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8. 별이 빛나는 밤(2)
흥미롭다는 듯 종이를 다시 읽어본 지환은 세빈을 바라봤다.
“이건 마치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급의 사악한 질문이네요. 하지만 우리 막둥이에게 한 번쯤 묻고 싶었던 질문일 것 같기도 해요.”
지환의 평가에 세빈을 제외한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입 밖으로 말하진 않았지만, 각자 세빈과의 추억을 떠올리는지 얼굴이 아련해졌다.
그런 주책바가지 형들을 바라보며 한숨을 푹푹 내쉬던 세빈.
“아무래도 당사자 앞에서 말하기는 좀 곤란하겠죠?”
“선택 못 받으면 우울해지기도 하고.”
대답해야 하는 건 세빈인데 어째 다른 멤버들이 더 긴장한 것처럼 보였다.
그 와중에도 마냥 재밌다는 듯 빙글거리던 지환은 세빈에게 소곤소곤 귓속말을 했다.
금세 환해진 얼굴로 세빈이 웃자 지환은 세빈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더니 종이와 펜 한 자루를 내밀었다.
“말로 하기 부끄러우니까 글자로 적어서 솜뭉치들한테만 보여줄게요. 형들은 전부 눈 감고 있기!”
“그건 좀 반칙 아냐?”
힘찬이 억울하다는 듯 투덜거리자 영빈은 세빈의 편을 들었다.
“어차피 답을 하면 되는 거니까 그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누구 하나 콕 집어서 고르면 아무래도 슬프잖아.”
막내 앞에서는 결국 약해질 수밖에 없었던 언래블 멤버들은 눈을 감았다.
내 이름 쓰지 않았을까? 하는 그런 설렘을 얼굴 가득 드러낸 형들을 본 세빈은 곧 씨익 웃었다.
뽀얀 손이 또박또박 이름을 적었고, 곧장 그걸 카메라 앞으로 들고 왔다.
[우진 형]
종이에는 예상 밖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멤버들에게는 안 들리게 할 생각인지 카메라 앞에서 목소리를 한껏 낮춰 말하는 세빈.
“형 중에 한 명 적으면 다른 형들이 서운해하기도 하고…. 우진 형은 저희 매니저 형인데 저희가 가족처럼 생각해요. 엄청 엄청 고마운 사람이라 적었어요.”
한 명만 적으라는 질문은 반칙이라며 조그맣게 투덜거리더니 종이를 예쁘게 접어 잠옷 주머니에 넣고 단추를 잠갔다.
다시 형들 사이에 쏙 끼어 앉은 세빈은 이제 눈을 떠도 된다며 형들을 하나, 둘 불렀다.
그리고 다른 멤버들이 입을 열기 전에 재빨리 선수 쳤다.
“누구 적었는지는 말 안 할 거니까 나중에 영상을 확인하든가 하세요.”
“우리 막내가 이렇게 철두철미하게 자랐습니다, 여러분.”
새침하게 말하는 막내 모습에 결국 웃고만 다른 멤버들은 한 번씩 막내 머리를 쓰다듬고, 볼을 주물렀다.
못난 형들의 사랑 때문에 엉망이 된 세빈은 울상을 지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금방 지환이 머리며 옷을 정리해주자 수줍게 웃었다.
둘만의 세계에 빠져 단내를 폴폴 풍기자, 힘찬이 못마땅한 얼굴로 투덜거려서 금방 정신을 차렸지만.
“그러면 이제 제 차례네요.”
“환이도 어서 뽑아보자.”
다른 사람들 뽑을 때보다 더 신나 보이는 멤버들 표정에 지환은 곤란하다는 듯 웃었다.
[이제 괜찮아?]
그리고 마침내 자신 몫의 질문지를 뽑았을 때, 지환은 침묵했다.
무언가 생각에 빠진 것도 같은 얼굴로 질문지를 하염없이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흘깃 질문지를 훔쳐본 멤버들도 입을 꾹 다물었다.
무엇이? 어떤 게?
라고 묻기에도 너무 많은 것들이 함축된 질문이라 누구도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잠시 생각을 정리하는 듯하던 지환은 다시 방긋 웃었다.
“네, 전 괜찮아요. 어떤 게 괜찮냐고 물어보는 걸까 싶어서 잠깐 고민했어요.”
여기까지 말한 지환의 얼굴은 조금 창백해 보였다.
촘촘한 속눈썹이 작은 얼굴에 음영을 만들어내어 그런 것인지, 힘겨웠을 시간을 떠올린 탓인지 알 수는 없었다.
크게 숨을 들이쉰 지환은 천천히 그리고 분명한 어조로 답했다.
“그래서 여러분이 고민할만한 것들을 하나씩 떠올려봤어요. 그리고 멤버들이 걱정할만한 것들도 떠올려봤고요.”
겨울에 부는 바람처럼 건조하고 서늘한 목소리였지만, 그만큼 사람을 차분하게 만들었다.
“그랬더니 전부 힘들지 않고 괜찮더라고요. 그러니 전 괜찮아요. 걱정해줘서 고마워요.”
그리고 고맙다고 말하는 지환의 얼굴은 목소리와 달리 봄이었다.
조그맣게 움트는 연녹색의 귀엽고 연약한 새싹을 꺼내 보이는 봄.
눈 녹은 차디찬 물을 받아마시고, 북풍의 서늘함을 견디면서도 봄은 온다.
어느새 언래블 멤버들 모두가 지환과 닮은 봄의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 짝
“그렇다고 합니다. 저희 환이가 참 많이 컸죠?”
하준은 분위기를 환기하듯 손뼉을 치며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
“쟤는 키 빼고는 다 잘 큰 거 같… 악!”
“내가 키 얘기하지 말랬죠…?”
경환이 눈치 없이 다시 지환의 키 얘기를 꺼냈다가 소리도 없이 스르륵 옆에 온 지환에게 옆구리를 뜯겼다.
힘찬은 그 광경을 보고 낄낄대며 앉은 자리에서 뒤로 누울 만큼 좋아했고, 세빈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조그맣게 중얼거린 말은 아마도 ‘내가 형들 때문에 못살아’ 였던 것 같았다.
“그럼 다음으로 히스 형이 종이 뽑아보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자기 자리로 돌아간 지환이 다시 방긋 웃었다.
그 모습에 이미 기가 빨린 영빈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상자에 손을 넣었다.
신중한 얼굴로 상자 안을 더듬던 길고 아름다운 손가락이 종이 하나를 뽑아냈다.
“뭐라고 적혀있어요?”
“흐음, 볼까?”
영빈이 느린 동작으로 꺼내어 펼친 종이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언제로 돌아가고 싶어?]
영빈은 종이의 내용을 곱씹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렸다.
“과거라….”
고민하는 영빈을 두고 막내들이 먼저 조잘거리기 시작했다.
“로또 번호 외워서 과거로 가면 우리 부자 되는 거 아냐?”
“그럴 거면 파워볼이 더 낫지 않아?”
“일단 영어가 잘 안 되잖아.”
지환은 그런 둘을 귀엽다는 듯, 득도한 고승처럼 허허롭게 웃었고 경환이 그 토론에 참여했다.
“어디서 본 건데 시간 여행이라는 이야기에서 나오는 타임 패러독스라는 게 있대.”
“그게 뭔데요?”
호기심 가득한 막내들의 눈길에 경환이 설명하려던 그때, 지환이 먼저 답했다.
“역사의 복원력이 있느냐 없느냐를 두고 여러 의견이 있거든. 가변 역사와 불가변 역사라는 게 있다는 말도 있고. 이론은 엄청 다양해. 과거를 바꾼다고 미래에 영향을 주느냐, 아니면 거기서 세계선이 갈라져 새로운 미래가 생기고 이전 세계는 그대로 가느냐…. 뭐, 상상력은 무한하니까. 별거 아냐, 어차피 알 수 없으니까.”
담담한 얼굴로 설명을 늘어놓던 지환은 바보 같은 얼굴로 바라보는 힘찬의 표정에 화들짝 놀라 입을 다물었다.
“환이가 그런 데도 관심이 있었어?”
“신기해서 좀 찾아봤어요. 가끔 그런 상상 다들 하잖아요. 과거로 돌아간다, 뭐 이런?”
요새는 그런 소설도 많지 않냐며 어깨를 으쓱거리는 지환의 얼굴이 묘하게 어두웠다.
경환은 조용히 팔을 뻗어 지환의 머리를 헝클었다.
“일단, 나는 돌아가고 싶지 않아.”
“그건 또 의외네. 왜?”
영빈이 제법 단호하게 말하자 하준이 의문을 표했다.
“어느 시점의 과거로 돌아간다고 해서 만족할까 싶기도 하고. 어차피 돌아가도 결국은 나니까 또 비슷하게 살 것 같아.”
“오, 여태까지의 자기 삶을 사랑한다?”
놀리듯 말하는 친구의 모습에 영빈은 한숨을 푹 내쉬며 옆에 있던 쿠션을 하준에게 집어 던졌다.
익숙하게 날아온 쿠션을 받아낸 하준이 히죽거리자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저은 영빈이 덧붙였다.
“난 복잡한 건 모르겠어. 하지만 여태까지의 경험과 추억이 소중한 건 우리가 모르고 경험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그리고 그게 첫 번째였으니까 더 행복했겠지.”
멤버들의 초롱초롱한 시선이 부담스러웠던 영빈은 슬며시 시선을 돌렸다.
그들의 시선은 ‘과거로 돌아가도 우리랑 함께 할거지?’라고 노골적으로 묻고 있었다.
“어차피 또 그 고생을 하는 것보다 앞으로 더 열심히 더 잘하는 게 낫지 않겠어?”
애써 동생들의 시선을 무시한 영빈은 연습생 생활을 두 번 하고 싶지 않다고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원했던 대답은 아니었지만, 영빈의 대답이 꽤 만족스러웠던 멤버들은 각자 좋을 대로 이해한 듯싶었다.
“한 바퀴 돌았네요. 빠르게 한 바퀴 더 돌고 끝낼까요?”
지환이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며 말하자 자연스럽게 하준의 손이 상자로 향했다.
누가 형이고 누가 동생인가 싶었지만, 아무렴 어떤가 싶기도 했다.
천천히 흐르던 ‘Pluto’의 연주가 어느새 다른 곡으로 바뀌어 있었다.
멤버들의 목소리에 묻혀 대부분 들리지 않는 희미한 소리였지만, 현악기의 소리 같았다.
신나게 조잘거리던 멤버들은 그 후로도 준비된 상자에서 종이를 뽑아 간단하게 답했다.
하준에게는 동생들이 때려주고 싶을 만큼 얄미울 때가 있냐는 질문이 있었다.
그 질문을 꺼내자마자 갑자기 얌전하게 앉아서 눈을 빛내는 동생들 모습에 폭소하며 없다고 답해주었고.
[겉으로는 무뚝뚝하지만 사실 나는 다정한 성격이다 or 아니다]
라는 경환의 질문에서 경환이 진지하게 고민해서 멤버들이 크게 웃기도 했다.
힘찬은 가장 친한 친구를 한 명 뽑으라는 말에 말없이 지환을 바라봤고, 지환은 어깨를 으쓱했다.
재빨리 뽑은 다음 질문은 요리에 대한 열정은 아직도 그대로냐는 질문이었다.
힘찬은 언젠가는 꼭 제대로 된 음식을 만들어보고 싶다고 했지만, 멤버들은 단호히 거부했다.
집 태워 먹으면 안 된다며 절대 불 앞에 가지 말라고 엄포를 놓는 모습이 무척 진지했다.
한편 세빈은 뽑는 족족 누군가를 고르는 질문들이라 자기는 이거 안 한다고 울상을 짓기도 했고.
[나는 요리사를 꿈꾼 적 있다 or 없다]
[정말로 조류 공포증이 있다 or 없다]
지환은 위의 두 문제를 뽑고는 세상이 떠나가라 크게 한숨을 내쉬며 둘 다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영빈은 노래에 자신이 있냐는 질문에 긴 고민 끝에 아직 부족한 점이 많지만 못하지는 않는 것 같다고 답했다.
“우리 마지막으로 딱 한 명만 더 뽑아보고 이제 그만할까요?”
“누가 뽑을 건데?”
“그건 가위바위보 해야지.”
한바탕 요란한 질의응답이 끝나고 마지막이라는 말에 다들 눈을 빛냈다.
자신이 답할 때는 곤란하기도 했지만, 다른 사람이 답하는 걸 듣는 건 재밌었으니까.
쓸데없이 엄숙하고 진지한 목소리로 외친 가위, 바위, 보.
그리고 그 결과 당첨된 사람은.
“환이 형, 뽑아요!”
“경환 형도 뽑아!”
한 명만 뽑으려 했거늘, 둘이 져버렸다.
다시 한 명을 뽑아야 하지 않냐고 물었지만, 멤버들은 행동으로 답을 보여주었다.
해맑은 얼굴로 지환에게 상자를 슬쩍 밀어주는 세빈과 경환에게 밀어주는 힘찬.
두 맏형은 내가 아니라는 안도감에 표정이 편안해졌다.
씁쓸한 얼굴로 종이를 뽑은 지환과 달리 경환은 덤덤한 표정이었다.
[병아리라는 별명을 이젠 인정하나요?]
먼저 종이를 뽑은 경환은 질문지를 뚫어져라 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병아리는 귀엽죠. 뭐, 귀여운 게 세계 제일 아니겠어요?”
이상한 논리였지만, 경환은 공식적으로 병아리를 인정해버렸다.
“저건 씨아이의 개인적인 생각이니까 저희 모두의 의견으로 보시는 건 곤란해요.”
“쟤만 인정한 겁니다, 저놈만!”
경환의 경쾌한 답변에 맏형들은 재빨리 뒷말을 덧붙였다.
누구를 위한 핑계인지 알 수 없었지만, 어째서인지 필사적이기까지 했다.
[힘찬이는 아직도 모지리로 저장되어 있나요?]
질문지를 펼친 지환은 곤란하다는 듯 손안에 질문지를 구깃거렸다.
“자, 어서 대답해!”
“이거 질문 네가 넣었어?”
“아니! 하지만 우리 솜뭉치들도 나만큼 궁금했다는 거겠지.”
이상할 정도로 멤버들이 넣은 질문은 하나도 나오지 않았지만, 어쨌든 이번 질문은 힘찬도 궁금했다.
바꾸라고, 보여달라고 그렇게 떼를 써도 보여주지 않았으니까.
한참을 망설이던 지환이 버릇 같은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조금 바꾸긴 했어요.”
“조금이라는 건 모지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거구만.”
“형은 왜 이럴 때만 날카로워?”
지환의 말을 냉큼 받은 경환.
지환은 억울하다는 듯 경환을 바라봤지만, 그는 놀리듯 싱글거리며 웃고 있었다.
“그러니까, 음….”
주저하던 지환은 결국 조그만 목소리로 답했다.
“이제는 ‘우리 모지리’입니다.”
누군가에게는 상처만 남은 진실 게임 시간이 이렇게 끝나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