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9. Next level(3)
부끄러웠던 건지, 대꾸할 가치가 없다고 판단한 건지 누나는 내 메시지를 읽고 씹었다.
‘읽씹’ 당하다니….
큰 충격에 휩싸였지만, 그마저도 얼마 가지 못했다.
우리가 조금 더 대외 활동을 활발히 하고 싶다고 밝히자, 회사에서는 기다렸다는 듯 일감을 쏟아냈다.
처음에는 우리도 이제 방송에 많이 나올 거라고 신났었다.
솜뭉치들이 TV에서 우리를 실컷 볼 수 있게 해주자고 기합도 넣고.
하지만 그것도 한두 번이지.
처음에는 프로그램 몇 개를 보여주시더니 그다음 날에는 한 뭉치를 우리 쪽에 밀어주셨다.
공중파, 케이블 할 것 없이 회사에서 접촉할 수 있는 곳의 일은 다 뽑아온 것 같았다.
우리의 호기 넘쳤던, 그리고 무모했던 발언을 차마 다시 주워 담을 수 없었기에 남몰래 눈물을 훔쳤다.
이렇게 일에 치여 죽고 싶다는 이야기는 아니었는데….
허우적대며 일에 치이는 사이, 갑자기 활발한 활동을 하는 우리에게로 별별 기사가 다 쏟아졌다.
작년 이야기를 끌어와서 조회 수 좀 먹으려다 회사의 고소 드립에 사라진 기자도 있었고.
매번 이러저러한 콘셉트로 무대를 만들어댔더니, 컨셉돌이라는 별명도 붙여주었다.
이미 컨셉돌로 유명한 선배님들이 계셨기에, 일부 자극적인 제목에는 ‘왕위 계승’ 어쩌고 하는 드립을 쓰기도 했다.
하늘 같은 선배님과의 대립각을 자기들 마음대로 재려던 기자들도 나란히 정윤 실장님의 연락을 받았다.
그리고 음악 방송에서 실제 그 선배님들을 만나 공손히 인사를 나누기도 했다.
하필이면 찬이와 경환 형이 장난을 치고 도망가는 걸 쫓아가다가 마주치는 바람에 무척 민망했다.
실제로 마주한 선배님들은 굉장히 유쾌했다.
그럴 나이라며 자신들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고 아련한 얼굴을 하기도 했고.
한편, 기사 봤다면서 무척 즐거워하시다 갑자기 멤버 중 한 분이 어디론가 달려가서 왕관을 구해오셨다.
갑자기 달려가는 선배님 모습에 우리가 어쩔 줄 몰라 하자, 정작 선배님들은 원래 저런 애라고 태연히 웃었다.
장난감 왕관을 구해오신 분이 찬이 머리 위에 왕관을 씌워주면서 활짝 웃을 때는 정말이지 아찔했다.
이 선배님들도 소문보다 더한 분들이었다.
더불어 멜트 형님들을 통해 우리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
직속 후배가 없는 것도 아니면서 다른 회사 애들 이야기를 신나게 해서 무척 궁금했다고.
졸지에 친한 형의 아는 형을 만나는 기분을 느끼며 우리는 최선을 다해 얌전을 떨었다.
그런 우리를 보며 선배님들은 다 안다는 듯, 피식 웃었고.
다음에 같이 밥 먹자고 하시더니 내 번호를 받아 가셨다.
그걸 보고 찬이가 넌 왜 형들한테 자꾸 번호 따이냐고 말했다가 준이 형한테 또 혼났다.
예쁘게 말하라고 하지 않았냐며 찬이를 달달 볶는 준이 형이 어찌나 듬직하던지.
역시 우리 형이 최고였다.
우리가 컴백하던 주에 막방을 찍던 DCL과도 오랜만에 음악 방송에서 만났다.
휴이와 단둘이 밥을 먹었던 그 날 이후, 우리는 평소처럼 굴었다.
쓸데없는 짤을 보내기도 하고 헛소리를 날리기도 하면서.
리우 형이 휴이와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고맙다고 치킨 기프티콘을 보내오기도 했다.
치킨이라니.
늘 세상에서 치킨이 최고라고 말하던 리우 형다워서 잠시 할 말을 잃기도 했다.
한편, 이번에 컴백 시기가 겹친 드리밍 분들의 본 모습을 보기도 했다.
‘꿈꾸는 소녀들’이라는 콘셉트에 굉장히 충실한 분들이었는데….
그동안은 마주쳐도 서로 말조심하느라 인사 외에는 대화를 거의 나누지 않았다.
아무래도 걸그룹과 우리가 친하게 지내는 건 좋은 소리 못 들을 테니까.
하지만 일 년을 넘기자 본래 성격들이 나오는 건지 활달하게 인사를 해왔다.
찬이랑은 언제 서로 말을 놓은 건지, 그쪽 그룹의 비글미를 담당하는 분과 하이파이브로 인사를 대신했다.
얼빠진 얼굴을 하는 그쪽 팀 리더와 이마를 부여잡는 준이 형 얼굴이, 무척… 애잔해 보였다.
나중에 찬이를 은근히 닦달해보니 데뷔 시기가 비슷한 그룹에 한두 명씩이랑은 말을 텄다고.
플라이하이에도 친구가 있다고 했다.
컴백 주 다른 음악 방송에서 오리진 멤버들을 마주했을 때도 기분이 이상했다.
우리 대기실에 인사하러 온 오리진 멤버들.
방송에서 이미 몇 번 만나놓고도 음악 방송에서 만나는 건 이렇게 달랐다.
아무래도 본업이라는 무게 때문일까?
고작 1년 차면서 우리는 참 많은 사람과 친분을 나눴고, 인연을 만들었다.
어쩌다 보니 또래 그룹보다 형님 그룹들과 더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지만.
‘무사이’ 때 인연으로 꾸준히 교류하고 있는 분들이 있다 보니, 배우분들도 제법 많이 알고 있었고.
처음에는 이런 게 보통의 일인 줄 알았다.
아이돌이든 솔로 가수든 배우든 모두 연예인이니까.
하지만 하겸 형이 실제로 서로 깊은 친분을 나누는 사이는 별로 없다고 했다.
그 얘기를 듣고 순진한 우리 막내들은 무척 충격받은 얼굴을 했었다.
내심 짐작했던 나나 형들은 덤덤했지만.
언제 어느 방송에서 만날지 모르니 그냥 안면만 튼 정도로 지내는 거라고.
물론 방송에서는 굉장히 친한 것처럼 이야기하겠지만.
그리고 진성 형님을 통해 경우 선배님의 이야기도 들었다.
‘형님이랑 형수님이 너랑 언래블에 관심이 많더라.’로 시작된 이야기.
처음에는 무슨 이야기인가 했었다.
하지만 그 ‘형수님’이 PD라는 걸 깨닫고 캐스팅 제의라는 걸 바로 이해했다.
진성 형님이 워낙 이런 류의 이야기를 꺼리는 성격이라는 걸 알기에 의아했다.
슬며시 돌려서 여쭤봤더니 너희에게도 좋은 기회가 될 것 같았다고.
뭐라도 해주고 싶은데 자신은 친분 있는 사람들이 적어서 소개해줄 사람도 없다고 시무룩해지셨다.
여태까지 진성 형님은 늘 내게 듬직한 선배, 프로패셔널한 사람, 선이 명확한 사람의 이미지였는데.
어쩌면 생각보다 우진 형과 같은 과에 가까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이 머릿속에 뿅 하고 떠오르자마자 갑자기 형님이 무척 귀여워 보였다.
그냥 요령이 없는 편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열심히 진성 형님을 다독다독 해드렸다.
그러고 나니 진우 형이 연락해와서는 요새 자신에게 소홀하다고 투덜거리고.
그렇게 형들에게 시달리고 나면 찬이가 도끼눈을 뜨고 쳐다보는 삶.
일하든 인맥 관리하든 한시도 자유로울 수 없는, 정신없는 일상들이었다.
이리저리 휘둘린다고 포잉은 그런 모습을 못마땅해했지만, 크게 혼내진 않았다.
그래도 사람은 사람과 어울려 살아야 하는 법이라며 자신이 이해하겠다고 했다.
잠시 눈을 감고 쉬는 동안 근래의 일들이 와르르 쏟아지듯 떠올라서 피식 웃었다.
정신없다고 말을 하긴 했지만, 사실 즐거웠으니까.
이렇게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온갖 일을 겪고 과분한 사랑을 받고.
포잉에게도 부끄러워 말하지 못했지만 모두 너무 즐겁다.
잠을 좀 못 자도, 가끔은 버거워도 그래도 분명 나는 지금 삶이 즐겁다.
모든 것들이 차곡차곡 쌓이고 자기 자리를 만들고 있었다.
* * *
“화나. 정신을 좀 차리지 않을래?”
“으응? 나 졸았어…?”
분명 최근 일을 돌이켜보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았는데.
어느새 졸았는지 찬이가 날 흔들고 있었다.
“무리한다 싶었다. 자, 이거 먹고.”
“어?”
“형, 가방 이리 줘요.”
“응?”
흐릿한 정신에 어버버하는 사이 찬이는 능숙하게 주머니에서 홍삼 스틱을 꺼내 내 입에 물렸다.
뭐지? 왜 우리 똥강아지에게서 익숙한 준이 형의 모습이 보이는 거지.
우리 막내는 언제 가져갔는지 내 백 팩을 자기가 맸다.
무심코 홍삼 스틱을 물고 가방을 뺏기는 사이, 먼저 내린 경환 형이 밖에서 팔을 뻗어 나를 내려주었다.
아니, 이게 대체….
오늘의 마지막 스케줄인 라디오.
우리 출근길을 기다리던 솜뭉치들 앞에서 못 볼 꼴을 보였다는 생각에 황급히 모자를 눌러썼다.
솜뭉치들은 다 이해한다는 듯 화사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지만, 저 미소 뒤의 뜻을 이미 읽었다.
‘최약체.’
‘작고 작은 우리 환이.’
‘그래, 홍삼 먹고 힘내야지!’
‘우리 애가 또.’
등등.
점점 처음 내가 생각했던 이미지와는 백만 년 멀어지고 있는 하찮은 내 모습에 속이 쓰려왔다.
내가 그렇게 약하지 않다고 항변하고 싶었지만, 그래봤자 어떤 대답이 돌아올지 알고 있기에 참았다.
짧은 인사를 건네고 부스에 들어온 우리를 반겨준 건 키스 형이었다.
“형이 라디오를 하면 좋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진짜 하게 될 줄은 몰랐어요.”
“나도 몰랐다.”
영빈 형이 웃으며 인사를 건네자 키스 형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답했다.
예전에 키스 형에게 우리가 라디오 DJ 하면 좋을 것 같다고 말하긴 했었다.
하지만 실제로 볼 수 있을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꿈이라는 걸 꾸기에 우리는 짧은 시간 동안 김윤혁이라는 사람을 너무 많이 알아버려서.
그런데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일단 이번 주만 대타 뛰기로 한 거니까.”
“키스 씨가 생각보다 훨씬 말을 잘하더라고요.”
“형이 말은 정말 잘하죠!”
잠시 전달 사항이 있다고 들어온 작가님이 방긋 웃으며 친근하게 말을 걸어오셨다.
예전에 복도에서 우리 마주쳤을 때 인사 안 받아주셨던 분이라 더 잘 기억하고 있었다.
“준호 형이 부탁했으니까요. 어설프게 하면 실례죠.”
키스 형은 유독 형에게 사근사근한 작가님에게도 분명하게 선을 그었다.
원래 이 라디오의 고정 DJ인 선배님과 키스 형이 꽤 친한 사이라고 했다.
“어제 연수 씨도 와서 언래블 칭찬 엄청 하고 갔어요.”
“안 그래도 선배님이 꼭 들으라고 신신당부하셔서 저희도 챙겨 들었어요.”
준이 형이 부드럽게 웃으며 인사치레를 했다.
평소보다 더 방송용 미소라는 걸 아는 키스 형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입 모양으로 내게 ‘뭔데?’하고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묻기에 그저 웃었다.
우리 인사를 받지 않고 지나쳤다는 일을 이 작가님은 기억도 못 할 거라는 건 안다.
신인은 매년 수십, 수백 명이 쏟아지고 그들을 다 기억할 수는 없을 테니까.
데뷔 초와 지금의 대우를 달리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라 새삼스럽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서운한 마음이 없냐고 하면 그건 아니니까.
그저 일은 일로 하고, 되도록 즐겁게 하고 묻는 수밖에.
집요한 키스 형의 시선을 슬며시 피하며 괜히 옆에 있던 막내 의상을 툭툭 털어주었다.
약간의 대화가 오가고 스탠바이를 스태프들이 준비하는 사이.
참지 않는 키스 형이 넌지시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냐고.
영빈 형이 난처한 듯 웃으며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지만, 이럴 때만 눈치 빠른 찬이가 형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잠깐 핸드폰을 확인하는 척, 얼마나 빠른지 감탄이 나올 지경이었다.
평소에도 저렇게 빠릿빠릿하게 일어나고 눈치채고 일해주면 좋을 텐데.
테이블 위에 놓인 키스 형의 핸드폰이 깜박거렸고, 화면에 뜬 메시지를 기어코 확인한 키스 형.
묘한 미소를 짓던 형은 고개를 끄덕이며 굳이 티 내지 않았다.
이제 카메라 돌아간다는 사인이 들어오고, 부스를 가리고 있던 천도 치워졌다.
제법 두꺼운 유리 너머로 초롱초롱한 눈을 한 솜뭉치들이 보였다.
아, 이게 힐링이지.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자마자 미묘하게 처졌던 멤버들의 분위기가 확 살아났다.
그런 우리를 보며 피식거리던 키스 형도 솜뭉치들에게 손을 살짝 흔들어주었다.
“아, 형! 우리 팬들 꼬시지 말아요!”
“꼬시다니. 아끼는 동생들의 소중한 분들이니까 인사한 거지.”
“형이 막 그렇게 하면 우리 솜뭉치들이 홀리니까 그렇죠!”
형 바로 옆에 앉아 있던 내가 괜스레 더 투덜거리며 형에게 장난을 걸었다.
사실은 실제 라이브 송출 전, 조정 시간이 약간 주어지는 동안 목을 풀고 텐션을 올리는 것.
카메라도 사람들의 시선도 이제 제법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오늘은 유난히 더 긴장됐다.
세빈이와 찬이는 의자에서 일어나진 못하고 엉덩이만 들썩거리며 자꾸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렇게 좋아?”
“그럼요. 우리 솜뭉치들 예쁘죠?”
세빈이가 배시시 웃으며 팬 자랑을 늘어놓는 사이, 밖에서 PD님의 사인이 들어왔다.
각자 앞자리를 정돈하고 숨을 고르는 사이.
on-air에 불이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