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아이돌의 꽃길을 위해 (407)화 (407/456)

407. Black swan(1)

일본에서의 마지막 외부 일정은 팬 미팅이었다.

아직 정식 앨범은 발매하기 전이지만, 일본 팬들을 위해 소규모 팬 미팅을 준비했다.

우리가 외워간 일본어로 인사할 때면, 일본 솜뭉치들은 더 크게 소리 질렀다.

반대로 우리 노래를 한국어로 따라부르는 솜뭉치들을 볼 때면 우리도 더 힘내서 노래를 불렀고.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더라도 감정적인 부분은 다르지 않다는 게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우리끼리 한국 솜뭉치들과 일본 솜뭉치들의 차이를 이야기하며 신기해하기도 했다.

하지만 하나같이 적응하기 어려웠던 건 날씨였다.

찜통에 들어간 만두가 된 것 같다는 찬이 말에 아무도 부정할 수 없었으니까.

현지 직원분은 올해는 더위가 일찍 찾아온 것 같다고 하셨다.

묘하게 더 맥을 못 추는 찬이 덕분에 오늘 외출은 경환 형이랑 하기로 했다.

다 같이 구경 나가면 너무 우르르 몰려다니는 느낌이라 인원을 두 무리로 나누기로 정했다.

“찬이는?”

“감기 기운 있다고 안 나온대요.”

“그래?”

우진 형은 우리 외출 일정을 듣더니 무언가 고심하듯 중얼거렸다.

“괜찮나?”

우리끼리 나간다고 해도 매니저 형들도 근처에서 대기한다고 했다.

위험한 일은 없을 텐데 싶어 세빈이가 왜요? 하고 묻자 우진 형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넘겼다.

“제가 힘찬이 컨디션 확인할게요.”

팀 내에서 가장 활기차던 힘찬이 기운 없다는 말에 매니저 형들은 걱정 가득한 얼굴이었다.

“아까 저희도 확인했는데 그냥 졸리고 만사 귀찮다고 하더라고요.”

“열은 없었어요.”

“에어컨 바람 너무 쐐서 그런 거 같아요.”

덥다고 난리를 치더니 밤새 에어컨을 빵빵하게 틀고 잔 모양이었다.

한숨을 푹 쉬던 우진 형은 종범 형에게 확인하고 내려오라고 하고는 우리를 인솔했다.

“이렇게 가니까 학교에서 소풍 가는 그런 느낌이네.”

“그럼 우진 형이 선생님이야?”

오늘 실컷 구경하고 찬이에게 이야기해 주기로 약속했던 터라 멤버들도 금방 기운을 차렸다.

모자를 눌러쓰기도 하고 마스크를 하기도하고.

긴 시간 돌아다니지는 못해도 유명하다는 곳은 가보고 싶었기에 단단히 준비했다.

아키하바라를 보고 싶다고 졸랐던 세빈이가 소원성취하는 순간이었다.

준이 형은 세빈이, 영빈 형과 함께 다니기로 했고 나는 경환 형과 둘이 다니기로 했다.

“약속 시간은 지켜야 된다?”

“걱정하지 말고 조심히 놀아요. 세빈아, 형들 체력 꼭 생각하고.”

“아무리 생각해도 네가 제일 나쁜 것 같아.”

웃으며 흩어진 우리는 모처럼의 자유에 괜히 들떴다.

거리를 걷기에는 꿉꿉한 느낌이 가시지 않아 큰 건물 위주로 천천히 돌아다녔다.

“뭐 안 사?”

“굳이? 딱히 사고 싶은 것도 없고.”

포잉은 요정계에 다녀와야 한다고 잠시 자리를 비웠다.

다만, 오늘 외출하는 걸 포잉도 알고 있었기에 떠나기 전에 내게 당부했다.

외출하더라도 낯선 사람을 따라가거나 무언가 물건을 사지 말라고.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니 이번에는 그렇게 하라고 했다.

내가 애냐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건을 사지 말라는 건 조금 이상하긴 했지만.

자신이 없는 곳에서 내가 무슨 일을 당할까 포잉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했던 터라 그 말을 듣기로 했다.

어차피 갖고 싶은 것도 없었고.

누나는 내게 돈을 쓰는 법도 배워야 한다며 이것저것 사보기도 하라고 했다.

하지만 옷에도 무언가 꾸미는데도 크게 관심이 없었던 터라 일단 그냥 버는 족족 통장에 넣어두기만 했다.

나중에 집을 사려면 돈이 많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을 하면서.

경환 형은 그런 내 모습에도 별다른 말 없이 머리를 쓰다듬어주기만 했다.

그렇게 얼마나 돌아다녔을까?

경환 형은 지친 나를 질질 끌고 카페로 향했다.

그냥 둘러만 보는데도 이렇게 체력이 모자랄 일인가?

한국에서도 자주 본 브랜드였다.

시원한 에이드를 홀짝이며 주변을 둘러보던 우리는 구경은 이쯤하고 일행을 만나러 가기로 했다.

내가 지친 것도 있었고, 구경이 신기하긴 하지만 형도 나도 크게 흥미를 갖지 못했던 것.

그저 약간의 일탈이라며 크레프를 사 먹는 등 군것질을 조금 한 게 전부였다.

그때, 카페 바로 앞에 촬영 중 봤던 파란 불빛이 일렁였다.

“어?”

“환아, 왜?”

그때는 잠깐 일렁이고 사라졌던 불빛이 이번에는 흔들거리며 카페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당황한 내가 그쪽과 형을 번갈아 가며 바라봤지만, 형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듯했다.

“형, 여기서 나가자.”

“지금?”

들어와서 이제 막 음료수를 마시기 시작한 터라 이상해 보이는 건 알지만, 꺼림칙했다.

하필 포잉도 없는 상황이라 더 불길하게 느껴졌다.

마치 저 불빛에 닿으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

“가자.”

“어, 어? 응.”

형은 내 얼굴을 살피더니 별다른 말 없이 빠르게 자리를 정리했다.

반대쪽 출입구로 나가려던 그때, 카페 안으로 불빛이 들어왔다.

심장이 쿵쿵거리며 불안감이 차올랐다.

[어? 이런 곳에서 만나는군요.]

그때 누군가 내 손목을 잡았다.

반가운 얼굴을 한 그 켄타라는 사람이었다.

“안녕하세요.”

꾸벅 인사를 하는 도중에도 푸른 불빛은 흔들흔들 움직이며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커피라도 한잔하는 게 어떻습니까?]

난감했다.

방송국 사람들과 좋게 지내는 듯 보였던 사람인데, 우리가 거절하면 불쾌해할 것 같아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내가 우물쭈물하는 사이, 경환 형이 슬며시 내 손을 빼내며 단호하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일행이 기다리고 있어서 급히 가봐야 합니다.]

평소 형의 모습보다 더 단호했고, 몸짓은 정중했다.

이렇게 단칼에 거절할 줄 몰랐던 건지 켄타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경환 형은 고개를 꾸벅 숙이더니, 날 끌고 카페를 나와 한참 동안 걸었다.

“휴, 이쯤 왔으면 안보이겠지. 환아, 괜찮아?”

“어, 응. 난 괜찮은데….”

이렇게 와도 괜찮은 건지, 혹시 형 눈에도 무언가 보인 건지.

묻고 싶었지만, 물을 수 없는 무수한 질문이 내 목을 틀어막았다.

“네가 거기서 빨리 벗어나고 싶어 하는데, 그 사람이 방해인 거 같아서. 아냐?”

경환 형은 연신 내 얼굴을 살피며 혹시 자신이 잘못 판단한 것인지 물었다.

경환 형의 말을 듣는 순간 긴장이 풀리면서 아무렴 어떤가 싶어졌다.

일행을 만나기로 한 것도 사실이니 그걸로 뭐라 하진 못하겠지.

“아냐, 맞아. 형 고마워.”

형에게 그 불길한 푸른 불빛에 대해 말할 수는 없다.

헛걸 본다고 잘못 이야기가 전해지면 어떤 조치가 취해질지 알 수 없으니까.

아마 누나나 팀장님이 들으면 기가 허한 모양이라고 또 영양식이나 보약을 구해 올 수도 있었다.

그 자리에 경환 형이 함께 있어서 다행이었다.

아마 나 혼자 그 사람을 상대해야 했다면, 무어라 제대로 말도 못 하고 벗어나지도 못했을 테니까.

“가자.”

“응, 우리 모지리들 보러 가자.”

아무것도 묻지 않고 날 우선시 해줘서 고맙다고, 직접 말할 수는 없었지만 전해졌다고 믿었다.

눈을 마주한 형이 씩 웃었으니까.

다행히 멤버들과 무사히 만났고, 그 시간 동안 무슨 짓을 당한 건지 형들 얼굴이 퀭했다.

반면 세빈이 얼굴은 마치 깐 달걀처럼 반질반질한 것이 무척 흡족한 시간이었던 듯했다.

호텔로 돌아가자마자 평소 컨디션으로 돌아온 찬이는 우리에게 어서 이야기를 풀어보라고 닦달했다.

이렇게 멀쩡할 거였으면 같이 나갔으면 좋았을 것을.

약 먹고 한숨 푹 자니 괜찮아졌다던 찬이는 세빈이와 신난 목소리로 한참 종알거렸다.

나중에는 꼭 다 같이 구경하러 가자며 아쉬운 마음을 털어낸 찬이.

웬일로 세빈이도 꼭 같이 구경하러 가자고 재밌는 게 많았다며 둘이 새끼손가락까지 걸면서 약속했다.

저 둘이 사이좋은 날이 무척 드문데….

경환 형과 둘이 다녀온 나는 우진 형을 만나자마자 이유 모를 검사를 받아야 했다.

차 조심했냐, 이상한 사람은 안 만났냐, 둘이 별일 없었냐 등.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다 훑어본 우진 형은 둘 다 멀쩡한 걸 확인하고서야 안심하는 눈치였다.

어리둥절해 하던 나와 경환 형이 방송국에서 봤던 그 영 능력자를 만났다고 했을 때는 조금 놀라기도 했다.

어떻게 했냐는 질문에 내 컨디션이 별로라 후다닥 빠져나왔다고 하니, 잘했다고 칭찬하기도 했다.

그 후에 소현 팀장님을 만났을 때도 비슷한 검사를 당해야 했다.

평소에도 우리 안전에 많이 신경 쓰고 있다는 건 알지만, 오늘은 조금 과했기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우리가 모르는 뭔가가 있는 듯했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마지막 일정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온 우리.

꽤 늦은 시간이었는데도 기다려준 솜뭉치들이 있어서 안쓰러우면서도 걱정됐다.

카메라를 포잉이 죄다 고장 낸 덕분인지 출국 당시 보였던 사생들은 보이지 않았다.

물론 그들 말고 다른 사생이 새로 나타났지만, 무사히 회사로 돌아올 수 있었다.

바퀴벌레인가…?

도대체 어디서 또 나타나는 거야.

그동안 몸이 근질거렸던 건지 회사 도착하자마자 연습실로 달려간 멤버들.

그래 놓고 한 타임 연습이 끝나자 숙소로 도망갈 걸 그랬다며 다들 죽는소리를 했다.

우리끼리 연습하던 도중, 아직 회사에 계셨던 건지 제영 쌤이 오셨다.

우리를 지그시 바라보던 제영 쌤은 도대체 일본에서 뭘 먹고 온 거냐며 혀를 찼다.

고작 며칠 사이에 둔해진 것 같다면서 연습을 늘려야겠다고, PT 쌤에게도 말할 거라고 하셨다.

사색이 된 우리가 우는 시늉을 하자 내일을 기대하라는 말을 남기고는 사라진 제영 쌤.

시무룩해진 우리는 일본에서 별로 안 먹었는데, 하면서 먹었던 메뉴를 하나하나 세어보았다.

그러다 음식의 수가 양 손가락을 넘어가는 순간.

모두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아, 우리가 잘못했구나….

비척거리며 우리가 숙소에 도착한 순간, 때마침 포잉도 요정계에서 돌아왔다.

무언가 할 말이 많은 얼굴을 한 포잉을 본 나는 피곤해서 일찍 쉰다고 말하고는 후다닥 방으로 들어왔다.

‘포잉, 무슨 일이야?’

‘너 나가서 괜찮았음?’

평소보다 지친 얼굴을 한 포잉에게서는 오래된 책에서 나는 종이 냄새가 났다.

오늘 종일 공부한 건가?

나 때문에 포잉이 고생한 것 같아 뭉클한 마음에 포잉을 꼭 껴안았다.

물론 곧바로 포잉의 솜방망이에 얻어맞고는 얌전히 놔주었다.

‘아, 나 그 푸른 불빛 봤어. 보고 너무 소름 돋아서 도망치느라 바빴지….’

‘그거 뭐 닮은 것 같음?’

포잉은 심각한 얼굴로 내게 물었고, 이해하지 못한 나는 포잉에게 되물었다.

‘뭐 닮았냐니?’

‘동물이나 사람이나 물건이나 뭐든 간에.’

‘형태가 있냐는 얘기지?’

여태까지 그냥 불빛의 덩어리로만 느꼈던 터라 포잉에게 말하려던 순간, 무언가 떠올랐다.

‘시선, 시선이 느껴졌어.’

‘시선?’

‘응. 형태는 모르겠어. 근데 지금 생각해보면 누가 날 쳐다보는 느낌이 들었어.’

애당초 사람이라고 하기엔 덩어리가 작았고, 어떤 형태를 이뤘다기보다는 그냥 불꽃 같았다.

그런데도 누군가 쳐다보는 것처럼 시선이 느껴져서 더 무서웠으니까.

대답을 들은 포잉이 심각한 얼굴로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그러다 내가 빤히 쳐다보는 것을 느낀 건지 한숨을 폭 내쉬며 느릿하게 말을 꺼냈다.

‘장로 영감이랑 이야기했는데, 몇 가지가 의심스러워서 고서를 뒤지느라 오래 걸렸다.’

‘응, 괜찮아. 포잉이 비행기 안 타서 다행이지 뭐.’

포잉이 비행을 힘들어하는 것을 알기에 가만히 포잉의 등을 쓰다듬었다.

보들보들하고 따뜻한 털이 손에 감기면서 내 마음도 한결 따뜻해졌다.

‘정확한 건 아니지만 타락한 소원 요정이 나타날 때의 정황이랑 몇 가지가 일치해서 더 경계하기로 했다, 이 모자란 계약자 놈아.’

‘내가 모자라서 그런 게 나타난 건 아니잖아!’

억울함을 담아 투덜거려보았지만, 이렇게 불안해하는 포잉은 처음이기에 쓰다듬는 걸 그만두지는 않았다.

‘괜찮을 거야, 포잉. 우리 포잉 님이 날 지켜줄 테니, 포잉은 내가 지켜줄게.’

내 안위를 걱정하는 포잉의 모습에 어딘지 뭉클해진 마음으로 속삭였다.

‘넌 얌전히 가만히 안전하게 있는 게 도와주는 것임.’

하지만 오늘도 어김없이 칼 같은 포잉의 철벽에 튕겨 나왔다.

이 한결같은 요정 같으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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