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아이돌의 꽃길을 위해 (406)화 (406/456)

406. 물 만난 물고기(5)

어딘지 모르게 오싹한 느낌이 드는 푸른색은 내 눈에만 보이는 건가 싶어 눈을 깜박거렸다.

희미하게 일렁이던 불빛은 이내 착각이었다는 듯 금방 사라져버렸다.

‘뭐지?’

방송 중이라는 걸 잊지 않기 위해 그쪽으로 시선을 두지 않으려 애썼다.

[정신을 차리니 스태프 한 명이 없는 걸 뒤늦게 눈치챘어요. 급히 남자 몇 명이 스태프 이름을 부르며 찾기 시작했죠. 하지만 조명도 망가지고 사람들은 지쳐있었어요. 핸드폰 불빛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저희가 너무 늦어버린 거죠.]

[설마 그 스태프분 위험한 일을 당한 건가요?]

어두운 안색을 한 배우의 모습에 MC는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간신히 그 스태프를 찾았을 때, 그는 눈이 풀려있었습니다. 다리가 부러져 기괴한 방향으로 꺾여있었는데 고통을 못 느끼는 것처럼 보였어요.]

배우분의 이야기가 정점을 찍던 그때, 그분 뒤쪽에서 다시 푸른 빛이 아른거렸다.

‘포잉, 여기 뭔가 있어….’

‘응?’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식은땀이 흐르고, 손이 체했을 때처럼 차갑게 식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주변을 둘러보던 포잉은 하얗게 질렸을 내 얼굴을 보더니, 심각한 얼굴로 주변을 훑었다.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못할 것들만 있는데….’

[병원에서 간신히 정신을 차린 그 스태프는 한참 만에 한마디를 중얼거렸습니다.]

[뭐라고 했죠?]

[푸른 빛을 조심해야 한다고….]

[도깨비불인가요?]

정확한 건 모르겠다며 고개를 젓던 배우가 푸른 빛이라고 언급한 순간, 나도 모르게 흠칫 몸을 떨었다.

[환 군, 무척 몰입했나 봅니다. 안색이 좋지 않아요. 걱정 안 해도 괜찮습니다, 우리에겐 켄타 선생님이 계시니까요.]

MC는 초대된 영 능력자를 언급하며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포잉은 별로라고 했던 저 켄타라는 사람을 이들은 꽤 신뢰하고 있는 듯했다.

내 상태가 어지간히 좋지 않아 보였던지, 준이 형이 내 손을 꼭 잡아 왔다.

[너무 실감 나게 이야기해 주셔서 몰입해버렸어요.]

따뜻하게 다가오는 체온에 겨우 정신을 차렸다.

멤버들에게 괜찮다고 웃어 보이며 더듬거리며 어설픈 일본어로 더듬더듬 답했다.

팀장님은 잘했다는 듯 눈빛으로 바라봐주셨다.

어설프더라도 일본어를 사용하는 모습을 보이는 건 긍정적인 시선을 모을 수 있다고 하셨다.

[환이는 무서운 이야기에 약해요. 물론 평소에는 용감한 편입니다.]

준이 형은 내 손을 꼭 잡은 상태로 내 편을 들어주었다.

역시 준이 형밖에 없네….

‘계약자야, 아무래도 조금 더 조사해봐야겠음.’

‘뭐가 있는 거야?’

‘뭐가 됐든 내가 있는 이상 네게 해를 끼치진 못함.’

‘포잉이 위험하면 어떡해?’

걱정스러운 내 말은 포잉의 코웃음 한 번에 사라졌다.

금방 돌아오겠다고, 꼭 다른 멤버들과 붙어있으라며 잔소리를 늘어놓는 포잉.

포잉은 주변을 수색하면서 이상한 기운을 느꼈다고 했다.

호의적인지 악의를 품고 있는지도 판단되지 않는, 방금까지는 여기 없었던 이상한 기운.

제대로 확인해본 후 말해줄 테니 걱정하지 말라는 말을 남기고 포잉은 모습을 감추었다.

언제나 포잉이 나를 지켜줄 거라는 믿음이 있었기에 떨리던 몸도 알 수 없는 공포도 떨쳐낼 수 있었다.

한 번도 이런 걸 본 적 없는데 갑자기 무슨 일이지?

무언가 내가 알 수 없는 일이 생기는 건가 싶어 마음에 아주 작은 불안이 자라기 시작했다.

어서 포잉이 알아내서 이 불안을 뽑아내 주길 바라면서 다시 촬영에 집중했다.

* * *

모습을 감췄던 포잉의 표정은 심각했다.

지환이 걱정할 걸 알기에 아무것도 아니라고 평소처럼 시큰둥하게 말했지만, 아무래도 이상한 기분이었다.

기본적으로 포잉은 일정 범위에 있는 생명체를 알아챌 수 있었다.

아니, 생명체가 아니라 그저 존재하는 것이라면 대부분 알 수 있다.

흔히 인간들이 귀신이라고 부르는 그런 잔재들도 느낄 수 있으니까.

하지만 지환이 봤다는 푸른 불빛을 포잉은 보지 못했다.

희미하게 공기 중에 남은 낯선 향만 맡았을 뿐.

인간들이 말하던 도깨비불 같은 건가?

하지만 누군가 수작을 부린 거라면 그 대상의 기척이 있어야 하는 데 그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미간을 잔뜩 찌푸린 포잉은 종종거리는 걸음으로 스튜디오부터 주변을 돌아다녔다.

무어라 표현하기 힘든 희미한 향을 쫓아가던 포잉은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방송국의 로비에서 그 향이 뚝 끊겼다.

이상한 일이었다.

사람이든 무엇이든 움직인다면 그 흔적이 남는다.

물론 계약자를 두고 너무 멀리 나갈 생각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잘라내듯 향이 끊기는 건 자연스럽지 못했다.

이런 장난질을 벌인 존재가 무엇이든 오늘은 여기까지인 듯했다.

무엇보다 자신의 계약자를 노리는 건지 아니면 스튜디오 안의 다른 이를 노리는지도 알 수 없었다.

한숨을 푹 내쉰 포잉은 날카로워지는 신경 탓에 주변을 다시 한번 살폈다.

역시 무언가 걸리는 것은 없었다.

‘이놈의 방송국은 저쪽이나 이쪽이나 비슷하네.’

워낙 많은 사람이 오가서 그런 건지, 아니면 그만큼 격렬한 감정들이 쏟아지는 곳이어서 그런지.

포잉은 사실 방송국에만 오면 불쾌했다.

워낙 많은 향이 뒤섞이니 코도 온전히 믿기 힘들었고, 건물 전체에 스민 감정들이 지나치게 무거웠다.

‘끄응….’

건물 전체를 둘러본 포잉은 향이 사라진 로비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몸을 돌렸다.

어쨌든 계약자의 곁을 너무 오래 비우는 건 좋지 못했다.

조만간 요정계에 또 가봐야 할 일이 생긴 것도 포잉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타박타박 걸어가던 포잉은 무언가 생각난 듯 핸드폰을 닮은 기기를 꺼내 옥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옥사에게도 물었으니 무언가 아는 게 있다면 공유해줄 터.

포잉은 조금이라도 더 익숙한 한국으로 빨리 돌아갔으면 하면서 지환 곁으로 돌아왔다.

계약자의 안색이 나아졌지만, 아직 창백하긴 마찬가지라 뚱하니 바라봤다.

포잉을 보자마자 환하게 밝아지는 얼굴을 보고 있자니 혼을 내기도 애매했다.

한결같이 자신을 믿고 있는 저 시선을 받은 이상 어떻게든 해결해야 했다.

이건 소원 요정으로서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가 돼버렸다.

역시 자신의 계약자는 여러모로 손이 너무 많이 갔다.

* * *

한편 옥사는 포잉의 메시지를 받고 콩콩 뛰어서 포포에게 갔다.

포잉은 모르겠지만 옥사는 포잉에게 이런저런 사진이나 연락이 오면 포포에게도 알려주었다.

포포가 포잉을 많이 아끼는 것을 알기에 한 행동이었다.

“포포님, 포잉이 이상한 일을 겪은 것 같아요.”

“오, 옥사 왔느냐. 이번엔 그 사고뭉치가 또 무슨 일을 겪었기에….”

느릿하게 몸을 일으켜 옥사를 반긴 포포는 옥사의 이야기를 듣고 미간을 왈칵 일그러트렸다.

“소원 요정이 기척을 느끼지 못했다고?”

“무슨 일이 있는 걸까요?”

하얀 토끼인 옥사가 걱정스러운 듯 포포를 바라보자, 포포는 이내 표정을 관리하고 옥사를 다독였다.

워낙 마음이 곱고 착한 아이라 동기를 걱정하는 마음도 그만큼 컸다.

게다가 아직 확실시된 것이 없는데 어린 요정을 겁먹게 할 수는 없었다.

포잉의 짧은 메시지만으로는 무어라 단정 짓기 어려웠다.

영 좋지 못한 기분이 들었지만, 포잉은 동기들보다 모든 면에서 뛰어났다.

게다가 자신의 계약자를 아끼니 무모한 짓도 하지 않을 터.

포포는 매번 필요할 때만 찾아오는 괘씸한 포잉을 떠올리며 혀를 찼다.

“별거 아닐 게다. 나중에 포잉을 불러다 내가 자세히 묻도록 하마. 그나저나 네 계약자는 요새 어쩌고 있는 게냐.”

포포는 자신이 해결해줄 테니 걱정 말라고 옥사를 달랜 후, 옥사의 계약자에 관해 물었다.

요정족의 아이와 계약하게 된 옥사는 장난꾸러기인 요정 아이 때문에 정신이 없다며 웃었다.

요정 아이는 수호 요정이 되고 싶다며 마법 연습에 열을 올리고 있다고 했다.

심지가 굳은 아이는 혼혈이라 배척받으면서도 옥사의 보살핌 아래 잘 자라고 있었다.

포포는 새하얀 옥사의 털을 얼룩덜룩하게 만들었던 계약자를 떠올리며 웃었다.

“고 녀석 제법 일 인분을 해나가고 있는 모양이구나.”

“네. 말은 좀 삐딱해도 정말 착한 아이예요.”

자신의 계약자를 애틋하게 여기는 건 소원 요정의 특징이기도 했다.

처음에는 서로 낯을 가리다가도 함께 붙어 지내는 시간이 길어지니 정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 저를 찾는 모양이에요. 가볼게요!”

“오냐. 조심해서 다녀오너라.”

옥사의 하얀 귀가 쫑긋했다.

포잉이 향을 잘 맡는다면, 옥사는 잘 들었다.

어디에 있어도 계약자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포포는 옥사에게도 늘 그렇듯 다녀오라는 인사를 해주었다.

모든 소원 요정 아이들이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하는 인사였다.

옥사가 사라지고 난 뒤, 포포는 포잉의 일을 다시 생각하기 시작했다.

푸른 불빛, 끊어진 기척.

오래 살아온 만큼 포포가 가진 기억은 방대했다.

눈을 감고 기억을 뒤적이던 포포는 오래전 있었던 슬픈 기억이 떠올랐다.

“설마, 그것들은 아니겠지….”

불길한 방향으로 뻗어나가던 기억을 멈춘 포포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래도 대비를 해두어 나쁠 것은 없겠지.”

포포는 포잉에게 한번 찾아오라는 호출을 보내둔 뒤, 다른 장로들을 찾아 움직였다.

* * *

“아니, 왜 또 내 방에 모이는 건데요….”

“같이 밥 먹자고.”

긴장한 상태로 촬영을 끝내고, 이리저리 우리를 재보는 시선을 잘 넘겼다.

그 후 이어진 인터뷰도 다행히 큰 무리 없이 넘겼고.

소현 팀장님이 옆에 있으니 여러모로 든든했다.

질문이 이상하면 바로 그 자리에서 정정을 요청하는 모습이 얼마나 멋있던지.

인터뷰에서 은근슬쩍 악플러 사건과 친가 사건을 두고 캐물으려는 기색을 보였다.

나는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지만, 준이 형과 경환 형의 얼굴이 굳은 걸 보니 꽤 예의 없는 질문이었던 것 같았다.

소현 팀장님은 그 자리에서 사전에 협의가 이뤄지지 않은 내용은 대답할 수 없다고 선을 그었다.

그 기자는 회사와 협의가 끝났다고 넘어가려다 소현 팀장님이 일반 통역사가 아님을 밝히자 낭패한 얼굴을 했었다.

지친 몸을 이끌고 겨우 숙소에 도착한 나는 들어오자마자 욕조에 몸을 담갔다.

긴장하느라 빳빳해진 몸을 따뜻한 물에 풀고 흐물흐물하게 녹아내린 행복한 시간.

그 사이 포잉은 자신이 쫓았던 일을 설명해주었고, 조금 더 지켜보자고 했다.

우리에게 해를 입히는 게 아니라면 관심 두지 말자고.

더 자세한 내용을 알아 오겠다고 말한 뒤, 포잉은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그렇게 축 늘어진 내가 침대에 누우려던 순간이었다.

문밖에서 들리는 우진 형의 목소리에 의심 없이 문을 열어준 게 화근이었다.

문을 열자마자 멤버들이 양손에 음식을 들고 우르르 내 방으로 들어왔고, 결국 이 꼴이 났다.

“식구끼리는 밥 같이 먹는 거라고 했잖아.”

“그래, 내가 잘못했다….”

찬이가 모처럼 맞는 말을 했기에 거절할 명분도 사라졌다.

입맛이 없었기에 저녁은 거르겠다고 우진 형에게 말했었지만, 멤버들이 조른 모양이었다.

“이제 얼굴색도 돌아왔네.”

“형, 이제 안 아파요?”

“응. 괜찮아. 긴장해서 그래.”

영빈 형은 내 얼굴을 살폈고, 세빈이는 옆에 찰싹 붙어서 손을 조물딱거렸다.

아까 촬영 때 상태가 안 좋아 보였던 것 때문에 멤버들이 걱정한 모양이었다.

차마 헛걸 보았다고 말할 수 없었던 터라 긴장해서 그런 거라고 둘러댔다.

준이 형이 한참을 잡아주고 있었는데도 손에 찬기가 돌았다.

놀란 멤버들은 내 손을 쥐고 주물렀다.

이렇게 또 걱정을 끼친 것 같아 미안했지만,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내가 그렇게 대할 때마다 우리 애들이 얼마나 속상해하는지 지금은 아니까.

“억지로 먹지 말고 조금만 먹어. 빈속에는 약 먹으면 안 좋으니까.”

“네. 조심해서 먹을게요.”

“내일은 더 부지런히 움직여야 하니까 밥 먹고 일찍 누워.”

경환 형이 미역국을 내 쪽으로 밀어주었고, 준이 형은 고기반찬을 내 앞에 두었다.

“우린 역시 한식이 더 좋은 거 같더라고.”

신기하다고 이것저것 일본 음식을 먹었던 멤버들이 한식을 들고 왔다.

각자 밥을 들고 방긋 웃는 멤버들을 보고 있자니, 피식거리며 웃음이 새어 나왔다.

“어휴, 진짜 내가 못산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우리 애들이 역시 내게는 제일 좋은 약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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