킬을 활성화했다.

오랜만에 스킬을 활성화하자 익숙한 말풍선이 퐁퐁 떠올랐다.

‘응? 뭔가 이상한데?’

‘뭐가?’

여태까지 스킬은 투명한 말풍선 안에 텍스트만 둥둥 떠다니는 그런 형태였다.

그 때문에 어떤 느낌인지 파악하는 게 무척 어려웠다.

반면, 지금 떠오른 말풍선은 색이 있었다.

[그 일만 아니었어도 이렇게 일이 꼬이진 않았을 텐데.]

투명한 회색빛의 배경색에 어리둥절해진 나는 포잉에게 스킬을 공유했다.

말풍선의 변화가 궁금했지만, 지금은 일에 더 집중해야 했다.

홍보 영상으로 드라마 내용을 넣는 건 흔한 일이었다.

하지만 정기운 PD님은 우리 노래를 배경으로 새로운 영상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드라마 촬영만으로도 무척 바쁠 것 같은데 그게 가능한가 싶었다.

“물론 촬영이 조금 빠듯하게 갈 겁니다. 촬영 영상을 따서 넣기도 할 건데, 나는 언래블도 잠깐 출연하는 쪽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잠은 죽어서 자자…. 이거 망하면 답도 없다.]

[사전 제작 덕을 이런 곳에서 볼 줄은 몰랐지.]

어딘가 체념한 듯 보이는 말풍선이 회색의 말풍선.

그 후로도 몇 가지 일정에 대해 비교적 자세히 말해주셨다.

중간중간 소현 팀장님이 말을 곁들여 들으며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 잘 알 수 있었다.

우리 애들은 얌전히 그 이야기를 경청하면서 각자 무언가 생각하는 듯 진지해졌다.

“우리 음악 감독이랑도 한번 만나서 이야기를 나눴으면 좋겠는데, 자세한 일정은 소현 팀장님을 통해서 나누도록 하죠.”

긴 설명이 끝난 후에는 개인적인 질문들이 이어졌다.

드라마는 좋아하는지, 각자 정확한 키는 얼마나 되는지, 곡을 쓴 건 누군지 등등.

‘이거 희한하네.’

‘아무래도 좋은 쪽은 녹색, 안 좋은 쪽 붉은색인 것 같지?’

끊임없이 쏟아지는 질의응답에 멤버들이 성실히 답하는 사이에도 말풍선은 쉼 없이 떠올랐다.

이분도 생각이 무척 많은 타입인 듯했다.

그리고 그걸 지켜본 나와 포잉은 같은 결론을 내렸다.

뭔가 스킬이 변했구나, 하고.

이전보다는 더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아서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그나저나 지환 군은 연기에도 뜻이 있다면서요?”

갑자기 훅 치고 들어온 질문에 답이 조금 늦었다.

“…좋은 기회가 있어서 출연할 수 있었습니다. 워낙 좋은 작품들이어서 과분하게 사랑받았죠.”

영화는 아직 개봉 전이었다.

올 추석 즈음 개봉으로 확정이 났으니 몇 달 후면 볼 수 있었다.

김찬성 감독님이 손이 근질거려 죽겠다고 얼마 전에도 연락 왔었다.

박수영 작가님은 이번 앨범 나오자마자 노래 잘 듣고 있다고 앨범도 샀으니 사인해달라고 전화하셨고.

“이구영 PD님이랑은 선후배 관계라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한번 보고 싶은데 말이지….]

말풍선도 녹색으로 긍정적인 감정을 나타내고 있었다.

생긴 거로 사람을 판단하는 건 참 나쁜 일인 걸 알지만, 이 PD님은 인상이 너무 예민해 보였다.

흔히 예술을 하는 사람들 하면 쉽게 상상할 수 있는 지쳐있고 예민한 인상.

그런데 눈은 묘할 만큼 번쩍거렸다.

웃으며 말하는 데 왜 이렇게 무서운 거야, 이 사람은.

최대한 얽히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며 공손하지만 친근하지 않게 답했다.

“최대한 멋진 작품 만들어봅시다. 우리.”

그래도 나름대로 차분하게 말하려던 PD님의 눈이 마지막 말과 함께 번뜩거렸다.

“히끅!”

옆에 있던 세빈이가 자기도 모르게 딸꾹질을 하며 내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저 인간은 왜 이렇게 무섭게 구는 거임?’

‘그냥 저분은 직업의식이 투철한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자….’

역시 무언가에 미친 사람은 무섭다.

가영 형도 저 PD님도….

겨우 회의가 끝났고, PD님은 조만간 보자며 환하게 웃으며 사라졌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얼마나 긴장한 건지 멤버들은 시들시들해졌다.

그런 우리를 바라보던 소현 팀장님은 혀를 차더니 무어라 중얼거렸다.

“역시 담을 조금 더 키워야…. 체험 프로라도 보내?”

어딘가 무서운 프로그램명을 중얼거리는 것 같아서 아무것도 듣지 못한 얼굴을 했다.

무인도랑 섬으로도 벅찼는데 도대체 우리를 어디다 보내려고!

주섬주섬 멤버들을 챙겨서 팀장님과 조금씩 멀어졌다.

이대로 눈앞에 있다가는 또 우리를 어디 보낸다고 하실 것 같아서.

겨우 연습실에 도착해 바닥에 철퍼덕 앉아서 오늘 만난 PD님에 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여태까지 했던 프로그램과는 다른, 차라리 회사에서 찍었던 메이킹 필름에 가까운 촬영이라 걱정이 많았다.

“드라마 잘되면 우리도 같이 잘되나?”

“OST 하나만 잘 뽑아도 통장이 든든해진댔어요.”

“와, 굉장히 속물적인 발언이지만 설렜다.”

무사이 때 알게 되어 종종 연락을 나누는 세진 선배님이 말해준 이야기.

세진 선배님도 시율 선배님도 OST 맛집으로 유명했다.

에단 쌤의 작곡 수업에서도 종종 들었던 이야기기도 했고.

드라마가 잘되면 한발 걸치고 있는 것만으로도 꽤 수입이 괜찮다고 했다.

아무리 좋아서 하는 일이라지만, 일과 수입은 떼어놓을 수 없는 한 쌍이라는 걸 우리도 안다.

수입은 말 그대로 내가 한 일에 대한 대가니까.

“뭐, 불법적인 것만 아니면 돈은 많은 게 좋은 거잖아? 우리가 그렇다고 남한테 피해 주는 것도 아니고.”

“그건 맞지. 돈을 많이 벌어야 고기도 자주 사 먹지.”

“기승전 먹는 거야?”

세상 물정을 모르는 것과 돈의 가치를 모르는 건 조금 다른 이야기다.

가끔은 그 두 개가 둘 다 부족한 사람도 있지만, 내가 본 연예인들은 누구보다 돈의 흐름에 민감했다.

오죽하면 진우 형도 가끔은 내게 한탄하듯 말했었다.

하고 싶은 작품과 돈 되는 작품이 같이 들어오면 너무 힘들다고.

가영 형이 다른 형들을 꾀어낸 방식도 수익 배분이라고 했다.

물론 음악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긴 했지만.

그런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우리라고 돈의 무서움을 모르고 살까.

형들은 틈만 나면 자기들이 알고 있는 노하우를 전수해준다고 바빴다.

“새로운 작업은 그것만으로도 좋은 경험이니까, 뭐.”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던 우리는 나머지 일정을 위해 몸을 풀기 시작했다.

돈이고 뭐고 일단은 눈앞에 닥친 일부터 해야지.

당장 오늘만 해도 오후 연습 후에는 언래블 스토리 미션 영상 촬영하러 또 움직여야 했다.

“오늘은 제발 정상적인 촬영이었으면 좋겠다.”

“꿈 깨.”

찬이는 벌써 미션 촬영이 걱정되는지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 말에 경환 형과 포잉이 현실을 들이밀었다.

‘그래, 기대가 크면 실망이 큰 법이지.’

이런 냉정한 사람과 요정님 같으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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