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4. 물 만난 물고기(3)
정균은 이전 지인과 함께 갔던 무속인을 다시 찾았다.
국내에 어느 정도 기반을 다지면 해외 진출하는 건 거의 필수처럼 여겨졌다.
그러니 언래블도 더 큰 세계를 알아가는 게 당연한 순서.
하지만 이상하게 불안한 마음이 들어 그나마 안면이라도 있는 곳을 찾았다.
당집 앞에 서니 기웃거리지 말라는 말이 문득 떠올랐지만, 그보다 마음의 불안이 더 컸다.
그렇게 잠시 뒤에 만난 무속인은 정균을 보자마자 얼굴을 왈칵 찌푸렸다.
“너는 오지 말라고 했잖아.”
“여쭤볼 게 있어서 왔습니다.”
한숨을 푹 내쉰 그녀는 자세를 고쳐 앉고 무언가 알 수 없는 말을 홀로 중얼거렸다.
말을 꺼내 보지도 못한 정균은 왜 이렇게 자신만 보면 한숨을 푹푹 쉬는 사람들이 많은지 슬퍼졌다.
자신의 아내도, 정윤 실장도, 하다못해 소현 팀장도 자신을 보면 한숨부터 내쉰다.
그나마 웃어주는 건 이사들이나 비즈니스 상대들뿐이니 울적해졌다.
이것이 중년 우울증인가 하는 생각에까지 빠지던 그때.
“바다 건널 거지?”
“네?”
“멀지는 않고 그러면 일본이겠네.”
“어, 어떻게 그걸….”
방금까지의 우울함이 홀랑 날아간 정균이 눈을 크게 뜨자 무속인이 담담히 자신의 할 말만 했다.
“불을 조심해야 한다. 작은 불이지만, 커질 거야.”
“불이요?”
“너희 애 중에 여름에 태어난 아이가 있지?”
잠시 멤버들의 생일을 곰곰이 따져보던 정균이 고개를 끄덕였다.
힘찬의 생일이 8월 5일이었다.
“걔랑 귀한 분이 보호하는 아이가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해.”
“저…. 그러면 부적 같은 건 없어도 되는 겁니까?”
“아무 때나 부적 쓰는 거 아니다. 그냥 되도록 애들 흩어지게 하지 말고 조심히 다니기만 해.”
무속인은 그 후로 몇 가지 간단한 주의사항만 일러주었다.
흔히 엄마들이 잔소리하듯 음식 가려먹고, 차 조심하고, 절대 낯선 사람을 따라가면 안 된다는 그런 이야기들.
정균은 원래 점을 보는 게 이런 건가 싶어 고개를 갸우뚱하면서도 알았다고 했다.
점이라고는 이전에 왔다가 오지 말라고 한 소리 들은 게 전부였기에 알기 어려웠다.
복채를 내밀어도 극구 거절하더니 정 신경이 쓰이면 덕이나 많이 쌓으라고 했다.
참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던 정균은 그길로 회사로 달려가 정윤과 소현을 불렀다.
둘을 불러다 자신이 겪은 일을 설명하자, 고개를 갸웃거리던 소현이 입을 열었다.
“찬이랑 환이 일정을 같이 잡으라고요?”
“둘은 절대 떨어트리지 말래. 힘찬이 여름 태생 맞지?”
“네. 일단 알겠습니다. 가서 대부분 단체 스케줄이니까 대표님도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저도 같이 가니까 너무 염려 마세요.”
이번 일정에는 정윤과 소현도 포함되어 있길래 정균은 그나마 마음이 놓였다.
둘은 일 처리도 꼼꼼하고 워낙 믿고 있는 사람들이었으니까.
“그래, 그럼 내가 정 실장이랑 김 팀장만 믿을게요. 어차피 얼굴 트러 가는 거니까 다치지 않는 걸 최우선으로 합시다.”
일본 아이돌 계가 둘로 나뉘어 대우가 극에서 극이라는 건 유명했다.
아이돌에 관한 생각 자체가 한국과 다른 점이 많으니 조심해서 나쁠 건 없다고.
모여 앉아있던 세 명 모두 조금 더 신경 써야겠다고 생각하며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 * *
“더워!”
“더운 건 한국도 더운데 습하다….”
일본 첫 스케줄은 간단한 인터뷰였다.
첫 비행에 대한 기대와 설렘도 잠시, 인천공항에 도착한 우리는 생각보다 많은 팬이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출국 사실을 어떻게 알고 있는지도 궁금했지만, 정보란 게 어디서든 새어 나간다는 걸 알기에 묻었다.
공항 패션으로 유명한 선배님들을 떠올리며 그래도 사람같이 챙겨입고 나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늘 옷에 관심이 많았던 막내 둘은 한참을 쑥덕거리더니 옷을 골라냈다.
준이 형은 이리저리 쫓아다니며 꼭 챙겨야 할 것들을 말하기 바빴고.
나는 상비약을 챙겼다.
매니저 형들이나 회사 분들이 챙기겠지만, 그래도 불안하니까.
그러면서 평소 입던 옷을 챙기려 했다가 막내들이 달려왔다.
우리 둘의 옷은 자기들이 챙기겠다고.
경환 형에게는 세빈이가, 내 옆에는 찬이가 붙었다.
둘 다 너무 옷을 대충 입는다고 어찌나 잔소리하던지.
그나마 앙퀴라 광고 계약 당시 선물 받은 옷들이 있는 게 천만다행이라고 한숨을 푹 내쉬기도 했다.
그 둘의 기세에 질린 나와 경환 형은 얌전히 막내들이 골라준 옷을 챙겼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준이 형과 영빈 형이 신나게 웃다가 경환 형이 쿠션을 던지기도 했고.
두 매니저 형과 직원분들의 보호 아래 우리는 미어캣처럼 고개만 쏙 내밀었다.
눈이 마주칠 때마다 손을 흔들고 환하게 웃어주는 솜뭉치들.
“조심히 다녀와, 얘들아!”
“맛있는 것도 많이 먹어!”
여러 목소리가 귓가에 섞여 들어왔지만, 우리는 웃어주는 것 외에는 대꾸하지 못했다.
그저 준이 형만 우리 대표로 미리 준비했던 멘트를 짧게 전했다.
고맙고, 조심해서 다녀오겠다고. 주변에 폐가 될 수 있으니 조금씩 서로 조심해달라고 뜻을 전했다.
더 큰 혼란을 만들어낼까 걱정했는지, 회사 분들은 팬들에게 반응하지 말 것을 요청하셨다.
흥분한 팬들이 밀고 들어오면 우리를 지키기 힘들다는 이야기는 충분히 이해할만한 내용이었다.
정신없이 출국 수속을 밟고 면세점 구경하러 가고 싶다던 막내들은 사람들을 보고 포기했다.
이리저리 치이는 기분에 진이 빠진 상태로 탑승한 비행기.
형들에게 일본 간다는 말을 꺼내자마자 교육을 받았던 것들이 스쳐 지나갔다.
새벽, 골든아워, 멜트 형들은 처음 비행기 탄다는 우리를 신나게 놀려먹었다.
오래된 농담을 꺼내기도 했지만, 세빈이의 질색한 얼굴에 얌전해지기도 했고.
지금 시대에 신발 벗고 타야 한다는 말을 누가 믿어….
점점 표정도 말하는 것도 자유분방해지는 세빈이가 걱정됐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착하지 뭐.
사생들과는 절대로 눈도 마주치지 말라는 말은 세 그룹 형들이 공통으로 했던 말이었다.
조금이라도 시선을 주면 더 찰거머리처럼 달라붙는다고.
다행히 정윤 실장님, 소현 팀장님, 두 매니저 형들이 함께 탑승해서 최대한 우리끼리 붙을 수 있었다.
포잉은 비행에 거부감을 보이면서도 공항에서 무작정 곁으로 다가오는 사람들 모습에 치를 떨었다.
도대체 무슨 정신머리로 저런 짓을 하냐고 사람인 내게 물었지만 해줄 대답이 궁색했다.
공항 보안 요원들이나 다른 승객들에게 민폐를 끼치는 모습에 할 말을 잃은 건 모두가 마찬가지니까.
못마땅한 기색을 감추지 않던 포잉은 무언가 결심한 듯 앞발로 내 머리를 탕탕 쳤다.
그렇게 찍고 싶어 하는 사진을 죄다 망가트리면 되겠다고.
‘그래도 괜찮아?’
혹시 또 다른 요정들에게 혼날까 싶어 걱정스레 바라봤지만, 콧방귀만 뀌었다.
나에게 악영향을 끼치는 사람들에게는 자신도 대응할 수 있다고.
얌전히 자신의 실력이나 보라고 씩씩하게 외쳤다.
그리고 얼마 후, 주변 사람들을 밀고 카메라부터 들이밀던 몇 명이 비명을 질렀다.
무슨 일이냐고 포잉에게 물었더니, 몇 가지 장난을 쳤다고 했다.
카메라가 고장 났을 거라고.
일부는 귀신같은 무서운 것도 보았을 거라며 속삭이는 목소리가 즐거워 보였다.
하지만 비행기에 탑승한 직후부터는 불안해하며 작은 몸을 웅크리고 내 품에 안겨있었다.
발이 땅에서 떨어지면 불안하다고 조그맣게 투덜거리던 포잉.
본인이 허공을 밟고 날아다니는 건 괜찮지만, 다른 무언가에 의지하는 상황은 걱정된다고 했다.
조용히 포잉을 토닥이며 눈을 감았다.
여전히 주변에서는 여러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내게 의미 없는 소리라 귀에 담지 않았다.
포잉이 그들의 카메라를 전부 망가트렸으니 사진 찍힐 일도 없을 테고.
그렇게 출발부터 다사다난했던 일정이 조금 불안했지만, 다들 겪는 일이라고 흘려 넘겼다.
형들이 이야기해 준 케이스들은 이것보다 훨씬 심했으니까.
일본 공항에서도 우리 팬분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말에 괜히 가슴이 찡해지기도 했다.
다행히 단단히 준비해둔 회사 분들 덕분에 우리는 큰 어려움 없이 낯선 땅을 지날 수 있었다.
인터뷰를 위해 만났던 분도 친절했고, 두 눈에는 호기심이 가득했다.
속으로는 어떨지 모르지만, 일단 우리에게 상냥하게 대했기에 거기까지만 알고 가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그 속내를 알아본다고 어떻게 할 수도 없으니까.
그런 상황을 겪고, 낯선 거리와 어딘지 모르게 다른 느낌의 사람들을 마주하니 실감이 났다.
정말 여긴 한국이 아니구나.
[일본에서도 언래블은 대단히 인기 있는 그룹입니다. 처음 일본에 온 소감은 어떻습니까?]
인터뷰의 첫 질문이었다.
“아직 많은 부분을 보거나 느끼지 못했지만, 공항에서 기다려주신 팬분들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하나같이 사랑스러운 눈으로 우리를 바라봐주셔서 감동했어요.”
인터뷰를 맡은 준이 형이 차분하게 대답했다.
일본어를 공부해왔지만, 능숙하게 사용할 수 있는 건 준이 형과 경환 형뿐이었다.
경환 형의 일본어 실력에 찬이가 언제 혼자 공부했냐고 배신감을 쏟아내기도 했다.
‘그러게 열심히 공부했어야지.’
하고 찬이를 놀리던 경환 형의 얼굴에는 모처럼 승자의 미소가 떠올랐다.
매번 찬이랑 비슷한 수준으로 취급받던 형이 형다운 위엄을 보였다고 생각했던 걸까.
하지만 그 덕분에 사이에 낀 영빈 형만 슬픈 얼굴을 했다.
일본어는 좀처럼 입에 붙지 않아서 힘들다고.
울적해진 영빈 형을 달래는 것도 결국은 내 일이었다.
형은 우리 그룹의 기둥이니 노래에만 전념해도 충분하다고 열심히 둥기둥기 했었지….
우리 애들은 여러모로 손이 많이 가는 애들이라니까.
[언래블은 팬들에게 굉장히 다정하고 상냥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남자다운 멋도 있는데 상냥하기까지 해서 성별을 가리지 않고 팬이 많아요.]
인터뷰어는 시종일관 좋은 이야기를 해주었고, 주로 일본 팬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의외인 건 남성 팬분들이 많다는 이야기였다.
한국에서도 팬 사인회에 와주시는 남성 팬분들이 꽤 있었다.
하지만 인터뷰에서 직접 언급할 정도면 그보다 수가 많은 듯했다.
[일본 팬들을 위한 일본 앨범을 발매할 예정은 없습니까?]
일본어로 준비된 앨범의 소식을 넌지시 묻자, 경환 형이 입을 열었다.
“팬분들을 위해 여러 가지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아직 단정 지어 말씀드리긴 어렵지만….”
무언가 말할 듯 말 듯 말을 아끼자, 인터뷰어는 냉큼 뒤에 말을 재촉했다.
[준비 중이라는 건가요? 이른 시일 내에 좋은 소식이 있다고 기대해봐도 좋을까요?]
“네. 조만간 팬분들에게 선물해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멤버들과 회사 분들 모두가 힘내고 있습니다.”
둘의 활약으로 인터뷰는 성공적으로 끝낼 수 있었다.
숙소에 짐을 풀기도 전에 인터뷰부터 하고 와야 했기에 멤버들은 조금 지친 기색이었다.
현지 업무 대행을 위해 계약한 회사 사람들은 한국어를 할 수 있었지만, 낯을 가리는 멤버들은 그들과의 대화를 불편해했다.
그런 멤버들을 챙기고 달래느라 두 배는 더 바빠진 준이 형과 우진 형.
찬이와 세빈이는 내 옆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어쩐지 처음 데뷔 준비할 때가 떠올라 나도 모르게 웃었다.
그때 내게는 모든 것들이 낯설었는데.
그렇게 생각하니 낯선 땅에 있다는 두려움이 어느 정도 사그라들었다.
이제 낯선 환경에 적응하는 건 누구보다 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혼자 다니다 길 잃지 말고 꼭 사람들이랑 같이 다녀라, 계약자 놈아.’
물론 포잉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