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8. Next level(2)
두근거리는 마음을 애써 꾹 누르며 무대를 밟았다.
이상하게 늘 무대에 오르는 계단에 발을 디디면, 심장이 쿵쿵거린다.
그전까지 열심히 마음을 진정시키고 태연하게 있어도 그랬다.
아무리 작은 무대라도 서로 손을 얹어 구호를 외치고 파이팅을 할 때면 흥분으로 두근거렸다.
늘 이런 흥분이 있기에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버텨가며 노래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새로운 곡을 들고 다시 무대에 오를 수 있게 되어 행복하다고.
이번 앨범을 만들면서 ‘Thanks to’를 적었을 때가 떠올랐다.
첫 앨범 때는 너무 덜덜 떨면서 적어서 뭐라 적었던 건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Pluto’ 때였던가.
그때 실장님이 우리를 불러 넌지시 이야기했었다.
다음 앨범부터는 회사 관계자들에게 감사하다는 이야기를 굳이 적지 말라고.
그저 정말 이 앨범을 만들면서 너희가 느꼈던 소감을 적으라고 하셨다.
너희가 평소 얼마나 사람들에게 고마워하고 있는지 다들 충분히 알고 있다며 하고 싶은 말을 적으라 말씀하셨다.
고민하고 고민하던 우리는 이번에는 서로에게도 보여주지 않고, 각자 적어 팀장님께 넘겼다.
그리고 나는….
여태까지의 소감을 적었다.
몇 번이나 종이를 바꿀 만큼 구구절절이 적었다가, 지웠다가를 반복하며.
정말 간신히 적었다.
어둠 속에서도 유난히 빛나는 눈동자와 응원봉의 불빛에 정신을 다잡았다.
소감은 나중에 멤버들과 솜뭉치들과 나누자.
지금은 무대에 집중해야 할 시간이니까.
* * *
연희는 처음으로 공방을 찾았다.
그동안 제대로 쓰지 못했던 연차가 아직 많이 쌓여있었기에 어렵지 않았다.
동생에게는 당연히 비밀로 했고, 직접 공방을 신청했고 당첨되었으니 당당했다.
지환이 알면 부끄러워서 어쩔 줄 몰라 할 테니까.
낯선 기분에 휩싸여 이른 시간부터 줄을 서고, 졸려서 비틀거리며 차에서 내리는 동생을 지켜봤다.
혹시라도 들킬까 멀리서 훔쳐봤지만, 애달프긴 마찬가지였다.
가뜩이나 지환은 푹 잠들지 못하는 아이였는데.
아기 때는 잠투정 없이 잘만 자더니 자라면서 깊게 잠들지 못해 뒤척이는 날이 많았다.
어릴 때도 부모님을 잃고 난 후에는 몽유병을 앓으며 온 집을 헤매고 다녔다.
처음 부모님과 살던 집에서 이사한 것도 그런 지환이 나아질까 싶어서였다.
매일 밤, 어린 동생이 부모님 방 앞에서 우두커니 서 있는 모습을 보는 건 연희에게도 너무 괴로운 일이었다.
차마 방문을 열어보지도 못하고 닫힌 문을 하염없이 보고만 있던 동생의 뒷모습.
그 안에 있어야 할 사람이 없다는 상실이 두려웠던 동생.
이사 후에는 익숙한 방문을 찾지 못하고 한참 동안 거실을 헤매고 다녔다.
어느 날은 현관문을 열고 나가려고 해서 붙들기도 했었다.
그날, 이제 엄마, 아빠는 다른 곳에서 쉬고 계신다고 초점 없는 눈을 한 동생에게 속삭였다.
컴퓨터 전원이 꺼지듯, 툭 고개를 떨구고 잠든 동생을 안고 연희는 많이 울었었다.
그 후로 동생의 몽유병은 조금씩 좋아졌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연희 안에 있던 그 작은 아이가 이렇게 품을 떠나 훌쩍 커버렸다.
무대 아래서 지켜본 동생의 모습은 조금 낯설기까지 했다.
“괜찮아요?”
“네, 고마워요.”
기다리다 안면을 튼 옆 사람과 이야기도 나누게 되었다.
그녀는 자기 이름도 연희라며 굉장히 신기해했다.
동생이 언래블 팬이라 영업 당했다며, 오늘 공방도 함께 신청했는데 자신만 됐다고 키득거렸다.
여러 생각에 빠져 울컥한 마음이 얼굴로 드러났었나보다, 하고 금방 수습하며 웃었다.
얼마나 고마운 사람인지.
최애가 누구냐는 말에 하준이라고 했더니 자기는 작은 환이 최애라며 웃던 사람이었다.
그래 놓고도 사실 매일 매일 최애가 바뀐다며, 한 명도 빼놓을 수가 없다며 부끄러워했다.
회전문 같은 언래블이라는 표현이 재밌었다.
칠칠치 못한 동생이지만 누군가에게는 무척 소중한 사람이라는 게 생소한 기분이었다.
조그맣게 속삭이던 사이 본격적으로 무대가 시작되었다.
[화려하게 물든 단풍 사이로 고운 그대 얼굴만 보이네요]
유독 하얀 애가 하얀 무대 의상을 입으니 더 여리여리해 보였다.
좀처럼 살도 붙지 않고 근육도 늘지 않는 동생이라 늘 걱정했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그런 모습조차 무대와 너무 잘 어울려 입을 다물 수 없었다.
한복에서 모티브를 따온 의상은 상의가 무릎길이까지 내려올 만큼 길었다.
지환, 영빈, 세빈은 진주를 갈아 넣은 것처럼 은은한 빛이 나는 흰색 옷에 붉은 깃이었다.
하준, 경환, 힘찬은 먹색에 붉은 깃을 달아 서로 대칭되는 분위기를 만들었다.
두 의상 모두 겉옷 아래쪽에 여러 꽃과 넝쿨이 금실로 자수 놓여 있어 화려함을 더했다.
그 와중에 소매 디테일이 조금씩 다른 것도 좋았다.
먹색 의상은 소매통이 좁아 흰색 의상보다 움직임이 절도 있어 보였다.
반면, 흰색 의상 소매는 넓고 풍성해서 움직일 때마다 함께 팔랑거려 잔상에 남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겉옷 안쪽에는 옅은 회색빛 얇은 상의가 한 겹 더 있었다.
게다가 바지 위에 안이 비치는 얇고 검은 천을 둘러 의상이 훨씬 풍성해졌다.
멤버들의 움직임이 커지면, 여러 겹의 천들이 날아갈 듯 하늘거렸다.
하늘하늘한 천들이 무대를 휩쓸고 다니는 우아한 모습.
그동안 영상으로 보고, 연습을 동생 몰래 훔쳐보고, 무대도 몇 번 보았지만.
연희는 오늘처럼 낯설고 감동한 적이 없는 것 같았다.
타이틀곡 ‘그믐달’ 전에 수록곡인 ‘사계의 춤’을 편집해서 한 곡처럼 예쁘게 녹여낸 특별무대였다.
[참 이상한 기분이야, 온 계절이 널 위해 웃고 있어.]
봄도 겨울도 아닌 가을에 시작하는 풋풋한 사랑 이야기.
세상의 모든 계절이 단 한 사람을 위해 존재한다는 듯 무척 소중하게 부르는 노래였다.
‘왜 가을이겠어, 창단식이 그때였으니 가을이겠지.’
이미 앨범을 소지하고 있는 연희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믐달’은 경환이 곡을 쓰고, 멤버들이 가사를 쓰고, 에단이 프로듀싱을 봤다고 들었다.
‘사계의 춤’은 지환이 곡을 쓰고 지환과 영빈이 가사를 썼다.
자꾸만 흐뭇함이 과해 입가가 형편없이 허물어졌다.
연희는 함께 입장한 팬들이 많다는 걸 천만다행으로 여기며 마음껏 응원 구호를 외쳤다.
깨끗하고 푸르르게 하느작거리던 ‘사계의 춤’은 자연스럽게 ‘그믐달’로 이어졌다.
잔잔하게 바뀌던 반주가 잦아들다가 묵직한 현의 울림이 훅 치고 들어왔다.
그에 맞춰 서서히 어두워지는 조명, 옷자락을 펄럭이며 등 돌려 서는 멤버들.
착! 하고 부채를 손에 말아쥐는 듯한 효과음이 들렸다.
순식간에 등 돌려 서 있던 멤버들이 어깨너머로 객석을 향해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워낙 지환을 통해 여러 이야기를 듣기도 했고, 회사에서 몇 번 보기도 해서 친동생 같던 애들이었다.
보약이며 선물들을 바리바리 챙겨서 직접 품에 안겨주고 오고는 했으니까.
하지만 오늘 무대에서 보인 미소가 얼마나 요요한지 생전 처음 보는 사람들 같아서 홀릴 뻔했다.
마치 금욕적인 느낌의 미인이 목 끝까지 단정히 채웠던 단추를 몇 개 풀어낸 것처럼 훅 치고 들어왔다.
방금까지 하느작거리는 버드나무 같던 멤버들이 순식간에 위험한 분위기를 폴폴 풍겨대니 정신이 없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봄바람처럼 이어지는 연주, 애틋하고 절절한 사랑이 듬뿍 담긴 가사.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위태롭고 위험한 분위기의 춤과 표정 연기.
상반되는 분위기에 정신 못 차리는 건 연희뿐만 아니라 솜뭉치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번에는 예쁜 사랑 이야기를 만들 거야!’
라며 통화할 때 기운차게 외치던 동생을 불러다 뺨을 꼬집어 주고 싶어졌다.
‘이게 어디가 예쁜 사랑 이야기야?’
응원봉을 쥔 손에 절로 힘이 바짝 들어갔다.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기며 하늘거리는 흰옷 멤버들과 절제된 움직임의 묵빛 옷의 멤버들.
가운데서 춤추는 지환이 꽃, 영빈과 세빈이 잎사귀라면 다른 멤버들은 나뭇가지 같았다.
그렇게 다 함께 있어 온전히 하나를 이루는 언래블.
평소의 연희는 사고뭉치 동생의 누나였지만, 오늘만큼은 순순히 한 명의 솜뭉치가 되어버렸다.
어떤 의미로는 지환이 바라던, 공연희 본인의 온전한 시간이었다.
* * *
무대가 끝난 후 땀에 젖은 얼굴을 닦아내던 나는 놀란 가슴을 꾹 누르느라 정신이 없었다.
누나가 여기서 왜 나와!
처음에는 잘못 본 줄 알았다.
리허설 때 언뜻 누나를 닮은 사람을 본 것 같아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이내 흘려보냈다.
분위기가 닮은 사람이 있나 보다, 하고.
하지만 본무대에 오르면서 집중력도 배로 올라간 덕분인지 누나라는 걸 직감할 수 있었다.
얼마나 놀랐는지 안무하다 실수할 뻔했다.
이번에 실수했으면 두고두고 멤버들에게 놀림감이 되고, 제영 쌤에게 불려가 지옥 훈련을 할 거라는 걸 알면서도.
다행히 이를 악물고 버틴 덕분에 휘청이지 않고 잘 움직일 수 있었다.
“환아, 나 근데 누님 본 거 같은데…?”
“어?”
“연희 누나 맞지? 나도 본 거 같은데.”
“나도!”
“누님이 오늘 공방에 오신다고 했었어?”
“어…. 음, 누나 맞는 거 같아….”
심지어 나만 본 게 아니었다.
다른 멤버들도 모두 누나를 발견한 건지 묻고 싶어서 입이 근질근질한 얼굴들이었다.
애써 모른척하려던 내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까발려지다니.
누나, 미리 말이라도 해주지….
다들 누나를 발견하고 많이 놀랐다며 실수할 뻔했다고 웃고 떠들고 있었다.
어깨가 들썩일 정도로 한숨을 푹 내쉬며 나도 몰랐다고 말하자, 우리 애들도 놀랐다.
비밀로 할 정도로 몰래 보고 싶으셨던 거냐고.
우리도 누님 못 본 척 해드려야 하는 거냐며 되묻는 멤버들에게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왜냐면 나도 모르겠으니까!
다행히 소란은 금방 잊혔다.
그 후 인터뷰와 라디오 출연이 잡혀있어 바쁘게 움직여야 했던 탓이었다.
정신없이 휘몰아치는 스케줄을 마치고 넋이 나가 회사에 도착한 우리.
그리고 그런 우리만큼 시들시들해져 있는 종범 형님이 우리를 맞이해주었다.
점심은 팬들의 서포트 덕분에 든든하게 먹어서 잘 버틸 수 있었다.
하지만 움직임이 많아서인지 금방 소화돼버렸고, 이제는 배가 고프다 못해 아파지고 있었다.
그래서 가장 뒤에 있던 라디오 스케줄 때, 우진 형이 저녁을 못 먹은 우리를 위해 주문한 걸 챙기러 종범 형이 먼저 이동했었다.
업무 후 처음으로 음방에 온 종범 형님은 혼이 나간 얼굴이었다.
사방에서 TV에서만 보던 사람들이 지나다녀 어쩔 줄 모르겠다고.
겉으로는 늘 무표정해서 잘 티가 안 나는 사람이지만, 조금만 유심히 보면 알 수 있었다.
긴장해서 손에 땀이라도 나는 건지 자꾸 바지에 손을 문지르고, 눈가가 움찔거렸으니까.
그래도 신입답지 않게 시선 처리도, 우리를 챙기는 것도 훌륭하게 해주었다.
간혹 신입 매니저님들이 다른 가수들이나 아이돌들을 보고 표정 관리 못 하는 걸 우리도 몇 번 봤었다.
그냥 좋아하는 모습은 괜찮지만, 넋이 나간 얼굴을 하고 쳐다보면 뒤에서 수군거리기 일쑤였다.
“얘들아, 오늘 진짜 잘했고 고생했다.”
“타이밍만 잘 맞았으면 컴백 무대에서 1위 후보 오를 수 있었는데 너무 아쉽네.”
우진 형은 우리를 아낌없이 칭찬했고, 소현 팀장님은 아쉬워했다.
우리는 저렇게 쉽게 1위 후보를 입에 담는 팀장님이 신기했고.
이제는 우리도 몇 번 1위를 해봤지만, 여전히 적응 안 되는 말이었다.
1위라니….
“그나저나 연희 씨는 만났니?”
“팀장님도 아셨어요?”
“그럼. 공방 리스트 관리하잖아.”
그러네.
공식 팬클럽 가입자들을 대상으로 한 일이니 당연히 인적 사항을 가지고 있을 텐데.
“형도 알고 있었어요?”
“응.”
우진 형의 덤덤한 대답에 배신감이 물밀 듯이 밀려왔다.
“우리만 몰랐네….”
“몰랐어? 연희 씨가 당연히 말한 줄 알았는데.”
“누나가 말 안 했어요….”
무언가 알 수 없는 기분에 휩싸인 나는 누나에게 바로 메시지를 보냈다.
[누나, 오늘 공방 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