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3. 아껴줄게(3)
영빈 형의 허밍이 시작이었다.
맑고 맑아서 시리기까지 한목소리는 투명한 색으로 공간을 점령한다.
거기에 내 목소리가 더해지자 청록의 빛이 아른거린다.
울림이 있는 푸르름, 깊은 산속이거나 혹은 차분하고 안정감 있는 공간이었다.
이윽고 짙은 밤색의 준이 형 목소리가 독특한 리듬을 더하고 옅은 회색을 가진 경환 형의 목소리가 문양을 만든다.
화려하게 빛나지 않지만 고즈넉하고 우아한 맛이 있는 고궁 같았다.
여기에 막내들의 목소리가 섞이면 생기와 화려함이 더해진다.
그렇게 우리가 있는 공간이 숲 한가운데 있는 아늑하고 예스러운 한옥이 되었다.
시간은 자정이 넘은 새벽녘이 좋을 것 같았다.
달은 다 차지 못한 가느다란 그믐달.
감은 눈 같기도 하고 웃는 입꼬리 같기도 한 달이 뜬 하늘에는 별도 희미하게 반짝일 것.
그 안에 있는 우리는 어딘가 서글픈, 혹은 서러운 눈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이제 막 생긴 상처가 아닌 오래된 상처일 것이다.
그래서 그믐달일 테니까.
홀린 듯이 부르던 허밍이 모두 끝나고, 나는 머릿속에 떠오른 이미지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노래 들으면서 망상은 누구나 하는 게 아닌가 하고 가볍게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이런 것들이 제법 도움이 된다는 걸 알았다.
아직 가사가 없는 곡이지만, 어쩐지 지금은 무언가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종이를 찾아내 생각을 끄적이며 형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과거의 상처를 딛고 새로운 인연을 기다리는 존재들. 괜찮을 것 같은데?”
“동양풍으로 하자고 했는데 갑자기 뱀파이어가 튀어나오는 거야?”
“굳이 뱀파이어까지 갈 필요 있어?”
“다 섞으면 되지! 어차피 큰 틀은 안 변하잖아.”
몇 가지 떠오르는 이미지를 형들에게 이야기했을 뿐인데 사방에서 아이디어가 쏟아졌다.
“주영 팀장님한테 가서 이야기하면 더 좋은 게 나오지 않을까요?”
“그러자.”
열심히 동양풍으로 이미지를 짜고 있을 A&R팀 팀장님을 떠올리고는 넌지시 말을 꺼냈다.
다 만들었는데 바꾸자고 하는 것보다 슬쩍 더하자는 말이 나을 것 같아서.
이번에도 갑자기 우리가 우당탕 만들어서 들고 가면 정말 울 것 같아서.
그래서 팀장님을 약간은 배려하려고 했다.
워낙 아이디어도 넘치는 분이니 우리가 도움받을 것도 있고.
서로 눈이 마주친 우리는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음흉하게 웃었다.
역시, 나만 그렇게 생각한 거 아니었구나?
악당처럼 서로를 마주 보며 킬킬거리고 웃던 우리는 그 길로 주영 팀장님을 찾아 나섰다.
우리를 보자마자 화들짝 놀라서 도망가려던 주영 팀장님.
준이 형이 경환 형에게 ‘가라!’하고 외치자 경환 형은 ‘라져’하고 답하더니 투다닥 뛰어가 주영 팀장님을 붙들었다.
갑자기 회사 복도에서 추격전을 벌이는 우리를 아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사실 자주 있는 일이기도 했고, 이제는 다들 그러려니, 애들이 또 무언가 하려니 하고 웃고 넘어갔다.
그리고 그 미소 안에는 대상이 자신이 아니게 된 것에 대한 안도도 있다는 걸 알았다.
우리 애들이 조금, 아주 조금 집요하긴 했으니까.
궁금한 게 있으면 알아야 했고, 이제는 도움받는 걸 꺼리지 않다 보니 그때마다 뛰어가서 캐물어 댔다.
주로 A&R 팀원들이 우리의 타깃이 되었고, 주영 팀장님은 그중에서도 제일 큰 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대화하다 보면 생각지 못한 방면에서 자극을 주기도 했고, 많은 팁을 전수해주기도 하셨다.
“어? 저기 에단 쌤이다.”
“선생님!”
경환 형이 주영 팀장님을 납치하는 동안 나는 에단 쌤을 발견했다.
느긋한 걸음으로 걸어가던 선생님은 우리와 붙들린 주영 팀장님을 발견하자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선생님!! 도움이 필요해요!!”
“지, 지환이구나….”
선생님? 왜 뒷걸음질 치세요?
우리 이런 사이 아니었잖아요.
상냥하게 웃으며 다가가는 나와 슬금슬금 뒷걸음질하는 선생님.
어느새 준이 형이 날렵하게 움직여 에단 쌤의 뒤를 막았다.
퇴로가 차단되자 낭패라는 얼굴을 하던 에단 쌤도 이내 주영 팀장님처럼 슬픈 눈을 했다.
“그래, 이번엔 무슨 일이니….”
“별건 아니구요!”
“저쪽 회의실 가서 이야기하는 게 좋겠네요.”
친절한 나는 에단 쌤의 팔에 팔짱을 꼈고, 주영 팀장님을 경환 형이 팔짱 꼈다.
“우리 연행되는 거니…?”
“그럴 리가요! 저희가 아이디어가 떠올랐는데 마침 팀장님이랑 쌤이 보여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해맑게 말하며 웃는 내 모습에 왜인지 모르겠지만 두 분의 얼굴은 퀭해졌다.
형들을 보며 나 잘했지? 하고 방긋 웃어주자 영빈 형이 엄지를 ‘척’하고 치켜들었다.
좋아, 아이디어는 떠올랐을 때 빨리 정리하고 해치워야지.
신나서 발걸음까지 가벼워진 기분이었다.
후딱 일하고 후딱 숙소 가서 자면 꿀잠 잘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 * *
숙소 가서 꿀잠 자야지 했던 다짐은 결국 이루어지지 못했다.
우리가 쏟아낸 아이디어를 들은 두 분은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지옥 같은 회의가 시작되었다.
얼마 후 안무를 만든다고 소 연습실에 있던 막내들까지 불러와야 했다.
우리만 부르는 게 아니라 모두가 다 같이 부르는 곡이니 모두의 의견이 필요했다.
나중에는 의상 문제로 서포트 팀 누님들이 불려왔고, 종국에는 소현 팀장님과 정윤 실장님까지 참여했다.
갑자기 시작된 토론은 점점 덩치를 불려서 결국 앨범 제작과 연관된 모든 분이 다 같이 모여야 했다.
종국에는 회의실이 좁아 대회의실로 옮겨서 모두가 머리를 싸매며 퇴근도 못 하고 끙끙대야 했고.
“우리 애들이 참…. 아이디어 뱅크인 건 너무 고마운데 좀 나눠서 해주면 안 되겠니…?”
“하하, 그게 막,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잖아요….”
퀭한 주영 팀장님의 혼잣말 같은 투정에 마찬가지로 퀭해진 내가 답했다.
그게 막 우리 마음대로 원할 때마다 꺼내지는 게 아니란 말이죠.
“그래도 며칠 고생할 거 하루에 끝냈으니까 다행이라고 생각해. 일단 다 집에 가자.”
한껏 피곤해진 정윤 실장님의 얼굴을 마주하니 미안해졌지만, 실장님은 눈이 마주치자 희미하게 웃었다.
“너희 덕분에 생각보다 금방 끝낼 수 있을 것 같아. 일단은 한숨 자고 또 이야기하자.”
다른 사람들에게는 냉정하고 무섭다던 정윤 실장님.
그런 실장님이 우리에게는 언제나 다정했다.
부끄러우신 건지 겉으로는 아닌 척하셨지만.
연예계와 회사에 관해 아는 게 많아질수록, 실장님과 팀장님이 우리에게 무척 신경을 쓰고 있다는 걸 모를 수가 없었다.
여태까지 큰일이 있을 때마다 냉철하게 벼려진 이성으로 피해를 최소화한 것도 실장님이라고.
언제나 우리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지켜주는 사람.
사람들 상대하는 일이 제일 힘든데 실장님은 그 일을 대부분 떠맡고 있었다.
미안함과 고마움을 담아 실장님께 감사하다고 인사를 하고 고개를 꾸벅 숙였다.
다음에 홍삼이라도 한 번 더 선물해드려야겠다.
그래도 오늘, 많은 것들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숙소에 돌아온 우리는 개운함에 서로를 바라보며 씩 웃었다.
이번 앨범 준비도 무척이나 재밌을 것 같았다.
* * *
언래블 팬들은 최근 촉을 날카롭게 세우고 있었다.
앨범이 나올 때가 된 것 같은데 아직 회사에서는 별다른 떡밥을 주지 않고 있었다.
일정하게 영상이 올라오는 언래블의 공식 채널에 빨간 점이 콕 박힐 때도 되었는데.
그리고 그 초조함을 알기라도 하듯, 그로부터 얼마 후 공식 SNS에는 흐릿한 사진 한 장이 올라왔다.
첫째 날 올라온 사진은 어두운 밤에 홀로 하얗게 빛나는 꽃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 올라온 사진도 어두운 밤 배경의 하얀 꽃.
두 사진을 받아 든 팬들은 아리송한 얼굴을 했다.
첫 번째 꽃은 배꽃이었고, 두 번째 꽃은 자두꽃이었다.
뭐지? 과일과 관련된 노래인가?
그다음 올라온 사진은 백매화였다.
여전히 사진은 어둑한 한밤중 탐스럽게 핀 꽃과 하늘이 배경이었다.
흐드러지게 핀 꽃이 몹시 아름다웠지만, 어떤 의미를 주고 있는 건지 알기 어려웠다.
솜뭉치들이 하나같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사진을 더듬고 있던 그때.
SNS에 하나의 링크가 올라왔다.
링크에서는 짧은 허밍이 흘러나왔다.
자장가인 듯 부드럽게 어르고 달래는 듯한 멜로디가 인상적인 짧은 목소리였다.
솜뭉치들은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리더인 하준이라는 걸 듣자마자 알았다.
그리고 궁금증에 휩싸인 그들은 저마다 의견을 나누기 시작했다.
- 이번 티저 무슨 의민지 아는 뷰어 있어????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게쒀….
누군가 정답을 안다면 알려줘….
근데 우리 준이 목소리 왤케 달달하니ㅠㅠㅠㅠ 나 자기 전에 이거 듣고 잔다ㅠㅠㅠㅠ
ㄴ 꽃의 순서가 의미가 있을까? 근데 찾아봤는데 배꽃, 자두꽃, 백매화 다 4월에 핀대.
ㄴ 배꽃이랑 자두꽃 둘 다 이화라고 부르는 것까지는 찾았다! 아니 근데 매화는 왜….
ㄴ 준이 허밍 엄청 부들부들한데 좀 슬프지 않아? 나만 그렇게 느꼈니 ㅠㅠ
ㄴ 왜 다 밤에 찍은 걸까?
모두의 궁금증이 쌓여가던 그때 누군가 한가지 가능성을 제시했다.
- 그냥 진짜 망상의 나래를 펼친 건데 한번 들어볼래?
우리나라가 옛날부터 배꽃이나 오얏꽃(자두), 매화 이런 걸 되게 많이 문양이나 그림으로 썼거든?
그리고 오얏꽃은 대한제국을 상징하기도 하고 고려 때 오얏 성씨 왕조가 생긴다고 예언이 있었대. 그 후 이성계가 조선을 세웠고.
그러니까 조선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그런 동양풍의 무언가를 해주지 않을까…? 아니면 개화기?
근데 왜 밤중에 꽃인지는 모르겠다….
ㄴ 헐!! 나 뷰어 글 보고 다시 사진을 자세히 봤는데 어슴푸레하게 먼가가 있어!!
ㄴ ㅁㅊ 나 방금 사진보다 안 건데 꽃 뒤에 저거 건물 아냐?
ㄴ ?????????? 아니 이건 또 무슨 소리야!!
ㄴ 정균찡 !!! 도대체 뭘 숨기고 있는 거야!!!
온갖 추측과 음모론이 게시판을 뒤흔들고 있었다.
조선 시대나 개화기라는 추측 글은 가뜩이나 터질 것 같던 커뮤니티에 거대한 폭탄이 되었고.
개화기의 모던보이도 좋고 조선 시대의 도련님도 좋았다.
이미 한번 우리 애들의 한복차림을 보았던 솜뭉치들이 다시 한번 흉포한 솜인형이 되었다.
당장 다음을 내놓으라고 울부짖는 그들의 반응과는 별개로 언래블의 공식 채널은 잠잠했다.
종종 라이브를 통해 얼굴을 비춰주던 언래블이 라이브를 하지 않게 된 후부터는 더욱 애가 탔다.
눈물 젖은 솜인형의 짜디짠 마음을 아는 건지 언래블은 공식 카페에 편지를 써주었다.
자주 찾아오는 편이긴 했지만, 이번 편지는 조금 더 특별했다.
[사랑하는 솜뭉치에게.
우리를 많이 보고 싶어 한다는 이야기는 자주 듣고 있답니다.
솜뭉치들이 그렇듯 우리도 늘 솜뭉치들이 많이 보고 싶어요.
더 자주, 더 오래 보고 싶은 마음은 늘 굴뚝같지만 조금 더 멋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서 참고 있어요.
솜뭉치들이 그리운 만큼 열심히 곡을 쓰고 노래를 부르며 다시 만날 날을 고대하고 있답니다.
열심히 새로운 앨범을 만들고 있어요.
솜뭉치들이 들으면 좋아할까? 하고 저희 여섯은 머리를 맞대고 궁리하고 또 궁리하고 있답니다.
아, 그리고 조만간 우리가 만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러니까 아주 조금만 더 기다려주었으면 좋겠어요.
언제나 그렇듯 우리가 아주 많이 사랑해요.
그리움과 애틋함을 담아 가장 보고 싶은 사람들에게 보냅니다.]
언래블 멤버 중 누구의 말투와도 달랐다.
굳이 따지자면 하준과 환, 영빈의 말을 섞으면 이러할까?
정중하고 부드러우면서도 조곤조곤 이야기를 건네는 듯한 내용이었다.
그리고 그 편지가 올라온 날 자정.
새로운 사진이 공식 계정에 올라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