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4. 아껴줄게(4)
흑백의 사진은 낡고 바랜 듯한 느낌을 주었다.
개화기의 감성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어딘가 이국적인 느낌의 건물.
그 앞의 너른 잔디 마당에 장의자를 놓고 찍은 듯한 사진 속 인물들은 하나같이 무표정했다.
긴 의자에 앉은 셋, 그리고 그 뒤에 서 있는 셋.
단정한 얼굴에 표정이 사라지는 것만으로도 이토록 차가울 수 있다는 게 신기할 만큼, 사진은 시렸다.
그들은 눈앞의 카메라가 아닌 다른 곳을 지켜보는 것처럼 시선이 조금 엇나가 있었다.
단정한 정장, 짓궂은 소년 같은 옷 등 다양한 옷차림을 한 그들 중, 가운데 소년이 조금 특이했다.
유일하게 소년만이 하얀 한복차림이었다.
아름답고 단정한 소년은 눈동자가 유난히 서늘했지만, 품 안에 작은 꽃이 달린 가지를 소중히 안고 있었다.
꽃이 떨어질까 손 위에 조심스럽게 가지를 받치고 끝부분을 살짝 쥐고 있었다.
그 사진이 끝이 아니었다.
다음 장에는 꽃무덤이 있었다.
온갖 꽃들이 소복이 쌓여 작은 무덤을 만들었고, 그 주변에 여러 소품이 놓여 있었다.
주인을 알 길 없는 곰방대, 환도, 선추가 달린 부채, 보드라워 보이는 비단 끈, 화려한 두루주머니, 향낭.
창백한 느낌을 주는 사진 탓에 소복이 쌓인 꽃과 주인을 잃은 물건들이 애틋했다.
독특한 것은 사진의 구도상 조금 위쪽에 꽃무덤이 있었고, 그 아래는 무언가 가리듯 칠해져 있다는 것.
그렇게 가려진 부분 위로 먹이 번져가듯 흐릿한 붓글씨가 보였다.
[감히, 애틋하게.]
그 사진이 올라오고 얼마 후.
위캠의 언래블 공식 채널에는 새카만 화면을 배경으로 나지막한 허밍이 들렸다.
몽환적인 허밍 사이로 독특한 리듬도 함께 들려왔다.
악기 소리라기엔 가벼웠고, 책상을 손톱 끝으로 가볍게 두드리는 듯한 소리였다.
두 장의 사진과 짧은 허밍으로 다음 앨범에 대한 궁금증을 키운 언래블.
공개된 힌트로 많은 팬이 기쁨의 함성을 지르던 그때.
그들은 오랜만에 푹 익어버린 파김치처럼 숙소에 널브러져 있었다.
몰아치듯 제작 일정을 소화하느라 잔뜩 지쳤음에도, 그들의 얼굴은 개운해 보였다.
드디어 모든 것을 끝낸 사람만 지을 수 있는 후련함이 가득 담긴 얼굴이었다.
“이제 잘 수 있어….”
“그래, 그러니까 자라….”
경환의 힘없는 중얼거림에 하준이 한숨처럼 답했다.
늘 에너지 넘치던 경환과 힘찬마저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상대적으로 체력이 약한 영빈과 지환은 이미 반쯤 졸고 있는 듯 보였다.
러그 위에 풀썩 누워버린 멤버들은 온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을 정도였지만, 뿌듯했다.
새로운 아이디어가 쏟아지는 회의도, 상상을 현실로 가져오는 일도 여전히 즐거웠다.
이번에는 조금 더 재밌게 즐겼으면 하는 마음에 이리저리 궁리하느라 더 힘들었지만.
“그래도 재밌었지?”
“재밌었어요. 하지만 아쉽기도 해요….”
꿈틀거리던 지환이 몸을 조금 더 편하게 옮기자 바닥에 축 늘어져 있던 세빈이 냉큼 다리를 베개 삼으며 답했다.
“저쪽에 쿠션 있잖아. 아니면 들어가서 누워.”
딱딱한 다리 때문에 불편하지 않을까 싶은 지환이 권했지만, 세빈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경환의 배 위에 엎어져 있던 힘찬은 히죽거리다 경환의 배를 툭툭 건드렸다.
아까는 비틀거릴 정도로 지쳤던 애가 장난을 치자 하준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일 하루는 일단 푹 쉬라고 하셨으니까 그냥 쭉 자자. 실컷 자고 일어나서 이야기하자.”
“그래. 다들 자라….”
하준은 더 늦어지기 전에 침대에 누울 요량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며 자라고 전했다.
그런 하준을 따라 영빈이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동생들은 일어날 눈치가 아니었다.
들어가서 자라고 잔소리해야 하나 하던 영빈은 작은 한숨을 내쉬며 자기만큼 커버린 막내를 불렀다.
“세빈아.”
“나 움직이기 싫은데….”
칭얼거리는 막내를 이제는 들어 옮길 수도 없기에 달래는 수밖에.
“가서 누워야지. 그래야 환이도 편히 잠들지.”
판다보다 느릿한 움직임을 보이며 꿈틀거리던 세빈은 ‘얼른’하고 영빈이 손을 내밀고 나서야 일어났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힘찬은 하준을 빤히 쳐다봤다.
“왜, 뭐.”
“횽아, 나는?”
“혀 짧은 소리 내지 말라니까.”
“저놈은 혀 반 토막을 연습실에 두고 왔나….”
답지 않게 귀여운 척을 하는 동생 모습에 질색하던 하준은 마지못해 손을 내밀었다.
물론 동생들이야 평소에도 귀여운 편이지만, 이런 짓을 할 때마다 하준은 영 떨떠름했다.
히히, 하고 짓궂게 웃던 힘찬은 자리에서 발딱 일어나서 하준의 손을 잡았다.
그 반동으로 배를 내주고 있던 경환은 ‘억!’하고 이상한 소리를 내야 했지만, 당사자인 힘찬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경환의 룸메이트인 지환만 그런 경환을 안쓰러운 눈으로 한번 봐주고 다시 눈을 감아버렸다.
“환아, 우리도 들어갈까?”
“조금 있다가요….”
“그러다 여기서 잠든다. 들어가서 자.”
“그래, 침대에 누워.”
각자 담당하는 동생들을 침대에 밀어 넣은 맏형들은 남은 둘도 방에 들어가라 종용했다.
아무리 날이 더워져서 에어컨 바람이 좋다고 한들, 이대로 잠들면 감기에 걸릴 게 뻔했다.
결국 경환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바닥에 붙어 하느작대던 지환의 옆구리를 툭 하고 건드렸다.
파드득대던 지환은 불만 어린 눈을 했지만, 이어진 경환의 질문에 얌전히 일어나야 했다.
“형이 들어다 옮겨줄까?”
지환은 스스로가 수치스러움을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기에 경환의 제의를 단숨에 거절하고 일어났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맏형들은 소리 없이 웃었고, 서로를 향해 하루의 마무리 인사를 건넸다.
“잘 자라.”
“오냐, 너도.”
딸깍하는 소리와 함께 거실의 불이 꺼지고, 언래블 숙소에도 모처럼 평화로운 밤이 찾아왔다.
* * *
다진은 못마땅한 얼굴로 가영을 바라보았다.
언제나처럼 가영은 특유의 뻔뻔한 얼굴이었다.
“왜 병아리들은 없어?”
“걔네 앨범 나오기 직전이라 바빠.”
“하. 모처럼 기분 전환 좀 하나 싶었는데.”
남의 집 병아리들을 자기 집 병아리처럼 여기는 다진.
세비는 이 시한폭탄 같은 둘을 빨리 어딘가로 치워버리고 싶었다.
오랜만에 보는 다진이지만 키스는 반가움이 아닌 귀찮음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그동안 휴가 때마다 뻔질나게 나와서 괴롭히고 간 터라 키스에게는 반가움이 생길 겨를도 없었다.
“밥이나 먹자.”
한숨 같은 세비의 말에 정갈하게 잘 차려진 상으로 시선을 돌린 셋.
다진이 노래를 부르던 한우를 먹으러 왔다.
자기 발로 군대 다녀온다고 나갔다 온 놈이지만, 그래도 고생하고 왔으니까.
가영은 나름의 자비를 베풀어 회사 카드가 아닌 사비로 밥을 사기로 했다.
고기 안의 기름이 불과 만나 녹아 흐르며 견디기 힘든 향이 퍼지자, 다행히 새벽 멤버들의 얼굴에도 미소가 번졌다.
“역시 고기가 최고지.”
“네놈한테도 상식이란 게 있긴 있구나.”
늘 투덕거리는 둘이 유일하게 일치하는 게 식성이라 밥 먹을 때는 그나마 평화로웠다.
식성마저 달랐다면 세비는 음악이고 나발이고 모든 것을 내던지고 도망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게 목구멍과 뱃속에 열심히 기름칠하던 다진은 언래블의 근황을 물었다.
실제로 만난 것은 몇 번 안 되지만, 처음 다진이 지환을 만났던 연습실.
그곳에서의 인상이 워낙 강렬했다.
본인을 닮아 정갈하고 편안한 작업실은 가영의 작업실과 비교되어 무척 마음에 들었다.
귀신 나올 것처럼 꾸며놓은 가영의 작업실은 늘 꺼림칙했으니까.
다진은 무서운 것들을 못 보는 건 아니었지만, 즐기는 편도 아니었다.
그 사이에 있던 작고 하얀 무엇.
유난스럽기로 유명한 새벽 멤버들을 사이에 두고도 아이는 눈이 초롱초롱했다.
인상이 사나운 다진을 보고도 활짝 웃는 모습이 가식이 아니라는 걸 동물적인 감으로 알아챈 다진.
그 후 마주한 언래블의 멤버들은 하나같이 동글동글한 자갈 같았다.
매끄럽고 묘한 촉감을 가진, 맑은 개울가에 있을 법한 자갈들.
그는 언래블의 모든 멤버들이 마음에 들었다.
어쩐지 까탈스러운 인간들이 먼저 찾길래 어떻게 생겨먹은 애들인가 싶었는데.
날카로운 눈매가 사르르 접힐 때면 무심코 머리를 쓰다듬고 싶어질 만큼 무해해 보였다.
워낙 망종들이 많은 곳에서 살다 보니 이런 무해한 것들이 귀했다.
처음 빤히 쳐다봤을 때는 주춤거리고 키스 뒤로 피하기도했지만, 그건 그저 조금 놀랐기 때문이었다.
다진은 인상이 사나운 편이라 누군가를 뚫어져라 바라보면 보통은 겁을 먹거나 기분 나빠한다.
내내 그런 오해를 많이 받아왔던 터라 이렇게 빨리 적응하는 지환이 더욱 신기했다.
키스가 감정보다 이성에 지배된다면 다진은 이성보다 감정에 지배된다.
가영은 그마저도 조절 가능한 괴물이고, 세비는 균형이 잘 이뤄진 경우고.
“병아리들이랑 노래 부르면 재밌을 것 같은데.”
“콜라보 하자고 할까?”
“그럴까?”
“애들 이번에 앨범 나오는데 여유가 있을까?”
“일정이야 맞추면 되지. 곡 많이 안 불러도 한두 개 정도면 가능하지 않을까?”
대화의 주제는 자연스럽게 언래블과 음악이 되었다.
최근 그들을 가장 즐겁게 하는 동생들과 늘 그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음악.
다행히 분위기는 편안하고 안정적으로 흘러갔다.
내심 둘이 싸우면 버리고 가야지 하고 생각하던 세비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대화에 불이 붙자 키스도 한마디씩 더하기 시작했고, 세비도 어느새 참여하고 있었다.
어떤 곡을 쓰면 좋을지, 이번 애들 앨범에 대해 아는 게 있는지.
최근 트렌드는 어떤지, 하고 싶은 곡이 따로 있는지 등.
“만들어 둔 거 많지?”
“많지.”
가영은 곡 쓰는 기계처럼 써 내려가는 편이라 그의 작업용 컴퓨터에는 아직도 많은 곡이 잠자고 있었다.
외부에서 곡을 팔아달라는 요청은 많지만, 내킬 때만 파는 편이라 밖으로 풀리는 것도 많지 않았다.
언래블의 데뷔곡을 주면서 가영과 작곡가 ‘Dawn’이 동일인이라는 걸 밝혔다.
덕분에 이전보다 곡을 팔아달라는 요청이 늘었지만, 달갑진 않았다.
가영은 곡에는 주인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답지 않은 운명론이랄까.
쓰고 싶어서 곡을 써 내려가지만,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가야 할 것 같은 곡들이 있으니까.
게다가 가영뿐만 아니라 다진도, 키스도, 세비도 작곡할 수 있었다.
“소현 팀장님이 진짜 사람은 잘 본다니까.”
“그건 맞지. 일단 연락해볼까?”
한번 생각이 꽂히면 직진하는 둘이 붙어있으니 가속도가 붙었다.
“전화하지 말고 메시지 보내. 연습하는 데 방해될라.”
바로 통화 버튼을 누르려던 가영은 세비의 한마디에 뜨끔한 얼굴을 했다.
통화 버튼을 바로 누르려던 손이 슬그머니 내려왔고, 그 모습에 코웃음 치던 키스가 핸드폰을 들었다.
그리고 그때, 키스의 핸드폰 화면에 익숙한 이름이 떠올랐다.
“환이네?”
“받아봐, 애들 쉬나 보다.”
“아, 그냥 내가 전화할걸.”
타이밍도 좋지, 하고 혼자 중얼거린 키스가 전화를 받아 스피커 폰 모드로 돌려두었다.
“병아리, 안녕.”
- 안ㄴ… 저 병아리 아니라니까요…. 아니, 이게 아니라 식사 중이세요?
‘안녕하세요’하고 인사하려던 말이 삼켜지고 불퉁한 목소리가 툴툴댔다.
목소리를 듣는 데도 상대가 눈앞에 있는 것처럼 훤했다.
새벽 멤버들 모두 피식거리며 조그만 부리 같은 입술이 불퉁하게 삐쭉 튀어나와 있을 모습을 떠올렸다.
“어. 다 같이 있다. 스피커 폰이야.”
스피커 폰이라는 한마디에 주변에서 와글와글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 안녕하세요! 형들 뭐 먹어요? 맛있는 거 먹어요?
- 찬아, 좀 얌전히 있어.
- 준이 형, 경환 형이 자꾸 괴롭혀!
연습실인지 소리가 울렸지만, 그마저도 재밌었다.
“연습 끝났어? 밥은?”
- 저희 곧 컴백하잖아요. 오늘 저녁은 닭가슴살 큐브였어요….
안쓰러운 중얼거림에 가영이 ‘저런’하고 혀를 찼지만, 얼굴은 웃고 있었다.
- 다진 형, 무사히 돌아오신 걸 축하드려요! 같이 밥 먹고 싶었는데 시간이 안 맞아버려서….
이 병아리들은 함께하지 못한 게 못내 아쉬웠는지 전화로 안부를 물어왔다.
이러니 기특해하지 않을 수가.
다진이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저녁치고 좀 늦게 먹었더니 벌써 11시가 다 돼가고 있었다.
그리고 시계를 보던 다진과 가영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서로의 생각을 읽은 그들이 씩 웃었고, 수상한 기색을 느낀 세비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이내 가영이 상냥한 목소리로 물었다.
“얘들아, 그럼 이제 숙소 가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