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3. 가자(7)
청춘 드라마에 나올법한 일들을 최근에 유독 많이 겪었던 탓일까?
멤버들과 나, 그리고 우리와 함께하는 사람들에 관해 계속해서 생각하게 됐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바쁘게 지나온 모든 날 중 단 하루도 같은 날이 없다는 게 등줄기가 오싹할 만큼 짜릿한 기분이었다.
이렇게까지 무언가에 몰두하며 살아본 적이 없기 때문일까?
마지막으로 전생의 가족들을 만난 후부터 제대로 이곳에 뿌리를 내린 기분.
그 후로는 한 번도 엄마, 아빠, 누나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그저 내 머릿속에는 뚜렷하게 남은 소중한 기억이 있기에 참을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아직도 일상을 보내다 갑자기 가족들이 떠오르곤 했다.
아무 생각 없이 밥을 먹다 엄마가 생각나서 눈물을 삼켜야 했고, 아빠가 해주던 말이 생각나 멍해지기도 했다.
익숙한 아이돌 그룹을 만나면 누나 목소리가 떠올랐고, 노래를 듣다 보면 다시 누나가 떠올랐다.
그럼에도 이제는 괜찮다고 말할 수 있었다.
조심스럽게 지금 밟고 있는 땅에 뿌리를 내리고 느리지만 착실하게 사방으로 뻗어 나가고 있었다.
지금의 누나와는 더 이상 어색한 모습 없이 자연스럽게 지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가끔 누나를 볼 때면, 지환이 방에 몸을 누일 때면, 가슴 한구석이 싸하게 아려왔다.
그렇지만 이제는 눈물이 고이거나 잠들지 못하는 밤을 보내진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나는 적응하고 있는 게 아닐까?
지난밤에는 멤버들과 각자의 최근 근황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우리는 늘 그날그날 있었던 일들을 나누곤 했다.
매일 무슨 일들이 그렇게 많은지 회사에서 있었던 일, 촬영 중에 있었던 일만 이야기해도 시간이 훌쩍 가버렸다.
평소처럼 거실에 누워있던 내가 휴이와의 일을 입 밖으로 꺼낸 건 반쯤은 충동적인 일이다.
멤버들이 궁금해한다는 것도, 한편으로는 걱정하고 있다는 것도 알아서.
슬그머니 궁둥이를 붙이고 옆에 앉아 눈치 보는 세빈이 얼굴만 봐도 알 수 있는 것들이라 웃을 수밖에.
경환 형이 슬쩍 밀어준 쿠션에 몸을 걸치고 영빈 형 다리에 드러누운 찬이를 보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자세한 이야기 말고 그냥 내가 어떤 기분들을 느꼈던 건지.
개인적인 일들은 아무리 우리 애들이라지만 말해줄 수 없었다.
그건 휴이가 날 믿고 이야기해 준 마음을 배신하게 되는 거니까.
내가 해왔던 일들이 어떤 결과를 불러왔는지, 그리고 내가 어떤 느낌을 받았는지.
휴이와 이야기하면서 느꼈던 이상한 기분 등.
유난히 걱정을 놓지 못했던 준이 형의 얼굴이 진지했다가 평소처럼 편안해졌다.
영빈 형은 여유를 되찾았는지 찬이 머리를 쓰다듬어줬고, 경환 형은 앉아있다가 슬금슬금 누워버렸다.
찬이는 발을 까딱거리며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눈을 굴려 멤버들 얼굴을 확인했고.
내가 몸을 일으켜 앉자, 세빈이는 기다렸다는 듯 내 다리를 자기 베개로 썼다.
평소엔 그렇게 빠르게 흐르던 시간이 이상하게 어제는 천천히 흘러간 것 같았다.
마치 우리에게 편하게 이야기하라고 배려해준 것 같다면 너무 꿈같은 이야기일까?
의외였던 건, 내 이야기가 끝나자 다른 멤버들도 최근 자기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는 것.
찬이가 다른 그룹 사람들을 만나고 다니는 것도 알게 되었다.
사람들을 만나는 거야 알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본격적인 것 같았다.
경환 형이 힙합 쪽 음악가들과 교류를 시작했다는 이야기는 정말 신기한 일이다.
워낙 외부와 인연을 만들지 않던 형이라 더욱더.
세빈이는 이전에 트러블이 있었던 재준이라는 친구의 사과를 받아주었다고 했다.
“진짜 귀찮게 맨날 주변을 맴돌아서 어쩔 수 없었어요. 친구 하고 싶다고 졸졸 쫓아다니는데, 아휴.”
조금은 뻐기듯 말하는 세빈이 모습이 조그만 뱁새가 한껏 가슴을 내밀고 말하는 것 같아 귀여웠다.
종알거리는 입술은 작은 부리 같았고, 투덜거리는 척하는 목소리는 톤이 조금 높았다.
맏형들은 그런 우리가 재밌었는지 자기들끼리 눈빛을 주고받더니 누가 봐도 티가 나는 칭찬을 늘어놓았다.
견디지 못한 찬이와 내가 방으로 도망갈 정도로 적나라한 칭찬들.
경환 형과 세빈이는 더 칭찬해달라는 듯 우쭐해 하는 게 어이없기도 했지만, 그걸 받아주는 맏형들도 대단했다.
역시 아무나 맏형을 할 수 있는 게 아니었어….
지난밤을 떠올리니 결국 한숨으로 끝났다.
우리는 역시 진지한 건 안 돼.
“무슨 생각을 하길래 표정이 그래?”
“네? 제 표정이 왜요?”
오늘은 본방 전 마지막으로 무대를 맞춰보기 위해 분홍 팀 사람들을 만나기로 했다.
“흐뭇했다가, 그늘졌다가, 한숨 쉬었다가, 질색했다가 히죽거ㄹ….”
“그만! 그만 해요! 알았으니까!”
진지한 얼굴로 하나씩 내 표정을 손꼽는 키스 형을 차마 계속 두고 볼 수 없어서 말을 끊어버렸다.
“병아리 괴롭히지 마.”
“괴롭히다니. 내가?”
키스 형을 붙들고 하지 말라고 버럭대는 사이 인하 형이 다가와 머리 위에 손을 턱 하니 얹었다.
“키 줄어요. 누르지 마요.”
“이 정도로 줄면 우리 단우는 손바닥만 해졌을걸?”
“아무튼요!”
자꾸 놀려대는 형들 사이에서 살아남기가 이렇게 힘들었다.
“저희 왔어요!”
“오냐.”
JC 엔터의 연습실 하나에 모인 우리는 만나자마자 가위바위보를 해서 커피 사 오기를 했다.
처음에는 막내 둘이 다녀오겠다고 했지만, 그건 공평하지 못하다고 내가 반대했다.
막내가 심부름을 다 해야 하는 건 불공평하잖아!
이왕이면 키스 형이랑 인하 형이 걸리길 빌었지만, 안타깝게도 결국 막내들이 걸려버렸다.
그 와중에 경환 형도 같이 당첨되어 커피를 사 온 참이고.
그래도 인하 형이 카드를 줘서 형 카드로 긁었다.
대신 점심은 키스 형이 산다고 했고.
나랑 경환 형도 보태겠다고 까불었다가 비웃음만 샀다.
아무튼 좋게 말하면 입안에 가시가 돋치는 사람들이라니까.
“그나저나 형이 안경 쓰는 건 처음 보는 것 같은데요?”
“아, 그런가? 평소엔 잘 안 쓰니까.”
커피를 마시던 키스 형은 내 물음에 그랬나? 하는 표정으로 고민하다 어깨를 으쓱거렸다.
“안경 쓰니까 갑자기 세비 형 같아졌어.”
“인상이 부드러워졌다는 거지, 형?”
“어, 맞아.”
경환 형의 한마디, 그리고 내 해석이 더해지자 이온과 태인은 웃음을 참는지 어깨가 움찔거렸다.
경환 형은 평소에 말을 많이 안 해서 그런가 입 밖으로 나오는 말이 되다만 경우가 있었다.
바로 지금처럼.
남의 회사 연습실에서 이렇게 태평하게 굴러다녀도 되나 싶었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각자 음료를 홀짝이며 최종 회의를 끝낸 우리는 그 후로는 마신 물만큼 땀으로 다 쏟아낸 후에야 연습을 끝낼 수 있었다.
“아, 진짜 한가영은 이기고 싶은데.”
“우리 파랑이랑 초록팀은 꼭 이기자.”
가혹할 정도로 연습을 시킨 두 형은 우리에 비하면 멀쩡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곧 죽어도 각자 팀의 리더들은 이기고 싶은 모양이었다.
푹 퍼진 찹쌀떡 같아진 이온과 태인, 나는 그런 형들을 괴물 보듯 볼 수밖에 없었다.
우리 경환 형이야 워낙 체력으로 어디 가서 지는 사람은 아니라지만, 저 형들은 도대체 뭐야?
“병아리, 펭귄들. 알았지? 더 연습해와.”
“네에….”
“얍. 형들도 준비 잘해요.”
기죽은 얼굴로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는 오리진 멤버들과 헐떡이며 바닥에 들러붙은 나.
태연하게 손을 흔드는 경환 형까지.
이 정도면 그래도 할 만큼 했다 싶었다.
“병아리들, 데려다줄게. 가자.”
“내일 보자.”
드디어 이 지긋지긋한 조합에서 내일이면 벗어날 수 있었다.
* * *
- 최근에 우리 애긔들 너무 잘 자라서 뿌듯한 할미
언래블 미션볼 때면 그냥 마냥 아깽이들이라 ㅎㅅㅎ 이러고 보고 있는데, 방송에서는 울 애들 너무 잘 자란 거시에요 ㅠㅠㅠㅠㅠ
ㄴ 잘 먹겠습니다 PD가 최근 인터뷰에서 울 애들 노리고 있다고 밝힘 ㅋㅋㅋㅋㅋ
ㄴ 잘 먹겠습니다 고정했으면 좋겠다 ㅠㅠ 너무 힐링 되고 좋았음….
ㄴ 우리 쟈근환이 지켜줘랔ㅋㅋㅋㅋㅋ자꾸 환멸짤이 늘어ㅠㅠㅠ
ㄴ 경환이 전복 찾는 거 울 엄마가 보고 쟤는 어촌 출신이냐고 물었다구ㅠㅠㅠ 아냐, 엄마…. 서울에서 나고 자랐다고 ㅠㅠㅠ
ㄴ 너무 능숙하게 형아들한테 일 시켜서 나도 모르게 고객 끄덕였잖아 ㅋㅋㅋ
ㄴ 낭만가객에서 울 애들 확 큰거 티났지?
ㄴㅇㅇ 이제 신인이라고 못 부른다 진짜 ㅋㅋㅋㅋ 나 애들 우승할 줄 몰랐자나ㅠㅠ
- 최근 언래블 활동 보는 내 심정
나:울 아기들 언제 크지 ㅠㅠ
언래블:콘서트 해요!
나:오오 ㅠㅠ 드디어 콘서트구나!
언래블:광고 찍었어요!
나:울 애들이 광고라니ㅠㅠ
언래블:섬 가서 밥해요! 전복도 잡았어요!
언래블:낭만가객 출연해요! 어라, 우승도 했어요!
언래블:파워아이돌게임 특별 출연했어요!
나:애, 애드라?
언래블:새 앨범 준비하고 있어요!
언래블:언래블 미션&일상편 보고 있죠?
언래블:GIVE 앱 할까요?
언래블:1주년 이벤트 준비했어요!
나:너희 잠은 자니…?
ㄴ 이거다, 정균찡한테 문의 넣어야 한다…. 울 애들 잠은 재우는지 물어봐라 ㅠㅠㅠㅠ
ㄴ 누가 애들 손에 헤르미온느 시계 쥐여줬냐, 당장 뺏어와….
ㄴ 떡밥 넘쳐서 행복하긴 한데 진짜 걱정됨; 저러다 몸 상하면 어떡해 ㅠ
ㄴ 울면서 허겁지겁 떡밥 주워 먹는 솜뭉치들
(얘들아, 지치지 마라 짤)
팬들의 글을 본 소현은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최대한 재우고는 있는데 애들이 안자네요…. 대표님 문제가 아닌걸.”
ON 엔터는 아직 성장기인 멤버들의 수면시간을 지켜주려 애를 쓰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멤버들이 먼저 나서서 무엇이든 더 하려고 하는 통에 말리기도 힘들었다.
콘서트 준비와 그동안의 앨범 준비로 경험치를 조금 쌓은 멤버들.
새 앨범 콘셉트 회의를 언급하자, 언래블 멤버들은 본회의 때 아예 보고서를 들고 왔다.
다 같이 준비했다면서 밀어주는 보고서는 1안, 2안으로 준비되어 있었다.
1안은 동양풍 분위기에 이전 앨범의 윤회 콘셉트를 끌어와 기존 세계관을 확장하자는 것.
2안은 인외 콘셉트였다. 기존 세계관의 내용은 차용하되, 새로운 세계를 만들자는 것.
상큼하고 발랄한 분위기의 콘셉트를 생각하고 자료를 준비해왔던 A&R 팀은 질린 얼굴을 했다.
A&R 팀의 김주영 팀장은 자기 손에 들린 종이 뭉치를 원수 보듯 보고 있었다.
정윤 실장은 그런 멤버들 모습에 무척이나 흡족해했지만.
물론 전문가들이 준비하는 게 아니니 어설프고 손봐야 할 것들이 많았다.
하지만 그걸 고려하더라도 언제 이렇게까지 차곡차곡 준비한 건지 신기할 노릇이었다.
단체 연습과 개인 레슨은 꾸준히 하고 있는데 도대체 언제 다 만든 걸까.
“숙소에 감시 카메라를 달 수도 없고….”
자라고 보내놨더니 지들끼리 일을 하는 통에 소현은 골머리가 아팠다.
지금부터 체력을 길러놔야 앞으로 더 잘 버틸 수 있다고 말은 했지만, 열정 넘치는 걸 혼낼 수도 없었다.
촬영은 촬영대로 쫓아다니면서 1주년 준비도 기어코 처음 계획대로 해냈다.
내일은 공식 카페에 멤버들이 직접 낸 문제가 올라갈 것.
그리고 특정 시간대마다 멤버들이 준비한 영상이 공개될 것이다.
6월 10일 당일에는 라이브 방송을 할 거고.
멤버들은 날짜에 맞춰 팬미팅을 하고 싶어 했지만, 콘서트가 얼마 전이었고 일정상 불가능했다.
점점 멤버들의 활동 영역이 넓어지면서 새로운 매니저도 뽑았다.
우진 혼자 멤버들을 모두 케어하는 건 불가능해졌으니까.
“내일 소개하고, 인수인계는….”
부디 새로 뽑힌 사람이 우진의 반만큼이라도 일을 해줬으면 하고 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