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6. 꿈꾸는 마음으로(5)
하규원 PD는 이번 화가 기존 시리즈에 활력을 넣는 새로운 전환점이 될 것이라 믿었다.
기존 포맷과 다른 게스트의 출연도 그렇지만 출연한 게스트의 독특함이 주는 신선함이 더했다.
공지환과 백경환. 둘 다 아이돌이라는 한계선을 벗겨놓고 보면 마냥 어린 애들이었다.
하지만 예능 신이 돌보는 건지 경환은 자기 손바닥만 한 전복을 잡아 왔다.
그때도 놀라웠지만, 역시 보고 있으면 즐거운 건 지환 쪽.
의도하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포인트를 딱딱 잘 만들어냈다.
어제만 해도 처음에는 진성을 보고 환하게 웃는 게, 그를 만나서 얼마나 기쁜지 숨김없이 나타났다.
‘별도시’가 많은 인기를 끌며 지환은 ‘언래블’의 환이 아니라 신인 배우 공지환으로 더 알려졌다.
비중 있는 조연이 아니라 거의 주연급 인기를 구가한 것.
그렇게 빛날 수 있었던 건 탁월한 연기실력도 있었지만, 비하인드에서 보인 지환의 노력이었다.
바쁜 스케줄을 소화하는 와중에도 틈만 나면 촬영장을 찾아 구석에서 공부하는 지환이 있었다.
‘별도시’ 팬들은 비하인드 영상을 모두 확인해서 매번 구석에 있는 지환을 찾아냈다.
호기심이 동한 몇 명은 당시 언래블의 스케줄과 지환의 촬영장 방문을 비교했고.
스케줄이 없는 날에도 대부분 촬영장에서 작은 노트를 쥐고 몰입해 있던 그 모습이 꽤 호감을 살만한 것이었다.
대중에게 욕을 덜 먹으려면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재능을 보이거나 그에 준하는 노력을 보여야 했다.
스스로 노력해서 결실을 얻어내는 모습은 많은 사람에게 좋은 이미지를 심어주기 적합했다.
어느 스트리머가 올린 과거 언래블의 데뷔 직전 연기 영상과 ‘별도시’에서의 임지웅을 비교하는 영상.
차마 눈 뜨고 보지 못할 그런 연기실력이 이렇게 다른 사람처럼 변한 것.
그걸 확인한 대중은 지환에게 더 많은 애정을 쏟았다.
힐링캠프 때의 어리고 순한 아이가 그런 캐릭터를 연기하기 위해 얼마나 고생했는지 직접 봤으니까.
힐링캠프에서의 지환은 전형적인 보호자 역할이었다.
캠프를 보호하고 구성원을 먹이고 뒤치다꺼리를 자처하고.
자기보다 나이 많은 형님들에게 일을 시킬 때든, 같은 팀 멤버들에게 일을 시킬 때든 예의 바른 어조를 유지했다.
늘 ‘이것 좀 도와주세요’, ‘이렇게 해주실 수 있어요?’ 등 듣기도 좋고 상대방도 기분 나쁘지 않은 말투.
하규원이 가장 신기한 건 평소 말투도 그와 비슷했다는 것이었다.
멤버들과 장난칠 때조차 특유의 부드러운 어투는 사라지지 않았다.
언래블 리더인 하준과는 다른 부드러움이었다.
‘별도시’의 임지웅은 모든 걸 태우고 재조차 남기지 않는 인물이었다.
지환의 평소 인물과는 정반대되는 그런 모습을 그리면 임지웅이 아닐까?
그런 갭을 출중한 연기로 커버했으니 대중의 애정이 쏠리는 것도 이상하지 않은 일.
규원은 그래서 진성의 요청에 응했다.
힐링캠프 때처럼만 해도 꽤 호감 가는 캐릭터로 사랑받을 거라는 계산이 섰기 때문.
지난 일 년 동안 언래블의 행보는 기존의 아이돌들과는 그 궤가 달랐다.
그런 점이 더 대중들에게 드러났던 건지 영향력이 커지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도 있었고.
그리고 규원이 생각하기에 언래블은 점점 더 빠른 속도로 성장할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미리 친분을 다져놓아서 나쁠 건 없다.
연예인이 인지도가 전부이듯, 이 바닥은 시청률이 전부였다.
아무리 지랄 맞은 PD라도 시청률을 잘 뽑아내면 어지간한 문제는 커버될 만큼.
더군다나 어제 그렇게 분량을 왕창 뽑아준 애들이 오늘도 이렇게 아침부터 분량을 뽑아주니 안 예쁠 수가 있나.
“지환 씨, 지금 심정이 어때요?”
“지금 심정이요…?”
방금까지 경환을 깨우고 씻으라고 들여보내느라 고생한 지환이 핼쑥한 얼굴로 카메라를 바라봤다.
“왜 힐링 캠프 때가 생각날까요…?”
그때도 혼자 가고 싶다고 침울한 얼굴로 대답했던 지환.
규원은 당시 영상을 따다 넣으면 재밌을 것 같다고 생각하며 질문을 이어갔다.
“힐링 캠프 때 재밌지 않았어요? 그리고 지금은 그때보다 풍족하잖아요.”
풍족하다고 말하는 규원의 등 뒤에서 경우와 이수가 이 비를 뚫고 뭐라도 채집해 와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의견을 나누고 있었다.
경환은 어느새 정신을 차린 건지 하늘을 가늠해 보다 이 정도면 움직일 수 있지 않냐고 되묻고 있었고.
혼란한 풍경을 잠시 바라보던 지환은 규원에게 시선을 던졌다.
‘진짜 이게 풍족해요?’
라고 되묻는 듯한 시선.
“풍족은 모르겠지만, 냉장고가 있고 비를 막을 건물이 있는 건 천만다행이에요. 뭐…. 밥은 어떻게든 해결해야죠.”
체념한 듯 답하는 지환의 어깨가 무거워 보였다.
4명의 밥이 그의 어깨에 달려있다는 걸 순순히 받아들인 걸까?
“오늘 못 돌아가는 건 스케줄에 지장 없나요? 다른 스케줄이 있는 거로 알고 있는데.”
“아, 안 그래도 걱정돼서 연락해봤는데 하루 정도는 괜찮다고 하시더라고요.”
웃으며 답하는 지환의 얼굴은 누가 봐도 영혼이 도망가버린 얼굴이었다.
이곳에서 하루 더 이 사람들을 먹여 살릴 생각에 암담해진 모양이었다.
“다행이네, 어제 지환 씨가 해준 밥이 워낙 맛있어서 저희도 안타까웠거든요.”
“하하, 감사합니다…. 최선을 다해볼게요.”
하룻밤 사이 십 년은 나이를 더 먹어버린 듯한 얼굴로 대답하는 지환.
그는 규원의 말을 이해한 듯했다.
자신과 스태프들도 맛있는 거 먹고 싶다는 그런 새카만 속마음을.
* * *
다행히 빗줄기는 점차 가늘어졌다.
하지만 바람은 아직 심상치 않은 터라 오늘 육지로 건너가는 건 무리라는 판단.
바로 회사에 연락했더니 하룻밤 정도는 괜찮으니 너무 걱정 말라는 답을 주셨다.
무리해서 움직이다 사고라도 나면 정말 큰 일이라고.
그 말은 나도 동의했다.
뮤직비디오 촬영을 위해 섬에 들어갔던 경험이 있었기에 바다 날씨가 얼마나 변화무쌍한지 조금은 알았다.
해가 쨍쨍 내리쬐다가 갑자기 새카만 구름이 몰려들기도 했으니까.
“자 그럼 슬슬 아침을 준비해볼까요? 이 정도면 불 피울 수 있죠?”
진성 형님에게 질문하며 주변을 둘러보니 어제처럼 세 사람은 뭐라도 채집하기 위해 움직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위험하지 않겠어요?”
“괜찮아. 바람도 많이 약해졌대. 어제처럼 깊이 안 나가고 앞에서 뭐라도 찾아보려고.”
경환 형은 그사이 이 섬에 적응이 끝난 건지 여기서 살던 사람처럼 덤덤하게 대꾸했다.
이 형은 진짜 어디 던져놔도 잘 살 것 같긴 하다.
“오늘 낚시는 무리죠?”
“음. 그럴 거 같아. 통발에 뭐라도 있었으면 좋겠는데.”
경우 선배님에게 물으니 잘생긴 얼굴에 근심이 가득해졌다.
입고 있는 옷만 아니면 전쟁터의 장군처럼 보일 얼굴이었다.
“이따가는 날이 좀 잠잠해졌으면 좋겠는데.”
“일단 뭐든 있는 대로 먹어야죠, 뭐.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아무리 지난밤보다 잠잠해졌다고 해도 여전히 바람이 거칠었다.
굳이 안 나갔으면 좋겠지만, 상주하고 있는 전문가도 괜찮다고 하니 믿을 수밖에.
“아이구, 우리 막내가 벌써 이 형님들 걱정하고. 기특하다, 기특해.”
“당연히 걱정하죠! 무섭잖아요.”
경우 선배님과 오수 형님은 안절부절못하고 걱정하는 나를 기특하게 보셨다.
당신들의 반 토막이나 살았을까 싶은 어린 애라 더 기특해하는 걸까?
속에 든 게 어찌 되었든 지금 나는 19살이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이 형만 믿어라.”
“지금 안 나가셔도 불만 피우면 금방 밥할 수 있으니까 위험하면 바로 돌아오셔야 해요!”
“오야, 금방 다녀오마!”
전쟁터에 나가는 장수들마냥 잔뜩 기합이 들어간 세 사람은 장비를 들고 손을 흔들며 걸어갔다.
경환 형도 걱정이지만, 저 형님들은 연세도 있어서 좀처럼 걱정이 가라앉질 않았다.
넘어졌다가 뼈라도 부러지면 어쩌려고, 에휴.
한숨을 폭 내쉬는 내 모습이 재밌었던지 불을 피우던 진성 형님이 피식거리며 웃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 저 형들은 절대 위험한 일 안 하니까.”
“괜찮겠죠?”
“그럼.”
그동안 셋이 부대끼며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이야기해 주는 진성 형님.
젖은 장작 때문에 좀처럼 불이 잘 붙지 않았지만, 꽤 능숙하게 부채질을 이어갔다.
형님 옆에서 매운바람이 다가가지 못하게 부채질해 주던 나는 오늘 아침 메뉴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비 와서 추우니까 국물 있는 게 낫겠죠? 달걀 있으면 계란국 끓이면 좋은데….”
“글쎄…. 닭장 한번 가볼래?”
닭장….
그 말을 들은 순간 어제가 생각났다.
아무 생각 없이 닭들이 있는 곳에 구경하러 간 나는 경계심 어린 눈빛으로 우리를 보던 닭을 마주해야 했다.
전투적인 기색은 아니었지만, 알을 빼앗아 가는 습격자가 우리라는 건 알고 있는 듯했다.
‘꼬꼭!’하고 울면서 푸드덕거리던 닭의 모습이 무서워서 주춤거리자 뒤에 있던 경환 형이 웃었다.
그런 날 보고 오수 형님은 병아리가 왜 닭을 무서워하냐고 놀려대셨고.
어떻게 된 게 주변 사람들 모두가 놀리는 데만 특화된 재능이 있는 걸까?
“왜? 무서워?”
“아니거든요!”
내가 주저하는 기색을 보이자 진성 형님도 은근히 말하는 목소리에 놀림이 가득했다.
아니, 내가 어쩌다 이런 취급이 된 건데!
나도 모르게 발끈해서 대답하자, 사방에서 다 이해한다는 듯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쯧, 이제는 하다 하다 닭까지 무서움?’
‘아니라니까!’
마루에 누워 느긋하게 나를 구경하던 포잉까지 놀려댔다.
세상에 이렇게 내 편이 없다….
무서우면 형이 가서 확인한다는 진성 형님의 말을 무시하고 씩씩하게 닭장으로 도망간 나.
어쩐지 어제만큼 오늘 하루도 길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지만, 여기는 도망갈 곳도 없는 섬.
어깨를 축 늘어트리고 다가간 닭장 안에는 달걀 세 개가 얌전히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미안해, 가져가서 잘 먹을게.”
닭을 향해 미안하다는 사과와 함께 진심을 내보인 나는 조심스럽게 닭장에 들어갔다.
한껏 경계심 어린 눈으로 나를 살피던 닭 중에 한 마리가 기웃거리며 내 곁으로 다가온 것도 그때.
“응?”
닭은 내 주변을 기웃거리다 ‘꼬옥!’하고 울더니 내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아버렸다.
“뭐지, 얘 왜 이래요?”
달걀을 들고나오려다 갑자기 다가온 닭에 당황한 내가 스태프에게 물었다.
“환이가 좋은가 봐. 보통 사람 옆에 잘 안 오던데. 병아리라 그런가?”
“…그럴 리가 없잖아요.”
나도 모르게 부루퉁한 목소리로 답을 하고는 닭에게 ‘미안, 가져갈게’ 하고 속삭였다.
머리에 아무것도 없는 걸 보니 암탉인 것 같았다.
이게 무정란인지 유정란인지 내가 알 수는 없지만, 어쨌든 마음이 조금 이상했다.
마트에서 파는 달걀을 쓸 때와는 조금 다른 기분이랄까?
내 옆에 와서 앉았던 닭은 내가 달걀을 들고나올 때까지 그 자리에 앉아 나를 바라봤다.
“…왠지 되게 미안해지네요.”
“이게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이니까 저 닭도 이해할 거야.”
지난밤, 음식을 나눠드렸던 스태프분은 친근한 목소리로 대해주셨다.
이전 힐링 캠프 때도 뵈었던 분이라 나도 대하기 조금 더 편했고.
같이 고생하면서 친해진다는 말이 맞는 건지 그때 뵈었던 스태프들은 한결 편하게 우리를 대해주셨다.
우리를 대할 때도 지시를 내리는 게 아니라 제안을 하듯 말해주셨고.
언래블의 덩치가 그만큼 커진 것도 있지만, 그때 함께 음식과 커피를 나눠 먹은 영향도 있는 게 분명했다.
역시 사람은 착한 일을 해야 해.
“닭이 안 물었어?”
“물기도 해요?”
“아니, 네가 무서워하길래.”
“아, 형….”
문다는 말에 놀라서 바라봤더니 진성 형님은 또 놀리듯 말해왔다.
한숨을 푹 내쉰 내가 주방으로 들어가는 와중에도 형님은 날 놀리느라 바빴다.
‘이제는 하다 하다 닭한테도 예쁨받음?’
내 이야기를 들은 포잉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바라봤다.
아니, 그게 내 탓은 아니잖아!
군중 속의 고독을 느끼며 준비하는 아침은 유난히 더 힘들었다.
왜 이 세상은 날 놀리지 못해 안달인가.
한탄이 절로 흘러나오는 우울한 아침 시간이었다.