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아이돌의 꽃길을 위해 (403)화 (403/456)

403. 물 만난 물고기(2)

언래블이 설명해주는 언래블의 세계관!

환한 빛과 함께 뮤직비디오에 줄곧 등장했던 검은 문이 앙증맞게 그려져 있는 화면이 떠올랐다.

딩동 거리는 경쾌하고 발랄한 느낌의 단순한 멜로디가 흘러나오며 화면에 언래블 멤버들의 모습이 나타났다.

- 이제 시작해요?

- 된 거 같은데?

회의실로 보이는 방 안에는 화이트보드와 원탁, 의자가 놓여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사용감이 있는 노트와 볼펜, 노트북이 있었다.

지환을 제외한 다른 멤버들은 의자에 앉아서도 신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평소 말이 적기로 유명한 경환은 힘찬과 무언가 투닥거리고 있었고, 지환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 자자, 조용.

- 네, 쌤

- 조용!

- 얘들아, 시작됐어. 제발….

동그란 안경을 쓱 끌어 올린 지환은 보드마카로 화이트보드를 톡톡 두드리며 멤버들을 조용히 시켰다.

하지만 순순히 들으면 언래블이 아닐 터.

막내들은 지금의 상황극을 반기는 눈치였다.

까르르 웃는 막내들의 모습에 영빈이 버릇처럼 한숨을 내쉬며 동생들을 불렀다.

- 시작하기 전에 오늘은 무얼 할지 설명하는 시간을 가져볼까 해요.

- 쌤, 쌤은 왜 이렇게 작아요?

- 첫사랑 얘기해 주세요!

교복을 입은 멤버들은 지환이 한마디 할 때마다 열 마디씩 쏟아낼 기세였다.

- 쌤이 첫사랑에 성공했으면 여러분만 한 아이가 있을 겁니다. 하지만 첫사랑이 없으니 아마 평생 없겠죠.

- 우우! 로망을 모르는 쌤이다!

지환은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힘찬과 경환의 질문을 피해 갔다.

지환이 키 얘기를 꺼낸 경환에게 다가가 무언가 속삭이자, 표정 변화가 적기로 유명한 경환의 얼굴이 핼쑥해졌다.

순식간에 얌전해진 경환의 모습에 하준은 흐뭇하다는 듯 웃었고, 세빈은 자세를 단정히 했다.

- 오늘은 ‘그믐달’ 뮤직비디오를 함께 시청하고, 언래블의 세계관을 조금이나마 이야기해보는 시간을 가질 겁니다.

거기까지 이야기한 지환은 방금까지의 냉랭한 얼굴은 어디 가고, 봄바람처럼 따뜻하게 웃으며 카메라를 바라봤다.

- 지금 온 솜뭉치들도 어서 앉아요. 오늘은 제가 여러분들에게 선생님이에요. 자, 선생님 해보세요.

- 선생님, 사심이 엿보이는 것 같은데요?

- 기분 탓입니다.

손을 든 하준이 짓궂게 물었지만, 지환은 칼같이 잘라냈다.

- 일단 뮤직비디오 먼저 볼 겁니다. 다들 예습해왔죠?

예습이라는 말에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지만, 지환은 굴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런 건 기대도 하지 않았다는 얼굴이라 영상을 지켜보던 솜뭉치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화이트보드 위로 스크린을 내린 지환이 노트북을 조작하고 리모컨을 누르자 스크린에 영상이 떠올랐다.

- 오…. 기분 이상하다.

- 조용히 감상해요, 좀.

- 아, 왜! 리뷰니까 소감을 이야기해야지!

힘찬이 세빈에게 속닥거리자, 세빈은 한숨을 푹 내쉬며 힘찬을 슬쩍 밀었다.

- 쌤, 저 때 진짜 졸았죠?

- 쉿, 그런 거 묻는 거 아니에요.

경환의 은근한 물음에 지환은 묵비권을 꺼내 들었다.

아무래도 정말 졸았던 모양이었다.

- 아, 저거 뭔지 궁금해하는 분들 많은데, 저 액체가 뭔지 알려주세요.

- 실제로요? 아니면 상징하는?

- 지금은 리뷰 먼저니까?

붉은 액체가 찰랑거리는 잔을 두고 그게 무엇이었는지 묻기도 했다.

체리 주스라 맛있었다며 싱긋 웃는 지환의 얼굴은 어딘가 얄미워 보였다.

- 우리 막내, 표정 연기 엄청 늘었네….

- 가야금 소리가 이렇게 좋은지 몰랐죠?

어느새 영상에 몰입한 멤버들은 자신들이 촬영한 뮤직비디오임에도 감탄하고 있었다.

중간중간 서로의 연기에 대해 칭찬하기도 하고, 이 장면이 이렇게 연결될 줄 몰랐다는 말도 하고.

그러면서 처음에는 조금 넓게 간격을 유지하던 의자가 조금씩 서로를 향해 움직였다.

- 이렇게 뮤직비디오에서 세상을 떠난 우리 화니.

- 다시 살아날 거니까 무서운 소리 하지 말고.

지환의 무덤으로 추측되는 꽃 더미 앞에서 슬퍼하는 멤버들 모습에 지환은 괜히 코끝을 매만졌다.

저 당시 지환은 자신의 분량이 없는 틈을 타 개인 인터뷰를 하느라 촬영 현장에 없었다.

멤버들이 지환이 있으면 몰입하지 못한다는 말로 등 떠민 것도 있었고.

- 형들 등짝을 보고 솜뭉치들이 감탄했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 몸 만든다고 고생했는데 좋아해 주시면 그걸로 다행이지.

- 형들이 그때 닭가슴살만 먹다가 울뻔했지?

- 넌 좀 조용히 해.

중간에 나타난 맏형들의 반나체에 힘찬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놀려댔다.

아무래도 자신들의 연기를 직접 보고 있는 게 점점 부끄러워졌는지 멤버들은 이런저런 말을 마구 꺼냈다.

마침 스크린에서는 반지를 얹어두는 장면이 흘러가고 있었다.

- 저 반지, 저희가 산 거예요.

- 의형제의 징표죠!

반지를 보고 반갑다는 듯 이야기를 나누는 막내들을 맏형들이 피식거리며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도 막내들의 의견이었던 것 같았다.

- 처음에는 세빈이가 나보다 작았는데….

- 막내는 성장기니까 이해해줘요.

지환의 서글픈 중얼거림에 세빈이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처음 작고 뽀얀 찹쌀떡 같았던 막내를 기억하는 이들 모두가 아련한 얼굴을 했다.

누군가는 고작 일 년이라고 할지 모르는 시간 동안 언래블 멤버들은 내외적으로 모두 성장했다.

특히나 이제는 형들만큼 훌쩍 커버린 세빈의 성장이 가장 눈부셨다.

이윽고 영상은 필름 감기는 소리와 함께 더 과거의 어딘가로 향했다.

- 아무래도 내가 이런 역을 맡아서 최약체라는 말도 안 되는 소문이 도는 것 같은데.

- 최약체는 맞잖아.

- 너는 진짜 조용히 해.

영상 속에서 화려한 비단 사이에 파묻힌 지환은 누가 보아도 연약하고 가녀려 보였다.

- 저 얼굴 메이크업 안 한 거예요. 여러분.

- 다른 장면에서는 했어요. 근데 저 때는 다른 색이 너무 화사해서 안 해도 된다고….

하준이 한마디 더 얹자, 지환은 변명이라도 하듯 사연을 꺼냈다.

목덜미가 붉게 물든 것으로 보아 부끄러운 듯했다.

- 아, 진짜 히스 형이랑 찬이 조합이 생각보다 훨씬 잘 어울려요.

- 맞아, 찬이도 노래 많이 늘었지.

어느새 서로 옆에 찰싹 붙어 앉은 멤버들은 영상이 끝나자 어딘가 아련한 얼굴을 했다.

- 저거 찍으면서 진짜 저희 쪄 죽을 뻔했어요….

- 너무 더운데 이게 막….

촬영 당시의 애로사항을 꺼내며 울상을 한 막내.

지환은 그런 세빈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고, 세빈도 방긋 웃었다.

- 촬영 당시의 비하인드 영상은 위캠 공식 채널에 올라와 있으니까 아직 안 본 분들은 보시면 됩니다.

금방 선생님 역할로 돌아온 지환이 차분하게 웃으며 말했고 스크린을 되돌렸다.

- 지금부터 수업을 시작합니다.

보드마카 뚜껑을 뿅 하고 열더니 진지한 얼굴로 크게 ‘그믐달’이라고 적었다.

- 감사하게도 많은 분이 그믐달 뮤직비디오 해석 영상을 올려주셨어요. 저희도 잘 보고 있습니다.

지환이 카메라를 향해 언래블에게 관심 가져주어 감사하다는 인사를 남기자, 멤버들도 고개를 꾸벅 숙였다.

- 사실 그분들이 워낙 잘 해석해주셔서 저희가 새롭게 말씀드릴 만한 건 많이 없어요.

지환은 능숙한 자세로 분위기를 휘어잡았다.

- 더군다나 저희가 이거다 저거다 하고 단정 지어서 말씀드리는 것보다 상상의 여지를 남기는 게 더 재밌잖아요?

어깨를 으쓱하며 장난스럽게 웃던 지환이 다시 화이트보드에 이스터에그라는 단어를 적었다.

- 그래서 오늘 저희는 다른 분들이 발견하지 못했던, 혹은 발견되었지만, 설명을 덧붙이고 싶었던 몇 가지 장치를 말씀드리려고 해요. 이스터에그가 무슨 뜻인지 말해볼 사람?

지환이 멤버들을 둘러보며 질문하자, 경환과 힘찬, 세빈이 손을 들었다.

- 우리 막내, 말해볼까?

- 이건 차별이야!

- 선생님은 평등해야지!

- 다 조용히 해요, 우리 막내 이야기하잖아요.

대놓고 막내를 예뻐하자, 멤버들의 반발이 있었다.

물론 지환은 꿈쩍도 하지 않았고, 세빈도 수줍게 웃을 뿐 신경 쓰지 않았다.

심지어 맏형들까지.

- 본래 요소 외에 별도로 제작자가 숨겨놓은 깜짝 놀랄만한 요소입니다.

- 잘했어요, 정답입니다.

주머니에서 사탕 하나를 꺼내 세빈이 손에 올려준 지환.

불퉁한 얼굴을 한 힘찬과 경환에게도 소포장 된 초콜릿을 하나씩 쥐여주었다.

맏형들이 ‘우리는?’이라는 얼굴로 바라봤지만, 슬며시 시선을 피했다.

아직 몸을 관리 중인 둘에게는 건네줄 수 없는 모양이었다.

지환은 그 후 차분하게 뮤직비디오에 숨겨놨던 몇 가지 아이템들을 거론했다.

마지막 장면이 촬영되었던 서재가 이전에 플루토 컨셉 포토 촬영 당시 사용한 장소와 같은 곳이라는 것.

그 안에 있는 책 중 몇 가지는 멤버들이 소장하고 있는 책이라는 것도.

평소 자신들의 사진을 SNS에 자주 올리는 언래블은 읽고 있는 책이나 그날 듣는 노래도 공유하곤 했다.

그렇게 올렸던 책들이라는 설명과 자신들에게 인상 깊었던 구절도 조금씩 이야기해 주었다.

더불어 분량상 편집됐지만, ‘samsara’ 당시 나왔던 소품과 ‘그믐달’에 나온 소품의 연관성을 보여주는 장면도 있었다고 했다.

지환의 설명 사이사이 멤버들은 솜뭉치들이 궁금해할 만한 점들을 대신 질문했다.

그렇게 모든 설명이 끝나고, 보드마카를 내려놓은 지환은 기쁜 기색을 숨기지 못하며 덧붙였다.

- 솜뭉치들이 빨리 알아줬으면 해서 말이 조금 길어졌네요. 다 같이 아이디어를 짜면서 기대했거든요. 알아채 주면 이걸로 또 같이 이야기하고 싶다고.

- 열심히 숨긴다고 숨겼는데, 역시 우리 솜뭉치들은 금방 찾아내더라고요!

- 저희가 더 열심히 공부할게요!

- 저 암호 관련된 책도 샀어요.

멤버들은 하나같이 솜뭉치들이 전부 알아차렸을 거라고 믿는 듯했다.

- 다음에는 조금 더 열심히 숨겨볼게요. 저 이런 거 좋아해요.

평소보다 환히 웃는 지환의 얼굴은 누가 보아도 진심이었다.

영상을 즐거운 마음으로 감상하던 솜뭉치들의 마음에 짐이 하나 더 얹어졌다.

영상 초반에는 분명히 자기들끼리 감탄하고 부끄러워하고 귀여움이 가득했다.

지환은 팀의 역할극에서 아예 선생님으로 역할이 굳어버린 건지 이번에도 선생님이었고.

물론 잘 어울렸고, 아주 귀여웠다.

입으로는 세상 둘도 없이 냉정하게 말하면서도 모든 멤버를 바라보는 시선은 무척 따뜻했으니까.

중간중간 오래 집중하지 못하는 힘찬이 노트를 뜯어 경환에게 던지기도 했다.

그때마다 귀신같이 눈치챈 맏형들이 뜨거운 시선을 보내고, 지환이 볼을 꼬집기도 하고.

영빈의 볼펜이 굴러떨어지자 멤버 모두가 주워주려고 동시에 일어나는 장면도 재밌었다.

언래블은 서로 동기화되어 있다고 주장하던 솜뭉치들은 눈물 젖은 솜을 흔들기도 했다.

그렇게 귀엽고 하찮고 재밌게 흘러가던 영상이 어째서인지는 마지막에 공부해야 할 것처럼 돼버렸다.

언래블은 티끌만 한 의심도 없이 솜뭉치들이 자신들보다 똑똑하다고 믿고 있었다.

영상 밑에는 무수한 솜뭉치들의 넋두리가 남았다.

[음악 공부로 부족했어…. 이제 암호학도 공부해야 해….]

[얘, 얘들아…?]

[암호학은 문과야, 이과야…?]

[교수님, 제가 수업을 잘못 들어왔습니다…!]

[뭔지 모르지만 내가 잘못했어!]

[이것의 덕질의 순기능인 것인가ㅜㅜ]

어째서인지 점점 공부해야 할 것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혼란스러운 댓글 창을 잠시 바라본 소현은 조용히 그 페이지를 닫았다.

소현도 처음 콘셉트 회의 때는 일이 이렇게까지 커질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사방에서 아이디어가 튀어나오고 그걸 정리하는 것만 해도 힘들었으니까.

피식거리던 소현은 진성을 통해 지환에게 슬며시 선을 댔던 PD와 오늘 이야기를 마무리 짓고 돌아왔다.

PD는 예정 중인 프로그램이 여행 콘셉트로 한국의 각 도시를 돌며 이야기를 나누는 내용이라고 했다.

전문가 포지션의 사람들은 섭외가 끝났고, 분위기를 살릴 사람들로 언래블을 원한다고.

시즌이 잘 되면 해외 진출 계획도 있다며 눈을 빛내며 말해왔다.

소현도 긍정적으로 보고 있었다.

특정 멤버를 고르는 게 아니라 언래블 전체 출연을 원하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바쁜 스케줄 사이에 촬영 일정을 끼워 넣기 힘들었지만, 조율도 이미 끝났다.

“일본 다녀와서 바로 촬영 들어가면 되겠네.”

새 앨범 활동의 새로운 시작은 해외 시장 공략이었다.

출연 프로그램과 일정, 모든 것은 이미 준비됐다.

소현은 다사다난했던 지난 일 년을 떠올렸다.

혼란에 익숙해졌더니, 최근 별일 없이 무사히 흘러가는 게 도리어 불안했다.

“휴, 별일 없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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